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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마태 28,7)
조회수 | 2,316
작성일 | 09.04.01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리시는 은총과 기쁨이 여러분 가정에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줄로만 알았던 어둠의 현실이 예수님의 부활로써 빛의 세상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한없는 절망과 실의에 빠져있던 제자들에게는 물론,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커다란 희망으로 다가옵니다. 부활을 통한 오늘의 은총이 누구보다도 현실의 어려움으로 고통받는 형제자매들에게 더욱 깊이 내리시기를 빕니다.

부활의 기쁨은 일반적인 기쁨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슬픔에 슬픔이 덮씌워져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극도의 슬픔에서 솟아나온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고통과 죽음이라는 어둠에서 피어난 희망의 사건이었습니다. 부활을 맞이하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좋고 편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 고통과 죽음을 통해야만 했고, 그 결과로 부활이 가능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기쁨과 영광만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부활사건에 전제되어있는 고통과 죽음을 함께 받아들일 때, 참된 기쁨과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사람들이 보인 첫 번째 반응은 놀라움이었습니다. 안식일 다음날 돌무덤을 찾았던 “여인들”(루가 24,1)과 “제자들”(요한 20,3)은 빈 무덤을 보고 놀랐습니다. 빈 무덤의 소식을 들은 “경비병”과 “수석사제들”(마태 28,11)도 역시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이에게 놀라움으로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응답을 보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감지한 사람들이 있었는가하면, 사건 자체를 거부하고 은폐하려고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누구에게는 영광과 기쁨이 되었고, 누구에게는 두려움이 되었습니다.

참 신앙의 눈으로 부활을 맞이할 때, 우리는 참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눈으로만 부활의 영광과 기쁨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루가 24,13-35)가 예수님을 알아보고 참된 기쁨을 발견한 것은 보고 만질 수 있는 장소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신앙의 눈을 뜨게 되는 영성적인 차원에서였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날 우리 사회의 양극화 현상은 점점 가속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재산의 많고 적음은 물론, 진보와 보수의 대립, 그리고 세대 간의 분리도 심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민족화해 문제와, 사형제도·낙태문제 등 생명보호를 위해 해결해야할 과제도 남아있습니다.

이러한 혼란의 시기인 오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이 아닌 바로 오늘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영광과 기쁨을 바로 지금 우리에게 선물로 주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힘겨운 현실을 겪어야 하는 우리들에게 다가와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는 장소는 바로 우리의 일상입니다. 가족에게서, 이웃들에게서, 사회와 국가로부터 우리는 예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무덤 문을 열고 나오신 예수님께서는 이미 우리 가까이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주님께 합당히 응답하는 신앙인의 자세가 우리에게 요구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하고 기뻐한 사람들은 주님을 바라고 믿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열망했던 사람들에게 먼저 나타나 주셨습니다. 부활은 예수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들에게 은총으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희망을 갖지 않는다면, 부활의 오늘은 죽음의 어제와 다를 바 없을 것이고, 부활의 기쁨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부활의 승리를 체험한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께 믿음을 두고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영광된 부활절을 맞이하여 이 기쁨이 형제자매님들의 삶 안에서 꽃피어나기를 바라며 은총 가득한 하루하루가 되시기를 빕니다.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주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마태 28,7)

2006년 이한택 요셉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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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은 주께서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우리가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부활을 경하하며 마음껏 기뻐하는 날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일상사에 함께 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 가운데는 아무도 감당할 수 없는 모진 고문과 업신여김을 당하시고 마침내 이 세상에서 가장 처참한 십자가의 죽음까지 당하셨던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도록, 그리하여 모든 역경을 딛고 일어서 마침내 영원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위하여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 외에는 이 세상에 죽었다 살아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이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주님을 믿고 주님을 기꺼이 따르는 사람들만이 주님 부활의 영광에 함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을 이긴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성을 초월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장입니다. 부활은 이 끝장을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께서 다시 죽으실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죽으심에 동참했다가 주님과 함께 부활하면 죽음의 끝장이 우리를 다시는 덮치지 못 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느님 아버지 곁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 영원한 행복에로 양팔을 벌리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부활이 가능하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실 뿐만 아니라, 믿는 이에게는 누구에게나 부활하신 주님처럼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장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을 믿는 이에게는 절망이라든가 좌절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처해 있는 여건이나 환경이 아무리 힘겹고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결코 용기를 잃지 않고 희망을 갖고 그 역경을 하나하나 극복할 때마다 감사와 기쁨을 덤으로 선물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부활을 묵상하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엠마오 길에서 두 젊은이에게 일깨워주셨던 말씀입니다. 즉 주님께서 부활의 영광에 들어가시기 전에 반드시 고난을 겪어야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 위하여 우리도 우리에게 닥쳐오는 고통을 달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부활의 영광은 고통과 죽음을 전제하고, 반대로 고통과 죽음은 믿는 이들을 반드시 부활의 영광에로 인도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은 하나의 파스카 신비를 이룹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희망과 기쁨에 넘쳤음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빈 무덤가에서 외롭게 울고 있던 마리아 막달레나, 좌절감에 어깨를 떨구고 맥없이 걸어가던 엠마오 길의 두 젊은이, 무서워서 문을 걸어 잠그고 벌벌 떨고 있던 제자들, 밤새도록 헛 그물질만 하고 허탈감에 젖어 빈 배로 돌아오던 일곱 제자들…. 모두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한없는 행복감을 되찾았습니다.

오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여, 우리가 겪고 있는 오늘의 어려움 속에서도 적어도 주님을 믿는 우리들만은 희망을 잃지 말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열심히 하면서 우리 주변의 힘겨워하는 이웃에게 희망과 힘을 실어주어야겠습니다. 최근에 우리 곁을 떠나시면서 모든 이에게 큰 감명과 희망을 주셨던 김수환 추기경님을 잊지 맙시다. 우리를 위하여 수난하시고 죽으셨다 부활하신 주님을 굳게 믿으시고 그분 가신 길을 철저히 따라가신 추기경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정 의미 있는 인생이 어떠한 것이며, 이 어려운 세상에서 이웃과 더불어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지나갑니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그리고 세상 자체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만이 영원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계실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분과 함께 죽었다 다시 살아날 우리도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을 굳게 믿고 서로 사랑하며 힘차게 살아갑시다!

2009년 예수부활대축일에
천주교의정부 교구장
이한택 요셉 주교
  | 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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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확실성이 주는 의미

성경은 우리에게 주님께서 ‘부활하신 분’이라는 것을 감격스럽게 증언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던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슬픔에 젖은 여인들과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이 일이 너무도 엄청나서 여인들과 제자들은 어쩔줄을 몰라 합니다. 당황해서, 놀라워서, 믿기지 않아서 받아들이지 못하다가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음을 ‘보고 믿게 됩니다’(요한 20,8).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히 이루어졌다는 것은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선적으로 죽음을 뛰어넘는 새로운 생명의 확실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허무함을 희망함으로 채우는 것이고, 인간 생명의 유한함을 넘어 우리를 영원함에로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확실성을 믿기에 유한한 현재를 살면서도 영원함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확실히 다시 살아 나셨다는 것은 또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살다보면 우리는 우리 사회가 보이는 여러 가지 죄의 구조들 때문에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진실은 통하지 않고, 거짓이 훨씬 더 효력이 있는 것처럼 보여질 때가 있습니다. 옳은 것보다는 옳지 않은 것이 더 힘있게 느껴 질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진실되이 세상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때로는 절망감에, 때로는 억울함 속에 슬퍼할 때가 많습니다. 부활은 이처럼 세상의 죄와 어둠에 상처입고 슬퍼하는 우리에게 진실은 반드시 이긴다는 것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아무리 어둠이 두껍게 내리 눌러도 끝내 빛이 그 모든 어둠을 뚫고 이겨낼 것이라는 당연한 정의를 우리에게 확신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의 확실성을 믿는 사람들은 작은 이익 때문에 거짓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이익과 손해를 먼저 생각하는 세상에서 언제나 옳은 것을 추구합니다. 슬픔이 있어도 그 슬픔너머를 볼 줄 아는 진실의 눈을 갖게 됩니다. 부활을 확실히 믿으면 삶이 변화됩니다. 언제나 진실에 기대어서 판단하고, 순간의 이익보다는 영원함을 추구하고, 불의에 결코 굴하지 않는 강건함과 용맹스러움으로 빛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체험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같은 변화된 삶을 통해 부활을 증언했습니다. 그들은 권력 앞에서도 당당했고, 사자의 날 시퍼런 이빨 앞에서도 담대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고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완전한 포기를 보였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부활을 믿는 믿음에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부활은 죄를, 불의를, 거짓을, 이기심을 포기하게 하는 변화의 사건이었고, 제자들은 삶으로 부활이 확실하고 참되다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신앙인들은 부활을 믿는 사람답게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부활로 말미암아 변화된 사람이 될 때,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게 이루어졌음을 세상에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부활을 살아 주님의 부활이 확실하고 참되다는 것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추교윤 시몬 신부
  | 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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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치워라” / 요한 11,39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죽음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희망의 빛이 되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오셨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놓았던 무거운 돌이 치워졌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대상이었던 죽음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아무 의미 없는 삶의 끝이 아니라, 참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기쁨과 희망의 여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기초요, 희망의 근거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인 부활은 믿는 이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부활이라는 희망이 있기에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떤 두려움도 절망도 고통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죽어야만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는 역설이 부활입니다.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때로는 희생으로, 때로는 인내의 모습으로, 때로는 관용과 침묵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자신을 희생시키고 죽이고 부서뜨리는 일 없이 십자가의 죽음은 불가능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분명히 하나의 여정입니다. 십자가의 의미와 가치를 외면한 채 부활의 영광만을 갈망하는 것은 헛되고, 부활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빼앗긴 십자가의 삶은 단지 고통일 뿐입니다.

부활은 찾아왔지만 마냥 기뻐하기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는 어두움이 많이 깃들어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생기는 자연재해가 우리에게도 예외일 수 없고, 특히 원전의 가공할 만한 위험이 있는 데도 편리함과 경제적인 이득만을 생각하여 원전개발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목숨을 걸고 넘어온 북한주민들이 다시 잡혀 북한으로 강제송환 되어 죽음으로 내몰리는 데도 우리는 아무 힘을 쓰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무관심한 채 있습니다. 또한 권력과 부를 위해서는 공동선이나 윤리는 안중에도 없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인격과 생존이 무시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사회는 원활한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라는, 세대 간 격차라는, 여와 야라는 등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집단이나 사람들에 대해서는 대화나 타협의 여지가 없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따뜻한 사회, 평화가 넘쳐흐르는 훈훈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이 만든 이 장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단호하게 배척하거나 매도하는 것이 아니라, 참아주고 대화하면서 그래도 하나 되기 위해 애쓰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 장벽, 이 돌들을 치우는 노력을 하지 않는 한 우리 사회는 밝고 훈훈한 사회, 예수님의 부활을 볼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없습니다.

부활을 전하는 성경에서도 돌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갔었을 때, 그들은 돌이 치워졌음을 목격하고 나서야 예수님의 부활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을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삶을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돌들을 치워야합니다.

우리에게는 사랑과 일치와 평화를 가로막는 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돌들을 치우는 일은 무엇보다 먼저 기도하고 화해하며 일치를 위해 한발 내딛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교구에서 올 해 들어 시작한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바치는 묵주기도 7천만단 봉헌 운동도 돌을 치우는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이 시대의 갈릴래아로 가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무덤을 찾은 여자들에게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면 우리 역시 이 시대의 갈릴래아로 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 곳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갈릴래아는 명예와 권력이 있는 곳이 아니고, 이방인들이 있고 가난한 이들이 있는 변방의 땅입니다.

우리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주변을 둘러보면 우리가 가야 할 갈릴래아를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난하고 외롭고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곳이 바로 갈릴래아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찾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기쁜 소식을 전하며 평화의 인사를 나누도록 합시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2012년 4월 8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의정부 교구장 이기헌 베드로 주교
  |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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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렐루야~~ 알렐루야~~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환한 미소를 머금고 알렐루야~ 알렐루야~를 외치며 인사를 나눕니다. 그러나 2000년 전 그날의 새벽은 그다지 기쁘거나 영광스럽지 않았습니다. 안식일 다음날 예수의 무덤을 찾은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 입구를 막아 놓은 돌이 치워져 있고 무덤은 비어 있음에 놀라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제자들에게 알립니다. 시몬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황망한 마음으로 한걸음에 달려가 예수의 시신이 눕혀져 있던 빈 무덤을 확인합니다. 여인의 말처럼 아마포와 얼굴을 쌌던 수건만 남겨진 채 무덤 안은 비어 있었고, 주님을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이것이 예수부활에 대한 첫 번째 증언입니다. 그렇습니다. 무덤은 텅 비어 있었고 그저 그분을 모셨던 흔적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 상황에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여인과 제자들의 믿음이 약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부활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무덤이 비었다!”

부활은 비움에서 시작된다

경이롭게도 부활은 비움에서 시작됩니다. 부활은 가득 채워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텅 빈 무덤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전해 주는 것처럼 예수님을 모셨던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누가 그 안에 있던 주님을 가져갔는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과 함께 세상의 온갖 죄악과 불의, 거짓과 불신, 부정과 패악을 돌무덤에 묻었습니다. 그리고 탐욕과 이기, 독선과 아집, 신자유주의의 흉물스러운 논리로 꾸며진 우상들이 가득 차 있던 무덤은 이제 비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하여 온갖 더러움으로 가득 찬 세상과 마음을 비워 주셨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부활은 비어 있는 무덤과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빈 곳을 조금씩 조금씩 채워 나가는 것이 바로 부활을 사는 삶입니다. 가득 채워진 것에서 무엇인가를 내어 놓는 것이 부활의 삶이라고 생각한다면 부활은 또 다른 삶의 짐이 될 뿐입니다.

빈 곳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지 고민하며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이 부활하신 예수를 증거 하는 삶입니다. 그 빈자리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자비와 진리, 자유와 정의, 존엄과 평화로 채워야 하는 것이 부활을 체험하고 믿는 이들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첫 제자들은 빈 무덤이 된 자신들의 삶을 복음 선포의 새 삶으로 채웠고 예전과는 다른 변화된 삶을 살아감으로써 예수의 자리를 채웠던 것입니다. 예수가 있던 자리는 비어 있으니 그 빈자리를 예수의 삶으로 채우는 것이 부활을 사는 것입니다. 때문에 부활은 관념이나 명제가 아니라 삶과 존재의 방식입니다. 머리로 이해할 수 없으며 지식으로 습득할 수 없는 이유는 몸으로 느껴야 하는 삶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교리가 아니라 삶이어야 합니다.

비어 있는 우리와 이웃

일 년 전 봄볕 가득한 어느 날, 우리네 가슴은 아이들을 하늘나라로 보내면서 텅 비어 버렸습니다. 언제 그만두라는 통보를 받을지 몰라 노심초사 마음 졸이며 일해야 하는 비정규직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함께 땀 흘리던 노동의 현장에서 무 자르듯 잘려 나간 해고 노동자란 이름만으로도 우리와 이웃의 삶은 비어 버렸습니다. 또, 국책사업과 도시 재개발이란 미명으로 숱한 이들이 삶의 터전을 비워야만 했습니다.

그 비어 버린 생명을 가지고 일 년을, 오 년을, 십 년을 살아온 이들이 있습니다. 생명보다 이윤이 우선되는 권력과 사회에서 내몰리면서 가진 모든 것을 빼앗겼고, 삶과 마음은 이미 비워졌습니다. 권력의 압제와 자본의 논리로 삶의 자리를 비워야 했던 그들은 이미 부활을, 삶을 시작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묵상해 봅니다. 빈 삶을 채우기 위한 투쟁의 길을 걸으며 받은 온갖 괄시와 모욕, 천대와 비난을 받으며 점점 더 비워야만 했던 그들은 강도를 만난 우리의 이웃입니다. 빈자리에 정의를 세우고, 진실을 밝히며 존엄과 자유로 채워 나가기 위해 싸우고 있는 그들의 삶이 빈 무덤을 채우는 부활의 삶임을 묵상해 봅니다.

그들과 연대하기 위하여 자신의 여린 어깨를 내어 주며 사순을 지냈던 착한 사마리아사람들의 삶이 부활에 동참하는 삶이 아니었을까 묵상해 봅니다. 더 가지고 채우기 위해서 안간힘 쓰며 살았던 신앙인들에게 빈 무덤은 부활의 질문을 던집니다.

“그분을 어디에 모셨습니까?”

<의정부교구 박명기 신부(다미아노)>
  |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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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요한 20,19-21)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예수님의 부활의 기쁨이 교우 여러분의 가정에
그리고 온 세상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어두움을 이기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어 살아오셨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 놓았던 무거운 돌들이 치워졌습니다. 이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대상이었던 죽음은, 더 이상 아무 의미 없는 삶의 끝이 아니라, 참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기쁨과 희망의 여정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신앙의 선물로서의 부활은 믿는 이들에게는 궁극적인 목적과 희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것처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주님과 함께 죽음으로써만 주님의 부활에 함께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로마 6,8)

십자가와 부활은 분명히 하나의 여정입니다. 십자가의 의미와 가치를 외면한 채 부활의 영광만을 찾는 것은 헛된 일이고, 부활에 대한 희망과 믿음이 없는 고통스러운 삶은 그저 고통일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본 십자가와 부활을 세상에 알리고 삶으로 증거해야 합니다.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면 우리 역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우리들의 갈릴래아로 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갈릴래아는 이방인의 땅이요, 가난한 이들의 땅이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사람들을 만나고 치유하고 설교하고 가르치셨던 곳, 예수님의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고개를 들어 부활하신 주님을 찾으십시오! 갈릴래아에 계시겠다던 그분이 지금 우리가 있는 곳, 삶의 현장, 우리들의 갈릴래아에 함께 계십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는 두려움에 떨고 가난하고 병들고 지친 몸으로 사랑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전쟁의 공포와 테러의 두려움으로 고향을 등지고 생존을 위해, 온 세상을 헤매는 난민들은 유럽뿐만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찾아가 예수님처럼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28,5) 하며 손을 잡아 줄때 우리는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또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현실 때문에 결혼과 인간관계마저 포기하는 젊은이들에게 힘을 내라며 등을 두드려 준다면 우리는 부활의 삶을 사는 좋은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인생의 황혼기에 지나온 삶의 의미를 성찰할 여유조차 없이 힘겹게 생계를 꾸려가며 홀로 사는 노인들과, 새터민들, 외국인 근로자들, 다문화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는 분… 등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형제가 되어 줄 때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의 여정을 걸어가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우리 시대, 우리 사회가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부활하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도록 합시다. 우리 시대 우리 민족이 살고 있는 한반도에 가장 절실한 것은 평화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처음 나누신 인사는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요한 20,19-21)였습니다. 최근 우리는 한반도에 짙게 드리워져 있는 분쟁의 그림자를 불안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남과 북의 정치 지도자들이 핵이나 무기를 통해 평화를 유지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평화협정의 테이블로 나올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십사 부활하신 주님께 간청해야겠습니다.

평화의 길을 가기 위하여 우리 신앙인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한반도의 평화가 어려움에 처한 시기이기에 우리는 지난해 분단 70년을 맞아 함께 하였던 기도를 계속해 나가야겠습니다. 특히 밤 9시에 바치는 주모경이 평화의 어머니시며 평화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들어 올려지도록 열심히 기도 바치도록 합시다.

둘째, 부활하신 예수님께 우리의 가정들을 봉헌하도록 합시다. 가정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그 무엇보다 가장 소중한 곳입니다. 최근 우리 교구 조사를 비롯한 많은 사회 조사 결과를 따르면, 인생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 선택한 것이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가정이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잘못된 시대정신과 문화가 우리 신자들 가정에도 그대로 스며 들었습니다. 입시 위주의 교육과 경쟁에 밀려 신앙교육은 물론 부모들의 소중한 의무인 신앙의 전수는 뒷자리로 밀려납니다. 그뿐 아니라 이기주의와 물질중심의 생활에 젖은 자녀들을 바로 잡아 주지 못합니다. 함께 기도하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들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그 출발은 가정이기에 예수님께 가정을 새롭게 봉헌하도록 합시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께 우리 삶을 새롭게 봉헌하며, 다시 한 번 부활하신 예수님의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 의정부교구장 이기헌 베드로 주교 : 2016년 3월 27일
  |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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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그대 나를 가슴에 묻고 이제 떠나시오.

“ ‘나다’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 (요한 18,8)

함께 했던 사랑하는 벗이여 그대 나를 가슴에 묻고 이제 떠나시오. 아직은 나와 함께 십자가를 질 때가 아니니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길을 가시오.

섬김과 나눔 가득한 함께 사는 세상 이루려 이제 나 주저함 없이 죽어가듯, 지금 그대 따스한 삶으로 여리고 작고 가난한 벗들 정성껏 곱게 품으시오

나 홀로 가야할 살림을 위한 죽음의 길 언젠가 그대 함께 하리니 그 날엔 살리기 위해 기꺼이 죽으시오. 함께 했던 사랑하는 벗이여! 그대 나를 가슴에 묻고 이제 떠나시오

▦ 의정부교구 상지종 신부 : 2016년 3월 27일
  |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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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오늘 다시 부활입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한겨울 살을 에는 칼바람보다 매정한 사람들의 찬 기운이 서럽게 시린 날에도 봄은 오듯이, 모든 빛 게걸스럽게 삼켜버린 세상의 막장 참혹한 십자가 딛고 따스한 생기 돋우는 부활이 옵니다.

분노, 시기, 증오, 탐욕, 불의, 폭력, 온갖 추잡한 인간의 광기, 어우러지던 십자가 피의 향연은 이제 끝입니다. 아무도 막을 수 없어 영원할 것 같았던 악과 어둠과 죽음 함께 뒹구는 권력 놀음은단 사흘 만에 고개를 떨굽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절망과 두려움에 몸서리치던 기만과 억압과 포악의 시간이 지납니다. 빛 자체이신 향기로운 생명은 썩는 내 진동하는 어둠 가득한 무덤에 더 이상 머물지 않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예수님께서 오늘 부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부활하라 하십니다. 오늘 여전히 칠흑 같은 어둠일지라도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 오늘 다시 우리는 부활을 살고자 합니다.

의심의 눈초리 거두고 믿음의 손 내밉니다. 미움의 덫을 걷고 사랑의 그물을 던집니다. 절망의 늪이 아니라 희망의 땅을 걷습니다. 경쟁의 사슬 끊고 기꺼이 어깨동무 합니다. 차가운 무관심 떨치고 더불어 함께를 이룹니다. 악의 달콤함 대신에 선의 힘겨움을 기쁘게 삼킵니다.

부활은 입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부활은 결코 머리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부활은 다만 온 몸과 마음으로 살 수 있을 뿐입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오늘 예수님께서 부활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부활합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신부 : 2016년 3월 27일
  |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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