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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부활의 증인이 되십시오!
조회수 | 2,484
작성일 | 09.04.01
세상의 누구보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나 뵙게 되는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마태 16,9)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왜 열 두 제자들을 제쳐 두고 가장 먼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겠습니까? 누구보다도 예수님으로부터 많이 사랑받고 많이 용서받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언제나 어디서나 더 많이 그분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십자가 아래서도(요한 19,25), 무덤 앞에서도(요한 20,1) 항상 제자들보다 더 가까이 예수님과 함께 했을 정도로 예수님을 많이 사랑했습니다. 복음말씀의 표현대로 "매우 이른 아침"(마르 16,2), "아직도 어두울 때에"(요한 20,1)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것도 예수님께 대한 이런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깊은 사랑이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나도록 이끌어주었던 것입니다. 끝까지 신뢰하고 끝까지 사랑한 마리아에게 하느님께서 몸소 응답해주신 선물이 바로 '주님 부활의 첫 증인'이 되도록 해주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는 지난 사순시기 동안 각자 나름대로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에 보다 더 깊이 동참하려고 함께 노력하였습니다. 부족하고 죄 많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고 있는지도 스스로 느끼고 체험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하느님께서 몸소 우리 각자에게 허락하신 주님 부활의 기쁨은 더욱 각별합니다. 주님께서 오늘 죽음의 무덤을 열고 생명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봄비가 땅에서 새싹을 틔우듯이 주님 부활의 은총이 온 누리를 생명으로 가득 채웁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주님 부활의 체험은 개인적인 차원을 뛰어 넘습니다. 자기 자신의 주님 부활의 체험을 제자들에게도 전하라는 사명을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이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요한 20,17-18)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부활의 신비를 제자들에게 전한 사람은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 그리고 마리아 막달레나를 통해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주님의 부활을 전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고 말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의 부활체험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이웃 안에서, 자연의 놀라운 신비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뵈올 수 있어야 하고 또한 그렇게 만나고 체험한 주님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 뿐만 아니라 당신 제자들에게도 직접 나타나셔서 그들의 믿음을 북돋우시고 용기를 주시며 그들을 당신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에 관한 베드로의 증언에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사도 10,40-41)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부활의 증인으로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셨듯이 지금 우리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20,21)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올해 우리 안동교구의 사목방향은 <지역선교와 복음화>입니다. 우리는 각자가 처한 자기 자리에서 이를 실천하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지역선교와 복음화>를 통해 우리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보다도 세상에 기쁨과 희망을 전하는 일입니다. 특별히 부활의 기쁨과 희망을 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농민, 노동자들을 비롯한 우리 서민들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보다 심화된 빈부간의 양극화현상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심한 박탈감에 빠져 있습니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여러 좋지 않은 조건 속에서 살아가기가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세상이지만, 우리가 사랑으로 서로를 위해주고 작은 것이라도 서로 나누면서 새로운 삶의 기쁨과 희망을 서로에게 심어 줄 수만 있다면 우리는 함께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활의 기쁨과 희망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나서서 세상에 기쁨과 희망을 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이 추구하는 경쟁과 능률과 성취라는 가치에 매몰되지 말고 경쟁보다는 나눔과 희생과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세상에 기쁨과 희망을 심는 사람들이 됩시다. 부활의 기쁨과 희망을 이웃에게 전하는 부활의 증인이 됩시다.

이날은 주님께서 만드신 날, 우리 기뻐하며 즐거워하세.(시편 118,24)

2006년 권혁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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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갈릴래아

“이 날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날, 이 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 이 밤은 우리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여 부활하신 밤입니다.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합시다. 이 좋고 기쁜 날에, 오늘 복음에서 젊은이가 전한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서 뵙게 될 것입니다.’(마르16,7)라는 말씀에 대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 시며 공생활을 시작하신 곳도 갈릴래아이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라는 곳도 역시 갈릴래아입니다. 성경을 써신 분들은 왜 갈릴래아를 이렇게 중요하게 생각했을까요? 갈릴래아에 가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의 변방 갈릴래아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물질하여 생계를 꾸려가던 어촌입니다. 손이 부르트도록 일한, 땀이 스며있는 고통과 고난의 땅이기도 합니다. 희비애락을 서로 나누며, 울기도 하고 웃기도한, 사람 사는 평범한 곳입니다. 정치, 경제, 문화, 종교, 사회의 중심지가 아닌 보통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갈릴래아는 갈매기가 물위를 나르고, 배 몇 척이 떠있는 호숫가 마을입니다. 하나 그곳은 하느님께서 주신 기름진 땅입니다. 가진 바는 적지만 서로 나누고 섬기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평화롭고 인정이 많은 마을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곳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다고 하셨고,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곳에서 만났습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오늘날의 갈릴래아는 어디 이겠습니까? 바로 우리 삶의 현장이 갈릴래아입니다. 트랙터로 논밭을 갈다가 잠시 쉬면서 새참을 먹는 논두렁이, 손자 손녀의 신발을 사기 위해 흥정을 하는 옷가게가, 모처럼 만난 친구와 지난날의 삶을 나누는 선술집이 갈릴래아 일 수 있습니다. 주일날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 드리기 위해 모인 성당이, 국민의 복지와 안녕을 논의하기 위해 모인 국회의사당이, 본당의 성화와 발전을 위한 좋은 의견을 모으는 사목회원들이 모인 곳이, 가족들의 건강과 성화를 위해 저녁기도를 바치는 신자들의 집이 갈릴래아 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오늘날의 갈릴래아는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입니다. 사람들이 기쁨과 슬픔, 실망과 희망을 나누는 바로 그곳이 갈릴래아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이곳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곳, 갈릴래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현실이 어렵다하여 실망하지 않습니다. 좌절하지 않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죄와 잘못됨의 극치인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의 원천인 주님 부활을 믿기에 희망을 가집니다. 우리는 희망의 사람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삶의 현장인 갈릴래아가 있는 한 희망이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28,10)

김영필 바오로 신부
  | 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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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 25)

“부활이요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어둠의 굴레를 벗기시고 죽음의 무덤을 비우신 그곳에 그분의 빛과 생명이 충만합니다. 그 빛과 생명으로 온 누리가 새롭게 됩니다.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이것이 우리가 이미 받은 주님 부활의 은총입니다. 이것이 또한 오늘 주님 부활 대축일에 우리 모두가 함께 누리게 되는 주님 부활의 새로운 축복입니다. 주님께서 몸소 우리에게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부활하신 그분을 믿으면 지금부터 그 축복을 얻어 누리게 될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오셨다.’(요한 10,10 참조)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말씀이 뜻하는 바 그 내용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요한 6,33) 되셨으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생명을 주는 쪼개진 빵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사랑의 성사 88항)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주님 부활의 기쁨을 선포하고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된다.’고 할 때, 우리는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생명을 나눈다.’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세상에 생명을 주는 쪼개진 빵”이 되어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진정으로 ‘생명을 나눈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서 부활하신 그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 부활의 은총과 축복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범세계적인 경제위기로 수많은 사람들이 생활의 어려움을 겪고 있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고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거리에 나앉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생계유지가 어려워 굶주림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자리를 구하기는 점점 더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은 다시 일어설 용기조차 가지지 못하고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신빈곤층의 양산은 사회적 안전망까지 위협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경제위기의 여파가 어디까지 갈지 짐작하기조차 어려운 지경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이제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 곧 나의 일이 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현재 경제위기의 원인을 개인의 탐욕과 국가적인 이기주의로 진단하고 있습니다. 위기극복은 그 원인처방에서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이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개인의 탐욕과 국가적인 이기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함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함께 그 방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개인적으로든 국가적으로든, 전문적이든 비전문적이든 여러 가지 다양한 정책과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원칙은 ‘서로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슬픔은 나눌수록 적어지고 기쁨은 나눌수록 커진다고 했습니다. 이 평범한 진리를 우리들이 ‘생명을 나누는 원칙’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생명은 하나이며 유기적으로 서로 관계를 이루면서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나누면 나눌수록 풍요롭게 되고 충만하게 되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생명의 샘”(시편 42,3)이신 창조주 하느님께서 모든 생명체의 구원을 위해서 사랑으로 배려하시고 섭리하신 생명의 질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가 구원되고 우리의 생명이 넘치도록 충만하게 되는 구원의 신비도 여기서 비롯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몸소 우리의 “부활이요 생명”이 되시는 이유인 것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믿는 형제자매 여러분, 온갖 죄의 원인이 되는 이기적인 탐욕에서 우리 자신을 멀리 합시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살리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놓으신 주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나눕시다. 그리하여 모두가 주님의 부활의 은총과 축복을 누리도록 함께 기도하고 노력합시다. 경제위기 때문에 생활의 어려움을 겪으며 생명의 위협까지 받고 있는 이웃이 있다면 그들과 근심과 걱정, 슬픔과 고통, 가난과 불편을 함께 나누며 그들에게 진정한 위로와 사랑과 희망을 전합시다. 어떠한 이유로든 인간다운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이웃이 있다면 그들이 겪는 편견과 차별, 억압과 멸시, 박해와 생명위협의 고통까지 함께 나눌 각오로 그들이 인간 생명의 존엄을 정당하게 누릴 수 있도록 도와줍시다. 그리고 성장과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자연환경을 오염시키거나 대자연의 질서를 함부로 파괴하는 개인이나 단체가 있다면 그들의 범죄를 일깨우고 그들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의 질서를 지키고 보존하는 일에 함께 동참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줍시다. 이러한 모든 일들을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생명을 나누는’ 일들이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의 증인들인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함께 이루어야 할 일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일들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부활의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생명의 기운은 나눌수록 풍요로워집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나누면 나눌수록 부활의 기쁨과 생명의 풍요로움은 그만큼 넘치고 또 충만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 부활의 은총과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이 서로 사랑하고 함께 나누는 그곳에 넘치도록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합니다.

2009년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안동교구장
권혁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 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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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기쁨, 희망, 평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온갖 어둠을 몰아내시고 죽음을 이긴 구원과 사랑의 승리자로 오늘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무덤을 막았던 육중한 돌들을 밀쳐내시며 새로운 생명의 길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를 물리치시고 부활의 새 아침을 여셨습니다. 너무나 부당하고 억울하게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무너져버린 듯했던 처참하고 절망적이고 어두웠던 그곳에서 찬란한 광채의 부활한 생명이 움터 나오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과 사랑의 놀라운 승리입니다. 우리는 이 엄청난 구원과 사랑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통과 아픔과 슬픔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참 기쁨을, 절망과 좌절로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참 희망을, 미움과 분노와 원한의 상처로 서로 갈등하며 갈라져 있는 사람들에게 참 평화를 주시는 부활하신 그분께 우리는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고통과 아픔과 슬픔 중에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신적 육체적 질병에서 오는 고통과 아픔, 생활고로 인한 갖가지 시련과 환난, 혼자서는 도저히 견디어 내기 힘든 인간적인 온갖 두려움과 근심, 걱정 등으로 슬픔 중에 있는 이웃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당신의 사랑 안에 초대하시고 우리에게도 그들과 함께 사랑을 나누도록 사랑의 계명을 주셨는데, 그 이유는 당신의 기쁨이 이들과 우리 안에 충만하게 하려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5,11 참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모든 고통과 아픔과 슬픔을 당신이 대신 짊어지고 가셨습니다. 우리들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가심으로써 고통과 아픔과 슬픔 대신 아무도 빼앗지 못할 부활의 기쁨, 참 기쁨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요한 3,16) 죽음보다도 강한 이런 사랑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났으며 이 세상에도 드러났습니다. 우리가 이제 고통과 아픔과 슬픔 중에 있는 사람들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함께 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부활의 기쁨을 세상에 드러내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될 것입니다. 고통과 아픔과 슬픔에서 참 기쁨으로 건너가게 하는 것, 이것이 우리 부활의 증인들이 해야 할 일이 될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사람들은 좌절하기 쉽고 절망의 늪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살아갈 보람은커녕 살아갈 이유조차 찾지 못하고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회적 경제적 양극화 현상의 심화로 많은 사람들이 상대적 박탈감에 젖어 실의에 빠져 있고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지난 3월 15일자로 발효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서민들의 이런 삶은 더욱 더 심화될 것입니다. 특히 지역 농민들의 삶이 더욱 어려워질 것입니다. 실제로 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방법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고 찾아봐야 할 것입니다. 물질적인 차원의 지원뿐만 아니라 교회 차원의 영적인 도움도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보이는 것만을 두고 희망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어떠한 경우에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릴 줄 알며 현세의 여러 어려움도 잘 극복할 줄 압니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희망이시고(에페 2,12 참조)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1베드 1,3 참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이런 부활의 희망을 세상에 전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음으로써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바꾸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절망과 좌절이 있는 그곳에 참 희망을 심어야 할 것입니다.

양극화 현상과 함께 사회적 갈등도 심각합니다. 남‧북 분단으로 고착된 이념 갈등도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들을 푸는 데 앞장서야 할 정부와 정치권은 오히려 갈등을 부추기고 조장하기까지 하는 인상을 주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올해는 총선과 대선이 함께 있는 해라서 이런 갈등의 골은 더 깊어져 서로가 주고받는 상처가 더 커지지는 않을지 염려됩니다. 평화롭기만 하던 제주 강정 마을이 미움과 분노로 가득 찬 갈등의 공동체가 되어버리는 작금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사회적 갈등의 결과가 얼마나 가슴 아프고 불행한 일인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첫 말씀은 평화를 기원하는 인사였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6) 제자들을 참 평화를 전하는 사도로 세상에 파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참 평화란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우리의 평화가 되십니다.(에페 2,14) 그 평화는 그분께서 스스로 몸을 바쳐 이루신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갈라서고 등을 돌린 양쪽을 당신의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서로 간의 적개심을 없애신 평화이기 때문입니다.(에페 2,16 참조)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이런 평화를 이루려고 한다면 강정 마을의 평화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의 큰 기쁨과 희망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빕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교회는 이러한 부활의 선물들을 세상에 전하도록 여러분들을 파견합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 예수님, 어두운 무덤을 막았던 그 육중한 돌들을 모두 치우시고 부활의 찬란한 새 아침을 여신 그분께서 친히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012년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안동교구장
권혁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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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을 희망하며

알렐루야! 주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모두 함께 기뻐합시다. 이날은 주께서 부활하시어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신 날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밤. 더 이상 밤은 어둠의 세력이 힘을 쓰는 시간이 아닙니다. 주께서 죽음에서 다시 일으켜지시어 이 밤을 환히 비추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빛이 온 세상을 비추니 우리는 걸려 넘어질 두려움 없이 마음놓고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탈출하기 전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습니다. 어린양의 희생으로 그들은 죽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처럼 주님의 피로 물든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죽음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새로운 백성으로 태어나기 위해 홍해바다 속을 지나가야 했습니다. 이집트에서의 삶을 떨쳐버려야 했습니다. 그처럼 죄를 지은 이들도 물 속에 잠겼다 올라옴으로써 옛 죄를 씻고 새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부활하신 이 밤에 세례성사를 베푸는 것이 가장 적합합니다. 또 이미 세례를 받은 신자들은 세례 서약을 갱신함으로써 과거의 삶을 씻어버리고 새로이 살 것을 다짐합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을 밟기 위해 광야에서 40년 간 정화의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부활을 위해 회개와 절제로 사순시기를 뜻 깊게 보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삶을 닮은 만큼 부활의 희망도 더욱 커집니다.

주님은 항상 살아 계십니다. 사람들 눈엔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돌아가시어 영광스럽게 되신 것입니다. 복음에서 천사가 여인들에게 말합니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마르 16,6) 죽음은 그분에게 일시적일 뿐 영원한 것이 못됩니다. 하지만 아직 여인들은 주님을 죽어 있는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무덤에서 찾으려 했지만 살아계신 주님이 무덤 속에 계실 리는 없습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까? 과연 생명의 주님을 찾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살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죽음과 죽임의 문화를 과감히 끊어야 합니다. 때론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 생활하던 이집트에서의 삶을 그리워하듯 회개하기 전의 삶으로 돌아가고픈 유혹도 강하게 들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회개하며 살아계신 주님,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 앞서 갈릴래아로 가신다고 합니다. 그곳은 전도활동의 주무대이자 제자들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즉, 부활은 무덤이나 다른 세상에서 체험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이 곳, 이 시간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이들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미운 사람이 안 보이는 곳이 천국이 아니라 미운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곳이 천국이요, 그것이 정말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부활입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내어놓고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시어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부활의 영광에 들어오기를 바라시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처럼 부활할 것을 희망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청하며 힘차게 걸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손성문 사도 요한 신부
  |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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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님 달님의 부활이야기

'햇님 달님' 이야기를 잘 아실 겁니다. 마실에 품팔러 나갔던 어머니가 돌아오는 길에 호랑이를 만납니다. 호랑이는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고 꼬셔서 어머니를 잡아먹고나서 아이들까지 잡아먹으려 하다가 결국 죽음을 당한다는 옛날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어보면 예수님을 몰랐던 우리 조상들이었지만 자신들의 삶 안에서 부활의 의미는 깨닫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남정네 없이 아이들 셋을 먹여 살리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겁니다. 젊은 나이에 홀로 되어 남의 집에 품팔며 사는 여인네의 심정은 짐작하고도 남을 겁니다. 호랑이가 어머니를 잡아 먹었다는 것은 어머니가 곧 호랑이로 변한 것입니다. 어머니 마음속에 쌓인 한이 호랑이로 둔갑한 것이지요. 결국 그 호랑이가 자신의 아이들까지 잡아먹으려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어른이 다 되어도 자식을 편하게 놓아주지 않는 호랑이 같은 어머니,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를 우리는 흔히 보지 않습니까.

아이들은 호랑이를 피해서 나무로 올라갑니다. 나무에 올라간 아이들은 땅에 있을 때와는 달라졌습니다. 맨날 어머니가 품팔아서 가져다주는 양식에만 의존해야되는 수동적인 아이들이었는데 이제는 호랑이라는 무시무시한 동물과 대적하면서 온갖 꾀를 낼 줄 아는 훨씬 성숙한 아이들이 되었습니다. 결국 자신들의 꾀에도 한계가 있어서 하늘에 도움을 청합니다. 그리고는 온 누리를 비추는 햇님 달님이 되지요. 호랑이는 수수밭에 떨어져서 죽고요.

아이들이 온 누리를 비추는 햇님 달님으로 '부활'하는데 도움을 준 것은 호랑이와 나무였습니다. 먼저 호랑이를 볼까요. 호랑이는 곧 어머니(혹은 아버지)입니다. 호랑이가 죽지 않으면 아이들이 부활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른이 다 되어서도 부모님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완전히 떨쳐 내지를 못합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 분노 등 부모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이 호랑이가 되어 늘 나를 쫓아다닙니다. 그 호랑이가 죽어야 아이는 햇님 달님으로 부활하여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아이들이 나무에 올라갔다는 것도 참 재미가 있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동양이나 서양이나 나무는 '생명과 성장'을 상징합니다. 또한 땅과 하늘을 연결시켜주는 역할도 하구요. 나무는 사람이 새롭게 태어나는 곳입니다. 아이들은 나무에 올라갔기 때문에 하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나무에 달리셨기 때문에 온 인류를 비추어 주는 구세주로 부활하실 수 있었습니다.

호랑이가 아이들을 잡아먹는 부모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지만 나무 역시 부모의 모습입니다. 호랑이는 내가 극복하고 떨쳐 버려야할 부정적인 부모의 모습이지만 나무는 부모님과 화해하고 난 뒤에 맑은 눈으로 바라보는 부모님의 모습입니다. 부모님에 대한 나의 사랑과 애정이 새롭게 솟아나는 부모님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작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 이야기의 형태로 두고두고 오늘날까지 내려왔을 테지요. 하지만 그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햇님 달님 이야기는 전해주고 있습니다. 조상들 중에 누군가는 햇님 달님으로 부활하는 체험을 했기 때문에 자신의 지혜를 후손에게 전해 주었겠지요.

옛날 이야기 속에서 부활의 의미를 찾아보고자 했던 것은 결코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를 축소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나의 삶 속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는 것을 조상들의 지혜를 빌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햇님 달님 이야기에서 눈여겨 봐야할 것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호랑이도 죽어야 하고, 나무에도 올라가는 인간적인 노력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이 번 부활은 동아줄 잡고 햇님 달님되는 체험들을 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김기환 요셉 신부
  |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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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기쁨

"이 날이 주님께서 마련하신 날, 이 날을 기뻐하라, 춤들을 추자." 주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예수 부활 대축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새벽, 예수께서는 죄와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나와 세상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자비로우신 사랑의 응답으로 부활시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죽기까지 하느님과 사람을 사랑하셨고, 철저하게 섬기신 분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라면,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신 분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 곧, 하느님의 뜻에 따르고 순종하는 삶과 철저하게 자신을 버리고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삶은 헛되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기초요 뿌리이며, 핵심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믿음도 사랑도 봉사도 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도 허무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아울러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역시 부활하리라는 믿음과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신자들에게 있어 구원과 생명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큰 은총의 선물입니다. 날마다 구원과 은총의 잔치인 미사에 초대된 우리는 참 복된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 주일이기에 우리는 매주일 미사에 참례하면서 주님의 부활을 경축해야 합니다. 부활 성야를 고요와 침묵, 기도와 기쁨 속에 지내는 형제 자매 여러분! 부활의 신비를 잘 드러내는 예절이 빛의 예식입니다. 성당에 불을 끄고 어둠 속에 부활초에 불을 붙이면서 "영광스러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빛은 저희 마음과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소서."라고 기도한 후, "그리스도 우리의 빛" 하면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응답하는데 이 때의 감격을 돌이켜보십시오. 빛의 예식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세상의 빛이라는 사실을 잘 드러내 줍니다. 교회는 세례성사와 장례미사를 집전할 때 부활초를 밝히면서 주님 부활과 구원의 신비를 드러냅니다.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는 빛의 아들 딸입니다. 우리는 죄와 죽음의 세력인 어둠을 몰아내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망의 빛을 밝혀야 합니다. 가난과 질병, 좌절과 실의에 빠져 있는 모든 이들에게 구원과 희망의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밤 부활 찬송에서 "이 밤은 하늘과 땅이 결합된 밤, 하느님과 인간이 결합된 밤! 불기둥의 빛으로써 죄악의 어둠 몰아낸 밤, 오 기묘하도다.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 오 헤아릴 길 없는 주님 사랑! 죄를 용서하고 허물 씻으며, 도로 준다. 죄인에게 결백, 우는 이에게 기쁨, 미움 없애고 화목 이룬 이 밤, 은총 가득히 내리는 이 밤!"이라고 노래하며 기도합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마지막으로 오늘 복음을 묵상해 봅시다. "무서워하지 마라. 너희는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를 찾고 있으나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다. 전에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 나셨다. 그분이 누우셨던 곳을 와서 보아라. 그리고 빨리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께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고 당신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거기에서 그분을 뵙게 될 것이오 하고 알려라. 나는 이 말을 전하러 왔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총으로 부활의 새 삶을 살도록 합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 믿음과 희망의 기쁜 소식을 이웃에게 전합시다. 구원의 은총과 생명을 이웃에게 전하여 신자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빛의 아들 딸로 살아갑시다. 주님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시기 바랍니다.

오성백 요아킴 신부
  |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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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주님의 부활을 축하합니다. 주님 부활의 은총이 모든 교우들에게 충만히 내리시고, 언제 어디서나 삶의 위로와 용기, 기쁨과 희망이 되어 주시길 기도드립니다.

세상 구원을 위해 인간이 되신 하느님께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밤입니다. 이 밤은 하느님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을 이겨낸 부활이 한 목소리로 이 세상에 새로운 희망을 선포하는 은총의 밤입니다. 하느님의 죽음, 인간의 죽음, 그리고 부활…, 과연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19세기에 있어서는 <신은 죽었다>라는 것이 문제였으나, 20세기에서는 <인간이 죽었다>라는 것이 문제다.” 물질주의, 개인주의, 과학만능주의, 기계문명…. 인간은 자기들을 하느님을 뛰어넘는 초인(超人)의 자리에 앉히기 위해 신을 죽이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부는 정말 ‘신은 죽었다’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신을 죽인 이후의 역사는 불행하게도 그들이 의도한대로 흘러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을 인간 이상의 모습으로 꾸며내기 위해 부득불 신을 죽일 수밖에 없었는지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그 결과는 인간 자신의 죽음으로 되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인간이 죽어가고 있는 현실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죽었다”라는 그 사실이 현대 세계가 앓고 있는 갖가지 문제들의 원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종종 인간이 과연 ‘하느님 보시기에 매우 좋은’ 모습으로 창조된 존재가 맞는 것인지 의심까지 하게 만들 정도로 인간성이 파괴되어 가고 있음을 경험합니다. 경제라는 말 앞에 어떠한 가치관도 명함을 내 밀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정신세계는 황폐해져 가고 있습니다. 소중한 목숨을 살상하거나, 인간의 생명을 지켜주는 자연세계도 아무 거리낌 없이 파괴하는 극단적인 이기심은 이제 너무 일상적인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인간은 더 이상 더불어 함께 살아야할 동반자가 아니라, 자기나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이용하고 짓밟을 수 있는 도구가 되어 버렸습니다. 신이 죽어버린 이 세상에서 인간은 자기들도 지금 그렇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우리 신앙인에게는 그러한 신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이 결코 절망적인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은 “죽어야 산다”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로마 6,8) 그렇기 때문에 신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이 공존하는 이 순간이 바로 새로운 삶의 첫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지금까지의 인간의 죽음은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죄의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죄 없이 죽임을 당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죽음과 하나 되는 죽음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을 살리기 위한, 그리고 죽어가는 인간성을 되살리기 위한 겸손과 희생, 나눔과 섬김의 죽음을 살아야 합니다. “그분께서 돌아가신 것은 죄와 관련하여 단 한 번 돌아가신 것이고, 그분께서 사시는 것은 하느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로마 6,10)라는 말씀처럼, 세례를 통해서 한 번 죽은 우리 역시 이제는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를 위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문득 바오로 사도의 권고 말씀 한마디가 기억납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1베드 3,15) 오늘 주님께서 보여주신 죽음과 부활의 길, 그리고 그 길을 함께 가자고 부르시는 그분의 초대, 그것이 바로 우리의 희망일 것입니다.

김종길 제오르지오 신부
  |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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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주님의 부활을 기뻐해야 할 이유

참으로 좋고 기쁜 날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밤 온 세상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을 힘차게 고백하며 노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부활의 기쁨이 신자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길 빕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교회가 아무리 부활을 기쁜소식으로 선포한다고 해도 우리들에게는 사실 그렇게 실감나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체험한 제자들의 생생하고 벅찬 기쁨을 우리가 어떻게 똑같이 느끼겠습니까? 어떻게 하더라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기쁨을 제자들과 동일하게 느낄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왜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모두에게 기쁜소식이 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스승 예수님이 잠시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 소생하신 것 때문에 교회가 예수님의 부활을 노래하고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나자로의 소생과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인류가 지금까지 아무도 보지 못했고 짐작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 예수님을 통하여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의 부활이 제자들 뿐 아니라 모든 믿는 이들, 나아가 전 인류에게 왜 놀라운 선물인 것인지 함께 묵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이 인간에게 참으로 유익한 선물이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써 인간이 영원히 행복하게 살 길이 마련되었다는 점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써 인간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대체가 불가능했던 영원한 하느님 세계로 나가는 일을 가능하게 해주셨습니다. 하느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영원한 통로를 열어주신 날이기 때문에 오늘 이 부활축일은 인간 모두가 함께 축하하고 기뻐해야 하는 날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의 역사가 악의 승리가 아니라 선의 승리, 하느님의 승리로 끝나게 되어있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사건이 됩니다. 종교지도자들과 정치인들이 결탁하여 진리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일 때만해도 그들이 옳은 것처럼 생각되었고, 그들이 승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부활시키심으로써 예수님을 처형한 사람들이 잘못되었고 예수님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세상 역사가 악의 승리가 아니라 선의 승리 곧 하느님의 승리로 끝나게 되어있다는 사실은 미리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미리 아는 것은 우리를 든든하게 해주며 악과의 싸움에서 지치지 않는 희망을 갖도록 해 줍니다. 예수님 부활을 통해 이런 확신을 갖게 되었으니 오늘은 기쁜 날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세상에서 가르치신 모든 것이 참된 진리라는 것을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가르치고 약속하신 모든 것은 분명한 진리가 됩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믿고 당신이 가르치신 대로 사랑의 삶을 살면 반드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니,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누구나 예수님께 인생을 배우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살면 하느님께 인정받는 성공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덕분에 여기에 대해 분명한 확신을 얻게 되었으니 이날을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넷째,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께서 인간 삶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계시다는 확신을 갖게 해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손과 발 그리고 가슴에 상처를 가진 분으로 부활시키셨습니다. 곧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서 고통과 상처를 겪으신 분을 부활시키신 것입니다. 이는 인생살이에서 인간이 겪는 선과 사랑 그리고 정의를 위해 겪는 온갖 고통과 상처를 하느님께서 하나하나 기억하실 거라는 걸 보여줍니다. 더우기 예수님께서 최후의 심판에서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을 당신에게 해 준 것으로 여기시겠다’고 하신 분이시니 예수님의 부활은 나의 선한 노력, 기꺼이 지는 십자가, 이웃을 향한 봉사 모두를 하느님께서 기억하시고 갚아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할 수 밖에 없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이토록 좋은 선물이 인간에게 한꺼번에 주어지도록 해주는 고마운 하느님의 업적입니다. 이 좋은 날, 이 큰 기쁨을 형제자매들과 함께 나눕시다. 부활계란을 선물하는 것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을 함께 고백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더 좋은 선물은 달라진 나의 삶을 이웃에게 보여 주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용기를 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겠다.”라는 예수님의 약속을 가슴에 깊이 새기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아멘

<안동교구 김학록 안셀모 신부>
  |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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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부활의 힘

‘오늘 예수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온갖 어둠을 몰아내고 죽음을 이긴 사랑의 승리자로 오늘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모든 생명이 약동하는 이 봄의 계절에 단단한 대지와 아스팔트에 콘크리트까지 뚫고 올라오는 놀라운 생명력에 우리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생명이 거의 죽어가는 상태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로 쓰이는 소생(蘇生)이라는 말과 부활(復活)이라는 말은 전적으로 다른 뜻입니다. ‘소생’은 아직 그 생명의 씨앗이나 뿌리라는 근거가 있어서 죽어가던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지만 부활은 다릅니다.

부활은 완전히 소멸된 죽음에서 생명이 움터 나오듯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서 시작된 실로 새로운 사건, 새로운 창조, 새로운 탄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러합니다. 베드로가 증언하듯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사도 10,39-40 참조) 너무나 부당하고 억울하게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완전히 무너져버린 처참하고도 절망적인 어둠에서 찬란한 광채의 부활한 생명이 움터 나오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입니다. 이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도 다시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들에게 빛을,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새로운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부활하신 그분 안에서 우리도 함께 부활하리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신앙고백의 의미가 바로 그러한 뜻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그 의미를 더 확장시켜서 당신의 부활 신앙을 이렇게 피력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세상에 스며든 생명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죽은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 또다시 곳곳에 부활의 싹이 돋아납니다. 이는 막을 수 없는 힘입니다. 가끔 하느님께서 존재하지 않으신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여기저기에서 고질적인 불의와 사악함과 무관심과 잔인함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둠 속에서도 언제나 새로운 어떤 것이 생명의 싹을 틔우고 언젠가는 열매 맺는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폐허가 되어 버린 땅 위에 끈질기고도 강인한 생명이 솟아납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언제나 선이 다시 꽃피고 퍼져 나갈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날마다 아름다움이 새로 생겨나고 역사의 풍파를 거치며 변모됩니다. 가치들은 언제나 새로운 형태로 다시 나타나는 경향이 있고, 인간은 돌이킬 수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늘 다시 일어납니다. 이것이 부활의 힘이고 모든 복음 선포자는 그 힘의 도구입니다. …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곳에 이 새로운 세상의 싹을 틔웁니다. 그 싹은 잘려도 다시 자라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모르는 사이에 이미 이 역사에 면면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헛되이 부활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살아 있는 희망의 행렬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복음의 기쁨」 276, 278항)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으니 우리도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하는 삶 자체가 부활의 삶이 될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하는 곳곳에서 부활의 힘이 드러날 것입니다. 복음 선포의 핵심 내용은 바로 ‘부활 선포’입니다. 복음 선포자들, 곧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참 신앙인들은 바로 그 힘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활신조는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듯이’(요한 12,24 참조),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꺼이 씨앗이 되고 그 씨앗으로 생명의 싹을 틔웁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미워하고 죽음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처럼 자기 자신의 뜻보다는 먼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세상과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다하려 합니다. 하느님의 자리를 포기하고서라도 인간을 위해 인간이 되신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어 놓으려 합니다. 자기 자신을 박해하고 미워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며 용서하고 사랑하려 합니다. 항상 따뜻한 마음과 열린 마음으로 죄인들과 병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려 합니다. 상대방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과 용기와 힘을 주기 위해서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말 한 마디에도 신경을 씁니다. 이렇게 부활의 힘의 도구가 되는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결코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도우심으로 그렇게 한다고 믿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필리 4,13)’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꾸준히 말씀에 귀 기울이며 깨어 기도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자기 탓 없이 부활의 축복과 은총, 곧 부활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들, 억울하게 해고된 노동자들, 무분별한 수입개방 정책으로 갈수록 소외 되어가는 가난한 농민들, 온갖 생활고와 병고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소중한 자유를 박탈당한 채 억압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자기 탓 없이 주님 부활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죄 때문에 그들이 소외되고 착취당하고 고통 받고 권리를 빼앗긴 채 생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놀라운 힘이 여러분들을 감싸고 있습니다. 부활의 놀라운 힘이 여러분의 삶을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그 부활의 힘의 도구로 초대되었습니다. 아직 주님 부활의 혜택을 얻어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빛이 되라는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이미 주님 부활의 혜택을 넘칠 만큼 많이 받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나서서 부활의 빛을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활의 기쁨을 나누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감싸고 있는 부활의 힘을 용기 있게 드러내는 삶을 통해 예수님께서 헛되이 부활하지 않았음을 증거 하도록 합시다.

오늘 예수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2015년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안동교구장
권혁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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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오늘은 멋진 사랑과 신뢰의 축제를

“와 부활입니다… 아이고 좋다. 좋아. 좋아. 알렐루야…알레루야…알렐루야.”

이렇게 외치는 이유는 성주간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묵상과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았던 저의 생활에 대한 반성 때문입니다. 그중에서 저에게 가장 큰 압박은 믿었던 제자들에게 배신당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3년 정도를 함께 살아오면서 그 누구보다 깊은 관계를 맺은 운명 공동체였는데, 온 정성을 다하여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토론을 하며 그렇게 믿었던 그들이 배신을 한 것입니다. 남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욕을 먹어도 참고 견디며 살아온 그들이었습니다. 저 또한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세상의 유혹에 넘어지면서 예수님을 배반하였기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라는 소식은 저에게 사도들처럼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주기에 진정 기쁜 소식이 됩니다.

또 다른 의미로 부활 소식은 저를 짓누르던 성공이라는 무거운 돌멩이가 진리의 발견으로 하나의 깃털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축제를 세상 모든 분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기쁨의 축제를 저를 포함한 우리 민족 더 나아가서 세상의 모든 사람과 함께 하였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이런 기쁨을 함께 나누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일가요? 우선적으로는 아마도 세월호 사건의 희생자 유가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고 소식을 접하고 모든 사람이 무사히 구조되리라는 소식에 감사의 기도를 드렸는데, 우왕좌왕하다 잃어버린 우리 가족들의 얼굴과 마음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20여 년 이상 부모님과 선생님 그리고 정부의 정책을 믿고 취업을 열심히 준비한 젊은이들의 암담함은 어찌해야 하는가요? 떳떳함과 자존감으로 ‘그래 사나이라면 한번은 다녀와야지, 남들 다 하는 경험인데 나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군으로 떠난 젊은이가 싸늘한 시신으로, 살인자로, 정신병자로 분류되어 가족에게 되돌아왔을 때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요?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대만은 국민과 녹색공민행동연맹(GCAA)이 2025년 탈핵 국가의 목표를 이루고 있는데 우리만은 ‘안전하다’고 하면서 지구촌 가족들 대다수의 원의와 반대로 정책을 펴가니 과연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요? 신자본주의로 인하여 무한 경쟁에서 희생당하는 저임금 노동자와 어린이들의 눈물은 과연 누구에게 회개를 요청해야 하는가요?

이렇게 배신을 당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과 공동체에 진정 예수님의 부활소식이 전해졌으면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제자들과 여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들의 고정 관념과 욕망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고 방황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세상적인 욕망과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눈이 떠지고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세상에 사랑이신 하느님을 외치게 됩니다. 저는 간절한 마음으로 모든 이가 ‘경제 만능’의 착각에서 벗어나 진리와 사랑의 눈을 떠서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논어에 보면 자공(子貢)이 스승인 공자(孔子)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데 무엇이 가장 중요합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첫째는 먹는 것이고, 둘째는 국방이며, 셋째는 백성들의 신뢰”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자공이 다시 묻습니다. “그중에서 부득이 하나를 뺀다면 어떤 것입니까?” 공자는 “국방”이라고 대답하자 자공이 재차 “또 하나를 부득이 뺀다면 어떤 것을 먼저 빼야 합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먹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는 “백성들의 신뢰가 없으면 조직의 존립은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국민과 정부 그리고 서로 간의 신뢰가 우선이라고 강조합니다.

우리나라 정부와 국민은 서로를 신뢰하고 있는지? 평신도와 성직자는 서로를 존경하고 신뢰하는지요? 사회는 교회를 신뢰하는가요? 우리는 아직도 서로를 배신하는 수난과 고통의 시기를 살아가고 있는가? 개인과 단체 모두가 신뢰를 통하여 이기적인 욕망과 편견을 끊어버리고 진리와 사랑으로 멋진 부활을 맞이하는 멋진 축제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은 정성으로 마련된 음식과 함께 울며 웃으며 살아가는 본당 가족과 신뢰의 축제를 열겠습니다. 부활은 서로를 사랑하고 믿어주는 축제입니다.

<안동교구 박재식 신부>
  |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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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오, 참으로 복된 밤!

오, 참으로 복된 밤. 주님께서 부활하신 은총의 밤입니다. 이 밤은 “어찌하여 살아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루카 24,5-6)는 천사의 말대로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사슬을 끊으시고 무덤의 승리자로 부활하신 복된 밤입니다. 무덤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밝게 비추시는 샛별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찬송하는 이 밤, 우리는 무엇보다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활찬송에서 노래하는 그대로입니다. “오, 오묘하도다,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 오, 헤아릴 길 없는 주님 사랑! 종을 구원하시려 아들을 넘겨주신 사랑!” 하느님의 사랑은 아담이 지은 죄마저도 구세주를 얻기 위해 필요했던 과정으로, 복된 탓으로 승화시켜주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나약함, 죄스러움마저도 너그러이 품어주시고 구원의 도구로 삼아주는 분이시기에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끊어진 실을 다시 이어 묶으면 더 가까워지고 단단해진다는 말이 있듯이 아담의 죄, 인간의 욕망으로 단절되었던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다시 결합되었고 더욱 돈독해졌습니다. 그래서 이 밤은 하느님과 인간이 결합된 참으로 복된 밤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였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났으니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의 모범을 따라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악의 존재는 여전히 우리 곁에서 기회를 엿보고 인간의 나약한 본성을 건드리며 자극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떠나라, 하느님을 거슬러 달콤한 욕망을 따르라 부추길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악을 뿌리치기가 거의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앞서 악을 이기고 꺾어놓으신 예수님의 영과 빛을 받아 걸어간다면 악의 유혹을 이기고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로서 참된 인간의 길을 완성하신 주님의 길을 따라 걸어갑시다.

복된 부활의 밤을 보내는 오늘,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새생명으로 건너가신 예수님의 여정이 나와 교회의 여정이요 온 인류의 여정이 되기를 기도하며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에페 5,8)

▦ 안동교구 이형철 바오로 신부 : 2016년 3월 26일
  |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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