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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부활 - 돌을 치우자' (요한 20,1 이하 참조)
조회수 | 2,221
작성일 | 09.04.01
친애하는 교우, 수도자, 성직자 여러분!
생명의 기운을 감지하는 이 계절에 우리는 주님의 부활 대축일을 경축하고 기념합니다.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이 교구민 여러분에게 가득히 내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지난 사순 시기 동안 인류의 구원을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의 세력과 싸우신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면서 부활을 준비해 왔습니다. 특히 우리 마산 교구민 모두는 교구 설정 40주년 원년을 맞이하여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믿음의 공동체로 쇄신할 것을 거듭 다짐하면서 부활 축제를 준비해 왔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터전이자 동시에 기쁜 소식의 핵심이고 희망의 근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그리스도인들의 실존과 삶의 방식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거듭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음 앞에 서신 예수님

여느 인간처럼 예수님께서도 죽음이라는 인간의 한계를 체험하셨습니다. 죽음과 무관하신 분이 죽음을 맞이하셨고, 죽으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 죽으셨습니다. 절대가 상대의 조건을 수락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죽음을 앞에 두고 회의와 고통에 휩싸이는 일반인들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신성으로 죽음이라는 한계마저도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 타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감지하시고도(마르 14,6-8; 루카 13,31-33; 마르 14,32-42) 그 죽음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기꺼이 받아 들이셨습니다. 그 몰골은 망가져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었고,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피해갈 정도로 멸시를 당하면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습니다.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으나, 그분은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았습니다. 끝내는 억울하게 처형되셨습니다(이사 52-53장 참조).

예수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받들고 따르던 제자들의 눈에 스승 예수님의 죽음은 무능과 허무로 보였고, 부활은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로 보였습니다. 스승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 때문에 고뇌하고 방황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스스로 목숨을 내어 주는 모습으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으로 일단락되어 끝장난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의미

예수님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부활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통해 죽음이란 흔히 우리가 생각하듯이 끝장도 아니고 허무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죽음은 생명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이며, 죽지 않고서는 생명으로 건너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죽음 너머에는 우리 믿는 자들이 소망하는 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죽음을 넘어 부활과 새로운 세계를 소망할 수 있는 것은 삶을 사랑하고 이 땅을 충분히 사랑하고 난 후에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존하면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참된 제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구원은 오로지 십자가를 받아들일 때에만 현실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깊이 헤아려야 합니다.

부활 체험

초대교회의 부활 신앙이 출발하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부활 신앙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여인들이 무덤으로 찾아가는 이야기로부터 출발합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확신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시체를 찾습니다. 죽음을 죽음의 틀 안에 고정시키려고 합니다. 죽음을 뛰어 넘는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외면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인들은 누가 무덤의 돌을 치워줄 것인가를 걱정합니다.

여기서의 돌은 죽음의 세계를 가두어 놓으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돌은 이미 치워져 있습니다. 이로써 죽음의 돌은 언제나 죽은 자들 위에 닫혀 있으리라 생각하는 죽음의 논리에 처음으로 도전이 생겨납니다. 무덤은 열려 있을 뿐 아니라 비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무덤이 비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을 통해 계시는 무너지고 신비만 남게 됩니다.󰡐빈 무덤 - 부활󰡑의 도식을 이제는 부활 - 빈 무덤󰡑의 도식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그것의 표지가 바로 비어 있는 무덤입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으려고 무덤을 찾았으나, 그들은 인간적인 계획을 뒤집어 새롭게 변모시키는 부활하신 분을 만나게 됩니다. 열려 있고 비어 있는 무덤에서 새로운 무엇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죽음의 권세는 끝이 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기쁜 소식으로 역사의 새로운 문이 열립니다.

부활 신앙 고백

그리스도교는 예수 부활에 대한 체험을 축적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체험을 신앙 고백의 형태로 정리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믿습니다(1테살 4,14). 만일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고(1코린 15,13),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현세뿐이라면(1코린 15,19) 그리스도의 부활은 의미가 없음을 신앙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살게 될 것임(1코린 15,22)을 신앙 고백합니다. 마지막 순간 죽은 이들은 불멸의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모두 변화할 것을 믿고(1코린 15,52), 썩는 몸은 불멸의 옷을 입고, 죽는 몸은 불사의 옷을 입을(1코린 15,53) 것을 믿습니다.

아울러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싶다(필리 1,23)는 소망을 키웁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음을 믿고(콜로 2,12),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듯이 아들도 살리고 싶은 사람들을 살릴 것임을 믿으며,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을(요한 5,21 이하)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신앙 고백합니다.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신앙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생물학적인 죽음은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이제 죽음을 넘어 생명으로 건너갑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죽으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을 위해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2코린 5,15). 부활은 새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요한 3,23) 새로운 삶입니다.

부활의 삶 - 돌을 치우는 삶

부활의 의미를 헤아리면 이제 그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돌을 치우면 생명을 다시금 되찾게 될 것이고, 그 결과 부활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무덤을 막은 돌은 우리의 삶의 흐름을 왜곡시키는 장애를 상징합니다. 우리 가운데 제법 많은 분들이 돌에 짓눌려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짓누르는 돌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앓고 있는 질병일 수도 있고, 어떤 지적인 관념일 수도 있으며, 정치적 또는 사회적 제도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를 얽어매는 온갖 부자유일 수도 있으며, 양심의 고통, 심리적 억압과 불안, 타인을 향한 증오심과 적개심일 수도 있습니다. 나만이 지고 가야할 과거의 짐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지나친 소유욕과 물욕, 명예와 권력의 추구일 수도 있으며, 교만, 아집, 독선, 이기심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돌에 짓눌려 살아가는 한 우리는 부활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부자유합니다. 살아 있다는 말을 들으면서 살고 있으나 실상은 죽음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삶이란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돌을 치우는 것입니다. 치워진 돌은 죽음을 이긴 생명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돌처럼 굳어버린 심장이 살 심장으로 변화됩니다. 돌을 치우면(요한 11,39) 우리 안에 죽어 썩어갔던 많은 것들이 다시금 생명을 회복합니다. 우리를 묶고 있는 띠와 얼굴을 가리고 있는 수건을 풀어줍니다. 그렇게 되면 불안과 부자유의 사슬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됩니다. 해방감을 느끼며 넉넉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의 삶을 짓누르고 있는 온갖 돌을 치우고 부활의 삶을 살기로 다짐하는 우리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큰 축복과 평화를 내려주시기를 청합니다. 우리가 죽음을 넘어 부활을 믿는다는 사실 때문에 모든 교구민들이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교구 설정 40주년을 맞이하여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믿음의 공동체로 쇄신되어 태어나도록 교구민 여러분의 동참과 협력을 기대합니다.

2006년 안명옥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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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교우, 수도자, 성직자 여러분! 곳곳에서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감지하는 계절입니다. 이 아름다운 생명의 계절에 우리 신앙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대축일을 경축하고 기념합니다. 모든 교우, 수도자 그리고 성직자 여러분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가득 받으시고 기쁜 부활 축일 맞이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지난 40일 동안 사순 시기를 보내면서 고행과 보속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고 그분의 부활을 기다려왔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참담합니다.

우리의 현실

지구촌에 금융위기가 닥치고 그 결과는 경제 위기로 치닫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체할 수 없는 무기력 속에서 힘겹게 살아갑니다. 절망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온갖 욕망과 탐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잠시라도 틈을 내어 자신과 자신의 삶을 깊이 들여다볼 겨를도 없습니다. 모든 가치와 판단의 기준은 돈입니다. 우리 모두가 돈벌이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경제가 어려운 시절이니 요즈음은 더욱 더 돈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부서지고 깨어진 세계 속에 많은 사람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의 삶이 이토록 부서지고 망가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인간의 탐욕과 하느님 없는 삶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금융위기와 경제위기의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욕심입니다. 특히 돈 그리고 재물에 대한 탐욕과 욕심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탐욕과 욕심입니다.

아울러 저는 개인적으로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부서지고 깨어진 세계의 원인은‘하느님 없이’살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싶습니다. 사도 바오로는“이 세상에서 아무 희망도 가지지 못한 채 하느님 없이 살았다.”(에페 2,12)는 사실을 주지시켜 주고 있습니다. 아울러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1테살 4,13) 말라고 격려하십니다.

부서지고 깨어진 세계를 자초한 것은 우리의 자업자득입니다. 인간이 원인을 제공했으므로 인간에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스스로 이러한 책임 의식을 갖추고 있으며, 이 좌절과 절망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확보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디에서 좌절과 절망을 넘어설 수 있는지도 물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가 믿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와 고민을 해결 하도록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외면하면 하느님 없이 살아갑니다. 입으로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하느님을 믿어야 하는 절대 절명의 순간에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외면합니다.

우리의 희망 - 하느님과 십자가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안다면 하느님 없이 사는 삶을 버리고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삶을 선택할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온갖 역경과 곤경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고, 온갖 고초에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시고,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십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고, 마시며,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하늘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의 새까지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마태 7,25-26)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입히시거늘,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하시며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7,32-33)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8.11)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왜 이러한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느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 믿는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 하느님 역시 우리를 알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멸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를 결코 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합니다.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알고, 믿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나를 넘어 너를 향한 삶 - 부활의 삶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삶과 죽음, 곧 ‘모든 이를 위하는’ 그분의 구원 활동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모든 이를 위한 그리스도의 활동을 우리의 존재 방식으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부단히 ‘나’ 이외에, ‘이웃’을 위해 살아갈 것을 요청하십니다. 그 결과 우리 역시 모든 이를 위한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모든 이를 위한 존재로 산다는 것은 모든 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벗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말씀하셨음에도 우리는 지금까지 나만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나만을 위한 삶이 이제는 무너지고 깨어지고 망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를 위한 삶으로 우리의 길을 바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남은 것은 너를 위해 사는 길밖에 없지 않습니까? 달리 다른 길이 있습니까?

너를 위해 사는 길이 바로 나를 위해 사는 길이라는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 길이 나와 너를 살리는 공생과 상생의 길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의 것을 이웃과 나누고, 내가 지금 누리는 행복마저도 어쩌면 이웃의 희생의 대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웃을 위해 나를 양보하고 희생하여 이웃을 살리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탐욕으로 어지러워 진 사랑의 질서와, 너까지도 포함하는 사랑의 사회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가난하게 태어나시고, 자기의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이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부유하고 자유롭게 사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고 죽어야겠다는 결심을 세워야 합니다. 하느님 없이 살아 온 우리의 삶을 이제는‘하느님과 함께’라는 삶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결단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공멸뿐입니다. 왜냐하면‘하느님’이라는 단어는 인류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풀어 낼 수 있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는다 할지라도 결코 아쉬워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의 부활의 힘과 능력을 믿고, 그분의 고난에 기꺼이 동참합니다. 이렇게 삶으로써 우리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시는 그분의 부활에 우리도 동참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부활이라는 영원한 생명 이외에 우리가 달리 욕심을 부려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교구민 모두가 죽음을 넘어 생명의 부활로 건너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신앙 고백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에 긍지를 느끼시기를 기원합니다. 경제가 어렵다고 기죽어 지내지 마시고 어려울 때일수록 나누며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부활하신 분께서 우리들의 믿음의 여정에 동행하시어 언제나 우리와 함께 머무시기를 기원합니다.

2009년부활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교구장 안명옥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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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교구장 부활 담화문“

십자가 - 하느님의 사랑 방식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교우, 수도자, 성직자 여러분!
곳곳에서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감지하는 이 아름다운 계절에, 우리 신앙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대축일을 경축하고 기념합니다. 하느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기(사도 2, 24)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 부활하신 분께서 선물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가득 받으시고, 기쁜 마음으로 부활 축일을 맞이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절대적이고 더할 나위 없는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인간이 생각할 수조차 없고, 인간의 말문마저 막아버리는 하느님 사랑의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희망 속에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머물 수 있는 곳 그리고 머물러야 하는 곳은 언제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소통의 부재와 거부당한 사랑

오늘날 우리는 소통이 부재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 세상은 소통대신 분열로 가득 차 있습니다. 상대의 말문을 막아 버리고, 무조건 자신의 말을 먼저 들어 주기만을 강요합니다. 결국 소통의 부재는 관용과 사랑의 부재에서 출발하여 오해와 독선을 불러일으킵니다.

십자가는 소통과 친교를 거부당한 사랑의 결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과 구원을 가져다주는 복음의 선포 안에서, 인간과의 소통과 친교 안에서,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며 당신의 사랑을 선사하십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거부에 부딪힙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느님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인간을 마주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강하게 표현하는 방식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사건

십자가 사건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사랑 사건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 사건은 자신의 모든 것을, 심지어 자신의 생명마저 내어놓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로 하느님을 거부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유로 인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며 인간과 소통하고 친교를 맺으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에 앞서 인간을 찾아오시고, 인간보다 먼저 인간과 함께 동행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목숨을 걸고 인간을 사랑하시고,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을 당신 십자가의 죽음으로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랑 때문에 당신을 한없이 낮추십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이시지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이로써 예수께서는 죄와 죽음에 놓여 있는 인간의 처지에 동참하십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처신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위한 아버지의 자기희생, 아버지를 위한 아드님의 자기희생, 성령을 위한 아버지와 아드님의 자기희생으로 십자가의 어둠 속에 들기까지 전적으로 관여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버림받은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모습은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이사 52,14),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으며(이사 53,2), 멸시, 학대, 천대받는 모습이었습니다(이사 53,3-4).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에게서 가장 멀리 있음을 그리고 당신께 대한 인간의 가장 강한 부정을 의미하는 십자가를 하느님께서는 감수하며 당신 사랑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십자가는 하느님께 맞서는 인간의 거부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이 생동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고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방식이며,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십자가의 역설

부활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 전제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죽어야만 새로운 생명이 돋아난다는 역설이 부활의 전제입니다. 이러한 죽음은 희생의 모습으로, 인내의 모습으로, 양보의 모습으로, 관용과 침묵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순교의 모습으로 그리고 자기 퇴출의 모습으로도 나타납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을 벗어나 타인중심적인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나를 뒤로 물리고 너를 나보다 먼저 앞세우는 삶의 모습으로도 나타납니다. 자신을 희생시키고 죽이고 깨트리는 일 없이는 십자가의 죽음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을 버리고 던지는 예수님의 죽음이 있었기 때문에 인간의 구원이 비로소 가능합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누군가의 죽음 위에 새로운 부활의 생명이 싹트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르려고 하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의 방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그분처럼 추방당하고 미움받고(마르 13,13; 요한 16,2 참조) 고난을 겪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요약하고 완성하고 계시합니다. 그분은 죽도록 하느님을 섬기고 인간에게 봉사함으로써 철저한 순종과 완전한 봉사 한가운데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역설을 우리는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무엇이 구원인지는 십자가를 구체적으로 지고 따름으로 알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삶 속에서 온전히 믿고 따름으로 밝히 드러나게 됩니다. 십자가를 따름과 부활에 대한 믿음의 길을 떠난다는 것은 생명과 마주한 죽음의 어둠을 감지하고 목숨을 다해 저항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폭력과 죄와 죽음을 똑바로 응시하고 고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들 안에서 우리는 고통받고 희생당하는 모든 이의 울부짖음을 한데 묶어 고발하고 해방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그분의 십자가에서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하느님의 사랑 방식이 계시되고 있으며, 우리는 그분을 따름으로 우리 십자가의 길들 역시 부활을 향해 열려 있다는 것을 알고 믿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마태 16,24) 한다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기꺼이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주님께서 가신 그 길을 따르고자 다짐합니다. 이 길을 따르면 부활이 가져다주는 결실, 곧 영원 생명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와 순교 영성

저는 올해 발표한 사목교서에서 “순교 영성으로 세상을 복음화”하자는 목표를 제시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에서 순교 영성의 원형과 핵심을, 그리고 그분의 철저한 이타적 삶에서 순교 영성의 정점을 찾는 삶을 살자고 호소하였습니다. 죽음으로 영원을 사는 순교 영성이라는 본보기를 세상에 보여줌으로써 복음화에 주력하자고 다짐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하심을 기뻐하고 경축하면서, 또한 세상의 온갖 모순들과 우리 사회의 소통부재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키워 나가고, 죽음의 어둠 속에서도 부활의 빛을 밝히며, 희망의 삶을 살자고 여러분 모두를 초대합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의 큰 축복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향한 갈망의 끈을 놓치지 말고 붙잡으시기를 기원합니다.

2010년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교구장 안명옥 주교
  | 04.03
447 45.6%
부활 - 영원한 삶을 향한 여정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교우, 수도자, 성직자 여러분!
곳곳에서 생명의 기운을 감지하는 이 계절에 우리 신앙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대축일을 경축하고 기념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약속하시는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으시고 부활 축일을 기쁘게 맞이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사순 시기를 보내면서 우리의 삶 속에 스며들어 있는 죽음의 세력을 떨쳐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면서 그분의 부활과 참 생명을 체득하는 길을 걸었습니다.

1. 부활 사건과 신약성경

신약성경은 부활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제공해주는 가장 기본적인 텍스트입니다. 이 텍스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다양한 진술과 고백을 전해줍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은 단지 사실에 입각한 사건만을 다루지 않습니다. 그 대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며(로마 10,9),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다(1코린 15,3-5)는 선언과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라는 신앙고백을(1테살 4,14) 더 중요하게 다룹니다.

2. 부활 사건과 하느님의 행위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온 유다에서 일어 난 사건”(사도 10,36 이하)으로 파악합니다. 이 사건을 모든 것을 결정하시는 하느님의 행위와 연결시킵니다. 하느님의 행위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켜지신 우리 주 예수님” 또는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되살아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마 4,25) 와 같은 표현을 통해 드러납니다. 아울러 하느님의 행위는 “하느님께서 주님을 다시 일으키셨으니, 우리도 당신 힘으로 다시 일으키실 것입니다”(1코린 6,14).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보여주시는 행위”(에페 1,19; 콜로 2,12 참조)를 포함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느님의 행위를 통해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만나는 하느님은 “다시는 죽음의 나라로 돌아가지 않으시고, 육신은 부패하지 않으시며, 죽음에 사로잡히지 않으시는 분”(사도 13,34-35.37)이시므로 죽음은 더 이상 그분 위에 군림하지 못합니다.

3. 부활사건과 그 의미

부활 사건은 진실로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부활 사건 그 자체 안에 부활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부활의 의미를 함께 정리해 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그분의 부활을 계시하며 완성합니다. 그분의 전 생애는 죽음을 향하여 진행되고 있으며 또한 죽음을 통해 결정됩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분의 발현을 통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일으켜지시어 올림을 받으신 분이심을 믿습니다. 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향하여 열려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 죽음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으로 탈바꿈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은 “하느님의 힘으로 지금 살아 계십니다”(2코린 13,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이 가져다주는 생명의 힘은 부활에서 완성됩니다. 이는 그분의 죽음이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그 자체가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임을 드러냅니다. 이 생명은 죽음에서 해방되어 죽음을 무력하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이 생명은 또한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묵시 2,8)를 의미하고, “나는 죽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있는 이”를 의미합니다. 부활이 가져다주는 이러한 생명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생명(로마 6,8), 하느님의 힘(2코린 13,4)으로부터 나오는 생명, 하느님의 선물로서의 생명이라는 특성을 지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과 인류의 근원적인 상황까지도 변모시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가 막강한 힘으로 경험하는 권력들은 그 통치력을 상실합니다. 이로써 세상의 권세와 권력의 무장은 해제당합니다(콜로 2,15).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펼치시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 위에 뛰어나게 하십니다.”(에페 1,20-21)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사상의 흐름, 이념의 지배 앞에서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권력들이 발휘하던 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너져 내리기 때문입니다. 죽음, 곧 “마지막 원수”는 파멸에 이르며, 그 결과 그리스도의 통치가 시작됩니다(1코린 15,25-26; 콜로 1,13; 2티모 2,12). 이제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날 것이고(요한 12,31), 부활하신 분께서는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세상의 권력이 행사하는 저항과 오만의 힘은 무너져 내리고 맙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분께서는 세상을 위해 세상 안에서 존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결과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이어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내가 너희에게 위임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 이하 참조)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 존재를 근본적으로 변모시킵니다. 인류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돌아가신 그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분 안에서 용서를 받고 그분과 화해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으로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사도 5,31) 아울러 부활하신 분께서는 인류에게 새로운 시작과 확실성을 제시해 주십니다(루카 24,30 이하; 요한 21,5; 사도 1,4; 10,41 참조). 만일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지은 죄 안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1코린 15,17). 그러나 지금 그분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으며, 그분의 십자가를 통하여 인간은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고(로마 5,10; 2코린 5,18 이하), 의롭게 되었으며(사도 13,39; 26,18; 로마 4,25; 5,9), 성스러움을(1코린 1,30; 콜로 1,21-22; 에페 5,26)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들에게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길을 열어 보여줍니다. 부활하신 분에게 의탁하고 순종함으로 생겨나는 믿음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분께서 주시는 최상의 선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습니다.”(1코린 15,17)

만일 우리가 부활하신 분을 믿고, 그분에게 속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으므로, 우리도 부단하게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로마 6,4; 7,4; 사도 3,26; 26,16 이하; 26,19-20). 옛 인간의 껍질을 벗어버리고 새 인간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만일 내가 그리스도를 얻는다면,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의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고,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필리 3,9 이하) 희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임을”(로마 14,7 이하) 거듭 마음에 새기며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교우, 수도자, 성직자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신앙인들의 존재 원리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죽어야만 산다는 믿음의 역설을 받아들임으로써 부활하신 분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약속하시는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여 부활의 힘과 능력을 체험하도록 기원합니다. 부활은 죽음의 순간에 그 참 모습을 드러냅니다. 절망의 순간에 희망은 그 진면목을 드러냅니다. 부활하신 분의 큰 축복 속에 영원한 생명을 향한 여정에 동행하시도록 여러분 모두를 초대합니다.

2012년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교구장 안명옥 주교
  | 04.07
447 45.6%
[마산]“그리스도 - 죽음에서 부활하신 우리의 희망”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들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15) 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그리스도교 복음 선포 전체를 위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매우 단호하게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복음 선포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로부터 부활하셨다는 증언에서 자라납니다.

만일 우리가 이 부활에 대한 증언을 배제하면, 그리스도교의 믿음은 죽은 것이 됩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제할 때라야 세상과 인간의 상황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것이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부활 사건

우리는 부활하신 분을 만난 증인들의 증언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들 역시 너무나도 엄청난 사건 앞에 휘청거렸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꼈던 경험의 지평을 부수어 버리는 전혀 새로운 현실에 직면하였습니다. 이들이 실제로 체험하는 부활은 그들을 압도하고 증언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질 정도로 완전히 다른 차원의 현실이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사람의 아들이“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9,9)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제자들이 의문을 가졌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서로 묻기도 하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부활사건을 현실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고, 부활 신앙을 거부하는 태도를 취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신약의 증언들이 전하는 소식에 따르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과 소멸이라는 법칙에 더 이상 예속되지 않으면서 새로운 삶 안으로 <들어서는 사건>입니다. 이 <들어서는 사건>은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고, 새로운 형태의 미래를 열어주는 관문입니다. 새로운 삶은 새로운 세상을 전제합니다. 그분은 다시 살아나시어 다시금 죽어야만 하는 시신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영원히 사시는 분이십니다.


부활에 대한 고백 - 작은 겨자씨

모든 생명의 역사에서 새로운 것을 가능케 하는 원천들은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아서 지나치기 십상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겨자씨와 같다(마태 13,31-32 참조)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작은 겨자씨는 그 안에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역시 가장 작은 겨자씨입니다. 무릇 위대하고 힘 있는 것은 가장 작은 것에서 출발합니다. 작은 겨자씨는 결국 큰 나무로 성장합니다.

로마 서간은(10,9),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고백은 구원을 가져다줍니다. 그것은 우리를 진리로, 구원으로 이끌어 갑니다. 고백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현이고,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내가 무엇인지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고백은 삶이 됩니다. 이 삶은 부활하신 분의 새로운 실존에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성립합니다.

우리는 부활 고백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고백을 코린토 1서 15장에서 만나게 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15,3) 여기서 복음은 바오로 사도의 서간에 따르면, 여러분이 서 있는 토대입니다(15,1참조).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15,2) “그리하여 나나 그들이나, 우리 모두 이렇게 선포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믿게 되었습니다.”(15,11)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맨 마지막으로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15,4.8)

부활의 전제 - 죽음

코린토 1서 15장 3절은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그분의 죽음은 우연이 아니고 자연사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일어난 모든 것은 심지어, 그분의 죽음까지도 성경의 성취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으로부터 와서 말씀 안으로 들어가 그 말씀을 보증하고 성취하는 사건이 바로 그분의 죽음입니다. 아울러 그분의 죽음 ‘우리의 죄를 위해’돌아가심입니다. 다시 말해‘무엇을 위한’죽음입니다. 이러한 죽음은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의 관계 안에 놓이게 되면서 인간이 하느님처럼 되려고 했으나 스스로의 교만으로 인해 죽음이라는 운명에 던져질 수밖에 없었던 원죄의 결과인 죽음과 구별되는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 차원을 달리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교만과 불손에서 오는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겸손에서 오는 죽음입니다. 그것은 진리에 역행하는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에게로 끌어올리기 위해 인간에게 내려가신 사랑의 완성의 결과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죽음은 속죄를 위한 봉사로서 화해를 가져다주고 백성을 위해 빛이 되어 주는 죽음입니다.

우리의 다짐 - 부활의 삶

사도 타대오가 스승 예수님께 드린 질문을 출발점으로 삼아 부활의 삶을 살고자 다짐하는 계기로 삼기를 제안합니다. 해마다 되풀이하는 부활 사건을 기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부활이 참으로 우리 믿음의 핵심이라면 우리는 그 사건의 참된 의미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타대오는 예수님에게“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요한 14,22) 하고 묻습니다. 온갖 이유로 나 자신도 알아들을 수 없이 고달프게 살아가는 우리 역시 묻고 싶은 물음입니다.

이 물음은 단지 부활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시는 방식에도 관련되는 물음입니다. 하느님께서 무기력하게 드러나지 않게 행하시는 행동 방식은 그분에게만 속하는 하느님만의 방식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과 하느님이 아닌 인간을 구분하는 경계 지점입니다. 그분은 인류의 장대한 역사 속에 서서히 결코 요란하게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당신의 역사를 세우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역사를 주도하는 권력자들과 온갖 인간적인 가치에 몰입하는 사람들은 그분을 철저하게 외면하였고, 처형에 앞장섰습니다. 그분은 고난 받고 죽으셨으나 부활하신 분으로 당신 제자들의 믿음과 신앙고백을 통해 역사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셨습니다. 외적인 힘이나 권력으로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해방과 사랑을 통해 일깨우는 것이 하느님의 존재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심히 들여다보면 언제나 아주 보잘것없이 작은 것이 진실로 위대한 것이 아니던가요? 예수님의 부활이 약속하는 영원한 생명을 통해 행복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2015년 부활 축일을 맞이하며,
마산 교구장
안명옥 주교
  | 04.04
447 45.6%
[마산] “누가 무거운
돌을 치워줄 것인가?” (마르코 16,3 참조)

생명의 기운을 감지하는 이 계절에 우리 신앙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대축일을 경축하고 기념합니다. 모든 교우, 수도자 그리고 성직자 여러분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선물로 주시 는 영원한 생명을 가득 받으시고 기쁜 부활 축일을 맞이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지난 40일 동안 사순 시기를 보내면서 흙으로 돌아가야 할 인간의 운명에 대해 깊이 묵상했고, 고행과 보속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면서 그분의 부활을 기다려왔습 니다.

1. 사순 - 죽음의 연습 이 시기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되새기고, 그분의 부활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기간입니다.

이 시기의 핵심은 자기 절제입니다. 자기 절제는 하느님의 자리와 이웃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나를 뒤로 물러나게 하는 태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중심에서 벗어나게 하여 대신 하느님과 이웃을 중심에 모시는 자세가 필요 합니다. 나를 물러서게 하는 겸손이 요구됩니다. 이 태도를 우리는 자아 포기 또는 자기 비움으로 달리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는 또한 회심이기도 합니다. 회심은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 발상을 전환하여 기존하는 모든 것에서 나를 해방시켜 자유롭게 만들고, 그 자유를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투신하도록 이끌어 주는 힘입니다. 이 힘은 그것이 구체적으로는 단식이나, 금육, 양보, 희생의 모습으로 드러나지만 그 핵심에는 언제나 사랑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사랑의 힘은 나를 죽여 너를 살리는 힘으로 작용 합니다. 이 사랑의 힘은 부단하게 연습을 필요로 합니다. 사랑은 나 중심의 삶에서 하느님 중심 그리고 너 중심의 삶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나를 지우고 하느님과 이웃을 존재하게 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사순 시기는 이 죽음의 예행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는 시간이고, 그 결과 부활의 축제를 생동감 넘치는 축제로 체험하도록 도와주는 시간입니다.

2. 부활 - 생명의 축제 부활은 전대미문의 승리, 곧 하느님의 어린양이 인간의 늑대보다 더 강하고, 하느님의 빛이 어둠보다 더 강하고, 죽음에서 부활 하신 분의 거룩함이 세상의 죄보다 더 강하며, 생명이 죽음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기리는 축제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을 부활의 사람으로 파악할 때 비로소 자신을 온전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막았던 돌처럼 무거운 짐을 지 고 살아갑니다. 사랑받지 못하고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가져다주는 짐, 실패한 사람들이 겪는 아픔과 슬픔의 짐, 절망과 좌절이 가져다주는 짐을 지고서 고달프게 살아갑니다. 우리의 삶이 위험한 경계에 이르게 되면 무엇이 우리를 보호하고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지에 대해 묻게 됩니다. 이 물음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 장에서 늘 만나는 물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핵심은 바로 생 명의 복음입니다. 예수께서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요한 10,10 참조). 그분은 생명의 하느님이시고, 생명을 죽이려고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살리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으로 부름을 받았음을 고백합니다. 생명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는 것을 의미하고,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한한 인간의 생명이 무한하고 영원한 하느님의 생명에 동참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인간의 생명은 거룩하고 존엄 하고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그 시작에서 부터 마지막 끝에 이르기까지 한 순간이라도 거룩하지 않고 존엄 하지 않은 순간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생명이십니다(요한 1,4 참조). 하느님은 죽임 대신 살림을 본질로 하는 분이시고, 자신의 생명을 자신의 것으로만 고집하지 않고 나누어주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주기 위해 육화하셨고, 수난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존재들이 생명을 누리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길, 진리, 생명이신(요한 14,6)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사랑한다면 생명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작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죽음의 물결에 편승하고 반생명의 유행에 휩싸여 흘러갑니다. 힘없는 생명을 보호하지 않고, 지키지도 않고, 죽어가는 생명을 외면하고, 생명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는 거룩한 생명에 대해서마저 도 과학 기술의 이름으로 개입하여 생명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파괴하고 심지어는 생명을 상품화시키고 있습니다. 생명을 목적으로 삼지 아니하고 수단화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곳곳에서 생명 이 경시되고 무시되는 현상을 만나게 되는 것이 일상화 되어버린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상화는 점점 더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시도들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거스르는 일련의 범죄 행위들을 정당화하려는 시 도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범죄를 처벌하지 않으려는 입법의 모색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무거운 짐에 짓눌려 고달프게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을 돌보는 것은 단지 교회에 맡겨진 직 무일 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위임된 사명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아벨은 고문으로 고통 받는 이웃들 안에서, 온갖 억압, 착취, 수탈과 차별을 받으면서 일그러진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웃들 안에서, 폭력과 테러로 무고하게 희생당하는 이웃들 안에서, 곳곳에서 자행되는 살인과 살육을 통해 희생당하는 이웃들 안에서, 비록 맞아 죽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병든 사회 구조의 희생물로서 억울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웃들 안에서도 발견됩니다. 이른바 사회적 약자들은 우리가 외면하고 얼굴을 돌려야 할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으로 감싸고 가슴에 품어서 안고 가야 할 우리의 이웃들입니다. 하느님 없이 살아온 삶의 비참으로 부터 해방되어 행복을 가져다줄 하느님과 더불어 사는 삶으로 초대해야 할 우리의 이웃들입니다.

3. 부활의 삶 - 하느님께서 나누어주시는 생명은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것이 아 니라 세상이 안고 있는 번뇌와 슬픔을 극복하게 해주는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께서는 세상과 인간에게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주시기 위해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이로써 생명은 생명을 필요로 하고, 생명이 생명을 살린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나의 생명을 넘어 너의 생명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하느님의 존재 방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아 인간의 생명을 살리시는 존재 방식을 보여주심으로써 교회 가 세상을 향해 선포해야 할 희망의 근거를 마련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나누어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거부하는 세상은 참된 희망에 대한 꿈을 거부하고 배척합니다. 교회는 하느님께서 나누어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선포하고 나눔으로써 이 세상에 희망을 주는 존재 이유와 사명을 깊이 인식하고, 생명의 소중한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세심한 감각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죽음의 문화와 반생명의 물결에 저항하면서 생명의 회복에 투신해야 합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거부하고 배척하고서는 어떠한 행복도 희망도 꿈꿀 수 없다는 사실 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러한 선포는 생명에 대한 사랑을 전제합니다.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는 생명을 내어놓아야 한다는 하느님의 존재 방식을 교회의 존재 방식으로 구현해야 합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으신 하느님의 존재 방식을 교회가 자신의 존재 방식으로 삼을 때 세상은 비로소 교회가 세상의 희망임을 인정하고 교회가 선포하는 기쁜 소식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언제나 생명을 선택하도록 촉구 하십니다. 우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으시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우리 앞에 내놓으십니다. 우리와 우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믿는 사람 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야 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생명과 불멸의 복음을 보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멸망할 사람이 아니라, 믿어서 생명을 얻을 사람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분께 서 선물로 주시는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 모두 행복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 마산교구장 안명옥 주교 : 2016년 3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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