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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축일/명절강론 코너 ( 대축일/명절 미사에 관련된 강론자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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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서울]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조회수 | 2,598
작성일 | 09.03.24
“꼬랑내 : ”구린내“ ”구린냄새“의 경상도 사투리.

예문 : 누가 이리 꼬랑내를 풍기노?”

국어사전에 찾은 내용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시작을 국어사전 내용으로 한 이유는 꼬랑내가 어디서 나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질문을 던져보지요.

“꼬랑내는 어디서 나는 것일까요?”

주로 이 ‘꼬랑내’라는 단어와 함께 오는 것이 아마 ‘발’이 아닌가 싶어요. 즉, ‘발 꼬랑내’라고 말을 많이 하지요. 그런데 어제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꼬랑내는 발만이 아니라 손에서도 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일을 할 때 보통 우리들은 ‘장갑’을 착용합니다. 이 장갑을 통해서 손에 지저분한 것을 묻지 않게 하는 것은 물론, 위험으로부터 손을 보호할 수도 있기 때문에 꼭 착용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어제 아침에도 이 장갑을 손에 낀 채 여러 가지 일을 했습니다. 화장실 청소, 쓰레기통 비우기, 성지의 지저분한 것들 치우기 등등……. 그리고 미사 시간이 다 되어서 장갑을 벗고 손을 씻은 뒤에 수단을 입었지요.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 분명히 손을 씻었음에도 불구하고 손에서 꼬랑내가 나는 것입니다. 저는 다시 한 번 손을 씻었습니다. 하지만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심각한 그 꼬랑내는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화장품을 손에 바른 뒤에 냄새를 맡아보았습니다. 저는 다시 손을 씻었습니다. 꼬랑내와 어울려진 화장품 냄새는 더욱 더 견디기 힘들었거든요.

그 꼬랑내의 원인은 바로 장갑에서 나는 것이었습니다. 빨아 놓지 않고 계속해서 쓰다 보니 장갑에 꼬랑내가 박힌 것이지요. 그리고 그 장갑을 끼었던 제 손에서도 그 냄새가 지워지지 않고 계속해서 남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꼬랑내는 발에만 날 수 있다는 생각. 그것은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손에서도 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꼬랑내를 다시 맡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냄새 나는 장갑을 끼지 않으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어제 성지에 있는 장갑을 모두 깨끗이 빨았습니다. 아마 오늘부터는 이 두 손에 꼬랑내는 풍기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모님께서는 말도 안 되는 체험을 하셨지요. 처녀의 몸으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예고를 받으십니다. 어떻게 남자를 모르는데 아기를 가질 수 있으며, 그 당시에 결혼도 하지 않은 사람이 아기를 가지면 간음을 했다고 해서 돌에 맞아 죽던데 어떻게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무사히 아기를 낳을 수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이 엄청난 예고를 받아들이기에는 성모님께서는 너무나도 어린 나이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성모님께서는 침착하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말도 안 되는 예고인데, 그 예고에 대한 대응 방법은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바로 ‘받아들임’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앞서 꼬랑내 없애는 방법으로 장갑을 빠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음을 말씀드렸지요. 이처럼 어쩌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의 해결책은 아주 간단한데 있음을 성모님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된 ‘받아들임’입니다. 이러한 수용으로 인해서 인간의 눈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하느님의 일들을 떠올려 보세요. 조금만 더 겸손해 진다면, 조금만 더 하느님의 섭리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들은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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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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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이었습니다. 미사 후에 고3 모임이 있었지요. 신앙생활에 있어서 마치 관면을 받은 것처럼 여겨지는 시기, 그래서 이 시기를 지나면 냉담자로 변하고 마는 고3들을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만나서 신앙적으로 이끌어주고자 이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서로 한 달 동안 생활했던 것들을 나누는 생활 나눔 시간이었습니다. 한 아이가 이런 이야기를 해요.

잘못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선생님께 매를 맞게 되었다고 합니다. 너무나 이해가 되지 않았고 그 선생님에 대해서 친구들에게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면서 흉을 참으로 많이 봤다고 해요. 그런데 그 선생님이 얼마 뒤 또 다른 아이를 너무 심하게 때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었는지, 선생님께서는 공개적으로 사과를 하셨답니다. 그리고 자신의 어려운 가정환경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이런 행동을 했던 것은 불우한 가정환경 때문이었음을 그래서 이해해주기를 청한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하네요.

저는 그 선생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자신의 가정환경이 불우하다고, 가르치는 제자에게 비정상적인 방법인 폭력으로 대한다는 것이 어떻게 올바른 선생님인가 라는 생각을 했지요. 그리고 가정환경 운운하는 것은 아마도 짤릴 것을 염려해서 순진한 아이들을 설득하기 위한 말일 것이라는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그 아이가 갑자기 울기 시작하는 것이었어요. 이렇게 힘든 가정환경을 가지고 계셨는데, 자기는 그것도 모르고 선생님에 대해서 비판만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께 너무나 죄송하다고 하면서…… 울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뭐가 죄송한지……. 그런데 다른 아이들의 반응에 저는 더욱 더 깜짝 놀랐습니다. 장난기 많았던 아이들이 숙연해지면서 다들 공감의 표시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어른의 관점에서 생각했고, 학생들은 아이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면서 제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살아오면서 내게 다가오는 문제들을 너무나도 복잡하게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 이것저것을 재면서 정작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은 늘 뒷전에 두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고3 아이들이 보여주었던 순수한 마음들, 즉 용서하고 또 용서를 청하는 그 모습에 주님께서는 따뜻한 미소를 보내셨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주님 잉태 소식을 듣게 되는 날을 기념하는 날이지요. 사실 성모님의 그 당시 나이가 16살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당시 약혼하는 나이가 16살 정도입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엄청난 소식을 듣게 됩니다. 잘못했다가는 율법에 의해서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운명에 처해질 수도 있습니다(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여자가 아기를 가지면 간음을 했다고 해서 돌에 맞아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만약 저처럼 이것저것 재었다면 이러한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불가능할 것입니다. 바로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 주님께 대한 충성의 마음이 바로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 것입니다.

내 모습을 다시금 반성합니다. 그리고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순수한 마음, 이것저것 재지 않고 주님께 충성을 다하는 신앙인이 되겠다는 결심을 이 새벽에 주님 앞에서 해봅니다. 어른의 눈이 아닌,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노력해보세요.

조명연 신부
  |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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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교구에서 강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당에서 차를 끌고 답동에 있는 가톨릭회관으로 이동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제 앞으로 가던 어떤 차의 뒤 창 와이퍼에 무슨 종이가 끼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조금 가까이 다가가 보았지요. 그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그 와이퍼에는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끼워있었고, 차가 속도를 낼수록 그 만 원짜리는 빠질 듯이 사정없이 흔들거렸습니다.

저는 차에 만 원짜리 돈이 끼어 있다는 사실을 그 운전자에게 말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히도 이 차는 제가 가는 길로만 앞서서 갔기 때문에 굳이 다른 길로 갈 필요는 없었지만, 단 한 번도 서는 경우가 없어서 말해 줄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드디어 신호등 때문에 서게 되었고, 저는 그 틈을 이용해서 앞차의 뒷문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문제의 만 원짜리를 손으로 잡고서 그 차의 주인에게 갖다 주려는 순간, 그 만 원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폐치고는 너무 맨질맨질 한 것입니다.

어떤 돈이었을까요? 저는 분명히 만 원짜리 지폐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만 원짜리 지폐를 흉내 낸 광고 전단지였던 것입니다. 결국 차 주인에게 주지도 못하고, 이상한 행동을 했다는 생각에 멋쩍은 웃음만 짓고는 제 차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그 종이가 만 원짜리 지폐라고 확신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봐도 만 원짜리가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의 착각이었습니다.

이렇게 내가 직접 보고, 직접 만진 것이라 해도 사실과는 다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의 나약함과 부족함 때문이지요. 하지만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체험에 조금이라도 반대되면 절대로 믿으려고 하지 않지요. 내 자신의 체험을 뛰어넘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은데도 말입니다.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그래서 복음도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받는 성모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실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들으셨을 때 성모님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일차적으로 천사가 자기 앞에 나와서 소명을 전한다는 것도 받아들이기 힘들 텐데, 여기에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가지리라는 잉태 소식까지 들었을 때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천사의 말씀을 듣고는 이렇게 고백하지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인간적인 기준과 세속적인 판단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이라는 굳은 믿음으로 그 모든 일들을 받아들이시지요. 그리고 그 결과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는 커다란 영광을 얻게 되십니다.

우리 역시 살아가면서 성모님의 이 모습을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인간적인 기준과 세속적인 판단으로 하느님의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약한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굳은 믿음으로 더 열심히 그리고 힘차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굳은 믿음으로써 다가서는 우리들에게도 성모님과 같은 커다란 영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약속으로 친구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실천을 함으로서 친구를 보호하고 지켜야 한다.(펠담)

조명연 신부
  |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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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력이 좀 부족한 사람에게 우리는 이러한 말을 하지요.

“아니, 저 사람이 까마귀 고기를 먹었나?”

이렇게 까마귀 고기를 먹으면 건망증에 걸린다는 말을 믿는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이 자매님은 국밥 장사를 하는데, 많은 손님이 드나들어도 자기 물건을 가게에 두고 가는 사람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까마귀 고기를 먹으면 자기 물건을 깜빡 잊고 두고 갈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손님의 국밥 속에 까마귀 고기를 넣기 시작했습니다. 즉, 손님들이 두고 가는 물건을 통해서 부수입을 얻고자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과연 까마귀 고기를 넣은 것이 효과는 있었습니다. 분명히 손님들이 잊어버리는 것이 있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물건을 잊고 가는 것이 아니라, 돈 내는 것만 잊고 가더랍니다.

눈앞에 있는 작은 이익에만 급급하면 큰 것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고 하지요. 그런데도 우리들은 눈앞에 보이는 작은 이익에 급급하면 말 그대로 ‘쫀쫀한’ 모습을 간직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즉, 하느님의 뜻인가를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나한테 어떤 이익이 있는가를 먼저 살펴보면서 무조건 거부하고 보는 경우가 참으로 많았지요. 그러나 이러한 모습을 통해서는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삶,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으로 도저히 살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즉,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께 예수님의 잉태를 알린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장면도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듣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은 ‘성모님이니까 그럴 수 있겠지…….’라고 가볍게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들은 성모님의 처지나 입장에서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과연 나한테 이러한 일이 닥치면, 성모님처럼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평소에 나의 작은 이익에만 급급하였던 ‘쫀쫀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은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성모님과 같이 큰마음, 그리고 주님의 말씀과 뜻에 맞춰서 살려는 마음이 있어야 하느님께 철저히 순종하면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눈앞의 이익만을 바라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 그 순간에는 내가 손해를 보는 것 같고, 내가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눈앞의 이익을 통해서가 아니라 가장 적합한 때에 맞춰서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주시는 분임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뜻에 철저히 따르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성모님께서 보여주신 그 순명의 마음을 우리들의 마음에 담아야 하겠습니다. 그때 우리들은 주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최고라는 마음으로 매 순간 기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순간의 이익만을 바라보지 맙시다.

조명연 신부
  |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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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어떤 모임에서 우연히 신학교 선배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서울 대신학교에 신학생 선후배로 만난 후 처음으로 보았기에 정말로 오랜만이었지요. 그래서 더욱 더 반가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신부님의 손을 잡으면서 “형님, 정말로 반가워요.”라고 말했지요. 그런데 그 신부님께서는 저를 처음 본 듯이 “네. 신부님 저도 반갑습니다.”라면서 깍듯하게 존댓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졌습니다. 너무나도 반가워서 다가갔는데, 그 신부님께서는 저를 잊어버리셨나 봅니다.

하긴 저는 그럴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어제는 아시는 분 자제분이 결혼을 하신다고 해서 예식장에 다녀왔는데, 예식장에 오신 많은 교우들이 저를 반갑게 맞이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부님, 저 누구에요. 아시죠?”하면서 물어보는데, 저는 그분에 대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분 역시 상당히 서운해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제 자신의 이기적인 모습을 발견합니다. 나는 기억되어져야 하고, 남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했었음을 반성합니다. 하긴 어제 낮에 제 휴대전화 속에 기록된 전화번호를 정리를 하는데, 모르는 이름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저장할 때에는 분명 꼭 기억해야 할 이름이었을 텐데,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삭제’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반성하게 됩니다. 얼마나 관심을 갖고 만남을 가졌었는지, 그리고 단 일회적인 만남으로만 그치는 행동을 했던 것은 아닌지…….

그런데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그랬던 것이 아닐까요? 성당에 가서 무릎을 꿇고 “주님, 주님!”을 외치고 있지만, 얼마나 주님의 관심을 끄는 행동을 일상의 삶에서 했을까요? 무조건 나만 주님으로부터 기억되어져야 함을 강조하면서, 정작 내 자신은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살았던 것은 아닐까요?

이 점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리고 모세 역시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선포하지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들을 너희가 듣고 따르면 복이 내릴 것이다.”

주님의 복을 받고자 한다면, 주님의 뜻을 실행해야 합니다. 즉, 내가 한 행동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주님! 주님!’만을 외치며 청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철저하게 따르려고 노력하는 자를 끝까지 기억하시고 지켜주십니다.

조명연 신부
  |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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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하느님의 선택 : 평범성, 일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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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오늘 하느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시켜 마리아에게 당신의 구원계획을 알리는 장면은 너무나 감동적이다.

온 누리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보잘것없는 시골 처녀를 구원사업의 동반자로 삼으셨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세도 있는 양가집 규수가 아니라, 한갓 시골 처녀에 불과한 마리아를 택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다윗이 계획한 성전이 아니라, 나자렛 촌구석을 택하신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생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과 보잘것없는 곳이 하느님 구원의 신비가 드러나는 현장이 되었다. 부대끼며 살아가는 도시 한복판이, 땀 흘리며 일하는 작업장이, 또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우리의 처지가 모두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무대가 된 것이다.

한편 마리아는 구세주를 잉태하리라는 축복의 말씀을 전해 들었지만 두려움과 놀라움에 사로 잡혔다. 예나 지금이나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은 불미스러운 일이다. 더군다나 이스라엘에서는 죽어 마땅한 죄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였다. 약혼자가 있는 몸으로서,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는 아이의 잉태를 온전히 하느님께 대한 믿음만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한 마리아의 순종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약혼자에게 파혼당하며 심지어는 죽을 위험을 받아들이겠다는 동의요, 결단이었다. 이러한 마리아의 순명은 영원히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하느님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신자 생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순명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보잘것없는 인간의 동의와 수락을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동의 없이 인간을 구원하시지 않는다. 이는 구원을 위해 인간이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하느님께서 인간을 필요로 하신다는 말씀이다. 소박한 곳에서 당신의 뜻을 실현시키시는 하느님과 나약한 인간의 동의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모습은 오늘 복음말씀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오늘날에도 하느님께서는 위대한 사건이나 거창한 모습으로 오시지 않고 우리의 일상생활 속으로 조용히 찾아오신다. 즉, 지극히 평범하게 보이는 가정과 직장, 그리고 학교생활 속에서 당신의 뜻을 펼치시기 위해 오신다. 하느님께서는 평범한 부엌으로, 일터로, 교실로 우리를 찾아오신다. 그분은 오셔서 우리의 처지와 의견을 귀담아 들으신다.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 당신 구원 사업의 동반자가 되어달라고 기다리신다. 그분은 우리 서로가 깊은 대화를 하고, 서로의 의견과 처지를 존중하기를 원하신다.

우리 서로가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귀 기울이는 어디에서나 하느님께서는 기쁨과 희망으로 우리에게 오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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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정운진 신부
  |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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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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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늘 부활시기를 보내면서 동시에 주님 탄생 예고를 듣고 있습니다.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장 기초적인 믿음이요,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부활했다는 것은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고 죽음은 살아왔음을, 그리고 살아왔다는 것은 탄생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므로 탄생 예고를 듣는다는 것은 새로운 준비요, 새로운 시작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탄생과 삶, 그리고 죽음과 부활이라는 새로운 여정의 시작을 떠올리게 합니다.

주님 탄생의 예고를 들은 성모님께서는 탄생 소식과 더불어 주님이 함께하심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소식을 들은 우리도 주님께서 가져다주신 부활의 기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며 당신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우리도 “저는 주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신 당신 안에서 영원한 삶이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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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성풍 신부
  |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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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각자가 펼쳐진 성경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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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탄생은 이미 예고된 것, 하느님에 의해 계획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탄생과 역할 또한 계획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분께서 나에게 맡기신 일, 이곳에서 이루도록 그분께서 내게 주신 일을 성심성의를 다해 할 수 있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잠시 틈을 보이면 어느새 내 맘속에 욕심과 유혹 등이 비집고 들어와 내 삶의 주인이 된다.

우리 각자한테는 하느님께서 뜻하신 역할이 있다. 그것은 사회생활의 직무거나 가정,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역할일 수도 있다. 비록 세속적인 눈으로 볼 때 하찮고 비천하다 할지라도 그 일을 나에게 맡기신 분, 나에게 그 자리에 있도록 하신 주님을 생각하면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각자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통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각자의 몫에 충실하고 그 일을 통해 주님 말씀을 실천하며, 일자리를 성스럽게 만들어야 한다.

부모로, 교회 봉사자로, 가게 주인이나 점원으로, 선생님으로, 회사원으로 어떤 일을 맡고 있더라도, 그 일을 통해 주님의 가르침을 드러내고, 우리 각자가 펼쳐진 성경이 된다면 천국이 따로 있겠는가. 비록 현실적으로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더라도,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것을 통해 당신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준비하고 뜻하신 바 있으리라는 희망을 잃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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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구인회 신부
  |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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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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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아들 예수는 처녀인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다. 불교의 부처 탄생 설화에서도 어머니인 마야 왕비의 옆구리로 태어났고 또 ‘보통 인간처럼 더러운 양수가 전혀 묻지 않았다’고 두 번이나 강조한다. 처녀숭배 또는 인간 육체에 대한 자학이 자못 짙게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 천주교에서는 하느님이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 강생했음을 신앙의 핵심으로 삼아 전반적으로 이를 극복하고 있다. 귀천을 따지지 않는 불교에서도 말할 것이 없다.

처녀가 애를 배도 할말이 있다. 유교 윤리가 엄격하던 조선시대에도 처녀나 과부가 애를 배면 이를 짐짓 ‘사태’(뱀이 오줌 눈 자리에서 오줌을 누다 뱀의 정으로 애를 뱄다)라고 하여 인정하기도 했다. 요즘 유행하는 건강물질 죽염의 창시자, 신의로 불리던 그 사람이 바로 이런 주장을 책으로 써놓았다.

죄를 처벌하는 것보다 두 생명이 더 중하지 않겠는가? 의학이든 종교든 다 사람 살리고자 하는 것 아닌가? 다만 당시 지배적 윤리도덕을 엄격히 지키려는 세력과 정면 충돌하는 것을 피하려면 신비가 필요한 것이다.

처녀가 애를 밸 수 있다는 것은, 또 다른 말로 하자면 상식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치를 잘 안다는 사람일수록 ‘분단 상황에서는 남한에서 좌파정당이 성장할 수 없다’고 단언하는 이들이 있다. 북한에 대한 분노·피해의식 때문에 사회주의를 대중이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에서는 절대적 상식이란 것이 없다. 약자를 구하고 생명을 구하는 일이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말이 된다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의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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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영 아시아 가톨릭 뉴스 한국 지국장
  |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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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는 이 이야기를 경이롭게 들으면서, 이런 의문 하나가 들 것입니다. “왜 마리아는 천사의 말에 ‘몹시 놀라워’ 했을까?”(루카 1,29) 또,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그녀가 하느님의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1,34)라고 물었을까요? 어쨌거나 그녀는 죄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는데, 천사의 예고를 듣고서 여기에 순종하는 대답을 하기까지 왜 그렇게 뜸을 들여야 했을까요?

여기에 대한 답은, 마리아도 한낱 인간이었고 그런 위대한 신비를 아무런 도움도 없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겠지요. 그 말은 우리가 하느님께 대답할 때 드리는 말과 참 많이 닮지 않았나요? 우리는 모두 이런 ‘예고’를 받았지요. 누구나가 복음을 선포하라는 말을 들었지만, 이렇게 대답할 때가 아주 많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저 주부일 뿐, 아니면 회계사, 혹은 교사일 뿐인걸요. 나는 하느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내 주제에 하느님을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요? 바로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모셔온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하면 됩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권능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혼자 힘만으로는 다른 이들에게 예수님을 전하지 못합니다.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요한 15,5) 고맙게도 그런 은총의 기적은 우리에게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성령에 의해, 그리고 세례성사 덕분에 그 일은 우리 안에서 일어났고, 우리는 어디를 가든 이미 예수님을 모시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야말로 하던 일을 딱 멈추고 놀라워할 일이 아닙니까? 살아 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우리 안에 모시고 다니다니요!

물론 성모님과 달리 우리는 죄를 짓는 성향이 있습니다. 때로는 주님과의 여정을, 실제로 앞으로 걸어나가기보다는 넘어지면서 더 많이 보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때에도 우리의 나약함에 사로잡히기보다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이므로, “원수의 모든 힘”(루카 10,9)에 대항해서 승리할 힘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곁에 머무는 한, 아무것도 우리를 다치게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그저 고난을 피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나자렛에서 시작하신, “어둠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는”(루카 1,79)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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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오늘 제가 하는 모든 일에서
당신을 선포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어머니, 성모님의 평화와 권능으로
제가 주님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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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출간 말씀지기>에서
  |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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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들에게 ‘인사이동’은 언제나 긴장이고, 설렘입니다. 보좌신부로 있을 때는 주교님께서 따로 언질을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인사이동의 공문을 받고 알았습니다. 주교님께서 저를 따로 부르셔서 인사이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신 적이 3번 있습니다. 한번은 1999년 적성성당으로 가게 될 때입니다. 주교님께서는 재정적으로 열악하고, 교우들도 적기 때문에 따로 부르셨던 것 같습니다. 2012년에 용문 청소년 수련장으로 가게 될 때입니다. 안식년을 신청했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교구장님께서 6개월이지만 수련장에서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수련장의 신부님이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고, 마땅한 사제가 없었기 때문에 안식년을 신청한 저를 부르셨던 것 같습니다. 2013년 성소국으로 올 때입니다. 짧은 수련장에서의 일을 마치고, 교구의 성소국에서 일을 하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사이동을 하게 되면 구상 시인의 시를 마음에 담습니다. 제목은 ‘꽃자리’입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다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다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엮여 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적성은 문화적인 것들을 찾기는 어려웠지만 자연 속에서 지내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수련장은 안식년의 기쁨은 없었지만 아이들과 함께하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성소국은 본당만큼 아기자기하지는 않지만 사제양성이라는 보람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아무런 고통이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고통 중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깨닫는 사람들입니다. 고통 중에 세상을 원망하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은 그런 고통 속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고통 중에서 인내를 배우고, 인내는 겸손을 알게 하고, 겸손함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바다의 별, 우리의 어머니, 천상의 모후, 정의의 어머니’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생애는 ‘고통의 바다.’였습니다. 어린 아들을 성전에 봉헌했을 때 시메온으로부터 가슴이 찢어지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든 고향을 떠나 어린 아들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을 가야했습니다. 어린 아들을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는 길에 잃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미쳤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보았고, 죽은 아들을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성모님은 그런 고통 중에서 하느님의 뜻을 보았고,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였습니다.

성모님은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며 자신의 몸이 구원 사업의 도구가 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성모님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잔치의 즐거움이 계속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게 합니다. 예수님 또한 성모님의 그런 마음을 아시고, 아직 때가 되지 않았지만 혼인잔치를 더 풍요롭게 하셨습니다. 성모님은 혼인잔치에 손님으로만 간 것이 아니라, 그 잔치에 부족함이 없는지를 살피시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성모님의 그런 마음을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웃의 아픔을 헤아리는 마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마음, 자신의 고통 보다는 사도들을 추스르고 교회를 걱정하는 마음, 바로 그것이 성모님의 마음입니다. 성모님처럼 해야 할 일을 분별하여,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열린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천주의 성모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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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2017년 3월 25일
  |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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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선 이어폰을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활동이 자유롭고, 편하기 때문입니다. 저렴한 무선 이어폰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가격은 만족스러웠지만 기능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충전이 잘 안 되기도 했고, 음감이 떨어지기도 했고, 오른쪽은 되는데 왼쪽이 안 되기도 했고, 이유 없이 안 되기도 했습니다. 이웃 본당 신부님과 무선 이어폰 이야기를 했습니다. 신부님의 지론은 이왕 구입하려면 비용이 들더라도 좋은 걸 구입한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권유를 받아들여 조금 비싸지만 ‘정품’을 마련했습니다. 역시 정품은 달랐습니다. 디자인이 깔끔했습니다. 외부의 소리도 들리면서 음량이 좋았습니다. 한번 충전하면 10시간 이상은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교우 분들은 사제에게 관심과 사랑을 주십니다. 자리에 앉으면 상석을 권하곤 합니다. 사진을 찍으면 가운데 자리를 마련해 주시곤 합니다. 식사에 초대하시면 가능하면 좋은 음식을 권합니다. 강론을 조금만 잘 해도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좋은 물건이 있으면 기쁜 마음으로 선물해 주십니다. 사제가 누구이기에 그럴까요? 사제의 제의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제의 복장에서 그리스도의 희생과 헌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제의 독신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제의 순명에서 그리스도의 열정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셨을까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넘어질지라도 포기하기 않고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언제나 기도하셨습니다. 고난의 잔일지라도 하느님의 뜻이라면 받아들였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교우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정품 사제인가?’ 교우들의 관심과 사랑을 당연한 것처럼 여겼던 적이 있습니다.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으면 서운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십자가는 이야기했지만 그것을 실천하지 못한 적도 많습니다. 때로는 교만했고, 때로는 게을렀고, 때로는 하느님의 뜻보다는 저의 뜻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사제는 세상에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합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 주어야 합니다.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으면 같이 그곳에 머물면서 함께해야 합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이어야 합니다. 높은 곳에서 벼락을 맞아야 하는 피뢰침처럼, 거친 바다에서 불을 밝혀야 하는 등대처럼 사제는 고독과 침묵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사제가 ‘정품’사제입니다.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나자렛에 사는 마리아에게 보내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했던 것처럼 하느님께서 몸소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놀라운 일이고,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렇게 응답하였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나자렛의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 성모님이 되었습니다.

성모님은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며 자신의 몸이 구원 사업의 도구가 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성모님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잔치의 즐거움이 계속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게 합니다. 예수님 또한 성모님의 그런 마음을 아시고, 아직 때가 되지 않았지만 혼인잔치를 더 풍요롭게 하셨습니다. 성모님은 혼인잔치에 손님으로만 간 것이 아니라, 그 잔치에 부족함이 없는지를 살피시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성모님의 그런 마음을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웃의 아픔을 헤아리는 마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마음, 자신의 고통 보다는 사도들을 추스르고 교회를 걱정하는 마음, 바로 그것이 성모님의 마음입니다. 성모님처럼 해야 할 일을 분별하여,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열린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천주의 성모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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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2020년 3월 25일
  |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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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에 봄, 가을이 되면 많은 순례객이 방문하십니다. 가장 좋은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이곳 성지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시는 모습을 보면 저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런데 때로는 이분들이 떠나고 나서 종종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합니다. 너무 많은 흔적을 남기시기 때문입니다(요즘에는 성지 방문하시는 분이 없어서 깨끗합니다).

바로 쓰레기입니다. 그래서 순례객이 많이 오실 때면 관리를 하는 직원들이 무척 바빠집니다. 만약 이 쓰레기를 그냥 놔두면 깨끗하고 잘 정돈된 성지가 아니라 지저분한 쓰레기통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것은 분명 버린 사람의 잘못입니다. 또 그분들의 잘못이니까 우리가 쓰레기를 치울 필요 없다며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가족일 수도, 친구일 수도, 성당 교우나 직장 동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내게 주는 아픔과 상처를 그냥 끌어안고만 있다면,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모두 품에 안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쓰레기는 좋은 냄새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또 내게 건강을 가져다주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빨리 버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내 몸 전체가 쓰레기통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나를 힘들게 하는 쓰레기 같은 것은 얼른 버리고, 내게 힘이 되어 주는 주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은 주님의 탄생 예고를 기념하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성모님께서 천사로부터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듣게 되지요. 성모님께서는 세상의 일보다 주님의 일이 먼저였다는 것을 복음을 통해서 분명히 알게 됩니다.

만약 세상의 일이 먼저였다면 천사로부터 들은 예수님 잉태 소식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혼인하기 전에 임신한 경우 간음을 했다고 해서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약혼을 한 요셉 성인을 설득하는 문제 역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세상일에 대해 걱정하지 않습니다. 천사의 말대로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는 믿음으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나를 두렵게 하고 걱정에 휩싸이게 하는 쓰레기 같은 세상일에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받아들이는 이에게 커다란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을 잉태하게 되었으며,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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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2020년 3월 25일
  |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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