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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구원받은 자의 삶으로
조회수 | 2,347
작성일 | 09.04.01
요한복음 20-21장은 한 가지 사건으로 특징 지워지고 있다. 주님께서 오셔서 행하시고 당신을 드러내실 때에는 "예수"님이시고, 당신의 제자들이 그분을 뵙고 그분의 말씀을 들을 때에는 "주님"이시다. 이렇게 오늘의 사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가진 점진적인 인식의 4 순간을 보기로 한다: 1. 치워진 돌(1절); 2. 두 천사(12a); 3. "서 계신 예수"(14a) "그러나 그분임을 알지 못하였다"는 말과 함께; 4. 막달레나의 인식이 충만해졌을 때, "주님"(18b)이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반대로 무덤에 대해서 다른 현상들과 함께 빛과 인격적인 神顯(젊은이들, 천사들)을 묘사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막달레나와 함께 다른 충실한 여인들을 거명하지 않는다. 장례의 침울한 방문의 동기를 주지 않는다. 반대로 다른 귀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첫째 날"(1절)에 대한 것이며, 이는 19절에 7+1로 26절에 여드레로 나타난다. 막달레나는 무덤이 빈 것을 보고 베드로와 예수님께 "사랑 받던 제자", 아마 요한에게 달려가, "누군가가 주님을 옮겼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한다(1-2절). 여기서 베드로와 다른 제자의 무덤방문이 나온다. 다른 제자는 먼저 "수의가 땅에 흩어져있는" 것을 보았으나 무덤밖에 있었다(3-5절). 그리고 나서 베드로가 들어가서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주님의 얼굴을 싸맸던 수건도 보았는데 그것은 한 쪽에 한 "표징"과 같이 잘 개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침착하게 당신의 계획에 따라서 하신 것이다(6-7절). 수건이 주님의 얼굴에서 치워진 것을 가리키면서 계시가 이제 신적인 얼굴을 부활하신 인간적인 얼굴에서 관상할 수 있도록 하셨다. 즉 그분을 보면서 우리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다른 제자가 들어가고, 요한에 따른 신앙행위의 완전성이 두 전문적인 동사 "보고 믿었다"로 나타난다(8절). 제1세대는 우리에게 증거가 되기 위해서 "보아야" 하며(요한 1,14 참조), 우리는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한다(토마 사도를 보라). 신앙의 눈은 단지 믿으면서도 "보기" 때문이다.

복음사가의 마지막 주석은 모호한 뜻이 담겨져 있다. 베드로는 단지 보기만 했고, 다른 제자는 "보고 믿었다". 그러기에 "그때까지도 예수께서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가(9절). 단지 "사랑 받던 제자"만이 사랑으로 여기에 모든 신적 경륜이 있음을 맺는 말속에서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소위 "부활한 육체"를 보려고 기다리고 있다. 그날 저녁 그 일이 일어나겠지만, 이는 막달레나에 의해 전해진 "성서 말씀대로"(1 고린 15,1-8) 선포된 후이다(17-18절). 주님의 부활은 마지막 사건(Evento-Omega)으로 항상 "성서에로", 구약, "첫째 사건"(Evento-Alfa)으로 소급된다. 이것으로 모든 인간들을 위한 신적 사랑의 계획의 유일한 완전한 발현을 형성한다. 오늘도 수의도 아니고 머리 수건도 아니다. 성서가 주님께로 소급된다. 그분의 얼굴은 이미 보여졌고, 흠숭을 드릴만하다.

부활 사건은 우리에게 그러기에 기쁜 소식이며 오늘, 여기 공동체 안에서 우리를 위해 우리의 삶을 쇄신하는 사건이다. 오늘의 축제는 우리의 지향과 구체적인 행위 안에서 일년 내내 모두 은총의 해가 되도록 남아 있어야 한다. 어떻게?

이것에 대해서는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가르쳐 주고 있다(골로 3,1-4). 바오로 사도는 골로 3장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을, 즉 죽게 하여 은총의 샘에서 부활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인 세례의 삶을 다루고 있다. 이제부터 우리는 "천상의 것들"에, 아버지의 오른편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바로 모든 세례 받은 이들이 살도록 운명지어진(1절) 곳에 살도록, 참여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들의 정신은 세상에 있으나 땅위에 고정시키지 않고 그들이 도달해야할 곳, 하늘에 고정시키는 것이다(2절). 이 두 절은 감사경 전에 나오는 "마음을 드높이"라는 권고의 단서가 되었다. 바오로는 옛것의 죽음과 하느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그것들의 충만된 발현을 기다리며 신적인 것의 새 탄생을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성령과 함께 오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기다린다. "생명을 주시는 분"인 그분은 성령의 영광으로써 당신의 신자들을 그들과 함께 영원히 사시려고 그들을 빛나게 해 주실 것이다(3-4절).

우리의 삶은 이 세상에 있으나 천상의 삶을 이미 이 땅에 끌어내려 살고 있는 삶이다. 이 삶이 바로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며, 부활한 후의 삶은 바로 이런 모습이라고 그분이 우리에게 확실히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이제 우리가 부활을 확실히 체험하는 것이다. 천상의 것을 추구하면서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이 세상에 대해서 죽는 연습, 아니 죽어야 한다. 죽는 삶을 통해 우리는 부활을 체험할 수 있으며, 우리는 사도들이 한 말과 같이 "우리는 우리가 보고 체험한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한 것처럼 우리도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복음선포이며, 그리스도, 즉 구원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참으로 "주님께서 부활하셨도다"라고 찬미드릴 수 있어야 하겠다.

"주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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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부활의 광채로 세상의 변화를!

사랑하는 수원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어둠과 죽음으로부터 승리하시고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사순시기의 나날을 지낸 우리들이 이제 “알렐루야”를 노래하며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기뻐하는 가운데, 부활시기 동안 부르게 될 이 찬미의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질 것입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 주신 주님 부활의 기쁨이 여러분 가정과 본당 공동체, 그리고 각 기관에서 봉사하는 모든 이와 함께 하길 빕니다. 또한 교회가 다가가야 하는 모든 이들, 특히 경제적 어려움으로 지친 이들과 그늘진 삶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열심히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도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이 기쁜 소식이 전해지길 바랍니다.

부활은 파스카 신비의 핵심

1.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거룩한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발라드리려고 무덤에 갔다가 처음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요한 20,11-18 참조). 그들은 ‘주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천사의 말을 듣고(마태 28,6) 크게 기뻐하며,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하고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그날 저녁, 주님께서는 두려워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시며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요한 20, 19-20 참조). 또한 당신의 부활을 의심했던 토마스와 다른 일곱 제자에게도 나타나셨고(요한 20,24-29; 21,1-14 참조),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는 더욱 극적으로 나타나시어,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루카 24,13-35). 제자들이 목격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이 체험은 초대 그리스도 공동체의 중심 진리가 되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 되었고, 교회의 성전(聖傳)도 이를 근본 진리로 전승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이고, 교회가 가르쳐 온 ‘파스카의 신비’의 핵심 부분이며 참 진리입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638 참조).

절망에서 희망, 어둠에서 빛을 가져다 준 사건

2. 지존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 세상에 오시어 인간들에 의해 온갖 모욕과 욕설을 당하시다가 끝내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오, 헤아릴 길 없는 주님 사랑! 종을 구원하시려 아들을 넘겨주신 사랑!”(부활찬송). 바로 우리의 게으름, 교만, 탐욕, 이기심, 편견, 고집, 아집으로 인해 인간의 삶과 죽음, 세상 만물의 법칙과 질서를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죽음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한 듯이 보였던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어둠과 악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다시 살아나시어 불변하는 진리의 광채를 만방에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이 가지고 있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고, 어둠에 빛을 가져다 준 사건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부활성야에 ‘하늘과 땅이 결합되고 하느님과 인간이 결합된 밤’, ‘거룩한 이 밤은, 죽음의 사슬을 끊으신 그리스도, 무덤의 승리자로 부활하신 밤’이라고 노래하며, 오늘도 온 세상 어디서나 그리스도 신자들을 세속 온갖 죄악과 죄의 어둠에서 구원하여 주시길 청합니다(부활찬송 참조).

부활은 우리 삶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천상적이며 초월적인 놀라운 사건

3.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에서 보듯이, 이미 제자들은 예수님의 천상 모습을 목격하였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지금까지 자신들과 함께 생활하시며 가르치시던 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장소는 스승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며 활동하였던 ‘갈릴래아’였습니다(마르 16,6). 그곳은 특별한 곳이 아니라, 스승이신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생활한 곳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는 장소가 우리 일상의 삶의 자리, 기쁨과 고뇌가 함께 하는 삶의 현장이며, 우리가 태어나고 활동하며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가정공동체, 반공동체, 본당공동체 그리고 지역사회 한복판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즉 그분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주님의 천상적이며 초월적인 부활 사건은 현재도 우리 삶의 공간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전해 줍니다.

어둠을 밝히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부활의 광채

4. 어두운 무덤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밝게 비추는 광채가 되셨습니다(부활찬송 참조). 예수님의 부활로 세상의 죄와 죽음은 사라지고, 타락하였던 만물이 새로워지며,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의 생명이 온전히 회복되었습니다(부활감사송 4 참조). 부활은 죽음을 새 생명으로, 어둠을 빛으로 바꾼 사건입니다. 또한 제자들의 불신앙을 확실한 신앙으로, 두려움을 그리스도를 전하는 용기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변화된 삶을 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이 변화된 삶의 근원은 예수님의 삶에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일하시는 그리스도를 행동하는 사랑으로 본받아 희망으로 기뻐하며 서로 다른 사람의 짐을 져 주어 더 높은 성덕, 사도적 성덕으로 이르러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교회헌장 41장 참조). 보편적 성화의 소명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자신이 성화되어야 세상을 성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삶에 변화가 없으면 가족 구성원이나 이웃, 사회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자신을 버리고 죽지 않으면, 우리가 속해 있는 가정과 사회는 진부하고 희망과 기쁨이 없는 상태로 사랑과 화해, 일치와 신뢰를 외면한 채 기약 없이 제자리를 맴돌 것입니다.

오늘날 시대적 상황과 우리의 현실

5.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인간의 미래에 도전하는 갖가지 사상과 현상들에 의해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특히 나날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전통적인 윤리관은 무엇보다도 소중한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함으로써 보편적인 인류의 공동선을 추구해야 하는 거룩한 인간성을 상실케 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경제 논리에 의한 실용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물질주의와 이기주의에 빠져들도록 하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은 인간의 삶을 극단적인 경쟁으로 내몰아 계층 간의 분열과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비록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지만, 오히려 인간성은 퇴보되어 서로를 불신하는 불안한 시대를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와중에 우리나라에서는 사회·정치적으로 국민들을 안타깝게 하는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비정규직의 생존권 문제로 인한 고용주와 노동자의 갈등, 우려스런 생명윤리법 개정안의 국회통과, 언론법으로 인한 정치권의 끊임없는 정쟁, 경인운하 추진으로 인한 사회적 논란과 분열, 무분별한 재개발로 인한 서민층의 생존권 문제 등, 결론이 보이지 않는 많은 갈등은 국민들로 하여금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또한 작년 말부터 시작된 국제적인 금융위기는 전 세계의 경제를 파산과 침체의 늪으로 몰아넣으면서 우리 사회에도 영향을 끼쳐, 극심한 경제난에 처한 사람들의 입가에 미소 대신 어둠을 드리우게 하고 있습니다. 유가의 폭등과 하락, 예측을 불허하는 환율의 변화, 부동산 경기 침체, 고물가 저성장, 수출입 불균형, 실직과 취업문제, 기업의 불황과 도산 등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원인은 세상의 정치적·경제적 구조와 체제에도 있겠으나, 일정한 기업윤리, 시장윤리의 원칙과 윤리적인 행위를 간과한 데도 그 원인이 있습니다.

올바른 세상을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역할

6. 교황 성하께서는 연초 ‘평화의 날 메시지’를 통해, “온 인류가족의 이익을 지향하고 불평등의 격차를 줄이는 강력한 세계적 연대를 전제로 하는 ‘공동 윤리 강령’을 만들어 실천에 옮겨야 한다.”고 천명하셨습니다. 불의한 세계 경제 구조와 국가의 체제가 무죄한 선의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과 슬픔을 안겨주고 있으며, 비윤리적인 사회체제가 선량한 사람들의 인권과 생존권을 말살하고, 가정과 사회 공동선을 파괴한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인류의 공동선과 미래를 위한 희망을 파괴하는 이러한 상황들은 우리로 하여금 관망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교회의 모든 하느님의 백성들이 이러한 사회 구조 속에 살면서 모두가 그 사회의 일원으로서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으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안의 다양한 민족과 문화 속에서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는 교회는 이러한 현상들을 항상 경계하며 인류의 보편적인 공동선을 위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사회 안에 살면서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 사회의 구조적 불신과 불의에 현명히 대처하며 희망과 위로를 선사하는 부활의 삶을 선포함으로써 이 세상이 참 진리와 참 가치를 추구하는 세상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 할 이들

7. 이러한 사회적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주위 사람들에게 눈을 돌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촉구합니다. 이 현실을 극복하는 힘은 하느님께서 육신을 취하시고 세상에 오시어 인간과 함께 하시면서 세상의 죄를 씻기 위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신 주님의 극진한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파스카의 신비 안에서 끊임없이 주님의 구원사업을 세상에 확산시켜, 우리 이웃 중에서 병고로 고통받는 이들, 물질적 가난에 허덕이는 이들, 장애로 인해 사회 안에서 차별받거나 힘들어 하는 이들, 가정의 역할 한계로 인해 힘들어하거나 방황하는 청소년들에게 더욱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요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직장을 잃고 방황하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다문화 가정, 그 가정에서 피어난 새로운 미래인 그들의 자녀들에게도 특별한 관심을 가져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범죄로 인해 사회의 구성원에서 밀려나 그늘에서 사는 이들과, 이들의 교화를 위해 노력하는 교정사목에도 배려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수원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역사적 반세기를 맞이할 시점에 있는 수원교구의 미래는 수원교구민 모두에게 희망적으로 열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우리의 사명은 세상에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선포하도록 더욱 재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복음을 실천하고 전파하는 곳에 주님께서는 늘 함께 하실 것입니다. 교회로부터 수원교구를 위해 일하도록 명을 받은 교구장 주교인 저도 사랑 안에서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평화의 모후이시며 하늘의 모후님, 기뻐하소서. 알렐루야!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나이다. 알렐루야!

2009년 4월 12일
예수부활대축일에
수원교구장 이용훈 마티아 주교
  | 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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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깊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눈은 따뜻했지만 인간의 영혼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을 바라보며 숨은 것을 드러내는 눈이었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매우 부드러웠지만 날카로운 칼처럼 마음의 깊은 곳까지 도달하여 듣는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또 그분의 귀는 보통의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우리가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을 들을 줄 알았고, 그분의 따스한 손은 우리의 아픔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분의 마음은 언제나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일으켜 주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을 거부했습니다. 그분 앞에만 서면 우리의 숨은 죄악이 드러났고, 그분의 소리를 들으면 오만한 우리의 비참한 모습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손은 우리가 피하던 죄인과 병자를 허락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마음 앞에서 초라한 자신을 마주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그분이 너무 거북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모습도 보기 싫어 캄캄한 굴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그 구덩이에 그분과 함께 우리의 모든 악행까지 집어넣고 두 번 다시 열리지 않도록 커다란 돌로 막아버렸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그분의 존재를 없애려 하였고 마음속에서도 지우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마음과 존재에서 지워지지 않았으며, 영원히 죽일 수도 가두어 둘 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이고 끝없이 타오르는 사랑이며, 꺼지지 않는 빛이고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복음도 이를 증명하듯 제자들이 간 그곳에 그분은 계시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열린 무덤이 상징하듯이 그분은 우리 안에 자리하고 있던 어둠과 죽음을 몰아내셨습니다. 그분은 부활로 우리의 어둡고 막혀버린, 더 이상의 것이 없는 지난 과거를 없애고 새로운 빛으로 우리를 비추시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늘과 땅, 인간과 세상이 하나 된 이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죽음과 죄를 없애고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신 그분께서 비추는 빛 안에서 새로운 일상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일상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이 녹아 있는 삶입니다. 또한 우리를 부활하신 예수님께로 인도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길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과 생명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기뻐하고 즐거워합시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 이건희(안드레아) 신부
  |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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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그리스도 안에 일치하는 수원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시어 온 인류를 구원하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가정과 본당 공동체, 그리고 여러 사목 현장에서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부활의 기쁨

오늘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헤아릴 수 없는 큰 사랑이 부활의 기쁜 소식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부활 성야부터 밝게 타오르는 부활초는 우리의 어둡고 무거웠던 마음을 환하게 밝혀줍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밤에 초를 밝혀 들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음을 세상에 선포합니다. “비춰진 땅아 깨달아라. 세상 어둠 사라졌다. … 거룩한 이 밤은 불기둥의 빛으로써 죄악의 어둠 몰아낸 밤.” 어둠을 몰아내는 이 초는 당신의 사랑과 희생으로 우리를 죄와 죽음의 사슬에서 풀어주신 주님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또한 부활 성야 때 축복하는 세례수는 우리가 세례를 통해 주님과 함께 묻혔으며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새로운 삶을 선물로 받았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우리 모두는 과거의 어두운 삶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해방의 삶을 되찾았습니다.

‘무덤의 승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의 승리자’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창조 때부터 시작된 구원 역사의 정점을 이룹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이 당신의 아들에게서 온전히 드러나고 실현된 것입니다. “오, 오묘하도다,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 오, 헤아릴 길 없는 주님 사랑! 종을 구원하시려 아들을 넘겨주신 사랑!” 인간의 교만과 배반, 탐욕과 이기심, 분노와 질투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십자가는 목숨을 내어주는 주님의 사랑의 행위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벗을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주님의 ‘완전한 사랑’의 표지이며,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에게 남겨주신 ‘새 계명의 완성’입니다(요한 13,34; 15,12-13). 주님의 사랑으로 새로 태어난 이에게 십자가는 걸림돌이나 어리석음의 표지가 아니라(1코린 1,22-25), 주님의 영광이요 세상 모든 이를 당신께로 이끄시는 축복의 근원이며 은총의 원인이 됩니다. 주님의 부활은 이 지극한 사랑이 결국 죄악과 죽음과 싸워 승리하였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명인 파스카의 삶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우리 모두는 파스카의 삶으로 초대받았습니다. 이 삶은 벗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주님의 숭고한 사랑과 희생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경제제일주의와 물질만능주의로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빠른 속도로 진행된 경제발전은 우리에게 물질적인 풍요도 주었지만, 우리 사회에 많은 부조리를 양산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경제논리로 평가하는 시류에 편승하여 우리 문화는 점차 선과 악에 대한 감각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더욱이 최근 들어서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물결과 함께 경제적 불평등과 소외현상이 확산되며 실업과 빈부격차가 극대화되고 경제적·사회적 양극화 현상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청소년 폭력, 인권 침해, 소통의 부재, 생명 경시 풍조, 환경 파괴 등은 인간의 품위와 존엄성을 파괴하는 형태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현실 앞에서 우리 신앙인들 또한 “그동안 ‘하느님의 것’을 잊고 살아왔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활 대축제를 지내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실천하신 파스카의 삶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 우리 사회를 정화하고 완성해야 할 사명을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파스카의 신비에 참여함으로써 곧,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가난의 길, 십자가의 길, 섬김의 길에 참여함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습니다.

교구 설정 50주년 기념 영성 운동

올해는 수원교구 설정 50주년 희년이 시작되는 역사적이며 감격적인 해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발전을 이룬 우리 교구가 50주년을 맞아 더욱 성숙한 교구로서 자리매김을 해야 할 시기입니다. 희망과 설렘으로 기다리는 이 은총의 해를 통해 우리는 신앙 안에서 영적으로 새로워져 신앙의 열정을 되찾고, 신앙의 기쁨을 일상 안에서 구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 영적인 도약의 해를 잘 준비하기 위해 교구는 올 부활 시기부터 50주년 기념 영성 운동을 실시하고자 합니다. “잘 섬기겠습니다.”라는 영성 운동입니다. 안으로는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그분의 겸손과 섬김의 삶을 본받아 영적으로 새롭게 되고, 밖으로는 이를 이웃 안에 실천하여 사회에 새로운 희망의 빛을 밝혀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섬김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증거할 때 그리스도의 복음은 탐욕과 폭력으로 형성된 ‘죽음의 문화’를 추방하는 희망의 메시지로 전해질 것입니다.

주님 안에 사랑하는 수원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죄와 죽음을 이기고 ‘무덤의 승리자’로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어 온 세상에 희망의 불을 지펴주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위해 늘 전구해주시는 우리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며 필요한 은총을 간구해주실 것입니다.

평화의 모후이시며 하늘의 모후님, 기뻐하소서. 알렐루아!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나이다. 알렐루야!

2012년 4월 8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수원교구장 이용훈 마티아 주교
  | 04.07
448 36%
이 날이 주께서 마련하신 날!

오늘은 우리가 부활대축일을 지낸다. 이 부활의 신비는 놀라운 경이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오늘의 화답송에서는 “주께서 이루신 일이옵기에 우리 눈에 놀랍게만 보이나이다. 이 날이 주께서 마련하신 날, 이 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시편 117,23-24)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 날에 느끼는 ‘기쁨’은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시는 ‘놀라운 일 중의 놀라운 일’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죽음에로 밀어 넣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자”(사도 10,42)로 세우시고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도록”(사도 4,12) 하셨다.

복음: 마태 28,1-10: 부활하신 예수 갈릴래아로 가실 것이다

복음은 놀라움과 경이의 분위기이다. 주님의 부활 순간의 ‘큰 지진’과 무덤의 돌을 굴려내고 거기에 있던 천사의 찬란한 모습이 이를 강조한다. 그리고 한 가지 놀라운 것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의 증언을 강조하며, 그들이 무덤으로 갔다는 것과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났다(9-10절)고 증언하고 있다. 그들은 다른 복음에서처럼 주님의 몸에 ‘기름을 바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덤을 ‘보러’(1절) 갔다. 그들은 거기서 빈 무덤을 보게 된다. 이것으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고한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마태오는 이 증언을 여인들의 증언에 따른다는 것이다. 여자들이 맨 처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그것을 전했다는 것은 그들의 믿음, 순수함 또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보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도들은 어땠는가? 겁에 질려있었고 그 여자들의 증언을 믿기보다는 헛소리 정도로 생각하였던 것이다(루가 24,11 참조).

그 여인들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엎드려 절하였다”(9절). 이 행위는 부활하
신 주님께 대한 신앙고백이며, 그분을 손으로 포옹할 듯 넘치는 기쁨과 환희를 나타내는 것으로써 그분이 진정 다시 살아나셨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예수께서 여자들에게 먼저 당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신 것은 교회 안에서 여자들의 중요성 때문이 아니라, 신앙의 선포에 있어서 ‘사랑’과 ‘기쁨’이 차지하는 수위성을 말해주고 있다. 이 ‘기쁨’의 주제는 처음부터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순간에 ‘겁에 질린’ 경비병들의 모습과 여자들에게 주어지는 ‘기쁨’은 큰 차이가 있다. 마음의 상태가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여자들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을 찾고, 이미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에 부활해 계신다. 그러나 그분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그들을 단죄하고 심판하기 때문에 그분이 영원히 죽어있기를 바라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여자들이 두려웠던 것은(8절)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일을 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큰 기쁨에 사로잡혀 “무서우면서도 기쁨에 넘쳐”(8 절) 제자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러 달려간다. 여기서 마태오는 기쁨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부활사건을 교회공동체가 자신들이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되었음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자신들의 부활을 내다보고 있다. 그러기에 부활찬송은 그 ‘기쁨’을 장엄하게 노래하고 있다. “용약하라 하늘나라 천사들 무리, 환호하라 하늘나라 신비, 구원의 우렁찬 나팔소리, 찬미하라 대왕의 승리, 땅도 기뻐하라, 찬란한 광채 너를 비춘다. 영원한 대왕의 광채 너를 비춘다. 비춰진 땅아 깨달으라. 세상 어둠 사라졌다. 기뻐하라. 자모신 성교회, 위대한 광명으로 꾸며진 성교회, 백성의 우렁찬 찬미소리 여기 들려온다.”

제2독서: 로마 6,3-11: 그리스도께서는 다시는 죽는 일이 없으실 것이다

부활체험이라는 것은 ‘두려우면서도 기쁨에 넘치는’ 일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될 때 가능한 체험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을 때, 바로 부활하신 그분이 우리 안에 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 전체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본받도록 해야 합니다. 세례로 그분과 함께 묻혔다면, 그분의 생명을 누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위해 사는 자세를 의미한다고 바오로 사도께서는 말씀하신다.

우리에게 두려움이 있다면, 자기 자신을 이기지 못하여 하느님의 뜻을 어기지 않을까 두려운 것이다. 결국은 자기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이길 수 있다면, 거기에 따르는 보상은 백 배의 보상이 될 것이며, 그것은 큰 ‘기쁨’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진정으로 우리가 부활을 잘 지내는 것은 진정으로 나 자신의 근본적인 변화를 통해서, 나 자신이 주님 안에 다시 태어나는 삶이 될 때 부활을 잘 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자신을 이기기 위한 부단한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때, 우리는 부활을 체험할 수 있고, 그 ‘기쁨’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기도하도록 하자. “주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조욱현 신부
  | 05.31
448 36%
주님께서 사랑하는 수원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의 기쁨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의 가정에 충만하기를 빕니다.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2) 그리스도 친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요한 11,25-26)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모든 이에게 ‘희망’의 원천이 되십니다.3) 그리고 이 희망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희망의 보증인 부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 믿음을 두고 희망을 걸었던 이들에게 나타나시어 ‘당신이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마르 9,31)이라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덤 앞에서 형언할 수 없는 깊은 슬픔과 절망에 젖어 울고 서 있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가장 먼저 다가가, 다정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시며 당신 부활을 그녀에게 확증해 주셨습니다(요한 20,11-16 참조). 또한 예수님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실 분이라고 기대했다가 그분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침통해하며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에게도 다가가시어 그들의 희망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말씀과 성찬을 통해 일깨워주셨습니다(루카 24,13-35 참조). 토마스 사도는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 말속에는 주님께서 부활하여 나타나주시기만 한다면 믿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기에, 예수님은 토마스의 희망도 저버리지 않으시고 그 앞에서 당신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마음이 부서진 이들에게 가까이 계시고 넋이 짓밟힌 이들을 구원해 주십니다(시편34,19; 119,116 참조).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이사 42,3 참조) 주님께서는 당신께 믿음을 둔 모든 이의 희망을 성취해주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는 희망으로 구원받았습니다(로마 8,24 참조). ‘이 희망은 닻과 같아서 우리의 영혼을 안전하고 든든하게 보호해주며 하늘 성전의 지성소, 곧 영원한 생명에까지 들어가게 해줍니다’(히브 6,19 참조).

절망의 슬픔과 탄식으로 가득한 세상

그럼에도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은 절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깊이 드리워져 있어 사회 곳곳에서 슬픔과 탄식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빈부격차가 갈수록 심화되어 중산층에서 저소득층으로 추락한 이들의 고통과 불행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해져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계파의 논리를 앞세워 자신들의 이권에만 열중하는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며 국민들은 더욱 큰 실망과 비탄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혼란 속에서 불투명한 미래에 직면한 젊은이들이 결혼을 포기하거나 회피하는 현상이 증가하고 있고, 기혼자들에게서도 출산을 기피하는 현상이 날로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자연스럽게 경제활동 인구의 감소와 고령화 사회 진입이라는 위기의식을 더욱 부추기고 있습니다. 게다가 10년 연속 자살률 1위, 청소년 사망률 1위, 노인 자살률 1위(OECD Health Data2014)라는 최근 통계가 말해주듯이, 우리나라 국민들은 모든 세대에 걸쳐 심각한 절망과 좌절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곧 1주기를 맞는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95명의 소중한 생명이 목숨을 잃고 9명이 실종된 이 엄청난 참사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탐욕과 이기심, 불신과 생명경시 풍조를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사고 후 1년이 다되도록 아직도 이렇다 할 참사의 진실을 밝히지 못한 채 손을 놓고 있고, 희생자 가족들과 시민들은 절망의 슬픔으로 탄식하며 아파하고 있습니다. 마치도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여주는 표징처럼 지금 세월호는 온 국민의 희망과 함께 진도 앞바다의 밑바닥 어두운 곳에 침몰해 있습니다.

언제나 신뢰의 대상은 주님

이러한 우리에게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상황이 바뀌지 않으리라 생각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을 물리치셨고 전능하신 분이심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4)고 용기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전을 기념하는 오늘, 우리는 다시 한 번 쳐진 어깨에 힘을 주어야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모든 세력을 이겨내고 부활하심으로써 희망의 빛이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대한 무한한 신뢰로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높이 올리시고 우리의주님이 되게 하셨습니다(필리 2,8-11 참조).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이라 고백하며 그분께 모든 신뢰와 희망을 두는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습니다(2코린 4,8-9 참조). 우리는 믿는 이들의 구원자이신 살아계신 하느님께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1티모 4,10 참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로마 10,13)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우리는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을 향해 걸어오신 사건을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련과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던 제자들을 진정시키시려고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당신이 참으로 ‘주님’이심을 믿게 하시려고 거센 바람이 이는 호수 위를 베드로에게 걸어오라고 허락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만을 믿고 바라보며 풍랑이 이는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에 몸이 흔들리자 그만 두려운 나머지 바다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가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마태 14,30)라고 청하자, 주님은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아 주심으로써 믿음으로 청하는 이의 간절한 마음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가리옷 사람 유다는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죄책감과 절망에 사로잡혀 차마 주님께 손을 내밀지 못했습니다. 그분께 희망을 두지 않아 스스로 죽음과 멸망의 길을 걸어가고 만 것입니다(마태27,4-5 참조). 이처럼 주님께 신뢰와 희망을 두지 않는 것이 곧 멸망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앞에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이 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의 인도에 따라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히브 12,2). 아무리 거센 두려움의 파도와 절망의 폭풍이 불어 닥쳐도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만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께서 항상 우리 곁에 계십니다(요한 16,33참조). 그분은 고통과 절망 중에 있는 사람을 홀로 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히브 13,5). 죄와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바라봅시다. 그러면 우리 모두는 얼굴에 기쁨이 넘치고 부끄러움이 사라질 것입니다(시편 34,6 참조).

“평화의 모후이시며 하늘의 모후님, 기뻐하소서. 알렐루야!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나이다. 알렐루야!”

2015년 부활절에
수원교구장
이용훈 마티아 주교
  | 04.04
448 36%
[수원]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 소통과 참여로 쇄신하는 수원교구!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이!

사랑하는 수원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 자비의 특별 희년에 맞이하는 부활의 기쁨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의 가정에 충만하기를 빕니다.

1. 하느님 자비의 절정인 그리스도의 부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느님 자비의 절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죄의 종살이에 억눌려 고생하고 죽음의 두려움에 신음하는 인간을 그 근원에서부터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로마 6,6; 8,2 참조).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죄와 죽음의 멍에 때문에 힘겨워하는 인간을 차마 두고 보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당신 친히 사람이 되시어 그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임을 당하셨으며 몸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써 온 인류에게 구원과 해방을 가져다주셨습니다. 여기에는 아무런 조건도 대가도 필요치 않았습니다. 오로지 당신의 성심에서 흘러나오는 자비의 열정만이 가득할 뿐이었습니다(에제 39,25 참조).

오늘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환호하며 노래합니다.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그리스도 부활하심 저희 굳게 믿사오니, 승리하신 임금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가 얼마나 놀라운지 찬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부활로 이제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고통도 울부짖음도 눈물도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묵시 21,4 참조).

2. 자비로운 본성을 저버린 인간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시며 숨을 불어 넣으시어 우리 안에 당신의 자비로운 본성을 담아주셨습니다(창세 1,26; 2,7 참조). 하지만 악에 물든 인간은 그 본성을 저버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만을 무한히 누리려는 교만에 빠졌습니다. 이 교만은 자신 이외의 모든 피조물을 빼앗고 파괴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께서는 선임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지금 우리가 저지르고 있는 악에 대해서 경고하셨습니다. “우리는 ‘인간에게 자신을 만드는 자유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 ‘인간에게는 정신과 의지뿐 아니라 본성도 있습니다.’ … ‘우리 자신이 최종 결정을 내리고 모든 것을 그저 우리의 소유물로 여겨 우리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피조물이 손상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 우리 자신 이외에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면 피조물의 착취가 시작됩니다.”

인간이 피조물을 착취하는 행태는 이미 그 도를 넘어섰습니다. 자연 환경의 훼손은 물론이고 사회 환경 역시 심각한 손상을 입었습니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내면 안에 담겨 있는 자비로운 본성을 도외시한 채 그저 욕망과 의지의 자유만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로 세상은 하느님 창조의 목적과는 반대로 살기 힘든 곳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자비로운 눈길과 평화로운 인사를 기쁨으로 맞이한다는 것조차 사치로 여길 만큼 우리가 처한 삶의 자리는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3. 자비의 활동을 통해 다시 살아나는 자비로운 본성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께서는 하느님 자비의 특별 희년을 선포하시면서 우리에게 특별히 자비의 육체적이고 영적인 활동을 실천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들에게 마실 것을 주며,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고, 나그네들을 따뜻이 맞아 주며, 병든 이들을 돌보아 주고, 감옥에 있는 이들을 찾아가 주며, 죽은 이들을 묻어 주는 것입니다. 또한 … 의심하는 이들에게 조언하고, 모르는 이들에게 가르쳐 주며, 죄인들을 꾸짖고,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며, 우리를 모욕한 자들을 용서해 주고,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을 인내로이 견디며,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비의 활동은 자비로운 본성을 일깨웁니다. 먼저 본성을 깨달은 뒤에 실천에 옮기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본성을 깨닫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자비의 활동을 뒤로하고 자비로운 본성만을 깨닫고자 한다면 이는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짓이고 교만입니다. 실천이 없는 믿음이 있을 수 없듯이(야고 2,20 참조), 실천이 없는 깨달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주님의 부활로 보여주신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본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자비의 활동을 통한 실천이 반드시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실천은 반드시 구체적이고 직접적이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남과 북의 정치적 대결과 갈등으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양상은 국제적 분쟁으로까지 확대되어 가고 있습니다. 또한 이 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는 전쟁과 폭력으로 굶주리고 아파하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자비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자비의 활동은 이 나라와 온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고, 굶주리고 아파하는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가진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수원교구에서는 특별히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한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지역의 여러 나라에 16명의 사제를 파견하여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봉사자들이 이들 사제를 도와 주님의 자비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가진 것을 나누는 자비의 실천을 통해 수많은 생명이 굶주림과 고통에서 구원되어 부활의 기쁨을 누리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4. 자비로운 마음으로 특별히 기억해야 할 아픔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이 축제의 시기에 특별히 우리는 재작년 4월 16일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월호 참사로 인하여 유가족의 시계(時計)는 아직도 2014년 4월 16일에 멈춰 있습니다. 이미 해가 두 번이나 바뀌었는데도 참사의 상처는 아물지 않고 자꾸 덧나기만 합니다. 자비롭지 못한 세상은 이미 오래전에 등을 돌려버렸습니다. 그나마 관심을 갖고 함께 아픔을 나누던 이들도 하나 둘 떠나갑니다. 그리고 지쳐갑니다. 그러나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는 하느님’(이사 40,28)께서는 이 자리에 당신 자비의 손길을 펼치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곧 세월호 참사 2주기를 맞이합니다. 함께 기억하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위로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비를 베푸는 바로 그 자리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기쁨으로 우리를 맞아주실 것입니다.

하느님 자비로우심의 절정인 예수님 부활의 은총이 교구민들과 선의의 모든 이에게 가득히 머물기를 빕니다.

지극히 자애로우신 어머니,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 : 2016년 3월 27일
  | 03.26
448 36%
저의 첫 기억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죽음입니다. 살면서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 ‘삶’보다는 ‘죽음’이 먼저였습니다. 그 이후로 어렸을 때부터 나도 언젠간 죽는다는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초등학교 때 세례를 받고 성당에 다니면서 죽음의 공포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믿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치 순교자나 된 듯, 믿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이긴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도 행복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돈도 많이 벌고, 예쁜 여자와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도 꾸리고 싶었습니다. 물론 신앙이 첫째가 되지 않으면 절대 행복할 수 없음은 이미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런 목표로 경영학을 전공하며 대학 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저의 삶을 바꾸었던 책 한 권이 있었는데, 바로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애벌레 하나가 경쟁 사회에 뛰어들었고, 거기에서 여자 애벌레와 사랑에 빠집니다. 얼마 뒤 남자 애벌레는 다시 경쟁 사회로 뛰어들었고 여자 애벌레는 남아서 누에고치가 됩니다. 남자 애벌레는 거의 정상까지 올라갔고 경쟁 사회의 끝은 ‘허무’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일단 그것을 알게 된 이상 자신이 한 수고가 아까워서라도 다시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나비 한 마리가 자신에게 다가옵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사랑스러운 촉촉한 눈빛, 애벌레는 무엇인가 깨달아 세상을 등지고 경쟁 사회에서 내려옵니다. 그리고 자신의 여자 친구가 벗어놓은 누에고치 옆에 자신의 누에고치를 만듭니다. 어느 달 밝은 밤에 애벌레는 나비로 다시 태어납니다. 옆에 기다리고 있던 사랑하는 나비와 둘은 이제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를 깨닫게 해 주었던 책입니다. 저는 애벌레처럼 내 자신이 바라는 것을 포기하고 죽지 않으면 결국 ‘허무’만을 만나게 될 것 같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은 때는 한참 대학의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있을 무렵이었고 동시에 마음 안에서 사제가 되고 싶은 생각도 일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저는 그 쓸 대 없는 생각을 누르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였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고생해서 대학 등록금 내주시는 부모님과 주위의 예쁜 여자들을 생각하며 지워버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사제가 되고 싶은 생각이 더 강하게 밀려들었고 저는 그것이 주님께서 부르시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사제의 생활이 자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뭐 하나 부족한 것 없이 계획대로 잘되어 가는데 왜 불러주시는지 원망스러웠습니다. 혼자 살면서 절대 행복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외로워서 나중에 더 여자들을 찾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기 싫었고 일 년 동안을 주님의 부르심에 거부하고 반항하였습니다. 반항하면서 내 자신이 더 안 좋은 쪽으로 가고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어느 순간에 그냥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말이 쉽지만 그 결정은 지금까지 가지고 살아왔던 나의 신념과 모든 확신을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니 조금 행복해지는 것 같기는 했지만 사실 신학교 생활을 하는 것보다 밖에 나와서 술 마시고 사람들 만나는 것이 더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기도의 맛을 알게 되었고 기도 안에서 얻어지는 에너지는 세상이 주는 행복과는 비교할 수 없게 사뭇 다른 것임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행복이 어디에서 오는지 모르게 저를 채워갔습니다. 행복을 찾아 헤맸기에 그 행복은 저의 결정에 한 번도 후회를 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대학교 들어가서 느꼈던 행복은 고등학교 때와 비교해서 행복했던 것이었지 참 행복은 아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은 저에게 참 행복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체험한 가장 큰 부활 입니다.

죽음과 부활은, 마치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다가 사람을 잡는 어부가 된 것처럼 존재와 삶과 그 가치에 커다란 변화를 주게 됩니다. 마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 자신들도 죽어야만 변화된 삶으로의 다시 태어남, 즉 부활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자신의 뜻을 죽이고 주님의 뜻을 따를 때 성령님이 오셔서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죽임으로써 얻게 되는 성령의 은총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바로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미리 보여졌습니다. 즉,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으로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었는데도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세례란 물속에 자신의 죄를 남겨놓고 깨끗한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는 이미 완전한 하느님이 아들이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거부하는 세례자 요한을 설득시켜 세례를 받습니다. 즉, 이유 없이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하늘에서 성령님이 내려오셨습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죽이신 아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 성령님을 받으신 예수님은 비로소 참 하느님의 아들이 되십니다. 아버지는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하시며 처음으로 당신의 음성으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아들임을 선포하십니다. 자신을 죽였기 때문에 성령님을 주신 것이고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 되신 것입니다.

아버지는 예수님의 세례에서 보여졌던 그대로 실제로 아들에게 고통을 받고 죽을 것을 원하십니다. 아들은 이번에는 조금 저항해 봅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당신 뜻을 버리고 아버지 뜻을 따르기로 결심하십니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희랍어 원본의 의미로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셨다는 말을 직역하면 ‘당신의 영을 보내셨다.’입니다. 당신의 영이란 바로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생명이십니다.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생명의 성령님을 다시 아버지께로 돌려보내신 것입니다. 아버지께로 ‘생명’을 보내셨으니 당신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신 이후에 생명이 없는 상태였지만 비로소 아들에게 그 생명을 받음으로써 다시 생명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생명의 성령님을 당신 혼자 차지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다시 생명의 성령님을 보내시고 죽음의 골짜기에 있던 아들은 그 성령님을 받아들입니다. 그럼으로써 다시 살아나십니다. 이것이 부활인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은 끊임없이 이렇게 서로 주고받으며, 가난해지고 부자가 되며, 죽고 사는 것을 반복하시며 성령님 안에서 한 몸이 되시는 것입니다. 죽어야 산다는 것은 이렇게 이미 삼위일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현실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자신을 죽이지 못하여 끝까지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여기며 하느님의 말씀을 선별해가며 따르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완전히 죽이지 못하기 때문에 그 부활의 행복도 완전하게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시리아 장군 나아만이 나옵니다. 나아만은 나병에 걸렸고 집에 있는 이스라엘 여종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의 예언자를 찾아갑니다. 우여곡절 끝에 엘리사 예언자의 집에 다다릅니다. 엘리사는 문 밖에서 기다리는 나아만에게 요르단강에서 몸을 일곱 번 씻으면 나병이 나을 것이라고 합니다. 나아만은 울화가 치밀어서 그냥 가려합니다.

“내 생각에는 적어도 그가 나에게 나와서 자기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부분을 손으로 만져 이 문둥병을 고쳐 주려니 했다. 이럴 수가 있느냐? 다마스커스에는 이스라엘의 어떤 강물보다도 더 좋은 아바나강과 발바르강이 있다. 여기에서 된다면, 거기에 가서 씻어도 깨끗해 지지 않겠느냐?”

나아만은 크게 노하여 발길을 옮겨 집으로 돌아가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하들이 막아서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만일 이 예언자가 더 어려운 일을 장군께 시켰더라면 장군께서는 그 일을 분명히 하셨을 것입니다. 그는 장군께 몸이나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는데 그것쯤 못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이에 설득을 당한 나아만은 요르단강에 일곱 번 자신의 몸을 담그면서 자아를 깨끗이 씻어 버립니다. 그랬더니 정말 나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이것이 자신의 뜻을 죽임으로써 얻는 부활의 기쁨입니다.

천주교는 죽음을 너무 강조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죽음이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어쩌면 자신의 뜻을 버리고 죽은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거저주시는 선물입니다. 따라서 부활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고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죽음은 내가 그 은총을 받기 위해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만약 끝까지 자신의 뜻을 고집하고 꺾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의 부활은 평생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축하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도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지 않는다면 기뻐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 부활로 기뻐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할 수 있음’으로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2016년 3월 27일
  |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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