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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아! 잔인한 4월, 잔인한 부활”
조회수 | 2,215
작성일 | 09.04.01
사월이면 한번쯤 중얼거려보는 엘리엇의 유명한 시, ‘황무지’의 첫 구절에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합니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고 생명수 같은 봄비가 무감각하던 겨울뿌리를 흔들어 망각의 잠에서 깨워주는’ 사월을 왜 ‘가장 잔인한 달’이라 했는지 이상합니다.

천지에 생명의 기운이 넘치고 부활의 기쁨을 노래하는 사월이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한 시인의 마음은 사월에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짚어 보게 됩니다.

사월은 봄이 무르익어가는 때,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생명의 몫을 다하기 위해 죽음을 뚫고 살아나는 생명의 계절입니다.

생명의 계절에 생명을 피워내지 못하고, 사랑의 기회에 사랑을 열매 맺지 못하는 삶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살아있어도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삶은 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의식이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어도 죽은 것처럼 생명을 잃어버리고, 희망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천지에 생명의 기운이 약동하는 사월은 차라리 잔인하기만 한 것이라는 역설적인 표현 속에 담긴 시인의 마음에 동감을 하게 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가 죽은 나무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인간으로 태어나서 열매 맺어야할 삶의 목적도 잃어버리고, 참된 것을 식별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순수한 열정도 식어 버리고, 사랑의 능력을 놓쳐버린 인간은 살아있어도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참된 것을 식별하고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기 보다는 헛된 욕망을 채우는 일에 정신을 빼앗기고 사는 삶, 사랑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만족만을 위해 자기중심적인 삶 속에 매몰되어 황무지처럼 메마른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사월은 정말 가장 잔인한 달입니다.

부활의 신앙을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견디어 내야할 희생과 시련을 두려워하여 새로운 삶을 열매 맺지 못하는 ‘죽은 삶’ (the living dead) 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부활은 잔인한 것입니다.

‘알렐루야’를 노래하면서도 자신의 삶 속에 드리워진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희망을 잃고 절망의 늪 속에서 살아가는 삶에 부활은 잔인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은 모든 것을 분명하게 밝혀줍니다. 우리를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생명의 삶으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삶의 고통과 시련 속에서 우리에게 비추어주시는 희망의 빛이 무엇인지를 드러내 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표지이고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확증이며 그 부활의 기쁨이 우리의 삶 속에서 실현될 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부활의 의미를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으로 우리 삶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희망을 일구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변화를 위해 내가 포기해야 할 것들이 두려워서, 겪어내야 할 고통이 아프고 싫어서, 때로는 감당해야할 현실이 너무나 부담스러워서 어둡고 무감각한 땅속에서 모든 것을 망각한 채 잠들고 싶어 합니다.

무덤에서 나오신 예수님께서는 잠들어 있는 무감각한 우리의 의식을 흔들어 깨우십니다. 그러나 생명을 가져다주는 부활의 빛은 어둠에 익숙한 우리에게 너무 눈부시고 아려서 도로 눈을 감아버리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죽은 자처럼 살아가고 싶은’ 우리를 흔들어 깨우는 부활의 노래는 차라리 잔인한 것입니다. 부활이 잔인한 것은 부활에 이르는 길이 십자가를 통한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십자가를 짊어지기를 거부하는 닫힌 마음 때문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지 않고 썩지 않으려는 굳은 마음이 잔인한 것입니다. 닫힌 마음에는 사랑이 자리 잡지 못하기에, 굳은 마음에는 생명이 자라나지 못하기에 스스로 고립과 죽음의 길을 재촉하는 그 마음이야말로 인생을 죽음 속에 살게 하는 잔인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빈 무덤을 바라보았던 제자들의 마음속에 부활의 희망이 자라나고 있었기에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었듯이 우리의 삶 속에 자리한 빈 무덤은 부활의 증거입니다.

모진 삶의 무게에 짓눌려 주저앉은 그 자리에서, 기를 쓰고 살아도 자꾸만 뒤처지는 인생의 수레바퀴 앞에서, 나를 뒤흔드는 두려움과 걱정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나를 잠들지 않게 하는 것은 주님의 약속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 33) 그 약속을 잊어버리고 산다면 우리는 참된 삶으로부터 우리를 마비시키는 망각의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며 부활은 잔인한 소식이 되고 말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은 생명과 환희의 계절이며, 주님의 부활은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의 노래입니다. “주님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김영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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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형적인 자신의 죽음과 내적인 자신의 부활

안식일 다음날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이 묻히신 무덤에 가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달려가 "누군가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다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하고 일러주었다. 제자들이 무덤을 직접 보니 수의가 흩어져 있었다. 그들은 그때까지도 예수께서 죽었다가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경말씀을 깨닫지 못했다.

예수님 부활은 인류 죄악과 세상 불의에 대한 승리다. 죽음의 극복이며 한 줌의 재로 돌아갈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교리다. 그분의 현세생활, 죽음, 묻힘과 달리 부활은 인간 이성의 한계를 넘어선 역사상 획기적 사건이므로 제자들마저도 믿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신 후 다시 살아나셔서 500명이 넘는 교우들에게 나타나시고(1코린 15,5-6),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구운 생선을 드셨으며(루카 24,42-43), 당신 부활을 불신하는 토마스 사도에게 직접 못 자국과 창에 찔리신 옆구리를 만져보게 하셨다(요한 20,25-28).

그리스도 신앙에서 예수 부활의 의미는 인간이 죽음을 넘어 영생에 참여함은 물론이고 실증주의와 물질 만능 사상에 침몰된 인간 존엄과 근본가치를 부활시키는 것을 말한다.
 
어느 마을에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마을에서 가장 인격이 높아 존경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그 부자의 생일에 큰 잔치가 있어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어느 현자가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찾아가 하인에게 "주인을 만나러 왔다"고 했다.

하인은 부자에게 "웬 거지같은 사람이 주인님을 만나러 왔습니다"하고 전했고 부자는 얼굴을 찡그리며 "경사스러운 날 거지가 오다니 당장 쫓아내라"고 일렀다. 문전에서 쫓겨난 현자는 단정하게 외관을 갖추고 다시 잔칫집으로 갔다.

그 부자는 "아이고 이렇게 누추한 곳에 고매하신 분께서 와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하면서 상석에 모시고 대접했다. 그런데 그는 음식을 먹지 않고 옷 속에 집어넣고 있었다. 궁금해진 부자는 "왜 드시지 않고 옷 속에 넣으시는지요?"하고 물었다. 현자는 "당신이 초대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이 옷이니 내 옷에게나 음식을 먹여야지요"하고 답했다. 그 부자는 그제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이것은 외형이라는 허상에 집착한 인간들 사고를 적나라하게 꼬집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잘 먹고, 호화스러운 옷을 입고, 고급 차를 타면 더 행복해 질 수 있다고 착각하는 이가 많아지는 게 현실이다. 몸이라는 외형에 사치스런 옷을 입히고 온갖 장신구로 치장한다.

이러한 집착이 가져오는 최대 악영향은 사람이나 사물의 근본정신을 보려 하지 않고 겉모양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게 한다는 것이다. 화려하고 감각적 외형에 빠져 자신답게 살려는 자존심이 결여되는 것이다. 결국 유명한 연예인들 겉모습을 모방하려 애쓰고 진정한 자기 마음과 얼굴, 개성과는 상관없는 자신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옛 성인들은 '도를 배우려면 마땅히 가난함부터 먼저 배우라'고 했다. 외형에 지나치게 비중을 두는 것은 자신의 정신적 향상이나 만족감, 참된 가치가 결여돼 겉모양에 집착하는 것이다. 이는 타인이 자기에게 관심을 주기를 바라는 잘못된 가치관에서 기인한다. 교만한 말과 꾸미는 얼굴빛보다 진실한 삶의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그리스도교인은 세례성사를 통해 한 줌 흙으로 사라질 물질에서 영적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그러므로 먼지로 되돌아갈 현세의 것들에 집착하고 과시하지 말아야 한다. 부활을 향한 강한 희망을 가진 우리가 썩어 없어질 것에 애착을 갖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현상과 외형, 체면이나 명분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생각을 크게 전환해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나오는 진실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겉모습에 따라 미와 추를 판별하는 세인들에 따르지 말고 인간 내면과 그 지향을 사랑하시어 사람의 인격을 높이신 예수님 방식으로 삶을 살아야 한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로마 8,5-6) 하신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하느님 모상인 인간 존엄이 부활하도록 온 힘을 다해야 한다.

서광석 신부
  |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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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자필멸(生者必滅),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죽어서 사라진다는 것은
인간 세상의 상식이고 자연의 법칙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 상식과 법칙을 깨뜨린 사건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사건입니다. 잘 만들어진 신학 이론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돌아가셨고, 무덤에 묻히셨고,
그것으로 지상의 생애가 끝났습니다.
그 죽음이 다른 어떤 죽음보다도 고귀하고 거룩한 희생이긴 하지만
죽음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생자필멸의 법칙을 따른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생애가 그것으로 끝났다면
당시의 사도들과 신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냥 흩어져서 또다시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흩어지지 않고 다시 모였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회상하면서 회고록을 쓰거나
추모사업 같은 것이나 하면서 지냈을 것입니다.
나중에라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인정해 주었다면
구약시대의 예언자들 같은 예언자로 기록에 남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정도로는 예수님을 믿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도 없습니다.
복음도 없고, 복음을 전하는 일도 없고, 순교자도 없습니다.

사도들과 신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유령인 줄 알았습니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유령이 아니라 진짜로 살아계신 분이라는 것을
사도들과 신자들이 확인하고 믿게 되었을 때,
그때 인간 세상의 상식과 법칙이 깨졌고,
사도들과 신자들은 인간 세상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일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께 '주님, 하느님'이라고 한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난 예수님을, 지금 살아계시는 예수님을
증언했고, 선포했고, 그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증언의 종교이고, 체험의 종교입니다.

사도들의 증언을 믿는 것은 이제 우리들의 몫이 되었는데,
우리는 단순히 사도들의 증언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예수님을 체험하면서 믿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책 속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만나고 있고, 또 그렇게 만나야 합니다.
부활절은 과거의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오늘,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부활절은 사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일을 회상하는 날이 아니라
오늘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예수님을 우리가 만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부활절은 예수님 때문에 사도들의 인생이 완전히 바뀐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완전히 바뀌는 날입니다.
언젠가는 죽어서 끝나버릴 것 같은 인생인 줄 알았는데,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르고 새로운 인생이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믿는 날이고,
모든 것을 끝내고 싶은 고통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날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로 이어져야 합니다.
예수님만 부활하시고 우리의 부활이 없다면
그건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또 부활이라는 것이 지금의 인생을 단순히 연장하는 것일 뿐이라면,
그런 부활을 희망하고 기다릴 이유도 없습니다.
만일에 지금 부귀영화와 온갖 행복을 마음껏 누리고 있고,
특별히 아쉬워하는 것도 없어서
다른 무엇인가를 더 희망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부활을 희망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희망한다고 해도 지금의 인생이 그대로 연장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의 세상이 그대로 반복되는 그런 세상에서 다시 사는
그런 부활을 바라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부활을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각 개인의 인생도 완전히 새로워지는 부활이면서
동시에 이 세상 전체가 완전히 새로워지는 부활입니다.
특권층도 없습니다. 차별도 없습니다. 눈물도 없습니다. 아픔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모든 기쁨과 행복을 모두 함께 누리는
그런 세상의 그런 부활을 희망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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