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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부활신앙으로 무장하자.
조회수 | 2,184
작성일 | 09.04.01
예수님은 세상의 역사를 두 쪽으로 가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이 오시기 이전의 시대를 B.C.(BEFORE CHRIST)라 하고 이후의 시대를 A.D.(ANNO DOMINE:주님의 해)라 합니다. 그것은 역사 뿐만이 아닙니다. 인류의 삶 전체를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위대한 힘이 바로 당신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새로운 탄생입니다. 그분이 부활하심으로 인해 세상은 진정 다시 태어났으며 모순과 악의 세계에서 진리와 은총의 세계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인류는 실로 새로운 시대에 들어선 것이며 어둠과 모순 속에 묻혔던 세상의 수수께끼들은 다 풀리게 되었습 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세상은 사실 모순에 빠져 있었습니다. 왜 착한 이들이 자주 고통 을 받으며 왜 악한 이들이 자주 떵떵거리는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더구나 인생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몰랐으며 '죽음' 이라는 무서운 세력 앞에서 인류는 참으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죽음으로 모든 것이 다 무너졌으며 세상의 어떤 생명도 이두려운 존재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죽음은 실로 세상의 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이와 같은 세상의 모순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친히 죽음 속으로 들어가시어 그 세력을 꺾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죽음은 이제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세계를 여는 은총의 문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당신의 부활로써 세상을 건지셨습니다. 죽음에서 건지셨고 죄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신앙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일행이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갔을 때 예수의 시체는 없고 천사가 거기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는 질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 천사가 말합니다. "겁내지 말라.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다." 그러나 여자들은 무서워 벌벌 떨면서 무덤 밖으로 나와 도망쳤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도대체 사흘 동안 완전히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났다니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온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고 인류를 깜짝 놀라게 했던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사도 베드로가 백성들에게 예수의 부활과 그의 놀라운 행적에 대한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본래 그는 무식하고 믿음이 약했던 자였습니다. 그는 사회 교육을 제대로 받은 자도 아니었고 예수님 밑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쌓은 자도 아니었습니다.

더더구나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도 아니었으며 자기 사상을 논리적으로 전개시킬 수 있는 수준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무식한 베드로가 놀라운 감화력을 가지고 백성에게 전도하며 그들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부활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제자들의 증언을 믿고 우리도 그 놀라운 사건을 바로 내 것으로 받아들여 삶에 실천함으로써 세상에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전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부활의 삶이요 또한 의무요 책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이미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믿어도 어정쩡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성당에 다녀도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고 갈등과 착각 속에서 고민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부활 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이 없는 자들은 오로지 현실 만을 중요시합니다. 지금 당장 잘먹고 잘사는 것에 축복의 기준을 맞춥니다. 그러니까 믿음 속에서 회의만을 갖게 됩니다. 신앙이 그렇게 된다면 비극입니다.

어떤 형제가 세례받은 지 5년이 되었으나 거의 냉담 상태에서 살았습니다. 주일 미사 참례는 물론 기도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신앙을 성가시게만 생각했습니다. 이 친구가 한번은 자기 동료가 암으로 죽는 것을 보고는 크게 느낀 바가 있어서 아주 열심하게 되었는데 연도회에 들어가서 봉사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삶에 은혜가 충만하게 되어 새 인생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친구의 죽음을 통해서 부활신앙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부활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나날이 체험해야 할 우리의 과제입니다. 그리고 그 삶의 개선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활을 미리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은혜 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신앙을 세상에 증거 하도록 합시다. 어떤 처지에서도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신앙의 기쁨을 가지고 삽시다. 예수님이 바로 여러분 안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2000년 가톨릭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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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20, 1-9. 사도 10, 34. 37-43

예수 부활 대축일입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고 제자들이 믿기 시작한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절망하여 각자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간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으면, 제자들이 다시 모여서 부활하여 살아 계신 예수님을 선포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인류 역사 안에 나타났다, 사라진 그 많은 생명들과 같이 예수님도 죽음과 더불어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졌을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갔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서가 어둡다고 말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마음이 지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물지 않게 하려고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다.”(12,46). 요한복음서는 이렇게 빛이라는 주제를 사용합니다.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그것이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이 부활하여 사람들의 빛으로 계신다는 사실을 아직 모를 때에 무덤에 갔습니다.

이 여인은 무덤의 돌이 이미 치워진 것을 보고 예수님이 무덤 안에 계시지 않는다고 직감하였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렸고, 사도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가’ 함께 무덤으로 달음질쳐 갑니다. 무덤을 향한 달음질에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가 더 빠릅니다. 그는 베드로보다 먼저 도착하였지만, 베드로를 기다려 주는 여유를 보입니다. 베드로가 무덤에 들어가고, 뒤따라 들어간 그 제자는 보고 즉시 믿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기 위해 예수님이 아끼셨던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 무덤을 발견한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가 베드로와 함께 무덤에 가서 그 사실을 확인하였다고 말합니다. 두 제자가 함께 가서 빈 무덤을 확인하였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먼저 믿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였습니다. 빈 무덤 이야기는 예수님에 대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죽음 전까지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분 죽음의 자리는 빈 무덤, 곧 비어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그분의 죽음에서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살아 계실 때, 그분과 접촉하고 그분이 사랑하셨던 사람들에게서 신앙이 발생하였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지상의 삶으로 환생한 기적이 아닙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분을 죽였습니다. 그들은 시편이 말하는 대로, 그분을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23,4)로 보낸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분을 당신 안에 살려 놓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들은 사도행전은 베드로 사도가 이방인들에게 설교한 내용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이 사흘이라고 말할 때는 72시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결정적인 날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이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예수님을 당신 안에 결정적으로 살아 있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지만, 그분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고 사셨기에, 하느님은 그분을 당신 안에 살아 있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의 설교는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셨고...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린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에게 성령을 주셔서 좋은 일, 살리는 일을 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숨결로 모험을 감행하셨습니다. 권위주의로 경직된 유대교 사회에서 예수님은 그 조직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으셨습니다. 율법과 성전을 절대시하는 사회였지만, 예수님에게 절대적인 것은 하느님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선하고, 고치고 살리시는 분이라, 예수님은 그분의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신 이유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생명을 받아 그 생명을 살듯이 예수님은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습니다. 오늘 베드로가 말하듯이 그분은 두루 다니며 선한 일, 살리는 하느님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인은 예수님이 살아서 행하신 하느님의 선한 일을 자기도 실천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자유롭게 당신의 일을 실천하며 살 것을 원하십니다. 자유롭게 살라고 주신 생명입니다. 율법에 얽매이고, 성전의 권위에 순종하며 살라는 우리의 생명이 아닙니다. 우리는 돈에 얽매이고, 우리의 명예욕과 허례허식에 짓눌려 삽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으로부터 성령과 능력을 받아 악마에게 짓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는, 오늘 베드로의 말씀은 사람을 짓누르는 것에서 사람들을 해방하셨다는 뜻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 무덤을 발견하고, 베드로가 그 사실을 확인하였으며,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는 보고 믿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우리의 빛으로 삼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확인된 사실이지만, 그 무덤은 비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신앙인의 길을 배우라는 말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이 많이 발생하여 많은 사람들 안에 그분의 삶이 관찰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많이 발생할 것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성전으로 요약되는 그 시대 유대교의 관행에 얽매이지 않고, 유대교 지도자들의 권위에 순종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실천하고 악마에게 짓눌린 이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부활은 예수님을 배워서 하느님의 선하심과 하느님이 주시는 해방을 자유롭게 실천하라고 초대하는 축일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을 배웁니다. 예수님이 자유롭게 하신 실천을 배웁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우리의 삶이 어떤 실천을 과제로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자기 스스로를 높여 허세를 부리거나, 남을 짓누르면서 죽음을 발생시키지 않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 하신 선한 실천, 고치고 살리는 실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실천 안에 자기가 해야 할 바를 읽어냅니다. 그런 신앙인 안에 부활하신 그리스도 살아 계십니다. 신앙인은 그런 실천으로 하느님이 선하고 살리신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실천 안에 그분이 살아 계신다는 말입니다.

바실리오
  | 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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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뛰어넘는 우리의 깨달음

1년에 부활절이 한 번 있는 것은 한 해에 한 번이라도 부활의식을 일깨우라는 의미일 것이다.

‘‘나’라는
이 완고한 돌문을 열리게 하옵시고
당신의 음성이 불길이 되어 저를 태워 주십시오’

박목월(1916~1978)시인의 시 ‘부활절 아침의 기도’중 한 구절이다.

부활절이 되면 그 많은 시구 중에 이 구절이 기도문처럼 떠오른다.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자신을 여는 일로 출발해서 삶의 온갖 장애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삶의 너름새와 자유를 체험하기 위해 힘차게 앞으로 나가는 것이리라.

자신에 묶여 남을 보지 못하는 삶은 좁고 닫힌 공간의 폐쇄적 고립이다. 그러면 부딪힘이 없어도 상처를 받는다. 현대인들의 상처는 고립의 상처에서 병을 키우는 일이 많다. 그래서 삶이 위협당할 때, 우울과 좌절에 시달릴 때, 실망과 체념이 엄습할 때 부활의식이 필요하다고 신학자들은 말한다. 그것이 나를 이기고 무덤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내면의 경직을 깨치고 새로운 삶으로 가는 것이다. 가능성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자신의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하는 무서운 이기심의 인간적 아집은 늘 투쟁과 단절을 불러 왔다. 박목월 시인도 부활절 아침에 가장 괴로워한 문제가 이기심이었는지 모른다. 완고한 돌문처럼 자기 안에 갇힌 우리들, ‘나’ 이외의 존재는 인정할 수 없는 모습들, 어디서나 자신만을 우뚝 세워야 성깔이 차는 행동이 마치 현대적이고 세련된 삶의 방법으로 생각하는 오늘의 현실을 시인은 가슴으로 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해인가 예수부활대축일 아침, 미주가 부활계란을 바구니에 담아 집으로 찾아왔다. 몇 해 전 졸업한 그는 수업 중에 느닷없이 울어버려 친해진 사이다.

“부활절이 다시 돌아왔구나!”

미주는 밝아 보였다. 졸업반 시절, 그는 ‘시에 나타난 가족의식’에 대한 수업 중에 질문을 받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결국 연구실로 불러 미주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오빠는 아버지의 아들이고 자기는 어머니의 딸이라고 했다. 집안에는 늘 충돌의 파도가 넘실거렸다. 미주는 새 아버지와 오빠, 어머니까지 한패고, 자기만 유독 혼자라고 느꼈던 것이다. 어느 날 혼자 집에 있다가 우연히 어머니의 일기를 봤고, 내친김에 아버지의 일기장도 고의적으로 보게 됐다.

미주는 놀랐다. 새 아버지도 자신이 혼자라서 외롭다는 표현이 많았고, 어머니는 사막에 혼자 있는 느낌이라고 적혀있던 것이다.

“선생님도 혼자라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아세요?”

아마도 미주의 눈에는 선생이 늘 화려하고, 사랑이 넘치게 사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나는 ‘혼자’라는 말에 너무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부글거렸지만, 그 상황에서 무슨 고백이나 연설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이듬해 부활절. 미주는 카드 한 장과 부활계란을 가지고 왔다. 그의 카드에는 “‘혼자’라는 느낌을 트고, ‘함께’라는 의식으로 끌어 올리니 부활이 왔습니다”라고 적혀있었다. 나는 하마터면 미주에게 “선생님!”이라고 부를 뻔 했다. 부활의식은 종교적 의미를 뛰어 넘어 가장 자신이 하기 힘든 벽을 허물고 새로운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종교적으로 해석해 볼 때, 부활은 우리 삶의 가난하고 복잡함을 이겨내고 저마다의 무너진 현실에서 눈을 뜨는 정신적 일어섬을 뜻한다. 즉, 복구의식이다. 그런 새로운 변화야말로 나를 부수고 우리라는 공동체로 이끌어 올리는 힘, 그것이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부활의 힘이다. 생활 속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저마다의 작은 인내도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일이며, 그것은 곧 부활에 한발자국 다가서는 일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부활은 그렇게 무겁고 거대한 것만은 아니다. “이리오렴.” 우는 아이를 거리에서 안아주는 일, “미안해.”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어 말하는 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몸을 움직여 먼저 손 내미는 사소한 일 등 부활은 ‘작은 마음’에서부터 눈을 뜨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부활의 힘’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모든 것이 얼어붙는 겨울이 아닌, 생명이 꽃피는 계절에 찾아온다는 것은 많은 상징을 담고 있는 일이다. 박목월 시인처럼 완고한 돌문을 열고 나와 그분의 목소리로 나의 자만과 이기심을 불태워 버린 화형식이 우리들 마음속에도 조용히 부활사랑으로 타오르기를 빈다.

신달자 문학가
가톨릭신문 2009-04-12
  | 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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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봄이고
하루 중 아침
아침 일곱 시
진주 같은 이슬 언덕 따라 맺히고
종달새는 창공을 난다.
달팽이는 가시나무 위에
하느님은 하늘에
이 세상 모든 것이 평화롭다.

로버트 브라우닝, <아침의 노래>

장영희 선생님 글에서 이 시를 발견하고는 이런 평화는 어떤 때 찾아올까 상상했는데, 부활 복음을 읽다 보니 이 구절이 떠올라 옮겨 적습니다. <피파가 지나간다>라는 극시에 등장하는 이 노래는, 베니스의 어느 실크 공장에서 일하는 가난한 소녀가 일 년에 한 번 있는 휴가 날 아침에 부른 노래랍니다. 줄거리를 모르더라도 한껏 희망과 기대에 부푼 봄날 아침의 전경이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가난한 소녀가 맞이한 들뜬 휴가 날 아침의 설렘이 한편 서글프기도 합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1절) 주간 첫날은 안식일 다음 날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보내드리고 맞이한 막달레나의 아침 또한 특별합니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다음 날 아침의 고요, 겪을 거 다 겪고 포기할 거 다 포기하고 난 뒤의 평화로움, 긴 설움과 울부짖음 다음의 후련함 같은 것이 막달레나의 아침에서도 느껴집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은 빈 무덤으로 시작합니다. 이 장면은 매우 간결하면서도 신비투성이입니다. 오늘 말씀 어디에도 예수님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공관복음과 달리 막달레나가 왜 무덤에 갔는지는 아무 설명이 없습니다. 별다른 볼일이 있어서가 아니었다면 예수님을 잃은 슬픔 때문이었겠지요. 한 번이라도 더 그토록 사랑했던 예수님 곁에 있고 싶었을 겁니다.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경비병들이 무덤을 지키고 있었다고 하는데(마태 28,4 참조),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용감했습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는 것만 보고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달려가 예수님 시신을 도둑맞았다고 전합니다(1­-2절).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2절) 주님을 찾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이 구구절절 묻어납니다.

서둘러 달려온 베드로와 사랑받는 제자가 무덤이 비어 있음을 확인합니다. 베드로와 애제자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오는 모습은 요한복음 특유의 전승에 속합니다. 학자들은 초대 교회에서 그들의 갈등 상황을 미루어 짐작합니다.

베드로의 권위를 존중하되 은연중에 애제자의 비중을 강조한 표가 납니다(8절 ‘보고 믿었다.’).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6­-7절) 예수님은 죽음의 흔적인 아마포와 수건을 벗고 무덤을 나오셨습니다. 시신을 도둑을 맞았다면 함께 통째로 없어졌을 것입니다. 한쪽에 얌전히 개켜져 있기까지 합니다. 이런 정황이 예수님의 부활을 입증하기에 충분하건만 제자들은 시신이 없어진 것에만 골몰합니다. 그들이 찾고자 한 것은 돌아가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9절).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사라진 시신에만 연연해할 수밖에요. 돌아가신 사실만으로도 참담한데 시신마저 잃어버렸으니 예수님 앞에 얼마나 면목이 없었을까요. 절망과 두려움에 휩싸인 제자들은 터덕터덕 집으로 돌아갔습니다(10절). 그들의 신앙은 아직 불완전한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깨우칠 것이 더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무덤에 계시지 않습니다. 더 이상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계시지 않습니다. 무덤에 붙잡아 둘 수 없는 분이십니다. 돌을 치우고는 자유로워지셨습니다. 빈 무덤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텅 빈 충만! 썩은 육체가 아닌 부활하신 예수님의 체취로 충만한 무덤입니다. 무덤이 다시 살아나는 장소로 바뀌었습니다. 이젠 무덤으로 달려갈 필요가 없습니다. 돌을 치우고 무덤에서 나오신 예수님이 직접 제자들을 찾아 나서실 것입니다.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에겐 적극적입니다. 최선을 다합니다. 막달레나의 사랑이 얼마나 애틋한지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장면에 여러 번 등장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가장 먼저 달려간 막달레나는 예수님 부활의 첫 순간을 체험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끝까지 지킨 것이 여인들이었으니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하는 은총 역시 그들에게 돌아갑니다. 본디 여인에게는 증언할 자격이 없었지만 엄연히 부활의 첫 목격 증인은 그녀의 몫입니다. 그러나 아직 빈 무덤 앞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예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2절) 막달레나의 주간 첫날 아침은 무덤을 비우신 예수님의 부활 향기로 어지럽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아직 짐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피파라는 소녀는 그 마을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네 사람의 창 밑을 지나면서 그들의 삶을 동경하며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일로 자신의 귀한 하루를 소요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저마다 극심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오히려 피파의 노래에 위로를 받아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답니다.

날이 저물어 피파는 자신이 네 사람의 영혼을 구한 줄도 모른 채 고달픈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드는 것으로 이 글은 끝납니다. 피파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네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걸로 일 년에 단 하루뿐인 휴가를 멋지게 보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부른 첫 노래가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달팽이는 가시나무 위에, 하느님은 하늘에….’ 가난한 그 소녀처럼 평온한 부활 아침을 맞습니다. 우리의 부활 노래가 누군가의 영혼을 구할 수 있기를 빕니다.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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