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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춘천] 희망은 희망, 절망은 절망
조회수 | 1,447
작성일 | 09.06.20
어떤 사람이 모래언덕이 끝없이 이어지는 사하라 사막에서 길을 잃었다고 합니다. 극한의 고통을 견뎌내며 걸어가던 중 사막 한 가운데를 지나는 유목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게 된 그 사람은 유목민으로부터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을 얻게 되자, 다시 걸어갈 용기와 희망이 생겨서, 다음 오아시스가 어디쯤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유목민의 답변이 걸작이었습니다.

“곧장 가세요. 그러다가 다음 주 금요일 쯤에 오른쪽으로 꺾으세요.”

“ ? ........ ! ”

하루 이틀 걷고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우스개 이야기지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누구나 살아가다 보면 사하라 사막을 건너는 것과 같은 시련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럴 때, 고통스럽고 피하고 싶은 마음에 무리수를 두게되면 길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오히려 이런 순간에는,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한 걸음씩 성실히 걸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목표가 뚜렷하고, 중간에 길을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오아시스를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유목민의 답변이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될 것인지, 아니면 절망의 메시지가 될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와 비슷한 난제가 ‘민족의 화해와 일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외견상으로는 분명히 통일의 그날이 오리라는 ‘희망의 메시지’가 선포되는 것 같은데, 실질적인 내용을 들어보면 결코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의 메시지’가 선포될 때가 많아서입니다. 희망을 이야기하는데 절망의 악취가 풍겨 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그래서 진실한 “기도”가 정말로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 18,19)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기도의 힘은 위대합니다. 개인의 기도가 아니라 여럿이 드리는 교회의 기도는 하느님의 심중을 흔드는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불어, 예수님께서 “일곱번이 아니라 일흔일곱번까지라도 용서”(마태 18,22) 하라고 하신 것처럼 ‘무한히 용서’해야 합니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작용하시는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용서하려고 노력할 때, 예화에 등장하는 유목민의 “다음 주 금요일쯤에 오른쪽으로 꺾으세요”하는 답변마저 절망이 아닌 희망의 메시지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광복이후 전개된 세계 질서 재편과정에서 빚어진 분단 상황의 극복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에 적극적이지 못하고 소홀히 한 점을 반성하고, 이 과정에서 생겨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마음 아파합니다.”(대희년을 맞이하면서 한국주교회의가 발표한 ‘쇄신과 화해’라는 과거사 반성 문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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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최성우 세례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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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하나 됨을 위한 용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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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를 바치며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우리에게 ‘용서’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남북으로 분단된 현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용서하지 못해 딱딱하게 굳어져가는, 따스함이 식어가는 이 땅 위에 서있습니다. 올해 초, 북한의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그리고 남한의 개성공단 폐쇄조치로 인해 남북이 어렵게 쌓아올린 평화의 완충지역이 사라지는 모습을 목격하였습니다. 아무런 의미 없이 시간을 되돌려 사드배치 논의 등으로 한반도를 과거 냉전시대의 상황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평화가 아닌 군사적 대결이라는 긴장상태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라는 제1독서의 말씀은 우리에게 약속된 희망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희망으로 들어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진심으로 당신의 말씀을 들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제2독서에서도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은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서로 용서하십시오”라고 하면서, 은총을 나누고 사랑 안에 살아갈 것을 권고하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듣습니다. 무력을 사용하는 서로에 대한 위협은 남북의 통일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단의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갈라지고 상처 입은 155마일의 철책 너머로 이 땅에 화해와 일치를 이루기 위해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통일을 바라는 이들이 살아야 하는 삶의 방식에 대해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흘러야 할 것은 총칼의 겨눔이 아니라 용서와 자비의 마음이어야 하고, 그것이 바로 우리 기도의 이유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남북통일을 위한 우리의 기도는 분단의 아픔을 더 많이 느끼고 있는 실향민과 이산가족들을 위한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평화를 지켜내고 있는 이들에게 희망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와 우리의 다음 세대는 통일된 땅에서 풍요로운 번영을 누릴 수 있도록 축복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9일 기도 기간 동안 통일을 위한 우리의 바람을 하느님께 청하고, 용서의 삶을 살아갈 것을 결심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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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김용석 아우구스티노 신부
2016년 6월 19일
  |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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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하나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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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당신의 모습대로 지어 내신 주님,
저희가 모두 주님을 닮게 하소서.’

‘사랑으로 하나 되신 주님처럼
저희가 서로 사랑하여 하나 되게 하소서.’

문득,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가 무척이나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을 닮으려는 열망과, 사랑을 통한 일치로 그것을 이루려는 노력이 잘 나타나 있지요. 다시 하나가 되는 민족의 원의를 기도하는 오늘, 우리는 용서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이 말씀처럼 우리를 괴롭히는 말씀도 없지요. 무제한적인 용서, 예수님은 그것을 이루라고 하십니다. 또 그것을 보여 주셨지요.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도 못 박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앞에서 우리는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예수님이시니까,
하느님이시니까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것은 도달하기에는 아득히 멀고, 갖기에는 도저히 품을 수 없는 크기로만 여겨집니다.

그리고 남북이 다시 하나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느껴집니다. 너무나 멀고, 너무나 크기만 합니다. 그에 대한 관심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표어도 단지 허공을 향한 메아리로 울려 퍼지기만 할 뿐, 마음을 울리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 우리들 안에서 서로에게 베푸는 용서에 대한 말씀이라기보다는 일흔일곱 번이라도 기꺼이 용서할 수 있는 마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기꺼이 용서할 수 있는 마음, 언제라도 풀어낼 수 있는 열린 마음이 바로 우리에게 원하신 예수님의 뜻이지요. 시시비비를 따지고, 가해와 피해를 밝혀내려고만 한다면 결코 화합, 평화, 하느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실, ‘미움을 갖는 것’이란,
말 그대로 미움을 ‘갖는’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해 얼마든지 버릴 수도, 갖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미움을 털어 내고 바라볼 때, 그 말을 들어볼 때 올바르게 해야 할 말과 행동이 정해집니다. 미움을 품지 않음으로써 용서가 시작되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신 자유로운 삶이 열립니다.

이해득실을 따지는 세상의 논리에
마음을 맡기지 말고, 여러분의 눈으로 보고 여러분의 귀로 들어 올바로 말하고 행동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속에 자리 잡으려 하는 미움과 증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놓으신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하십시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할 수 있는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 안에 가득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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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조영수 마태오
  |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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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조건없는 사랑으로 가능한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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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해야 할 일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저항하였던 많은 레지스탕스 운동가들은 독일군에게 붙잡혀 끔찍한 고문 끝에 처형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붙잡혀 온 사람들 중에는 평범하게 지내며 조용히 살다가 잡혀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이 절규하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였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저항운동을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 내가 왜 이렇게 죽어야 한단 말입니까?” 그러자 순순히 죽음을 기다리던 구석의 저항운동가가 울부짖는 사람을 향하여 이야기합니다.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바로 당신이 죽어 마땅한 것이오. 전쟁은 5년 동안 계속되었고, 수백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무참히 피를 흘렸으며, 수많은 도시들이 파괴되어 잿더미가 되었고 조국과 민족은 멸망 직전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도대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진정 무서운 경고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조국도 벌써 반세기가 지나도록 갈라져 있고, 수많은 이산가족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데, 무심한 세월은 쏜살 같이 흘러 이제는 헤어진 가족의 얼굴조차 기억에서 사라지고, 이제 남과 북의 가족들은 하나둘 땅의 먼지로 천추의 한을 안고 사라지고 있습니다. 남쪽은 배부름 속에, 북쪽은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서로를 향한 증오의 살기만 쌓아가고 있는데, 사랑과 용서를 외치는 신앙인들은 이 모든 저주의 세월을 나 몰라라 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이 죽어 마땅한 일이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남녘과 북녘의 고통 받는 동포들을 위하여 쓰고 또 써도 남을 돈들을 쓸모없는 전쟁의 소모전을 치루기 위해 끊임없이 쏟아 붓는 현실에 우리가 눈을 감고 있다면, 그것이 죽어 마땅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시간과 세월이 흐를수록 통일에 대한 희망과 작은 의지와 기도마저 사라진다면, 그것이 벌받을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차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그 나태함과 무관심으로 받게 될 징벌을 피하고자 또다시 움직여야 합니다. 남과 북의 위정자들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고, 바꾸도록 애써야 합니다. 바꿀 수 있는 길을 찾아 행동해야 합니다. 서로가 소통할 길을 뚫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능력과 한계로 불가능해 보이는 이 통일의 염원을 오늘 주님의 말씀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 18,19).

사랑으로 해야 할 일

창세기의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사 우여곡절 끝에 이집트로 팔려 갑니다.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려갈 때, 요셉이 형들에게 울부짖는 모습이 지금 이 땅에도 들리는 듯합니다. 그가 얼마나 형들에게 통곡하며 살려 달라고 하였을까? 카인과 아벨에게서 보듯, 요셉과 형들에게서 보듯, 또는 이 나라 이 땅에서 보듯이, 모든 인류의 전쟁과 살인은 형과 아우의 혈육의 전쟁이고, 피붙이들의 살인이었던 것입니다. 이 같은 살육의 전쟁을 그치게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서로에 대한 용서뿐입니다.

요셉은 피눈물 나는 고통과 슬픔 속에 이집트 파라오 왕 다음가는 재상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때 형들이 이스라엘에 기근이 들어 이집트로 건너와 요셉을 만나게 됩니다. 형들은 요셉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요셉은 증오의 한 맺힌 형들을 알아봅니다. 그러나 현자 요셉, 착한 요셉의 증오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가 형들을 용서하는 장면은 실로 감동입니다. 그는 신하들을 모두 물러가게 한 뒤, 형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며 큰 소리로 목 놓아 웁니다. 그 울음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이집트 전역에 들렸고, 파라오의 궁궐에도 들렸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창세 45,1-2). 요셉은 자신이 이집트에서 겪었던 수많은 아픔의 세월 때문에 목이 메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형들을 용서해야겠다는 결심으로 울었을 때, 이미 그에게는 환희의 기쁨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울음소리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울음소리였을 것입니다.

이제 진정 기도해 봅니다. 요셉의 용서의 기쁜 울음소리가 이 땅에도 울려 퍼지길 말입니다. 남과 북의 형제자매들이 서로를 용서하며 부둥켜 한 몸이 되어 그동안 막힌 증오의 한을 강물 같은 울음으로 모두 뚫어 버리길 주님께 간청해 봅니다. 우리가 진정 사랑할 때, 이유와 조건 없이 사랑할 때,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하느님의 약속이 이 민족, 이 땅에서도 가능할 것입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또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흩어 버리신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신명 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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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배광하 신부
  |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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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북으로 갈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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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6월 25일을 앞둔 주일에
한국 천주교회는 남북통일 기원 미사를 봉헌합니다.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에서 시작하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로 바뀌어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방과 더불어 시작된 분단의 역사 70여년을 보내면서, 우리의 마음속에는 증오와 상처의 앙금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용서’ 라는 복음적 가치를 외면한 채 신앙인마저도 돌처럼 굳은 마음을 지니며 살아가고 있지 않나 반성해 봅니다.

‘자비의 특별희년’을 지내며
기나긴 분단의 상처가 치유되기를 희망하며 기도합니다. 춘천교구는 지난 4월 18일 ‘천주교 함흥교구 사제 양성을 위한 협약’을 맺었습니다. 2005년부터 춘천교구장이 함흥교구장 서리를 겸직하는 걸로 바뀌었기에 가능한 협약입니다.

이에 따르면, 함흥교구 소속 사제직을
지망해 선발된 신학생은 춘천 교구 신학생과 똑같은 교육과정을 거친 뒤 부제품을 받을 때 춘천교구에 입적하게 됩니다. 사제품을 받은 뒤에도 춘천교구 소속 사제로 사목활동을 하지만, 통일이 되어 함흥교구에서 사제가 사목할 수 있는 여건이 되면 곧바로 자신의 교구인 함흥교구로 복귀하게 됩니다. 성소자 모집은 남북의 화해와 일치, 북녘 복음화에 관심이 있는 젊은이는 누구나 전국에서 지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춘천교구도
북쪽 강원도에 여러 본당을 가지고 있습니다. 통일이 되면, 함흥이 아니라 그곳에도 가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부족한 사제를 메우기 위해 수도회와 다른 교구에서 파견을 받아 유지하는 상태입니다.

그나마도 향후 10년가량
같거나 적은 수의 사제가 활동할 것이라는 낙관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함흥교구 사제 양성이 반가우면서도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그러한 이유입니다. 함흥교구 성소자를 많이 받아놓고 통일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결코 아니리라 봅니다.

함흥이든 춘천이든,
통일이든 아니든, 미래를 향한 성소계발은 절실한 요구가 되었습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에페 4,29) 은총을 가져다 줄 이들이 많이 생겨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놓으신 것처럼, 우리도 눈앞의 이익과 현실에 안주하기보다 교회와 세상을 위하여 사랑 안에서 살아가기를 마음 모아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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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엄기선 베네딕토 신부
2016년 6월 19일
  |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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