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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부활을 선포하는 사람들
조회수 | 3,133
작성일 | 09.04.01
역사적인 사건이 오늘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예수님께서 오늘 부활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역사는 지금과 다르게 바뀌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이천 년의 그리스도 역사가 지금도 전 세계인의 삶의 흐름을 잡아주고 있습니다. 오늘 부활 대 축일을 지내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부활을 가장 잘 사는 것인지, 또 어떻게 사는 것이 부활을 실천하며 사는 것인지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다. 부활을 전하는 삶, 즉 복음을 전하는 삶이 그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오늘 50명의 예비 신자들이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부활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는 삶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활을 체험하고 목격한 사람들이 첫 번째로 한 일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살아나셨다. 그 분은 우리의 주님이시다.”

이것을 알리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 선포입니다. 우리 교회의 핵심 교리이기도 한 이 부활을 알리는 복음 선포의 사명을 교회는 매 미사 때 마다 신자들에게 각인시킵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그러면 신자분들은“아멘”하고 응답합니다. 무슨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그 분이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전하는 것이지요.
  
모든 신자들의 첫 번째 의무는 복음 선포의 사명을 실천하는 것이고, 주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달음질을 쳐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부활 대 축일을 맞으면서 시간이 걸리지만 꼭 세례식을 하는 것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이 세례식이 끝나면 바로 다시 예비신자 교리가 새로 반 편성이 되어 시작됩니다. 부활을 함께 경축했던 우리들은 부활의 기쁨을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오늘 부활 대 축일을 맞으며 세례를 받는 예비신자 여러분들께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런데 도대체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세례 받는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부활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깡패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이는 매일 깡패짓만 하고 다녔는데 ꡒ넌 도대체 무엇을 믿고 사냐?ꡓ하고 사람들이 물으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내 주먹을 믿고 산다.”

이 깡패가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묻습니다.
    
“당신 무엇을 믿고 사시오?”

그 때 그의 대답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주님을 믿고 삽니다.”

이렇게 답이 변했습니다. 이것이 세례를 받은 사람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그 전에는 나를 믿고 나의 힘을 믿고 나를 위해서만 살았다면 이제는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것, 이것이 세례를 받는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세례를 받으면 완전히 새로워집니다. 세례를 받으면서 우리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새로 살겠다고 세례명을 받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겠다고 하느님의 이름을 받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그 수많은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다 새기고 살 수 있겠습니까? 이제 세례를 받은 후에 살아가야 할 우리의 자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세례를 받기 전에 깡패의 삶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나한테 잘못하면 끝까지 찾아가서 보복한다. 몇 배로 갚아주어야 한다.”

하지만 세례를 받고 난 후에는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세례를 받고도 그 전과 같이 깡패짓을 계속한다면 그는 새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도 아니지요. 그의 삶은 그 이전과 사뭇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또 해서는 안 될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세례를 받았다면 어떻게 됩니까? 갈등하다가 끝내 그는 그 직업을 그만 두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직업을 갖고는 신자생활을 계속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신자가 된다는 것은 이렇게 전혀 다른 차원으로 삶이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나에게 아픔을 준 그 사람까지도 용서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이웃을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특히 불우하고 가난한 이웃을 내 몸 같이 돌보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내 돈 내가 벌어서 내가 쓰면 된다고 생각하고 저 사람에게 피해만 끼치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았다면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시지 않았고, 또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예수님께서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삶을 믿습니다. 그런데 그 영원한 삶은 심판을 통해서 우리에게 상급으로 주어집니다. 심판의 기준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베풀면서 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하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가난 사람,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믿습니다. 이 세상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모를 때에는 이 세상이 다인 것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알게 되면 이 세상이 다인 것처럼 살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이 세상이 다가 아니라고 말해 줍니다. 또한 영원한 생명이 승리한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믿고 또 하느님의 뜻대로 살면서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한편 천주교 신자들은 한 주에 한번 주일을 주님의 날로 거룩하게 지내고 주님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 안에 6일을 나와 가족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하루는 주님을 위한 날로 주님께 감사 드리고 주님 안에서 한 주간을 준비합니다. 지금 여기 세례를 받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여러분들은 모두 천주교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개신교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 신자가 되는 것은 더더군다나 아닙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는다고 모두가 다 천주교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천주교 신자의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천주교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군인에게는 군인 정신이 있습니다. 군인에게 군인 정신이 없다면 그들은 있으나 마나한 오합지졸의 신세가 되고 말 겁니다. 천주교 신자에게는 천주교 신자 정신이 있습니다. 불교 신자는 불교 신자의 모습이 있고 개신교 신자는 개신교 신자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럼 천주교 정신이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복음적인 순명 정신입니다. 가끔 천주교 정신을 잘 모르는 신자들이 말합니다.
    
“신부님, 천주교도 민주주의가 되어야 됩니다. 너무 독재하지 않습니까? 민주화가 되어야지요?”

천주교가 민주화가 되어야 한다는 이 말이 맞는 말입니까? 틀린 말입니까? 틀린 말입니다. 우리 천주교는 민주화가 될 수 없습니다. 민주화가 무엇입니까? 다수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51명이 찬성한다면 49명은 그냥 따라가야 하는 것이지요. 천주교는 다수결의 원칙으로 진리가 바뀌는 사회 집단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절대로 민주화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천주교의 정신은 바뀔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천주교의 정신은 복음주의입니다. 민주주의가 아니라 복음주의인 것입니다. 때문에 설혹 100명 중에 100명이 모두 바꾸기를 찬성해도 복음과 다르면 바꿀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목숨을 내 놓고라도 복음을 지키는 것이 천주교입니다. 이렇게 천주교는 복음주의이면서 동시에 천주교 고유의 정신이 있습니다. 복음적인 순명이 그것입니다. 복음에 근거한 순명 정신이 우리의 정신입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이 본당에 부임해 온지 이제 4년이 지났는데 어느 날 교구장님께서 갑자기 저에게 아프리카로 선교하러 떠나라고 하신다고 합시다. 보통 주임 신부의 임기는 5년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합니다.
    
“아직 사목적인 마무리가 되지 않았고, 떠날 준비가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주교님이 “꼭 갔으면 좋겠네.”하고 발령을 내리신다면 저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당장 가야 합니다. 발령 받은 즉시 보따리 싸들고 가는 겁니다. 우리 신부들은 사제로 서품 될 때 복음적인 순명을 서약했습니다. 수녀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적인 순명을 약속합니다. 천주교 신자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교회법에 따른 순명을 해야 합니다. 이 지역에 사는 신자는 이 지역 성당에 나오도록 하자 하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경우에 따라서 약간씩의 예외가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 원칙대로 지켜지고 있습니다.
  
“그 성당에 갔더니 신부가 마음에 안 들고, 수녀가 마음에 안 들고, 건물이 마음에 안 들고 아직 건물을 다 짓지 않아서 싫고... 가기 싫다. 나는 다른 곳에 있는 성당으로 나가겠다.”
  
이런 신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천주교 정신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개신교 신자라면 가능합니다. 개신교에서는 서로 자기가 좋은 곳으로 찾아갈 수 있습니다. 제주도에서 서울까지도 올라옵니다. 천주교에서는 있을 수 없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세례를 받으면서 무슨 신자가 되는 겁니까? 천주교 신자가 되는 겁니다. 천주교 신자는 천주교 신자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독재주의를 하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천주교 신자로서 복음적인 정신을 바로 지니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주교에는 교계제도가 있습니다. 교구 전체의 결정권은 교구장님께 있고 본당 전체의 결정권은 본당의 주임 신부에게 있습니다. 특별하지 않으면 그 흐름 안에 함께 따라가는 것이 천주교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 신자들의 모습이 많이 흩어져 보입니다. 순명하는 자세보다는 자기 목청을 돋우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본당이 시끄러워지고 공동체가 분열이 되는 모습을 더러 보게 됩니다.
  
본당 신부, 또 수도자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로 뒷받침하고 성직자, 수도자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이런 모습 안에서 복음적인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직자, 수도자들은 하느님과 신자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봉헌한 사람들입니다. 따뜻한 가정도, 여러 가지 지위도, 명예도 모두 봉헌했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하느님과 신자들을 위해서 헌신합니다. 그 진실된 모습을 보고 신자들은 또 존경과 순명으로 그 분들과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천주교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대부 대모 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 분들에게 몇 마디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제 내 대자, 대녀가 되었으니 내 방식대로 이끌겠다.”라고 생각하는 대부모님이 계신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대부모의 방식대로 대자 대녀를 성숙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본당 신부의 사목 지침 아래 신앙의 자녀들을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대부모로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경제적인 거래는 도움이 안됩니다. 금전적인 거래는 멀리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두 번째, 교리에 어긋나는 것을 대부모라고 강요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대자 대녀도 교리에 어긋나는 것에는 순명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것이 복음적인 순명은 아닙니다.

오늘 세례를 받는 여러분들이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천주교 신자로서의 삶을 잘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오늘 이 세례식에 참석한 신자분들도 내가 지금 세례 받을 때의 그 정신, 그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 한번 되돌아보고, 세례 받는 새 신자분들이 우리 공동체의 식구로서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따뜻하게 배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새로운 영세자들과 첫영성체 하신 분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부활 대 축일을 맞이하신 여러분 모두에게 축하 말씀 전합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소홀함이 없도록 함께 노력하고, 실천하는 공동체로 거듭나는 부활의 삶을 살아갑시다, 알렐루야!

이기양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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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신앙에 이르는 길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이렇게 시작되는 예수 부활 대축일의 복음 말씀은 언제 들어도 우리의 마음을 신선한 신앙의 기쁨으로 설레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알아보고 믿은 사람들이, 성 금요일의 깊은 슬픔과 충격 속에 있던 사람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애절한 사랑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복음서의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놀랍게도 초기 증인들조차 ‘부활 소식’을 듣고 즉시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빈 무덤’의 사실은 해석을 필요로 하고, 믿음을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빈 무덤’을 처음 본 마리아 막달레나의 반응은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라는 걱정이 가득 찬 ‘놀람’이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서 소식을 듣고 빈 무덤으로 달려가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의 반응도 마찬가지로 ‘놀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빈 무덤’에 대한 이들의 ‘놀람’은 그들이 예수님께 대하여 가지고 있던 ‘사랑’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오시어 베풀어 주시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변해갑니다. 깊은 슬픔 속에 잠겨 있던 마리아 막달레나를 일으켜 세워 ‘빈 무덤’을 향해 가게 했던 것은 바로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황량한 무덤가에서 울고 있던 그에게 들려오는 낯선 사람의 소리(“마리아야!”라는)를 듣고 그분이 주님이시라고 즉시 알아볼 수 있게 한 것도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와 사도들이 ‘부활신앙’에 이르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대한 그들의 사랑만으로는 부족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그들의 믿음은 주님께서 먼저 그들에게 사랑으로 다가오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예수 부활 대축일의 의미는 부활 성야 미사 때 있었던 ‘빛의 예식’에서 가장 상징적으로 제시됩니다. ‘빛의 예식’ 때에 ‘짙은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성당’은 많은 사람들의 삶의 실상을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짙은 어둠 속에’ 살아가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갑작스런 사고로 평생을 침대라는 십자가에 못 박히다시피 살아야 하는 사람들, 중병중에 있는 사람들, 극심한 가난 속에 살아야 하는 사람들, 노년의 외로움과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 그리고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이 깊은 죄의식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런 분들입니다.

오늘 예수 부활 대축일의 기쁜 소식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런 사람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참으로 이 모든 ‘죽음의 어둠’을 밝혀 줄 수 있는 참빛이시라고 믿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죽음의 어두운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시편 23,4 참조), 자비로우신 그분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며,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김영남 다미아노 신부
  |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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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믿었다

나에게 생명과 사랑을 주시고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이제는 고인이 된 친지들이 흘러가는 세월과 더불어 뇌리와 추억에서 잊혀지기보다 더 생생하게 떠오르고
마음 안에 자리하고 있다. 이는 단지 나의 기억력이 비상하기 때문이 아니고 어쩌면 이분들이 계속 존재하며 살아 계심을 일깨워 주는 것이라는 예감이 들곤 한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신약성경의 가장 오래된 진술인 코린토 전서 15장을 읽다보면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 이전에 죽은 이들의 부활을 먼저 전제한다(13절, 15절, 16절) :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희랍의 현자들이 간파한‘영혼의 불멸성’이나 불교의 가르침인‘환생(re-incarnatio)’이 죽음 저 너머의 지속적인 생명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인 염원과 희망을 표현하며, 또 이를 나름대로 통찰하는 것은 아닐까? 이는 어쩌면 오늘 우
리가 경축하는 주님 부활에 대한 전이해(前��解)라고도 하겠다.

예수님을 사랑하며 따르던 막달라 마리아와 두 제자가 본‘빈 무덤’은 우리에게 무엇을 계시하시는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신 예수님에게 죽음은 결정적이지 못하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지니신 신성(神性)으로 그분은 바로 하느님의 생명(生命) 안에 머무르시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는 생명만이 있기에 죽음은 결코 하느님에게 속하지 않는다. 죽음은 하느님을 거부하는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인간성(人性) 안에 감추어져 있는 신성(神性)을 확인해 준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어 육신이 영혼과 분리된 뒤에
도 육신은 항상 신성과 결합되어 있었다.

“인간의 이 두 구성체인 영혼과 육신 안에 남아 있는 신성(神性)의 단일성으로 이 둘은 다시 결합됩니다. 이처럼 두 구성체의 결합이 분리됨으로써 죽음이 오고 분리된 이 둘의 결합으로 부활이 일어납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한편, 빈 무덤 안에서 천사들은 한결같이‘그분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되살아나셨다’(마태 28,6; 루카 24,7; 마르16,7)고 전한다. 주님의 부활은 하느님의 약속의 실현이다(요한 20,9). 하느님께서는 인류와 맺으신 계약에 충실하시며 당신의 언약이 담긴 말씀에 성실하신 분이시다. 이 하느님의 약속은 인간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와 사랑을 말하며 이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죄와 죽음보다도 더 강하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뵙는 길은 오늘 복음의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처럼 예수님에게 걸었던 인간적인 모든 기대와 희망이 무너져 내린‘어둔 밤’가운데서도 임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주님과의 관계와 사랑에충실할 때이다.

한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그 사람에게“그대는 죽지 않으리!”라고 말하는 것이다(가브리엘 마르셀). 부활의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은 그 어떠한 처지에서도‘인생은 아름다워라!’라는 生의 긍정 안에서 사는 사람을 말한다. 이는 또한 인간이 이룩하는 역사의 뒤안길에서 겪는 암울한 부조리와 모순 가운데서도 이 역사를 긍정하고 인류의 공동선을 위하여 헌신하는 성실성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구요비 신부
  | 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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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온 세상에 생명의 기운이 스며든 싱그러운 봄과 함께 우리는 주님의 부활 대축일을 맞이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마태오 16,21) 인간적으로 볼 때 이 세상 어떠한 것도 인생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리는 죽음의 허무함과 슬픔을 달래줄 수는 없습니다. 죽음은 우리 인간에게 가장 두렵고 비참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닙니다. 우리가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이 세상에서의 죽음을 뛰어넘어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생활은 부활한 생활이며(에페 2,6), 그리스도의 몸을 모시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1고린 12,12-27)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처럼 더 기쁘고 복된 소식은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신앙인의 부활에 대한 희망이며, 보증이 됩니다.(1고린 15,20-22)

오늘날 세상은 과거보다 물질적인 풍요를누리고 있지만, 그 이면에 존재하는 물질만능주의, 이기주의의 어두운 면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더 깊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가난과 부의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은 더 심해져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고, 고통 받게 합니다. 또한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뛰어난 최첨단 대중매체의 체제 아래 살고 있지만 인간의 삶은 과거에 비해 더 소외되고, 진실된 친교와 소통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우리 사회가 당면한 과제는 모든 생명의 공존과 소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다양한 계층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일치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생명의 일치는 모두를 같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사회, 종교, 정치문제에서 우리와 달리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도 존경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도 사랑과 호의를 가지고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대화는 더욱 쉬워질 것입니다.(사목헌장 28항)

이제 곧 국민을 위한 봉사자를 우리 손으로 뽑는 제19대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옵니다. 국가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선택의 순간입니다. 이번 선거에서 우리는 냉정하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우리나라의 미래와 행복에 가장 바람직한 선택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정치 생활의 목적인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을 보호하고 증진하도록 모든 국민이 자유투표를 할 권리와 의무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봉사자를 선택하는 것은 신자들이 세상의 복음화와 공동선의 증진을 위해 참여하는 중요한 활동이 됩니다.(사목헌장 75항) 또한 교회는 특정 정당이나 후보에 대해 공개적인 지지나 거부하는 일은 삼가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행위는 공동체의 심각한 분열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다가오는 총선이 국민의 화합과 일치를 이루고 우리나라가 한층 더 발전하는 도약의 계기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매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우리 자신의 부활을 믿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삶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사랑과 희생과 봉사의 생활입니다. 따라서 부활의 믿음을 가진 이들은 일상생활, 삶의 현장에서 사랑의 삶을 충실히 살아갈 때 부활하신 주님을 세상에 증거 할 수 있습니다.(마르 16,11 참조) 그때 비로소 우리는 더는 죽음 아래 있지 않고, 부활의 생명 아래 있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영광스러운 주님의 부활을 맞이하여, 여러분 마음 안에 주님의 부활과 생명의 빛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2012년 부활절에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추기경 정진석
  |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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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르 16,6) 복음사가들은 곳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전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티베리아 호수 가에서 제자들과 함께 아침을 나누시는데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평범한 일상의 삶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다시 한 번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조반을 끝내자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 며칠 전에 베드로가 세 번 배반했던 것을 떠올리듯 예수님께서는 세번 물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질문은 친구 사이의 사랑과 모든 사람들을 향한 폭넓은 사랑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등장하는 데 그들은 기쁨과 두려움에 떨며 갈릴래아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려고 무덤을 떠나 급히 달려갔습니다. 루가복음사가는 복음서 마지막 부분에서 “기쁨”이라는 말을 언급할 정도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과 온전히 기쁨을 나누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지니신 기쁨을 함께 나누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화를 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화를 내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감정임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어지간하면 부활하신 후에는 화를 내지 않은 실 것 같은데 예상을 뒤엎습니다. 엠마오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께서 두 명의 제자에게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루카 24,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셔서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시며”(마르 16,14)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이 복음을 선포하라고 재촉하셨습니다.

신앙인들에게 도전은 이기심으로 생기는 노예 상태로 부터 믿음을 통해 순명하는 자유의 상태로 옳아 가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빠스카 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슬픔과 고뇌 속에 묻혀 있는 사람들에게 치유와 영원한 생명을 준 사건입니다. 그분의 십자가 고통으로 우리의 고통은 승화되어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우리의 고통은 초월적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것이 빠스카의 의미입니다. 곧,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의 도정에서 고통과 죽음을 건너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과 죽음을 아주 탁월하게 변형시키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삶을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숭고한 생애와 연결해야 합니다. 우리 존재는 흘러가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영원합니다. 우리 존재는 유한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라면 영원할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오빠인 나자로가 죽어서 슬퍼하고 있는 마르타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문종원 베드로 신부
  |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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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다시 시작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알렐루야.”

기쁨의 환호성이 온 누리에 퍼져 나갑니다. 아니 그 기쁨을 선포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체험해 보지 못한 예수님 부활의 위대한 사건을 어느 누가 인간의 지성이나 학문적인 논리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들조차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도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믿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7)라는 예수님의 질문을 받은 베드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응답한 바 있습니다.

그런 베드로였건만 지금 그는 빈 무덤이 주는 표징의 의미를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믿음이란 살아 계신 예수님을 육안으로 보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질서에서 오는 것임을 지적해 줍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라는 말은 무덤을 막았던 돌이 굴려져 있었던 사실을 전해 줌과 동시에 제자들이 얼마나 심각한 혼돈상태에 빠져 있었는지를 잘 지적해 줍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오늘의 복음은 “보고 믿었다”(요한 20,8)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어떤 태도를 맞아들여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지적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사셨습니다’라는 표현은 그분께서 생물학적인 생명을 다시 얻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분께 전혀 다른, 말하자면 새로운 형태로 실존하실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그저 멋진 하나의 추억에 불과한 사건이 결코 아닙니다. 부활이란 깨닫고 받아들이고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할 현재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고통과 암흑의 실체를 체험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나아가 부활을 통해 승리에 동참할 수 있는 은총까지 우리에게 내려 주셨습니다.

지나온 시간 속에서 번민하며 괴로워했던 아픔의 시간들을 떠올려 봅니다. 한 치 앞도 장담할 수 없는 불안했던 순간들도 되짚어 봅니다. 시기와 질투로 범벅된 자기 우월주의에 빠져 아집과 욕심으로 살아왔던 떠올리기조차 싫은 지난 시간들을 회상해 봅니다.

먹구름이 뒤덮어 태양 빛을 전혀 쪼일 수 없는 순간조차도 실상 구름 위에서는 강렬한 태양 빛이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어찌 모르겠습니까마는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어리석음입니다.

더 이상 과거에 머물지 아니하고 미래를 향해 용기 있게 나아갈 수 있도록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보이지 않으나 우리 곁에 함께 계시고, 만질 수 없으나 우리와 함께하심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게 해 준 사건이 주님의 부활입니다.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새생명을 주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방황과 두려움도, 의구심과 좌절도, 실망도 용납지 않으십니다.

오늘 다시 사심으로 우리 모두에게 찬란한 생명의 빛을 던져 주신 예수님을 믿고 어둠의 터널을 빠져 나와 용기 있게 그분을 따름으로 새로운 희망 속에서 당당하게 삶을 펼쳐가는 것이 부활의 기쁨을 선포하는 삶이 아닐까요?

안병철 베드로 신부
  |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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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믿었다

“거룩하다 부활이여! 기쁘도다 알렐루야! 예수 부활 아니시면 구속 사업 헛되도다!”

부활 대축일을 경축합니다. 마침내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예수님 이전을 B.C(Before Christ)라 부르듯이, 인류 역사의 중요한 정점에 예수님의 부활이 자리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예수님의 탄생도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인류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게 된 것입니다.

애 써서 이뤄놓은 모든 것들을 파괴하고 무(無)로 되돌리는, 알 수 없는 죽음을 두려워하여 피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본능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불로초를 찾아 헤맸던 진시황제의 노력은 죽음 앞에 속수무책인 인간의 한계만을 드러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영원한 세상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죽음은 더 이상 파괴도, 종말도, 끝도 아닌 새로운 희망이자 영원한 생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인간은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1코린15,17)라고 말씀하시면서 부활이 그리스도교의 핵심적인 사건임을 증거하셨고 일생을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사셨습니다. 부활 대축일을 지내는 오늘 어떻게 사는 것이 부활을 잘 사는 것인지, ‘4.5t 트럭 안의 부부 이야기’를 나누며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차창을 타고 흘러내린다. 밤 11시 이은자(55)씨가 운전하는 4.5t 트럭이 영동고속도로 하행선 여주 부근을 달린다. 이씨는 몸이 아담해, 운전을 한다기보다 운전대에 매달려 가는 것 같다. 트럭이 차선을 바꾸자 운전석 뒤편에 매달린 링거팩이 흔들거린다. 남편인 심원섭(53)씨가 누워서 복막 투석을 하고 있다. 시속 100㎞로 달리는 트럭 속에서 투석은 30분만에 끝났다. 10년 전부터 신장병을 앓고 있는 심씨는 하루 네 번씩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투석을 한다. 투석을 마치자마자 심씨가 코를 골며 잠들었다.

“시끄럽지요? 하지만 저 소리가 나한테는 생명의 소리예요.”

가끔 코고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손을 뒤쪽으로 뻗어 남편의 손을 만져 본다. 곤하게 잠든 남편, 고맙고 또 고맙다. 부부는 일주일에 세 번씩 서울과 부산을 왕복한다. 수도권지역 공단에서 짐을 받아 부산 지역에 내려놓고, 부산에서 짐을 받아 서울로 가져온다. 원래는 남편이 혼자서 하던 일. 하지만 5년 전부터 아내가 함께 다닌다. 렌터카․택시․버스, 안 해본 운전이 없는 경력 35년 베테랑 운전사인 심씨는 1995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뇌졸중이 나아질 무렵 다시 심장병으로 6차례 수술을 받았고, 신장병까지 겹쳤다.

사업은 망가졌고 고단한 병치레 끝에 자녀들과도 사이가 멀어졌다. 아들 둘, 딸 하나 가운데 막내 아들(28)을 제외하고는 연락도 하지 않는다. “출가한 큰딸과 아들에게는 더 이상 손 벌리기가 미안해 연락도 못해요. 저희끼리 잘 살길 바랄 뿐이죠.” 아내 이씨가 한숨을 내쉰다. 운전석 옆에서 남편 수발을 들던 이씨는 2004년 아예 운전을 배웠다. 몸이 아픈 남편과 운전을 교대로 하기로 했다. 트럭이 안산공단에 들어서자 남편이 운전대를 잡았다. 좁고 복잡한 시내 길은 남편 심씨가, 고속도로 같은 쉬운 길은 아내 이씨가 운전을 한다.

낮에는 지방에서 전날 밤 싣고 온 짐을 안산․반월공단 공장을 돌며 내려놓는다. 해 질 녘이 되면 쉬지도 않고 지방으로 가져갈 물건을 싣는다. 저녁 7시쯤 경기도 안양에 있는 집에 눈 붙이러 잠시 들렀다. 남편은 집까지 걸어가기가 힘들다며 그냥 차안에서 쉬겠다고 한다. 아내만 어두운 골목길을 따라 집으로 향한다. 이틀만에 돌아온 집은 온통 빨랫감과 설거지감으로 발 디딜 틈도 없다. 공무원 시험준비를 하는 막내아들 뒤치다꺼리도 이씨 몫이다. 집안 청소를 마친 이씨는 무너지듯 쓰러진다.

“좀 쉬었어?” 밤 10시, 짧은 단잠을 자고 돌아온 아내에게 남편이 한마디 던졌다. 무뚝뚝한 남편 앞에서 이씨는 말없이 트럭에 시동을 걸었다. 밤 12시. 어느새 중부내륙 고속도로로 접어들자, 뒤에 누워 있던 남편이 눈을 뜨며 라면이라도 먹고 가자고 했다. 충북 괴산휴게소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트럭을 세워놓고, 이씨가 트럭 옆에서 라면을 끓였다. 남편은 다른 사람이 끓인 라면을 먹지 못한다. 신장병을 앓고 있는 환자 특유의 입맛 때문이다.

라면으로 허기를 달랜 부부가 다시 트럭을 몬다. 새벽 2시쯤 경부고속도로 칠곡휴게소에 도착했다. 휴게소 한쪽에 차를 주차시킨 뒤 남편이 운전석 뒤편 남은 공간에 전기장판을 깔고 눕는다. 아내는 운전석에 나무합판을 깐 뒤 잠을 청한다. 뒤쪽 공간이 조금 더 따뜻하고 편하긴 하지만 한 사람이 누워도 몸을 뒤척일 수 없을 만큼 좁다.

“이렇게라도 함께 잘 수 있어 좋습니다. 꼭 신혼 단칸방 같지 않나요?”

남편 심씨가 애써 웃는다. 새벽 4시, 캄캄한 어둠 속에 트럭이 다시 출발했다. 새벽 6시전에 톨게이트를 통과해야만 통행료 50%를 할인 받을 수 있다. 고속도로는 경부고속도로에서 구마고속도로로 바뀐다.

심씨 부부가 이틀 동안 10여 차례 고속도로를 바꿔 타며 돌아다닌 거리는 1200여㎞. 한 달 수입은 기름값, 통행료 제외하고 350만원 정도다. 일감이 없는 날도 많다. 트럭 할부금으로 매달 180만원, 심씨 약값으로 50만원이 들어간다. 정부에서 6개월마다 기름값 보조금 명목으로 150만원이 나오지만 남은 돈으로 생활하기에는 빠듯하다. “그래도 약값이라도 나오니 다행이지요. 남편 몸이 조금 나아져 같이 다닐 수 있는 게 행복이라면 행복이고요.” 가속 페달을 밟는 이씨의 표정이 밝다.

부부는 구마고속도로 김해 진례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길가에서 1시간 정도 쉰 다음 톨게이트 화장실에서 세수를 했다. 김해공단에 이르자 남편이 다시 운전석에 앉았다. 짐을 부리고, 남해고속도로는 다시 아내 몫. 부산 녹산공단과 해운대에서 남편이 또 운전대를 잡았다. 옆자리로 옮겨 앉은 아내는 쉬지 못한다. 몸 아픈 남편에게 말도 붙이고 팔도 주물러준다. 녹산공단과 해운대 등을 돌아다니며 포장지, 전선 보호막, 철근 등을 내려주고 다시 서울로 향한다. 서울로 올라가는 경부고속도로 상행선. 아침이 밝다.

“피곤해도 자동차 타고 여행 다니는 심정으로 일하지 뭐! 일 때문에 고생한다고 생각하면 더 힘들어지는 거 아냐?” 남편과 아내가 손을 꼭 쥐었다.」(글=주완중 기자 wjjoo@chosun.com 조선일보 4월 8일자)

요즈음 많은 가정들이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위기의 원인으로는 경제적인 빈곤, 부부간의 성격 차이, 자녀 양육 등이 가장 큰 우위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큰 어려움으로 작용하는 것이 사실이지요. 하지만 때로는 이 걸림돌들이 오히려 부부간의 정을 깊게 하고, 가정의 결속을 더욱 단단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트럭 안에서 투석을 하면서도 밤낮으로 운전을 하여 열심히 살아가는 기사 속 부부의 모습에서 우리는 참 행복이 무엇인지를 보았습니다.

신자로서 부활을 산다는 것은 어려움과 역경이 좌절과 파괴로 이어지고 마는 비신자들과는 달리,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최선을 다해 기꺼이 지고 감으로써 성숙되어진 삶 안에서 달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생로병사의 과정 속에 어려운 상황을 예외 없이 맞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사는 사람들은 똑같이 주어진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불사불멸의 열매를 맺으며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진리입니다.

여러분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부활의 증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기양 신부
  |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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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인물은 마리아 막달레나, 베드 로,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이렇게 세 사람 입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요한 20,1) 세 사람의 뜀박질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여인” 이고 “자기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던” 여인이며(루카 8,1-3 참조) 십자가 아래에 증인으로 있었 던 여인(루카 23,49 참조)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일정을 추 종했던 여인, 평생을 예수님께 사로 잡혀 산 여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부르심을 받은 뒤에 열 두 제자 중의 으뜸이었고 어디서나 예수님과 함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며(마태 16,18 참조) 무한한 신뢰를 보 내셨던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이들이 자 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예수님의 곁을 떠났을 때도(요한 6,66 참조) 오히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요한 6,68)라고 단호하게 신앙고백을 했던 열정 넘치는 제 자, 예수님께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도 최후 만찬 때에 “예수 님 품에 기대어 앉아”(요한 13,23) 있었고,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실 때는 멀리 물가에 계신 예수님을 먼저 알아보고 “주님이십니다.”(요한 21,7)하고 베드로에게 소리치듯 말했던 제자였습니다. 역시 사랑으로 예수님께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요한 20,1), 세상은 부활을 알아차리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한 사람 한 사람 직접 이름을 부르신 이들, 그분과 함께 빵을 나누던 사람들, 그리고 평화의 말씀을 건넸던 사람들만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평생 추종했고 열정을 드렸으며 사랑했던 사람들, 예수님께 사로잡 힌 사람들이 체험했던 부활의 현장입니다.

실패, 좌절, 낙담, 원망, 분노…. 그렇게 인생을 살았 지만 예수님을 만나 다시 살게 되었고, 언제나 따르고자 하는 추종의 마음을 가진 그 여인은 다시 한 번 일어나 뛰어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열정이 가끔은 자신을 태우는 불길이 되었어도, 배신 의 그림자가 있었어도, 자신의 잘못에 회한의 눈물을 흘렸어도, 열정에겐 기회가 또 찾아옵니다. 또 달릴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달립니다. 아픔도 있고 숨기고 싶은 부끄러움도 있지만, 그 어느 것도 베드로를 막지 못 합니다.

사랑의 마음은 변하질 않습니다. 그분의 힘겨운 시간 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어도 변한 것은 없습니다. 또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달려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 부활의 현장은 이렇게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 한 분 한 분 불러 주신 여러분! 예수님께 사로잡힌 여러분! 이제 우리가 부 활하신 주님을 만나러 뛰어야 할 시간입니다. 아직 어둡다고 세상은 말하지만 우리에겐 이른 아침이 시작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 루야! 알렐루야!”

<서울대교구 강귀석 신부>
  | 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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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우리 마음 안에 간직하여(필리 2,5 참조)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북녘 의 형제자매들에게도 주님의 빛과 생명, 그리고 평화 가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고난 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나 사흘 만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영원히 살게 하는 참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았던 사도들은 본래 배움도 짧았으며, 겁 많고 나약한 보통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핍박을 받고 고초를 당하실 때에는 스승을 배반하고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나약 한 사도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 의 영을 받은 후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성과 힘 을 다해(루카 10,27 참조)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였습니다. 사도들이 살아 계신 예수님을 체험하지 않았다면 감히 나서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순교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시복을 결정하신 ‘하느님의 종 124 위’를 보더라도 학식과 능력이 뛰어난 이들도 있지만, 인간적인 대우조차 받지 못했던 천민들도 있었습니 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가 한 결 같이 죽음 앞에서 흔들림이 없었으며, 사형장에서는 오히려 얼굴에 기쁨의 빛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생전에 가난하고 유약해 모든 이들에게 비웃음을 샀던 조용삼 베드로(?~l801)는 마지막 형벌 때 박해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대담하게 말했습니다. “하늘에는 두 명의 주인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 은 천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뿐이며, 다른 말씀은 드 릴 것이 없습니다.” 죽음의 공포 앞에 선 순교자들을 이처럼 굳건하게 변모시킨 힘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것은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고 자신도 그분과 함께 부활하리라는 굳은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순교자들의 삶을 어떻게 본받을 수 있을까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며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우상으로 여긴다고 우려하셨습 니다.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욕심 안에는 결코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고, 지상의 재물에서는 결코 안전을 찾을 수 없다고도 하셨습니다. 가능한 재물을 많이 소유하고 축적하는 것이 인생 최고의 행복이라 생각하는 세상 안에서 우리 신앙인들은 사랑과 나눔 안에 진정 한 삶의 기쁨과 행복이 있음을 증거해야 합니다.(교황 프란치스코, 삼종기도 강론, 2014년 3월2일)

또한 갈등과 분열이 반복되고 개인주의가 만연한 세상 속에서 우리들은 나의 생각과 뜻이 다른 이들을 보듬고 서로 대화하고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반 대자들을 사랑하고 우리를 험담하는 이들을 축복합시다.”라고 말씀하십니다.(교황 프란치스코, 연중 제7주일 미사 강론, 2014년 2월23일)

사도들과 한국의 순교자들 이 그러했듯이 우리 신앙인은 용감하게 모든 이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용기를 성 령께 청합시다. 재물이나 명예와 같은 온갖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고 내게 소중한 것을 이웃과 나누는 것이 바로 순교이며 부활 의 삶이 됩니다.

이번 우리나라를 “일어나 비추어라.”(이사 60,1)라는 주제로 사목방문하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한을 계기로 우리의 신앙이 다시 생기를 얻고 활성화되기를 기원합니다. 특별히 미래 교회의 주역인 젊은이들이 이번에 체험한 신앙을 바탕으로 삼아 우리 교회와 국가에 이바지할 수 있는 큰 인물로 성장하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이번에 시복되는 124위 복자와 이미 시성된 103위 성인에 대해서도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알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거칠고 힘들어도 부활의 믿음 안에서 주님과 같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고 새로운 하늘과 새 땅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집시다. 그래서 부활시기를 맞이하여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우리 마음 안에 간직하여(필리 2,5 참조) 내적으로 새롭게 거듭 태어나야 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영광스러운 주님의 부활을 맞아 여러분 과 우리 사회에 주님의 평화가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또한 온 세상과 한반도, 특별히 북녘 땅에 주님의 평화와 자비가 전해질 수 있도록,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와 한국의 모든 성인 성녀의 전구를 청합니다. 아멘.

2014년 4월 20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 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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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죽음을 물리치고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빈 무덤 이야기로 묘사되는 예수님의 부활 증언은 그‘때’에 대한 묘사부터 조금은 색다른 표현으로 시작합니다.흔히 초대교회 부활신앙 정식에 자주 등장하는 ‘사흘째 되는 날’이라는 표현 대신에, ‘주간 첫날 이른 아침’이라는 표현이 쓰이고 있습니다. 이 표현 속에서 ‘이른 아침’부터 무덤으로 달려간 마리아 막달레나의 특별한 예수님 사랑을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무덤에 도착해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무덤 안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곧바로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합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 사실, 그 당시 무덤을 강탈하는 강도의 예는 드물지 않았다고 합니다. 서기 40년경 클라우디우스(Claudius) 황제가 내린, ‘무덤을 훼손하거나 시신을 훔치거나 무덤을 막은 돌을 치운 자는 무거운 형에 처한다’는 포고령이 기록으로 남아있을 정도이니 말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몸을 감쌌던 아마포가 놓여 있고 얼굴을 쌌던 수건이 따로 잘 개켜져 있었다’는 복음사가의 묘사는 독자로 하여금, 어느 강도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간 상황이 아님을 알게 합니다. 강도가 ‘수건을 따로 잘 개켜둘’리도 없거니와, 무엇보다도 당시로써는 꽤 비싸고 값나가는 ‘아마포와 수건’을 두고 갈 강도는 없을 테니까요.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직접 묘사가 아니라 ‘빈 무덤’에 대한 기사로 증언됩니다. ‘부활 사건’ 그 자체는 인간의 논리를 뛰어넘고 필설의 묘사를 넘는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보고 믿었다’라는 표현은 단지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보고 알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빈 무덤의 의미를 깨닫고부활을 믿게 되었다’고 이해되는데, 문장 표현에는 ‘예수님의 사랑받던 제자’ 홀로 ‘보고 믿은’ 것으로 나오지만, 어찌그 제자만 그 순간을 보고 믿었을까요. 자신의 한 많은 삶을 용서해 주시고 온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해 주신 예수님을 떠나보내고 이른 새벽부터 달려온 마리아 막달레나나, 결정적 순간에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수제자베드로나 모두, 그 ‘빈 무덤’을 본 순간, 생전에 예수님께서여러 번 예고하셨던 ‘죽은 이들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남’을그때서야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무덤’, 때로는 우리 고단한 삶이 ‘무덤’에서 안식처를 구하기도 합니다. 갖가지 형태의 ‘무덤’이 우리를 가두고서는‘쉼’을 준다고 착각하게 합니다. 우리들이 세상 가치와 타협하고 안주할 때, 우리는 ‘무덤’ 안에 머무르는 셈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무덤’에 안주하고 있는 우리를 흔들어 깨우시고, 새롭게 일어나 다시 앞으로 나아가라고 하십니다!

2015년 부활절에
서울대교구 보좌주교
정순택 주교
  | 04.04
448 10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습니다.”(1베드 1,3 참조)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겨우내 얼어 있던 대지에 다시 생명의 싹이 돋아나고 꽃망울이 피어나는 봄이 왔습니다. 싱그러운 봄과 함께 주님의 부활 대축일을 맞이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남과 북의 모든 형제자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충만히 내리시기를 기원합니다. 무엇보다도 지난해 온 국민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충격과 슬픔을 안겨준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희생된 모든 분들과 유가족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특별한 은총을 기원합니다. 주님 은총의 힘으로 희생자들이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유가족들은 하루빨리 슬픔을 극복하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무참하게 죽으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절망과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을 찾아오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21)라고 인사를 건네십니다. 이 만남을 통해 제자들은 스승을 배반했던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어 그분을 증거 할 용기를 얻게 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인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며,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선사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와 죽음의 어둠 속에서 살아가야하는 우리에게도 새로운 삶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전해줍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부활하신 주님의 빛과 은총이 어느 때 보다도 필요합니다. 세계 도처에 어둠이 짙게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곳곳에서 테러와 폭력, 전쟁의 위험이 끊이지 않고, 무고한 사람들이 생명의 위협을 당하며 억울하게 희생되고 있습니다. 테러와 전쟁은 하느님의 뜻에 반하여 고귀한 인간성을 말살하는 반인륜적인 행위며 소중한 생명을 짓밟는 행위입니다. 우리 사회에도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이기주의, 물신주의와 생명경시 풍조, 진영논리로 인한 비난과 증오가 날로 증가하여 평화롭고 조화로운 삶을 어렵게 합니다. 이런 어두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우리 신앙인들은 새로운 삶으로써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크게 변화되어 그분을 만방에 선포하였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제자들의 ‘부활’, 곧 새로운 삶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무엇보다 먼저 부활하신 주님께서 선물로 주신 평화의 삶을 각자 삶의 현장에서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사랑과 정의가 충만한 상태”로서,“결코 한 번에 영구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모든 사람이 언제나 꾸준히 이룩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사목헌장」 78항)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평화의 길로 나아갑시다. 주님이 주신 평화는 그분의 십자가와 죽음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평화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희생할 각오를 합시다. 특히 올해는 한반도 분단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주님 부활의 은총으로 남과 북이 새롭게 되어 서로 화해와 일치를 위해 더욱더 힘써야 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남한과 북한은 같은 언어를 쓰는 한민족이며, 순교자의 피는 남한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에 피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남북한의 형제들이 하루빨리 서로 대화하고 교류하여 함께 평화의 삶을 이루어 나가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우리 사회가 갈등과 분열을 뒤로하고 평화와 화합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모두 노력하고 희생합시다. 우리 각자의 변화 없이 우리 사회의 변화는 요원합니다. 우리 자신의 변화를 위해 이번 사순 기간에 한국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 주도하여 범종교인 차원의 ‘답게 살겠습니다’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나 자신부터 시작하여 스스로 반성하고 쇄신의 기치를 드높여 나가겠다는 선언입니다. 이와 같은 훌륭한 실천운동이 각 계층에서 활발하게 이어져 우리 사회가 좀 더 밝고 평화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마음으로부터 새로워져 자신과 가정만을 바라보는 좁은 삶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이웃을 배려하고 사회를 생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기원합니다. 많은 이들이 더 큰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여 우리 사회가 하나가 되는 데 힘을 모은다면, 물신주의에서 비롯된 우리 사회의 비인간화와 여러 분열상들을 해소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많은 어려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다시 생생한 희망을 줍니다. 우리도 주님의 제자들처럼 새롭게 변화되어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안에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형성되실 때까지(갈라 4,19 참조) 그분을 닮는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의 어둠 속에 있지 않고, 부활의 빛과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영광스러운 주님의 부활을 맞이하여 여러분과 가정에 주님 부활의 생명과 빛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2015년 부활절에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 04.04
448 100%
[서울] 부활의 삶

주간 첫날 이른 아침, 부활의 소식은 한 여인, 마리아 막달레나로부터 전해집니다.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이 사건은 부활의 증거처럼 복음서에서 표현됩니다. 흔히 ‘빈무덤’이라고 불리는, 예수님을 모셨던 무덤에 예수님께서 더 이상 계시지 않다는 것은 복음서가 전하는 부활 이야기의 시작이자 사실적인 증거입니다. 무덤이 빈 것을 처음으로 목격한 마리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부활을 생각지 못했던 그녀의 이 말은 지금 우리에게 부활을 알리는 첫 소식이 되었습니다.

부활의 모습이나 과정은 성경에 자세히 표현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것을 명확하게 안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대신 부활을 목격하고 체험한 이들의 모습이 부활의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제자들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가고 수난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제자들은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스승을 버리고 달아나기에 바빴습니다. 인간적인 두려움은 그들을 예수님 곁에 있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부활은 이런 모습들을 완전히 바꾸어 놓기에 충분한 사건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모습을 오늘 제1독서인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이전의 모습은 간데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에 열정적이었습니다.

코르넬리우스를 만나 설교하는 베드로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사셨던 지상에서의 삶을 잘 묘사해 줍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모든 예언자가 증언하는 분이며, 하느님께서는 항상 그분과 함께 계셨다는 베드로 사도의 연설은 신학적으로도 훌륭해 보입니다. 또한 부활에 대해서도 그는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라고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전한 몸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렇듯 부활은 그분을 체험한 이들의 변화를 통해 더욱 잘 표현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바꾸어 놓은 삶의 모습은 부활을 목격한 이들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그것이 삶에서 어떤 의미였는지 가늠하게 해 줍니다. 이것을 잘 정리해 놓은 것이 콜로새서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라는 권고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을 요약해 줍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머물러 있지 않고 부활한 삶을 사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부활을 삶에서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제자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처럼, 부활은 이해하지 못했던 예수님을 이해하도록 하고, 부족했던 믿음을 굳건하게 합니다. 부활을 통한 기쁨은 박해의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선포하게 하고, 인간적인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믿음을 통해 기쁨의 삶을 살고 세상의 가치보다 ‘저 위’의 것을 찾는 것이 부활을 체험한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아니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매년 맞는 부활 대축일이지만 그 안에서 부활을 체험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해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각자에게 진정으로 기쁜 소식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눈에는 놀랍기만’한 부활이 마음으로 받아들여지고, 그 안에서 우리의 믿음이 굳건해지기를 희망해 봅니다.

알렐루야! 모든 이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그리고 우리 함께 ‘주님 안에서 축제를 지내는’ 시간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서울대교구 허규 신부>
  | 04.04
448 100%
[서울]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체험하는 공동체의 부활

예루살렘 성전 성묘성당에 가보면 예수님의 무덤 옆에 막달레나의 부활 체험 그림이 있습니다. 사실 막달레나의 부활 체험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자신의 전 존재를 통해 사랑받은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깊이 신뢰하고 사랑했던 사람이었지만 오늘 복음 속 그녀의 신앙은 연민과 집착이라는 이름으로 가려져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한 그녀는 예수님의 시신을 도둑맞았다고 생각하며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제자들에게 알렸습니다. 막달레나의 사랑이 연민과 집착 안에서 혼란을 겪고 난 뒤에야 그녀는 주님의 부활을 체험했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또한 빈 무덤으로 가서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게 됩니다.

막달레나는 주님을 잃고 그분에 대한 지나친 연민과 집착의 시간을 지낸 후에야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부활을 체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사랑받은 제자는 진정한 사랑 안에 깊이 머물렀기에 베드로가 빈 무덤에 들어간 다음에 뒤를 따라가서 주님의 부활을 믿는 공동체를 체험합니다.

우리는 매년 예수님의 부활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삶을 사는 신앙인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을 체험하고 증거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일상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면서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안에 믿음이 자라고 확고해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부활이 나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고 의미 없이 지나쳐버리는 예수님의 부활절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통해 자신의 삶 가운데 현존하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께서 체험시켜주시는 구체적인 사랑을 깨닫고 그분 사랑에 대한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가운데 믿음은 더욱 강화될 것입니다. 그래야만 지나친 애정의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는 주님의 부활을, 무미건조한 삶에 생기를 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넘치는 부활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듯 주님의 현존을 자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생동감이 넘치는 신앙을 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사는 기쁨의 공동체를 이루게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자각한 제자가 베드로 사도를 모시고 체험한 빈 무덤에서의 부활 체험은 새로운 초대 교회 공동체가 성령에 의해 창립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은 우리 교구 공동체도 주교님과 함께 부활을 체험함으로써 자유를 누리며 공동체적 나눔 과 일치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 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사랑받은 제자도 들어갔다.”(요한 20,6,8)

▦ 서울대교구 김창훈 바오로 신부 : 2016년 3월 27일
  | 03.26
448 100%
[서울]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알렐루야, 알렐루야!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죽음의 어둠을 뚫고 부활하신 거룩한 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의 빛이 여러분과 늘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또한 부활의 빛과 기쁨, 평화가 한반도 방방곡곡에 그리고 북녘의 동포들에게 더 나아가 온 세상 곳곳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주님 부활의 은총으로 북한의 핵 문제가 잘 해결되고, 남북 관계도 단절과 적대관계가 아닌 소통과 협력관계로 변화되어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에 평화가 넘치기를 기도드립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죄와 죽음의 어둠 속에 갇혀있는 이 세상을 비추시며, 부활하신 주님 스스로 빛이 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거룩한 미사 예절 중 “그리스도 우리의 빛!”이라는 사제의 외침에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교회는 온 세상에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이기는 빛으로 부활하셨음을 선포하고,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기쁜 소식을 전해줄 것을 다짐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만약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과 삶은 모두 쓸모없는 것이 되고, 인간의 삶은 결국 멸망과 죽음으로 끝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구원을 갈망하는 모든 인간의 희망이며 보증이 됩니다.(1코린 15,14-22 참조)

예수님의 부활 직후,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다락방에서 문을 굳게 닫고 있었습니다.(요한 20,19 참조)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은 온갖 세상 걱정에 빠져 하느님을 등지고 이기심과 욕심에 가득 차 있는 우리의 삶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두려움에 마음을 닫고 폐쇄적인 모습으로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평화’의 메시지를 전해주자 제자들은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요한 20,20-21 참조)

부활하신 주님은 닫혀있던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부활의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그 빛으로 제자들은 더 이상 두려움과 불안, 죽음에 머물지 않고 용기와 희망, 생명의 길을 걷게 됩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후 과거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어둠에 잠긴 세상에 어두움과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빛, 희망의 빛을 비추는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예수님께서 수난하시고 죽으셨던 때처럼 어둡습니다. 세상 곳곳에는 여전히 전쟁 과 테러의 위험, 경제적인 문제 등에 많은 사람이 노출 되어 두려움을 느끼고, 특히 서민들의 삶을 더욱 힘들게 합니다. 우리는 평화가 절실히 요청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신앙인의 역할은 더욱더 중요한 위치를 지닙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부활의 빛을 받은 사람들로서 더 이상 어둠 속에 머물지 않고, 믿음 안에서 희망과 사랑의 빛을 세상을 향해 비추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 사회는 얼마 후 국민을 위한 봉사자를 우리 손으로 뽑게 되는 제20대 국회의원선거를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기심과 권력욕에 사로잡혀 서로 자리다툼을 하는 제자들에게 서로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마태 20,20-28 참조) 우리는 이번 총선에서 우리나라의 미래와 국민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는 봉사자들을 선택하도록 국민의 신성한 권리를 행사해야 할 것입니다.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 이 자리에 우리 안에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특히 올해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선포하신 「자비의 해」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 라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죽음의 두려움과 어둠 속에 있지 않고 부활의 기쁨과 빛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어느 때보다 부활하신 주님의 빛 이 필요한 시기인 만큼, 사순을 시작하면서 요청했던 나라를 위한 기도(※)를 부활 시기 동안에도 바쳐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영광스러운 주님 부활을 맞이하여 온 세상에 주님 부활의 생명과 빛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 서울대교구 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 2016년 3월 27일
  | 03.26
448 100%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이 사람이 당신의 아들입니다. 이 분이 당신의 어머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에게 당신의 교회를 부탁하십니다. 사도에게는 어머니를 공경해 주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으로 갈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에라도 회개하면 자비를 베푸시는 예수님입니다. ‘주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십자가의 고통은 그토록 심한 것이었습니다. ‘목마르다.’ 주님께서는 온 몸으로 고통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십자가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겨 드립니다.’ 예수님의 순명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저 자신 개인적으로 보면 지난 97년 경제위기 때 형이 사업에 실패하여 부모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형이 사업이 잘 될 때는 자랑스럽기도 했고, 만나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형이 사업에 실패하고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형의 작은 허물들이 크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가끔씩 만나는 것도 부담스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형도 나와 피를 나눈 형제이기 때문에 제가 담당해야 하는 일들을 기꺼이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히 제가 져야할 십자가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자신의 십자가가 아닌 다른 이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십자가도 지기 싫어하는 세상인데, 그것도 가능하면 다른 이에게 넘기려는 세상인데 자신의 십자가는 당연히 지고, 타인의 십자가를 지고가면서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사람들을 봅니다.

헌혈증을 가져오면 국밥을 무료로 주시는 아저씨가 있습니다. 그 헌혈증을 모아서 어린이 백혈병 환자들을 위해 쓴다고 합니다. 한 번도 만난 적도 본적도 없는 이들을 위해서 국밥을 나누어 줍니다. 어떤 택시기사 분은 동네에 장애인을 위해서 10년 넘게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장애인이 병원에 갈 때, 고향에 갈 때, 시장에 갈 때 휠체어를 트렁크에 담고, 장애인을 모시고 항상 다닌다고 합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분인데도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혼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 목욕을 시켜드리고, 빨래 해드리고, 머리도 손질해 드리고, 음식도 장만해 드리는 분들도 보았습니다. 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다가 자신의 다리가 절단된 사람도 있습니다. 물에 빠져 떠내려가는 사람을 구하다가 자신은 목숨을 잃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이렇게 우리 주변을 보면 타인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십자가는 물론 타인의 십자가까지 기꺼이 지고 가는 분들을 보면서 작은 십자가조차도 힘겨워 하고 불평하는 저의 모습이 부끄러웠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 주고 멍에를 풀어 주어라.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려라.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 주고,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 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하지 마라. 그렇게만 하면 너희 빛이 새벽 동이 트듯 터져 나오리라. “(이사 58, 6-9)

십자가는 선택 사항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의무 사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니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에 함께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 2016년 3월 27일
  | 03.27
448 100%
[서울]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뿌리에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성경의 예언에 따라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도 의미 없습니다.

합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것만을 받아들이는 현대인들에게 부활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주제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는 초세기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고 의아해했고, 어떤 유다인들은 제자들이 몰래 시체를 숨겨 두고 예수님이 부활했다며 거짓 소문을 내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예수님이 잡히실 때 겉옷까지 내팽개치고 도망갔던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돌변한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스럽고 강렬한 체험이 있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성경은 여러 방식으로 제자들이 예수 부활을 체험했다고 증언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이 모든 것이 제자들이 거짓으로 꾸며낸 이야기였다면, 그들이 감히 순교까지 할 수 있었을까요? 부활 이야기가 꾸며진 이야기라면 그리스도교는 분명 시작과 더불어 사라졌을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성령이 오셔서 제자들이 구약성경의 예언을 기반으로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다고 증언합니다. 이렇게 보면 부활은 책상에 앉아서 이해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성령이 임할 때 체험되는 하나의 실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님이 부활하셨음을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성령의 영감을 받아 증언할 뿐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증언한 부활 체험은 오늘날까지 성령의 이끄심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이들이 부활의 실재를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활을 믿으며,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지 못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부활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아서겠지요.

진정 부활을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는 십자가를 얼마나 기꺼이 지느냐에서 확인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이는 십자가를 결코 지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부활을 더욱 깊이 체험하려면 일부러 더 큰 십자가를 찾아서 져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각자의 능력에 맞는 십자가를 주십니다. 그리고 져야 하는 십자가의 크기만큼의 부활 체험도 주어지겠지요. 문제는 이 모든 것을 올바로 깨달을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는 그 누구도 부활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성령을 통해 믿음의 눈이 열린 이들만이 부활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꾸게 됩니다. 이번 부활절을 지내면서 다시 한 번 성령께 믿음의 눈을 열어 주시어 부활의 실재를 더욱 깊이 받아들여, 우리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사고 청합시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반드시 우리가 지고 있는 그 십자가와 함께 부활을 체험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부활을 진정 깊이 있게 체험할 때 비로소 마음으로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다시 한 번, 우리 주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 서울대교구 주수욱 신부 : 2016년 3월 27일
  |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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