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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무덤에서 요람까지 사제와 함께
조회수 | 2,696
작성일 | 09.07.04
오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김대건 안드레아사 사제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유다인들은 토라를 배우는 것만이
유다인이 살 길이라는 생각에 예루살렘 성전을 구할 수 없다 하더라도 토라와 그것을 가르치는 랍비는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또한 유다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만일 자기 아버지와 랍비가 한꺼번에 해적에게 붙잡혀 노예시장으로 팔려 갔는데 돈이 한 사람을 구할 정도밖에 없을 때에는 랍비를 먼저 구해야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자식을 이 세상에 데려왔을 뿐이지만 랍비는 그를 영원한 세계로 인도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유다교에 랍비가 있다면 우리 가톨릭 교회에는 사제가 있습니다.
사제는 자신의 삶을 통해 영원한 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의 요람에서부터 무덤까지 사제를 필요로 할 때 그들과 늘 함께 있으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그 영혼을 제관이 되어 바칩니다.

그러한 사제는
하느님 아버지를 향하는 그리스도를 닮은 존재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제가 떠난 자리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향기를 맡을 수 있어야 합니다(2코린 2, 15참조). 그리고 신자들은 사제가 남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위로를 받고 희망을 가지며 신명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제는 본디가 유혹을 받는 사람입니다.
사제들의 모델이신 예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40일간 단식을 하면서 기도를 하는 동안 세상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유혹은 단순합니다.
포기하고 편하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혹으로 시작된 예수님의 공생활은 잡히시기 전에 하느님께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 36)라고 기도하시는 등, 당신 사명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하고
그 유혹을 이겨내십니다. 예수님을 닮아야 하는 사제도 역시 유혹을 받는 존재입니다. 사제가 되기 위하여 많은 유혹을 받으며, 사제가 된 후에도 많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자신이 지고 살아가던 십자가를 다 내려놓을 때까지 유혹을 받습니다.

사제들은 예수님처럼 많은 유혹을 받지만
예수님처럼 그 유혹을 이겨내며 살아간다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은 많은 유혹을 이겨내고 불꽃같이 사셨던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에게 한국의 성직자들을 위해 도움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제들은 더욱 힘을 내어 유혹을 이겨내고 신자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착한 목자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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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원석 신부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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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하여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이미 뜻하신 구원계획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때문에
주님께서 이르신 가르침은
구약성경이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과 약속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다만 세상이 잘못 생각하는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일러 주셨고
세상이 잘못 받아들이는 하느님의 사랑을
제대로 느끼도록 해 주신 것이지요.

오늘 독서가 전하는 즈카르야의 억울한 죽음은
주님께서 “예언자 아벨의 피부터 제단사이에서 죽어간 즈카르야의 피까지”
하느님께서 기억하시는 일이심을 밝힌 바 있습니다.
정말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라는 걸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그들처럼 억울하게 죽어가는 일을 피하라고 이르신 것일까요?
세상에서 당하는 억울한 일들은
하느님께서 “조심하여라”고 이르신 대로
조심하지 않은 결과라는 말씀일까요?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 모두가 조심하여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조심
세상의 눈치를 보면서 적당히 비위를 맞추라고 가르치시는 걸까요?
순교자의 피도
결국 “조심하여라”는 이르심을 무시한 결과라는 뜻일까요?

세상은 영악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많은 것에 몸을 사리고
하나 뿐인 목숨을 아끼라고 말합니다.
틀리지 않은 말입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고
천만금을 주고도 되살 수 없는 우리의 생명이니까요.
때문에 우리는 정말로 많이
너무나 흔히
그리고 거의 모든 일에
주님의 뜻에 내 생각을 섞습니다.
굳이 미움을 받을 까닭이 없다는 생각이고
서둘러 주님의 뜻을 실천해 봐야
그분의 때가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기도 합니다.
그리고 훨씬 더 많이 우리는
이번만 잘 넘어가서
다음에는 제대로 주님을 섬기겠다고 생각하고
이번만 봐주시면
다음부터는 하느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혹은 이번 한 번만 잘 되게 하고 살려주시기만 한다면
이제부터는 주님의 일만 하겠다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목숨을 버리는 순교의 큰 십자가가 오면
그분을 위해 장엄하게 순교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지요.
지금 주어진 작은 십자가를 피하기 위해 타협하고
지금 살아야 할 주님의 뜻을 내던지며
세상에 굴복하면서
때문에 성령을 외면하고 슬프게 하고 탄식하게 버려두면서
생각만
멀쩡하고 거룩한 척 하고 있으니
얼마나 치사하고 부끄러운 모습인지요.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행위는
서서히 그분으로부터 멀어지는 신호라는 데 있습니다.
이야말로 이제는 그분을 향하지 않는 길로 들어섰다는
빨간 불이 켜진 상태입니다.

그분을 따르는 길은
그분을 닮아 십자가를 지는 일은
멋지고 대단하지 않은 것으로 이루어지고
잡다하고 혹은 교활하고 너저분하고 또는 시시한
우리의 일상 안에서 선택됩니다.
때문에 오늘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생활하는 구석구석,
그분의 뜻을 지나치고 때론 무시하면서 살아가는 지를
조심 조심 살피라는 의미로 새깁니다.
지금 내가 행하는 이 생각과 말과 행위가
그분의 것인지를 일일이 깨어 살피라는 이르심이라 믿습니다.
세상에게 이해받지 못할지라도
걱정하지 않고
세상에게 박해를 받을지라도
오히려 그분의 사랑을 믿고 희망하는 일이야말로
그분의 사랑을 부어주실 수 있는 통로이며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그것만이 우리 마음에 하느님의 사랑이 채움 받는 유일한 길이니까요.
마침내 그분의 이름 때문에
미움 받는 일마저도 기쁨으로 생각하는 일이 순교입니다.
모든 순교자들은
자신의 죽음을 면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도
배교로 얻게 될 영화는 충분히 달콤하고 탐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 날 그 시간
하느님의 영께 스스로를 맡겨드리지 않았다면
결코 죽음을 선택하지 못했을 터입니다.
하느님의 영을 가진 사람은
하느님의 영이 이르시는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의 미움이나 평가를 넘어선 그분의 사랑에만 매달리기에
어떤 처지나 어떤 상황에서도 평화롭습니다.
그의 눈은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임하신 성령께서 힘을 주며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에게 약속된
주님의 평화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살아가기 위해서
지금 내 안에서 생성되는 모든 것
내 바깥으로 표현되는 모든 것에
내가 아닌 하느님의 영이 말씀하시도록 하는 일,
참으로 내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을 드러내고 살아가는 지
세심히 살펴야 한다는 이르심을 새깁니다.
정작 우리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믿음을 잃는 일
희망을 버리는 일
사랑을 택하지 않는 일임을 기억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믿고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하느님의 자비에 감격하는 삶일 때에 그분께
자신을 맡긴 평화로 담대한 삶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순간 순간을
그분께 맡겨 순명하는 사람일 때에만
주님의 영에 이끌림 받는 의탁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은
그리스도인의 자랑임을 기억하는 우리이기를 바랍니다.

매일 매 시간
하루에도 수없이 많이 그분을 밀어내고
내 생각을 취하면서
환란이 아닌 안락을 선택할 때
사랑이 아닌 냉정함을 살아가는 모습이 배교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장재봉 신부
  |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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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의 마지막 반려자(伴侶者)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산상설교(5-7장)와 기적사화(8-9장)에 이어 기록된 파견설교(10장)의 한 부분이다. 예수께서는 먼저 12제자를 선발하시고(2-4절), 그들을 파견하시면서 선교수행지침(5-15절)을 하달하신다. 스승인 예수께서 제자들의 파견을 마치 양들을 이리들 가운데로 보내는 것에 비유하시는 것을 보면(16절),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는 뻔한 일이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살아 계시는 동안에 일이 나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죽음 이후에 복음 선포자와 신자들이 당하게 될 박해를 미리 예고하시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의 박해예고와 두 가지의 위로약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유다인들과 로마제국으로부터의 박해예고(17-18절) - 성령에 의한 증거보장 약속(20절)과, ② 가족의 고발과 세상의 미움예고(21-22절) - 종말론적 구원보장 약속(23절)이 그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을 포함하여 초기 교회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 신앙은 끊임없이 박해를 받아왔다. 그러나 그 모든 박해의 순간에 신자들은 예수님의 약속에 따라 성령으로 충만하여 복음을 증거 하였으며, 끝까지 참고 견디어 냄으로써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2000년 그리스도교회의 역사는 바로 이러한 순교의 역사이다. 그 역사 속에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머리 숙여 깊이 경축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서 계신다. 그분은 우리 한국교회의 첫 사제이시고 한국의 모든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시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1846년(병오박해) 9월 16일 새남터 백사장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셨다. 김대건 신부님은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산 45의 1번지에서 아버지 김이냐시오와 어머니 고울술라의 아들로 태어나 1836년 15세의 나이에 당시 프랑스 선교사 모방 신부님에 의해 안드레아로 세례를 받고, 즉시 최방제, 최양업과 함께 중국 마카오로 비밀리에 유학을 떠났다. 성품이 바르고 재능이 출중했던 김대건은 5년간 유학생활 중에 라틴어, 불어, 영어, 중국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한 학생이었다. 당시 마카오 반란으로 인해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난을 가서 롤룸부이에서 지내시기도 했다. 롤룸부이의 맨도사 가정은 아직도 찾아오는 한국인들에게 김대건 안드레아 신학생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본인은 1990년 7월에 그곳을 순례하였다.)

1844년 23세에 만주에서 부제품을 받고 한국에 잠시 입국하였다가, 다시 배를 타고 상하이로 가서 1845년 8월 17일 금가항 성당에서 한국교회의 최초 신부로 성품에 오르게 된다. 8월 31일 라파엘 호를 타고 페레올 고주교님과 다블리 안신부님을 모시고 상하이를 출발하여 9월 28일에 제주도에 도착하고, 그후 42일 만에 충청도 강경리 나바위 교우촌에 도착한다. 신부님은 쉴 틈 없이 사목 하면서 다른 신부님들의 영입을 위해 노력한다. 1846년 6월 5일 또 다른 신부님들 영입을 위해 황해도의 순위도 근처에서 배를 띄우다 적발되어 체포, 서울로 압송되어 갖은 문초와 형고를 받으시고 9월 16일 사형장인 새남터로 끌려가셨다. 신부가 된지 1년 30일, 향년 26세의 꽃다운 나이에 순교하신 것이다. 신부님은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께서 한국의 다른 순교자 78위와 함께 복자품에 오르셨고, 현 요한바오로 2세 교황께서 한국선교 200주년 기념 행사를 위해 방한하신 중 1984년 5월 6일 다른 복자 102위와 함께 성인품에 올려주셨다.

우리는 한국교회의 오늘을 있게 만든 어제의 주역들 가운데 죽음으로써 한국교회의 초석을 놓았던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성인을 기념하고, 그 천상탄일을 경축한다. 성인의 죽음은 불의의 사고도, 자신의 실수도, 강요당한 죽음도 아니었다. 신부님의 죽음은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1고린 10,31) 증거의 죽음이었고,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비운" 선택의 죽음이었으며, "스승을 닮고자 하는" 적극적 죽음이었다. 모든 순교자의 죽음 곁에는 마지막 반려자(伴侶者)가 있었으니 이는 곧 "누구든지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면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마태 10,39)는 예수님의 말씀이었다

박상대 신부
  |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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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성인의 삶을 본받아

간절한 그리움으로 하늘을 바라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기도한 적이 있는가? 텅 빈 가슴이 되어 속이 후련하도록 울며 뉘우쳐본 적이 있는가? 그런 마음으로 성사에 임한 적이 있는가? 사도들, 순교자 성인들처럼 성경 말씀과 교회 교리에 따라 열정적인 선교와 신앙의 삶을 살아본 적이 있는가? 순교자 성인의 축일에는 항상 먼저 이런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오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인 성 안드레아 김대건 사제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1821년 출생한 성인은 16세 때에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에 가서 공부하였고, 그 후 1845년 상해에서 사제로 서품된 후 선교지요 박해지였던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 다음해인 1846년 붙잡혀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성인의 삶은 이 땅에서 일어난 참혹한 박해사의 일면을 잘 보여줍니다. 박해로 인한 아픈 역사 안에는 순교의 고귀함이 담겨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는 우리 교회의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1984년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사실 순교자 성인에 대한 생각은 우리에게 목숨마저도 포기하게 한 신앙의 값진 가치를 느끼게 합니다. 그러면서 부족한 신앙을 되돌아보고 반성하게 합니다. 나는 주님의 길을 신앙의 확신과 열정으로 걷고 있는가를 살펴보게 합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신앙으로 충만한 그런 순간들이 다 있겠지만, 그런 확신과 열정으로 계속 살고 있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순교의 삶은 먼저 자신을 비우고 포기하는 삶에서 시작합니다. 성 김대건 신부는 교회를 위해 신앙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바친 분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 성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내어놓은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교회에 대한 사랑과 신앙의 열정에 있어 많이 부족합니다. 대충대충 살고 있습니다. 절박함도 애절함도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신앙생활도 그렇게 간절하지 않습니다. 적당한 선에서 해결합니다. 오늘 순교자 성인의 축일을 지내며 우리 모두 성 김대건 신부의 선교 열정과 교회를 향한 그분의 마음을 배우고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순교의 칼날을 망설임 없이 의연하게 받아들였던 그 믿음의 자세를 우리도 함께 지녔으면 좋겠습니다.

예정출 신부
  |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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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한국의 모든 성직자를 위해 신부님의 전구를 구합니다. 성 김대건 신부님께선 1821년 솔뫼에서 태어나 16살에 모방 신부님의 추천을 받아 사제가 되기 위해 마카오로 떠나십니다. 약 10년 후 사제 서품을 받고 1년 1개월 동안의 사제 생활 후에 새남터에서 순교하십니다. 신부님의 옥중서한을 살펴보면 40여 차례의 고문들 속에서도 오히려 큰 어려움에 처해 있는 교우들을 걱정하며 더욱 굳건해지도록 마음을 쓰시는 목자로서의 신부님의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 강론을 통해 신부님의 편지에 드러난 그분의 마음을 살펴보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누어 보려 합니다.

먼저 신부님께선 비유를 통해 교우들이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들을 격려하십니다. 마치 곡식을 온갖 노력을 기울여 심고 가꾸는 농부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어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이라는 땅에서 우리를 심고 가꾸셨으니, 수확 때에 잘 영근 벼가 되어 그분의 사랑에 보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 영근 벼가 된다는 것은 박해라는 어려움을 이겨내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지켜가는 것입니다.

또한 신부님께선 어려움 중에서도 굳건히 성장해 온 교회의 역사를 들어 예수님께서 언제나 교회를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교우들에게 심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세우신 성교회를 어려움 중에서도 성장하도록 보살펴 주셨으니, 한국 교회도 친히 작은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도록 보살펴 주실 것입니다. 박해 중에서도 오직 하느님만을 신뢰하며 하느님의 보살핌에 한국 교회를 맡기는 신부님의 강인함을 보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세상의 근본 원리를 물질에서 찾는 물질주의와 그 물질을 소비함으로써 존재적 갈증을 풀려는 소비주의의 큰 물결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야 하는 소명에 응답하며 살아갑니다. 사회매체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는 수없이 많은 메시지 속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소명에도 응답해야 합니다. 즉, ‘소비하면 행복해진다’는 메시지가 가득한 세상 속에서 ‘사랑하고 용서하며 또 자신을 내어주면 행복하다’는 메시지를 선포해야 합니다. 박해라는 어려움은 아니지만, 이런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해 있는 한국 교회가 하느님의 보살핌을 신뢰하며 이 도전들을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영성을 배워 나갑시다.

부산교구 윤기성 미카엘 신부
  |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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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런 질문을 받기도 하지만 똑같이 같은 질문들을 던져보기도 합니다. ‘영성이 무엇입니까? 영성 생활은 잘하고 계십니까?’ 대부분 이런 대답들을 하십니다. ‘영성은 기도 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 하느님을 내 마음에 모시고 살려고 노력하는 것, 하느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믿고 느끼며 내 삶 속에서 그분에게 배우고 듣고 따르려는 생활 아닙니까?’ 다양한 대답들을 들으면서 많은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사는 삶을 영성 생활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성령이 누구십니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힘이십니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적으로 보고 판단하고, 자신의 힘으로, 의지대로 무엇인가 하려는 삶이 아니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힘을 믿고 그분께 자신을 맡기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따르는 삶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삶의 무게 중심을 자기에게서 하느님으로 옮기는 삶을 끊임없이 지향하는 것, 이것을 영성 생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대부분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이 영성 생활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가 아니라 여전히 악령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삶을 고집하고 있고, 매일매일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데, 도리어 제 십자가를 남에게 지우면서 희생을 강요하고, 비우는 삶보다 소유하는 삶을, 섬김의 삶보다 섬김을 받고 누리려는 삶에 더 관심이 많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갈라 5, 22∼23) 그런데 과연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이런 성령의 열매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삶의 무게 중심을 옮기려고 하지 않는 한, 새로운 삶의 방식을 택하지 않는 한,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려고 하지 않는 한, 그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을 지내면서 한국의 모든 성직자를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의 삶의 방식, 지향에 대해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가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까?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 20)

<부산교구 임형락 신부>
  |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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