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대축일/명절강론

대축일/명절강론 코너 ( 대축일/명절 미사에 관련된 강론자료입니다... )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47 89.6%
[인천]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에게 부활의 기쁨이
조회수 | 2,428
작성일 | 09.04.01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축원합니다. 특히 고통 중에 주님의 부활을 맞이한 모든 분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충만하기를 빕니다.

오늘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죽음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1코린 15,55) 주님께서 쳐 이기신 것은 비단 죽음만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은 고통에 대한 기쁨의 승리이며, 불의에 대한 정의의 승리이며, 거짓에 대한 진리의 승리이며, 미움에 대한 사랑의 승리이며, 결국 절망에 대한 희망의 승리입니다.

I. 부활은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오늘 주님의 부활을 한껏 기뻐하고 찬미합시다. 주님의 부활은 바로 우리의 부활을 위한 보증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다”(요한 11,25).

그러므로 부활은 어떤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다시 불끈 일어서게 하는,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입니다. 부활은 현재 우리 각자가 지고 있는 십자가가 결코 결론이 아니요, 죽음이 결코 인생의 끝이 아님을 웅변으로 역설해 줍니다. 부활은 죄의 무거운 형량보다 주님의 자비로운 은총이 더 크고, 죽음에 대한 인간의 무능력보다 다시 살리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훨씬 크다는 사실을 입증해 줍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부활에 힘입어 우리는 우리의 부활을 꿈꾸며 사도 바오로와 함께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장차 우리에게 게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 8,18).

II. 오늘 신음하는 피조물들에게도

하지만, 오늘 우리는 이렇게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면서, 가슴 한편에 허전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슬프게도 이 시대에 많은 형제와 자매들이 지구촌 곳곳에서 부활의 축제에 동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로마 8,22). 지금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아픔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경제적으로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 현상이 점점 심해져 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한 계층간, 지역간, 이념간 갈등은 심각한 사회 분열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국제 자유무역협상으로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는 농어민들, 장기화 되고 있는 청년 실업, 비정규직 근로자의 증가 등, 도처에서 고통 받는 이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옵니다. 또한 우리의 자녀들이 여러 형태로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많은 자녀들이, 부모 이혼의 희생양들이 되고 있고, 혹은 컴퓨터 게임중독에 시달리고, 혹은 끔찍한 성폭행에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건강하지 못한 문화로 인해 우리의 미래가 함께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한반도의 생태계가 함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여러 형태의 환경 오염문제는 이제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중하지 않은 국책 건설사업, 무분별한 골프장 건설, 비양심적인 오폐물의 방류, 개발논리를 앞세운 간척 사업 등으로 우리의 산천이 심각하게 훼손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방 60년을 맞았지만 아직도 이산가족의 고통은 깊어만 가고, 통일의 그날은 멀어 보입니다. 아직도 북쪽 형제들은 가난과 기근, 인권착취 아래 허덕이고 있습니다. 나아가 세계 도처에서 전쟁의 후유증, 기근과 질병 등으로 온갖 생명체들이 ‘죽음의 박동’을 들으며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오늘, 우리는 특별히 이들 모두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그 곳이 어디이든, 어서 찾아가 주시도록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께서 이 시대에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부디 부활의 기쁨과 평화를 나누어주시기를 간절하게 기도합시다.

III. 갈릴래아로 갑시다

부활하신 주님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는 전갈을 보내셨습니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 그러니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러라.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마르 16,6-7).

이는 십자가 사건으로 생긴 제자들의 낙심과 좌절을 치유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장장 3년간 공을 들이셨지만 제자들은 끝내 예수님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이해를 못하다가, 중간에는 오해를 하더니, 마침내는 주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제자들은 철저히 실패자였습니다. 그들의 낙심과 좌절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거의 공황상태였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치유하여, 새롭게 파견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갈릴래아에서 만나자고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갈릴래아는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처음 만난 곳이요, 첫 번째 신앙의 결단을 내렸던 곳이며, 첫 번째 비전이 움트던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서 “처음에 지녔던 사랑”(묵시2,4)을 되살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는 한 번 갈릴래아로 가고 그만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늘 갈릴래아로 가십니다. 우리가 실패자가 되어 낙향할 때 우리를 맞이하기 위하여 먼저 가 계십니다. 우리가 낙심과 두려움과 불안을 품고 패잔병처럼 고개를 떨구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 우리를 품으시기 위하여 우리보다 먼저 가 계십니다.

우리 모두 자신의 갈릴래아로 갑시다. 거기서 주님은 찬란한 부활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만남의 기쁨을 세상에 전합시다. 아직도 고통을 받으며 신음하는 우리 이웃에게 선포합시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 마침내 우리 모두의 입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해주셨던 바로 그 구원자이십니다”(사도 13,24 참조). 라고 고백합시다.

Ⅳ.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꾼

부활하신 예수님은 절망에서 희망을, 슬픔에서 기쁨을, 죽음에서 부활을 우리에게 선물하셨습니다. 영원한 삶의 희망은 현세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열쇠입니다. 이제 우리만이 기쁜 소식을 갖고 있을 수 없습니다. 인천교구는 올해의 사목 목표를 새 복음화에 두고 인구대비 12% 신자 배가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경축하는 오늘, 이 부활의 기쁨을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들에게 전하겠다는 결심을, 부활하신 주님께 선물로 봉헌하는 것은 어떨까요?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2006년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
447 89.6%
지난 목요일. 성유축성미사를 위해서 주교좌성당에 갔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 벚꽃이 활짝 펴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봄이 되니 꽃이 피는 것은 당연하겠지요.’라고 말씀하시겠지만, 제가 놀란 것은 아직도 꽃 필 때가 멀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갑곶성지가 가장 멋있다는 평가를 받을 때는 바로 벚꽃이 만발할 때랍니다. 하지만 도심에서는 활짝 펴 있는 벚꽃이 갑곶에서는 아직 피지 않은 채 몽우리만 볼 수 있으니, 제가 어떻게 만개를 한 벚꽃을 보면서 놀라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어제였어요. 기도를 하고서 성당 문을 나오는데 드디어 갑곶에서도 활짝 핀 벚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너도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렸니?’라는 혼자의 속삭임을 벚꽃 나무에게 하면서, ‘언제 저렇게 꽃을 활짝 피웠나?’라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언제나 꽃이 필까?’하면서 계속 벚나무를 보았지만, 계속해서 그 모습 그대로였거든요.

아무튼 저도 모르게 어느 순간 갑자기 꽃이 핀 벚나무를 보면서, 예수님의 부활도 우리들 모르게 갑자기 다가왔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2000년 전에 물론 제자들에게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예언을 미리 하시기는 했지만, 그 누구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지요. 그래서 제자들은 다락방에 숨었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슬픔 속에서 서로 힘들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부활하셨습니다. 그것도 마치 꽃이 언제 활짝 피었는지를 모르는 것처럼,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시간에 부활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몰래 부활하셨을까요?

이 점을 곰곰이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사랑과 우리 인간의 사랑이 다르기는 다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끝없이 배려하는 진실한 사랑이셨습니다. 그래서 배반하는 제자들이 심한 죄책감으로 힘들어할까봐 천천히 준비를 시키면서 가장 마지막으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지요. 하지만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만약 제가 예수님의 입장이라면, 부활 후에 ‘감히 나를 배반해?’하면서 제자들을 혼내야겠다고 가장 먼저 제자들 앞에 나타나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들 역시 사랑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그 사랑은 어쩌면 해코지 하는 사랑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나에게 잘하는 사람에게만 사랑을 주겠다고 하면서, 대신 나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는 사람에게는 해코지를 하겠다고 성큼성큼 그 앞으로 다가섰던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부활은 바로 사랑의 완성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 간직하고 있는 미움과 이기심을 없애 나갈 때, 우리 역시 주님의 부활인 사랑의 완성으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우리 역시 죄의 뿌리들에게 부활할 수 있기를 주님께 기도합니다.

조명연 신부
  | 04.11
447 89.6%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은 곧 우리들의 부활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르 16,6)는 이 기쁜 소식은 2000년 전이나 오늘이나 똑같은 기쁜 소식입니다. 위로의 소식입니다. 희망의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되살아나시어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계시며 힘과 위로를 주십니다. 도움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바다를 맨발로 건너는 기적을 체험한 뒤에 “주님을 찬양하세. 그지없이 높으신 분,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이시며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라고 노래했습니다. 노예살이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음을 감사하는 노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로 죽음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찬양하세, 그지없이 높으신 분, 나의 희망, 나의 힘이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소리 높여 찬양하세”라고 노래해야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경축하며 감사하고 기뻐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도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돼야 합니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사도 4.33)고 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언제 예수님을 체험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말씀을 들을 때”(루카 24,32 참조)와 ”빵을 뗄 때“(루가 24,30-31 참조)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함으로써 예수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또한 성체성사를 거행할 때마다, 우리가 영하는 성체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가 전하는 기쁜 소식은 힘을 잃고 맙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발걸음을 재촉하며 예루살렘으로 달려갔습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다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비신자들에게 달려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을 증오하며 박해하던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 말에서 떨어져 눈이 멀었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났기에 주님의 증인이 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체험해야 합니다(사도 9장 참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은, 그분이 가르치신 대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주님을 전하는 증거의 삶입니다. 사랑으로 무장하고 예수님처럼 남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살 때 주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세계적인 경제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많은 실직자들이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직장이 없어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하고 희망의 보루가 필요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흔들림 없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분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를 위로하시는 분이시고(마태 11,28 참조), 청하는 것을 얻고, 찾으면 얻고,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며 위로의 말씀을 주십니다(마태 7,7 참조). 지금 고통 중에 계신 여러분, 절대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게 되기 바랍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부활의 기쁨을 노래하면서도 인천교구 지역 내에서 시작되고 있는 경인운하를 걱정합니다. 인천교구 사제들이 기도회와 단식을 하고 있습니다. 교구장으로서 걱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이유는 이미 시화호의 거짓홍보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무지개빛 청사진을 내보이며, 청정호수를 만들어 자손만대에 길이 물려줄 귀한 보물이, 시화호라고 떠들던 사람들은 다 어디에 갔습니까? 시화호는 오염된 바닷물만 가득합니다.

경인운하에 대한 장밋빛 청사진은 마치 한강에서 시작되는 기적이 경인운하를 거쳐 중국까지 이어지는 것처럼 과대 포장되고 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걱정하고 있고, 재정부에서 나온 보고서를 보면 경인운하 시나리오 6개 중 경제성을 띠는 것은 1개뿐이라며 국토부의 과대 포장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한겨레 3.24일자 참조).

이 어려운 때에 신기루 같은 공약을 내세우며 천문학적 재정을 투입하기 보다는 현재의 방수로를 잘 정비하여 시민들의 편익을 제공하고, 경인운하에 투입될 재정을 지속 가능하고 국가의 미래를 살찌울 곳에 투입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대운하 사업입니다. 역사의 오점을 남겨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부활절을 기뻐하면서도 정부가 하는 사업들이 사리에 맞고 국민전체의 이익과 후손에게 길이 이익이 되도록, 신중하고 철저한 연구와 국민적공감대를 거친 뒤에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더욱이 정부가 힘 있는 자들의 편에 서있지 아니하고 국민전체, 특히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편에 서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며 정직한 정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올해의 부활절이 더욱 뜻 깊은 것은 김수환 추기경님의 서거를 통해 이 땅에 부활의 기쁜 소식이 널리 전파될 기반이 잘 성숙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의 가슴에 숨겨져 있던 사랑이 부활하여, 장기를 기증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랑의 실천소식이 충만합니다. 우리 모두 김수환 추기경께서 다져놓으신 예비선교의 바탕위에 부활의 기쁜 소식을, 비신자들에게 널리 전하는 데에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거창한 구호보다는 우리가 먼저 사랑을 실천할 때 부활의 기쁜 소식은 널리 전파될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 그리고 희망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2009년 04-12
주님 안에서, 천주교 인천교구
교구장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
  | 04.11
447 89.6%
부활을 증거(證據)하는 인생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시 118, 22)

혹시 여러분 중에 인생을 살아오면서 말 못할 실의와 절망에 빠져 그저 죽고 싶다는 생각에 밤낮 눈물로 지샌 적은 없습니까? 너무나 고통스러워 가슴을 쥐어뜯으며 삶을 저주한 적은 없는지요? 그런 괴로운 마음을 누가 알아주기라도 하던가요?

예수님의 부활은 이런 암흑의 긴 터널에 종지부를 찍는 빛의 대축제입니다.

시들시들 꺼져가던 인생사에 사랑의 빛을 받아 부활이라는 용광로에 뜨겁게 함께 한 분이 바로 오늘 복음서에 나타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마리아는 본래 일곱 마귀가 들린, 한마디로 온갖 악령이 들끓던 몹쓸 여자였습니다. 그녀는 너저분한 절망의 최하층에 자리한 인생 낙오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누구도 마리아만큼 고통스런 삶을 산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녀 역시 죽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을 만끽하는 여주인공으로 대변신합니다. 열두 사도들을 제치고 예수님을 가장 먼저 알아 본 “부활의 사도”로 등극합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것은 예수님 사랑의 치유제가 극적인 효험을 발휘한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극진한 배려로 절망의 늪에서 벗어난 마리아! 그녀는 저급한 인생살이에서나마 신주단지처럼 모셔놓았던 일금 천오백만원 이상(300데나리온) 가는 값진 향유를 ‘임 위해 머리카락을 뽑아 짚 세기라도 삼아준다’는 말처럼 예수님 발에 아낌없이 바르고 머릿결로 닦아드리면서 지극정성 예를 다합니다. 주님 사랑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확실히 보여주는 마리아의 작은 응답이라 할 것입니다. 사도들보다 먼저 주님의 마지막 여정을 눈치 챈 마리아는 그 분의 죽음 및 부활과 궤를 같이 하는 초자연적 영으로 무장되어 있던 터, 장례도 미리 치러 드립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던 날 새벽, 무시무시한 어둠을 가르며 군사들이 포진한 무덤을 찾는 일은 보통사람으로는 쉽지 않은 일, 그러나 마리아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두려움보다 컸기에 이 모든 일을 과감히 해냅니다.

주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지만 넋을 잃고 희미하게 인생을 이어가는 이들도 이승에서 당신 부활에 참여토록 인도하십니다. 오늘 이 축제일은 하느님 사랑이 결정적으로 나타나 인간을 완성으로 이끄는 역사의 유일무이한 날과도 같기에 그분께 의탁함으로써 밑바닥 인생은 고귀한 인격체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나의 삶이 지금껏 쓸모없는 돌처럼 보였다면 주님은 분명 오늘 남몰래 나를 들어다가 당신 나라의 귀한 보석으로 치장하여 쓰실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담벼락도 고기를 먹어야 하는 날! 고기를 먹지 못하니 가서 문지르기라도 해야 할 것입니다”(성 프란치스코).

김현태 루카 신부
  | 04.11
447 89.6%
2010년 교구장 부활절 메시지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루카 24, 5-6)

2010년 부활절을 맞아 부활하신 주님의 크신 축복과 은총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특히 병상에 있는 분들, 멀리 고향을 떠나 외롭게 사는 분들, 소외된 분들, 힘겹게 살아가는 분들이 주님의 부활을 기쁜 소식으로 맞이하기를 기원합니다. 나아가 연초부터 지구촌을 안타까움과 두려움으로 물들였던 아이티 및 칠레 참사의 희생자들에게 부활의 기쁨을 주시고 생존자들에게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큰 위로와 희망과 힘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부활이 오늘 유난히 더 반가운 것은 우리들 위에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 곧 ‘죽음의 문화’ 때문일 것입니다. 실로 환경재앙, 과중한 삶의 무게로 인한 자살의 급증, 인륜을 거스른 엽기적 범죄, 미혼모 낙태율의 급증 등 연일 보도되고 있는 전율할 소식들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그 바닥에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이 두려움이 인간의 탐욕이나 미움의 근저에 자리 잡고 있다고 심리학자들은 말하기도 합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죄로 인해 처해졌던 죽음의 운명을, 예수님께서 청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당신의 부활로 끝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제 새 희망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부활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분의 부활하심은 곧 우리의 부활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너무나 기쁜 날입니다. 너무나 감사한 날입니다. 알렐루야를 부르며 주님을 찬미하는 날입니다.

분명 초대 교회 최초의 복음 선포는 예수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증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루카 24, 5-6).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여인들이 들었던 전대미문의 이 부활소식은 이후 곧바로 사도들의 목격담으로 이어집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을 두 눈으로 확인한 이들로 베드로와 열두 사도(1코린 15, 5 참조)이외에도 오백 명이 넘는 사람들(1코린 15, 4-8 참조)이 있음을 성경은 신이 나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부활하시어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이 부활신앙이야말로 우리 신앙의 근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 14)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먼저 있었기에 우리는 부활 신앙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 25-26).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장차 우리 부활의 근원이며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이 부활의 기쁜 소식을 경축할 뿐 아니라 스스로가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부활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부활 신앙을 선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크게 보아서 ‘죽음의 문화’를 거슬러 ‘생명의 문화’를 퍼트리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즉, 온갖 유형의 불의에 저항하여 정의를 실현하는 구체적인 노력까지 아우르는 포괄적 소명인 것입니다. 올해 사순절을 맞으며 교황 베네딕도 16세께서는 정의에 대해 강조하셨습니다. “정의란 마땅히 각자에게 주어야 할 몫을 각자에게 주는 것이다.”라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통적인 개념을 거듭 확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정의를 실천하여 서로 돕고 사랑하며 존중하는 사회를 이루도록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불의로 고난 받는 사람들이 부활의 기쁜 소식을 듣고 힘을 얻어 이 세상을 넘어서는 더 큰 꿈을 갖도록 소망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꿈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활하리라는 꿈, 그것은 이 세상이 꿈꾸지 못하는 원대하고 아름다운 꿈입니다. 이러한 부푼 꿈을 우리만 간직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우리의 주변에 아직도 기쁜 소식을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힘차게 전해야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올 해의 부활절은 더욱 뜻깊습니다. 인천교구가 50주년을 맞이하는 데 마지막 점검을 하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지난 50년간 주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업적을 더듬어 보면서, 혹여 우리의 타성으로 인해 무덤 속에 묻혀버린 보화들은 없는지 성찰하고 또 우리 교회에 아직도 부활의 빛이 필요한 어둠의 지대는 없는지 둘러보는 기쁘고 희망이 넘치는 부활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부활하심이 교구민들과 모든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주님 안에서,
천주교 인천교구장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
  | 04.03
447 89.6%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 부활 시기를 맞아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미리 당신의 부활을 이렇게 예고하셨습니다.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나서 죽이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마르10, 33-34)

예수님께서는 예언하신 대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11, 25-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기 마련입니다. 집회서는 말합니다. “모든 사람의 고민과 마음의 두려움, 다가올 일에 대한 걱정, 그것은 바로 죽음의 날이다.”(40,2) 인간은 누구나 세상을 떠나겠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의 육신은 “영적인 몸”(1코린15, 44)으로, 영광스러운 몸과 형상으로 변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부활하여 영원히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집회서는 “죽음의 판결을 두려워하지 마라. 너보다 앞서 간 자들과 뒤에 올 자들을 기억하여라. 그것은 모든 생명체에 주어진 주님의 판결이다.……십 년을 살든 백 년을 살든 천 년을 살든 저승에서는 수명을 따질 필요가 없다.”(40,3-4참조)라고 위안을 줍니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닥칠 죽음, 그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인간에게 큰 희망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1베드1,3-4) 어디 그뿐입니까? 바오로 사도는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15,13-14)라며 우리가 언젠가 부활하여 영원히 살게 됨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성 테르툴리아누스는 “죽은 자들의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의 확신이며, 우리는 부활을 믿는 자들이다.”(가톨릭 교리서 991참조)라고 말하며,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처음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요소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 같이, 우리도 언젠가 부활하리라는 확신 속에 늘 기쁘고 희망이 넘치는 생활, 감사하며 사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이 단지 이 세상에만 희망을 걸고 사는 사람들처럼, 이 세상에 대한 희망만 간직하고 이 세상의 것들을 위해서만 최선을 다하며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경축하며 감사드리는 오늘, 이 기쁜 소식을 우리만 간직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선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부활의 증인”(사도1,22)이 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이 기쁜 소식을 접하지 못한 채 쓸쓸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희망이 아니라 실망과 좌절 속에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도 영광스러운 부활을 맞이할 것임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점점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고 있다고들 말합니다. 가난한 이웃, 고통 받는 이웃들을 외면한 채, 나만의 기쁨과 행복만을 추구하면서 복음을 선포한다면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할 것입니다. 따듯한 동정심으로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누려는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널리 전파할 수 있는 수단입니다.

주일미사 때, 우리는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 내용 중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라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고백합니다. 또한 미사 때 마다 사제가 “신앙의 신비여” 하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는 주님의 죽음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라고 답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하심을 굳게 믿는가 안 믿는가 하는 것이 신앙의 척도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필립3, 10-11)라고 천명하였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희망을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축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저는 올해 사목 교서에서 50만 신자를 목표로 했던 것이 이루어지기를 함께 노력하자고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임을 널리 전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가족이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성스러운 가정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시대가 발전할수록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는 요소도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과학문명의 발달로 컴퓨터로 인한 편리함도 많아졌지만, 그 대신 많은 사람, 특히 학생들이 컴퓨터에 중독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멀리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부활하신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 그분만이 오직 내 인생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고, 나의 행복이심을 늘 마음 깊이 간직하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크신 축복이 가득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특별히 병고에 시달리며 집에서, 병원에서 고생하는 분들, 경제적 고통에 시달리며 나날이 힘들게 살아가는 모든 분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부활 축하드립니다.

2012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인천교구장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
  | 04.07
447 89.6%
예수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큰 선물로 다가오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더욱 더 기쁘고 의미 있는 삶을 보내는 오늘 되셨으면 합니다.

작년에 치료를 위해 치과에 갔다가 의사선생님으로부터 칫솔을 어느 손에 잡고 사용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저는 당연히 오른손으로 잡지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의사선생님께서는 양손을, 즉 얼굴 왼쪽 부분의 치아를 닦을 때에는 오른손으로, 반대로 얼굴 오른쪽 부분의 치아를 닦을 때에는 왼손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잘 닦인다는 것이었지요.

그날부터 바로 왼손을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40년 넘게 오른손만 사용했던 습관을 바꾸기란 쉽지 않더군요. 왼손으로 닦은 오른쪽 부분의 치아는 왠지 개운하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닦아도 되나?’ 라는 의심도 생깁니다. 그런데 불과 한 달이 채 안 되어서 이제는 왼손과 오른손 모두를 사용하는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안 될 것 같았지만, 안 되는 것은 없습니다. 내 마음이 안 된다는 신호를 계속해서 보내기 때문에 안 되는 것뿐입니다. 오래된 습관도 바꿀 수 있도록 우리 몸은 만들어져 있습니다. 본인의 긍정적인 의지만 있다면 분명히 바꿀 수 있는 몸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우리들이 이렇게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부정을 긍정으로 만든 사건인 부활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셨던 것이지요. 사실 제자들을 비롯해서 예수님을 따랐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음 이후 부정적인 마음을 간직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는 부정적인 마음 때문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죽음에서 다시 일어나십니다. 모든 부정을 긍정으로 만들어, 새로운 희망과 기쁨을 우리들에게 전해주신 것입니다.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살게 되었을까요? 여전히 고개 숙이고 슬퍼하며 비통에 사로잡혀 있을까요? 아니지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커다란 기쁨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제 더욱 더 예수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즉, 단순히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실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천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교리에서 배웠듯이, 인간은 일단 죽은 후 모두 부활합니다. 그러나 이 첫 번째 부활로 곧바로 영원한 생명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오 복음의 ‘최후의 심판’에서 보듯이, 모든 이가 부활하여 ‘사람의 아들’ 앞에 불려나가지요. 그리고 의인과 악인으로 갈린 후, 악인은 전생에 지은 업으로 영원한 지옥으로 의인은 하느님이 계신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부활은 이 세상에서 의로운 삶을 살았던 사람에게는 위로의 기쁨이 되며, 악인에게는 피하고 싶은 괴로운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삶 안에서 우리의 사랑 실천이 중요한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며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한다면, 세상 안에서의 모든 부정이 사라지는 참 행복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부활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조명연 신부
  | 04.08
447 89.6%
부활의 희망

"알렐루야! 노래하자, 기쁜 때가 왔도다!”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지난 사순시기 동안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고 묵상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부활하실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해 기도와 자선과 봉사도 행하였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부활을 맞이한 우리는 그 동안 우리가 행했던 노력 이상으로 큰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면서 사제 피정 중 강의시간에 들은 말씀이 생각납니다. 부활성야 때 사제가 부르는 부활찬송 중에 ‘오, 복된 탓이여! 너로써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도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지요. 거기에서 ‘오, 복된 탓이여!’라는 말이 얼마나 역설적인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탓’은 바로 첫 인간이 지은 잘못을 말합니다. 즉 아담이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이전보다 더 큰 횡재를 했다는 것이지요. 바로 예수님을 뵙고 그분의 부활을 체험하는 횡재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죄는 복된 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맞이한 지금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탓’이라는 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가 진심으로 느낄 때가 언제이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그보다 더한 노력-죄를 지을 때마다 나무기둥에다 못을 하나씩 박아 넣으며, 선행으로 못을 하나씩 뽑아낼 수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잘못 하나를 선행 하나로 지울 수 있다고 하더라도 못을 뽑은 뒤의 못자국은 남아있습니다. 결국 또 다른 선행으로 못자국을 지워야 하겠지요.-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했을 때 우리가 더 큰 기쁨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맞이하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그러한 점은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인하기 위해 무덤으로 달려가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의 모습을 보며 베드로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심문받으실 때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입니다. 자신의 행동 이후 예수님과 한 마디 대화도 나누지 못했던 베드로입니다. 그런 그의 마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인하려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만약 정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면 어서 빨리 용서를 청해야겠다는 마음이 더 강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죄책감과 불안감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을 것이니 말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생각하고 뉘우치는 마음으로 생활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에 있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확인하게 됩니다. 평생 죄책감 속에서 살아갈 줄 알았던 그가 이제는 스승님을 만날 수 있다는 기쁨, 그래서 용서를 청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는 기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큰 기쁨을 얻게 된 것이지요.

어느덧 우리는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에 무감각해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의 목적 앞에서 인간의 도덕성은 무시되고 말아버리는 사회에서 살아가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적어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신앙인들은 그래서는 안되겠지요. 우리 모습을 한 번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과연 우리는 사순시기 동안에 얼마만큼 나의 잘못을 반성하고 회개했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얼마나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부활의 기쁨을 맞이하기 위해서 어떠한 모습, 어떠한 자세가 필요한지 알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커다란 희망을 안겨줍니다. 우리가 알고 말하는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주어지고 가능한 희망입니다. 오늘 베드로가 예수님께 용서를 청할 기회를 얻었듯이 하느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그 기회는 바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주는 기회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희망은 그분의 은총과 그 은총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희망입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예수님의 부활로 인한 기쁨과 희망이 가득 찼으면 좋겠습니다.

박임호 마티아 신부
  | 05.31
447 89.6%
“알렐루야! 예수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사십일이라는 길게만 느껴지는 사순시기를 마치고 예수님의 부활을 맞이한 지금 얼마나 기쁘신지요? 물론 어떤 분에게는 매년 맞이하는 하나의 행사 정도로만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위해서 사십일을 희생과 속죄의 시간으로 잘 보내신 분들에게는 그 기쁨이 더욱 더 크고 의미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느 쪽인가요?

사실 저 역시 약간의 후회는 있습니다. 조금만 더 열심히 부활을 준비할 걸, 스스로 다짐했던 일들을 제대로 행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주님께 죄송스런 마음도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과거에 연연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만큼, 핑계대지 말고 지금이라는 시간에 더욱 더 충실할 것을 다시금 다짐하는 오늘 부활대축일이 되어야겠습니다.

세계적인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비발디가 세상에서 최고라고 알려진 바이올린인 스트라디바리우스로 연주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그의 연주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지요. 연주가 시작되자 청중들은 감탄을 연발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비발디의 실력 때문에 연주가 좋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역시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세계적인 악기야. 악기가 좋으니까 저렇게 좋은 소리가 나지!”

그런데 갑자기 비발디가 연주를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바이올린을 높이 들더니 그대로 바닥에 내리쳤습니다. 바이올린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지요.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입을 벌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 때 사회자가 조용하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비발디가 연주한 악기는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싸구려 바이올린입니다. 비발디가 바이올린을 산산조각 낸 까닭은 참된 음악은 악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는 데에도 많은 조건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다른 것이 필요없음을 특히 이 세상의 기준보다도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부활을 맞이하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유다인들의 무덤이 그러하듯이 예수님의 무덤 역시 돌로 봉인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여자의 몸으로 무덤을 찾는다는 것은 허탕 칠 일이었지요. 그러나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허탕을 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무덤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돌이 치워져 있었습니다. 이 무거운 돌이 없어진 것에 더 깜짝 놀랄만한데, 마리아는 무덤 속에 주님의 시신이 없어진 일에만 놀라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주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에 무덤을 막아 놓았던 돌 자체보다 예수님 시신이 없어진 것이 더 중요했던 것이지요.

바로 그 사랑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나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지요. 그 사랑이 일생의 가장 큰 기쁨을 일구어 냅니다.

지금 나는 무엇을 더욱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참된 음악은 악기에서가 아니라 훌륭한 음악가의 손에서 나오는 것처럼,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이 주님을 만나는 조건이 아라 주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만이 주님을 만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조명연 신부
  | 05.31
447 89.6%
“알렐루야! 주 참으로 부활하셨네!”

이른 새벽 허탈한 마음으로 찾아간 빈 무덤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맞이하며 누린 환희와 기쁨이 오늘 여러분에게 “알렐루야”의 노래처럼 희망과 기쁨의 멜로디가 되시길 바랍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주 참으로 부활하셨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삶의 역사이며 의미 그 자체이십니다. 배신과 갈등 그리고 불평등 속에서 그분께서는 언제나 억눌리고 버림받은 자와 고통받는 이들의 고통을 나누시며 그들의 아픈 마음에 용서와 화해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소외당하고 억울함 속에서 약한 이들과 어린이들을 감싸주시며 겸손한 마음으로 그들 속에서 생활하셨습니다. 굶주림과 아픔 속에서 그분은 평생을 통해서 가난 속에 사셨지만 배부름과 건강을 주시고 또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고통 앞에서도 그분은 굴복하지 않으시고, 부활의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두려움과 좌절 속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희망을 잃지 않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로마 5, 20)의 증언처럼 우리에게 죄가많아 불행한 것이 아니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은총과 축복으로 내려오십니다.

이제 우리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 (요한 20, 19)의 말씀처럼 우리들의 삶의 자리를 의미와 가치 있는 삶으로 변화시켜 주시며 평화의 은총을 통해 진정한 부활의 기쁨을 주셨습니다.

이 평화의 은총은 그간 우리에게 만연되어 있던 죽음의 문화에 대한 생명의 승리를 미움에 대한 사랑의승리, 죄에 대한 은총의 승리로 거듭나게 해 줄 것입니다.

지난 사순시기를 금욕과 희생의 시간으로 보내신 모든이들에게 오늘의 부활이 큰 위안이 되시길 바랍니다. 무덤에서 부활하심을 상징하는 부활 달걀을 가족과 이웃들과 기쁘게 나누듯 서로가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고, 배려하며 기쁨을 함께 나누면서 우리 모두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평화를 함께 나누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크나큰 축복과 사랑을 주시고, 무엇보다도 위로를 주시어 위안과 기쁨이 가득한 부활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인천교구 윤승일 유스티노 신부>
  | 04.04
447 89.6%
[인천] “예수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부활절을 맞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특히 병고에 시달리며, 병상에 계신 분들에게 예수님께서 축복을 내리시어 빠른 쾌유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며 믿음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1코린 15,19-21)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도 부활하게 되었으니 기뻐 용약함이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에, 누구나 한 줄기 연기처럼 왔다가는 이 세상에서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야고 4,14 참조) 누구든 죽음에서 제외될 수는 없지만,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믿기에 어떠한 처지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매주일 미사 때마다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때마다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 부활하시고…”라며 예수님의 부활을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셨지만 한 인간으로, 구세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인류를 원죄에서 해방시키시고, 원죄의 결과로 영원한 죽음의 골짜기에서 헤매는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담은 우리의 빚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콜로 2,14)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우리의 죄 문서도 함께 못 박아 없애셨기에, 죄의 결과로 찾아왔던 영원한 죽음은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죽는다 해도 예수님처럼 언젠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실망한 나머지 뿔뿔이 흩어져 고향으로 가거나, 자신들이 체포될 것을 두려워하며 숨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3일 만에 부활하시어 40일간 때때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말씀도 나누시고, 음식도 나누시며, 힘과 위로를 주셨습니다.(루카 24, 36-43 참조) 성령을 보내심으로 제자들의 믿음을 굳세게 하셨습니다.(요한 20, 22-23 참조)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세 차례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셨지만 제자들조차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습니다.

가톨릭신앙인이란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죽더라도 살 것이고 또 살아서 예수님을 믿으면 부활하여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사람, 그분을 의지하는 사람, 그분의 은총으로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야말로 세상의 악과 죽음에 대한 하느님의 승리이고, 우리에게 죽음에서 부활하리라는 큰 희망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부활절은 기쁜 날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기쁨을 서로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기쁨보다는 슬픔이, 희망보다는 절망이 산재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근심과 걱정이 우리의 주변을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남북이 대치 속에 있기에, 서로 간의 화해와 사랑의 소리는 점점 멀어져만 가고 있습니다.

생명을 경시하는 시대적 성향은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낙태와 자살, 살인, 배아줄기세포를 이용한 연구 등 생명을 경시하는 사조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생명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을 본받아 생명 보호에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비록 우리 앞에 펼쳐진 현실이 어두침침하다 해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늘 우리와 함께 계심을 깨닫고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자비의 해를 맞아 부활하신 예수님의 뜻에 따라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선교에 있습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과 예수님 부활 소식을 널리 전해야 하겠습니다.

예수 부활하셨네! 알렐루야!
부활하신 예수님의 축복을 기원합니다.
2016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

▦ 천주교 인천교구장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 : 2016년 3월 26일
  | 03.26
447 89.6%
무엇을 계획할 수 있는 능력이 상실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인간의 뇌에는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하는 부분이 있는 이를 전두엽에서 담당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전두엽이 손상된 사람은 “내일 뭐 해 볼 생각이세요?” 등의 질문에 아무런 답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마치 백지 상태의 마음 상태를 갖게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됩니다.

사실 이 전두엽의 손상은 현재의 순간을 사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단지 그때그때의 현실만 따르는 존재로 만들 뿐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옛날에는 심한 발작을 일으키는 사람, 심한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사람 등의 전두엽을 일부러 손상시켜서 어떤 상황에서도 차분에게 잘 참도록 해주고 또 미래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줍니다. 하지만 이런 삶이 진정으로 행복한 것일까요? 즉, ‘영원한 현재’만 사는 삶이 과연 윤택한 삶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인 미래이기에 우리 삶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미래를 상상하면서 즐거움을 얻을 때가 많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최고로 멋진 사람을 만나서 연애를 하는 상상, 거액 복권의 당첨되어서 돈방석에 앉는 상상, 사랑하는 내 자녀가 성공해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상상, 미지의 낯선 곳을 여행하는 상상 등등,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더 높지만 그 자체로 분명히 즐거움을 줍니다.

물론 이렇게 즐겁고 매혹적인 상상만 하는 것은 아니지요. 고통과 시련을 가져다주는 상상도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나쁜 상상도 있다면서 아예 상상 자체를 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미래에 대한 희망도 완전하게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먼 미래에 대한 희망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 희망을 버려 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마치 일부러 전두엽을 손상시키는 사람처럼, 미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려는 것 같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희망이 현실이라는 것을 당신이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부활입니다.

한 해의 교회력 중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뽑으라고 하면 아마 사순시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날들이 바로 성주간, 특히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성삼일이지요. 각 본당에서는 이 주간은 참으로 바쁜 날입니다. 워낙 중요하고 또 의미도 깊은 날이기 때문에 준비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지요. 사제 역시 복잡한 성삼일 전례를 준비하면서 참으로 힘들어집니다. 그러나 그렇게 지내고 맞이하는 부활 대축일은 너무나 큰 기쁨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바로 오늘입니다. 바로 오늘 주님께서는 세상의 부정적인 악의 세력들을 이기시고 부활하십니다.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직접 보여주심으로서 먼 미래에 대한 희망이 현실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제는 부활의 기쁨으로 힘차게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이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오늘 저녁 맞이할 주님의 기쁜 부활을 잘 준비하였으면 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6년 3월 27일
  | 03.27
447 89.6%
주님의 부활하심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사순시기와 성주간을 보내면서 얼마나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셨습니까? 이 기쁜 소식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우리 모두 힘차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며칠 전에 한 자매님으로부터 결혼식 주례를 부탁받았습니다. 그런데 제 시간이 맞지 않아서 도저히 주례를 설 수가 없어서 정말로 미안한 마음으로 거절을 했지요. 그러면서 어디에서 결혼을 하는지를 물었더니만 예식장에서 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결혼하는 신랑신부를 축하하기 위해 오는 하객들이 복잡한 전례에 너무 지루해하기 때문이랍니다.

예식장에서 결혼식 주례를 꽤 많이 서 봤습니다. 성당에서는 미사만 1시간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지만, 일반 예식장에서는 사진촬영까지 다 마쳐도 40분을 넘지 않더군요. 1시간 단위로 예식이 있기 때문에 길게 할 수 없다면서 예식 전에 담당자가 와서 “신부님, 예식을 30분 이상 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라고 미리 이야기해 줍니다. 저도 빨리 끝나니 좋기는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신랑신부에게도 좋은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순간인데 그렇게 해치워버리는 식으로 지나간다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더군요.

아무튼 혼인미사 자체를 지루해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사람들의 참을성은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미사 시간이 1시간만 넘어도 지루해하는 표정을 넘어서 화가 잔뜩 난 표정을 짓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성체만 영하고서는 곧바로 나가시지요.

우리 주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당하셨던 것 역시 사람들의 참고 견디지 못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최후의 만찬 이후 밤늦게 게세마니 동산에서 잡히신 후에 밤새 문초를 당하셨던 예수님, 그리고 그 다음 날 오후 3시에 십자가 죽음을 당하십니다. 일사천리로 진행된 죽음이었습니다. 바로 사람들의 참고 견디지 못하지 못하는 마음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정작 참아선 안 될 중요한 것은 한심스러울 정도로 잘도 참고 견딜 때가 많습니다. 사랑, 봉사, 희생, 나눔 등에 대해서는 얼마나 잘 참고 견디어 냅니까?

주님께서는 사흘 만에 곧바로 부활하셨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판단을 내리려고 할 즈음 주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인해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참을성 없이 판단하고 단죄하는 그 모습이 잘못 되었음을 당신의 부활을 통해 세상에 환하게 보여주십니다.

중요한 사랑, 봉사, 희생, 나눔, 기쁨 등의 긍정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참지 말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판단, 단죄, 미움, 죄로 기울어지는 마음 등등 참아야 할 것에 대해서는 끝까지 참고 버틸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라고 오늘 부활하셨습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6년 3월 27일
  | 03.27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   [수도회] 부활의 아침, 설레는 마음  [12]
!   [군종] 하나의 밀알이 죽어 많은 열매를 맺다  [2]
!   [기타] 부활신앙으로 무장하자.  [3]
!   [전주] “아! 잔인한 4월, 잔인한 부활”  [2]
!   [광주]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8)  [2]
!   [마산] '부활 - 돌을 치우자' (요한 20,1 이하 참조)  [5]
!   [수원] 구원받은 자의 삶으로  [7]
!   [원주] 우리는 주님 부활의 증인  [2]
!   [청주] 부활 메세지  [3]
!   [대전] 부활은 인간에서 하느님 발견하기  [5]
!   [서울] 부활을 선포하는 사람들  [15]
!   [의정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마태 28,7)  [7]
!   [춘천] 부활을 믿고 복음 전할 의무  [3]
!   [인천]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에게 부활의 기쁨이  [12]
!   [대구]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5]
!   [안동] 부활의 증인이 되십시오!  [11]
!   [부산] 부활신앙은 예수님으로 부터 빛을 받아 살겠다는 약속.  [14]
495   (백) 예수 부활 대축일 독서와 복음  [7] 2195
494   [전주/제주/청주] 지금 말씀대로 이루어지소서!  [4] 2331
493   [서울/수원] 하느님의 선택 : 평범성, 일상성  [7] 2342
1 [2][3][4][5][6][7][8][9][10]..[26]  다음
 

 

대축일/명절강론 코너 ( 대축일/명절 미사에 관련된 강론자료입니다... )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05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