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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주님 세례 축일 독서와 복음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조회수 | 1,800
작성일 | 11.01.06
제1독서 : 여기에 내 마음에 드는 나의 종이 있다.
이사야 예언서서 42,1-4.6-7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2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3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4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6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7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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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독서 :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사도행전10,34-38

그 무렵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35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36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곧 만민의 주님을 통하여 평화의 복음을 전하시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을
37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 일어난 일과,
38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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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3,13-17

13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14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15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16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17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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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태 3,13-­17)

▪ 묵상

바야흐로 주님의 때가 이르렀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예수님의 첫 소명은 다름 아닌 요한을 찾아가는 일이었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들 틈에 끼어 회개의 세례를 받고자 하십니다(13절). 단번에 그분을 알아본 요한은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14ㄴ절) 바리사이와 사두가이 무리가 요한을 찾아왔을 때는,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주더냐?”(3,7ㄴ)라며 독설을 퍼붓던 그였습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3,11) 분을 고대하던 요한 앞에 오히려 주님께서 머리를 숙이고 요르단 강에 몸을 담그십니다. 그럴 수는 없다고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14ㄱ절)라며 몸을 조아려 예수님을 말리지만(14ㄴ절) 소용없습니다.

요한은 도시가 아닌 광야에서 설교를 하였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들으러 광야까지 몰려갔고, 그의 설교에 모두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를 따르는 무리는 종교 지도자들까지도 위협을 느낄 정도로 갈수록 불어나 그 세력이 커졌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임무는 그저 준비하는 일일 뿐, 그는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을 예고하기 위해 앞서 온 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누구보다도 요한 자신이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요. 예수님 때문에 이 세상에 왔고 오로지 주님이 오실 길을 마련하는 소명으로 살아온 요한이었기에, 자신 앞에 한없이 몸을 낮추신 그분의 모습에 많이 놀랐을 겁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몫과 소임을 존중하셨을 뿐더러, 자신의 소명 또한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요한과 예수님 단 두 사람만 등장하지만 실제로 세례 현장에는 세례 받을 많은 사람들이 무리지어 있었을 것입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 없이 요한의 신호에 따라 요르단 강에 몸을 담그는 무리와 함께 서 계셨을 것이라 합니다. 죄인들 무리에 섞여 계신 예수님을 상상해 보십시오. 요르단 강에 머무시는 동안 세례 받는 이들과 연대감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강물에 몸을 담그시면서 죄 없으신 분이 인간의 죄를 떠맡으십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그분을 두고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이사 42,2)라고 한 표현이 떠오릅니다.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실 이’께서는(42,1) 묵묵히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저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15절)라며 더 큰 뜻을 내다보십니다. ‘마땅히 이루어야 할 의로움’이라는 게 무엇일지 자못 궁금합니다. 하느님 앞에 죄인처럼 자신을 낮추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 답을 찾아봅니다. 아마도 ‘의로움을 이루는 일’은 예수님이 몸소 보여주신 대로, 소박한 베들레헴 마구간과 요란스럽지 않은 요르단 강 세례터와 담담히 유혹을 견디신 광야에서 시작되어, 치열하게 마지막 소명을 다하실 십자가상에 이르기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은 줄곧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밝히는 일에 몰두하였습니다. 이 대목도 예외는 아닙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시자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16ㄴ절)고 합니다. 본디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신데 강 속에까지 몸을 낮추시자 하늘이 열립니다. 그분을 향해 열린 하늘에서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예수님이 직접 보셨습니다(16ㄷ절). 다른 누구도 아닌 예수님 자신의 체험입니다. 구약에서 하느님의 영이 내려온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자로 소명을 받는다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사자 그 이상이시라는 것이 곧이어 입증되는데,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7ㄴ절) 하는 하늘의 소리에서입니다. 첫 소임에 충실한 아들에게 내리는 최고의 찬사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처럼 ‘아버지께 사랑받는 아들, 자랑스러운 아들’로 인정받은 기쁨에 감격하셨을 겁니다. 아울러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 다시금 확인하셨겠지요. 그래서 예수께 세례는 더욱 큰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께 주어진 전권은 바로 하느님께로부터 왔음을 입증하고 있으니까요.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이사 42,1)라는 확신으로, 예수님은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실’ 것입니다(이사 42,4 참조).

예수님이 하느님의 충실한 아들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요한을 찾아와 세례를 청했기 때문입니다. 짧은 소견으로 예수께 세례가 타당하기나 할까 싶지만, 이 세례를 건너뛰셨다면 성령에 사로잡히는 일도 없이 아버지의 칭찬도 놓치고 자신이 누군지도 모른 채 한참을 허송세월하셨을 듯싶습니다. 아마도 이 세례 체험이 공생활 내내 예수님을 굳건히 지켜주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데 큰 버팀목이 되어주었을 것입니다.

사춘기 때 세례 받던 생각이 납니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른 채 원하지도 않은 세례를 받은 터라, 세례 때 찍은 사진을 보면 뿔난 도깨비마냥 입이 이만큼 나와 있습니다. 다행히 어른이 되어 친구나 후배들의 대모로 세례식에 참석하면서 늦게나마 세례성사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되었지요.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로, 인정받는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기쁨을 알게 된 것입니다. 철부지적 얼렁뚱땅 넘긴 세례의 은총을 보상받고 싶기도 하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듯이 하느님 영에 젖어 사랑한다는 하늘의 고백을 다시 듣고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용서를 가슴 깊이 체험한다면 하느님의 딸이 된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시편 2,7)

▥ 강지숙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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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제 마음이 당신의 의로움으로 채워져 생활하게 하소서 !

▪ 세밀한 독서 (Lectio)

예수님의 세례사건을 연결짓는 접속사 “그때에” (마태 3, 13) 는 시간적 의미보다, 옛 시대에 속한 사람 요한이 유다 광야에서 하늘나라를 선포하며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있는 전 (前) 문맥 (마태 3, 1 – 12)의 역사적 현 상황을 묘사하고, 새 시대를 열어 오실 예수님의 등장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생활하시던 익숙한 장소 “갈릴래아” 를 떠나 “요르단” 으로 “요한을 찾아가시는데” (13절) 이 새로운 행보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함입니다. 요한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닌 분으로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11절) 예수님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려는 이유는 “모든 의로움을 이루기” (15ㄴ절) 위함입니다. 마태오복음에서 ‘의로움’ 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여”(15ㄷ절)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요한한테서 세례를 받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모든 의로움’ 의 시작이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의로움의 시작은 자신의 뜻을 낮추고 그분의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면서 준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와 더불어 놀라운 체험을 하십니다. 첫째,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16ㄴ절) 둘째,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16ㄷ절) 셋째,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17절) 하는 말씀을 들으십니다.

‘하늘이 열렸다.’ 는 것은 하늘이 닫혀 있음을 전제하며, 닫혀 있다는 것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통교가 단절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역으로 그분께서 친히 열어주시지 않는다면 사람은 열 수 없습니다. 이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하늘을 열고 오실 분임을 계시합니다. 예수님의 세례와 더불어 열린 하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제헌되심으로써 완성됩니다. 성전은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하느님 현존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제헌되시는 순간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져” (27, 51) 성전의 가치는 무너지고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중재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통교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예수님 위에 내려오시는 것” (16ㄷ절) 은 예수님이 세상에 내려오시는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한 분이심을 뜻합니다. (아가 2, 14; 5, 2) 또한 세상 창조 때 심연의 물 위를 감도신 성령 (창세 1, 2) 을 ‘비둘기’  형상으로 이해한 유다인의 전통에 따라 세례 때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세례는 단순한 예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으로 도유된 새로운 변화입니다. (루카 4, 18; 이사 61, 1 – 2)

예수님께서 성령이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 , 하늘에서 들려 온 ‘사랑하는 아들’ 이란 소리를 ‘들으셨다’ 는 것은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계에 대한 체험이자 확신입니다. 특별히 마태오는 ‘내 사랑하는 아들’ 에 삼인칭 주어 ‘이는’ 을 사용해 객관화시킴으로써 공생활에 앞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공적으로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능력과 권능의 구원자가 아니라 요한의 세례를 통해 죄인들과 연대하심으로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하늘을 열어 오실, 제1독서에 나타나는 ‘주님의 종’ 으로 이해됩니다. (이사 42, 1; 마태 17, 5; 필리 2, 6 – 11)

이제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어 “부러진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이사 42, 3) 분으로 우리 가운데 오시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주님의 종으로서의 사명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죄로 단절되었던 하늘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열리게 되어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마태 6, 10)

이로써 세례자 요한한테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이루셔야 할 ‘의로움’ 이 무엇인지 확연해졌습니다. 또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분부에 따라 그분께 겸허하게 세례를 베풀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사명’ 을 완수함으로써 구원사에 새로운 장을 열어놓았습니다.

▪ 묵상 (Meditatio)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마태 3, 15ㄴ)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낮추어 요한한테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의로움’ 을 시작하셨습니다. 의로움의 시작은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라가며 변화되는 삶입니다. 생활하는 신앙은 세례성사를 통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깨어남을 통해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세례성사의 은총을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내가 교회 공동체와 함께 나누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며, 내가 머무는 자리, 처한 상황에서 이루고자 한 의로움은 무엇인지 성찰해 봅니다. 이웃의 뜻을 헤아려 보기도 전에 고착된 나의 관념에 묶여 고집했던 것에서 일어나 하느님의 뜻을 찾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 앞에 서 있기에 넉넉한 삶이 되고자 합니다.

▪ 기도 (Oratio)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이사 42, 1)

▥ 반명순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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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세례는 죄를 씻는 일이었고, 죄를 씻는 것이 하느님을 만나는 일로 이해됩니다. 죄를 씻기 위하여 우리는 죄를 찾아내려 애씁니다. 고해소 앞에서 무엇을 잘못하였는지 되돌아보는 일은 꽤나 아픈 일입니다. 고백하건대, 지난 과오를 진정으로 뉘우쳐서 아프기보다 그 과오 때문에 부끄러운 자신을 마주하는 것이 더 아픕니다.우리가 믿는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시지만 세례를 받으십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예수님의 세례는 ‘모든 의로움’을 이루는 일입니다. 예언자 시대부터 ‘의로움’은 하느님과 제대로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그 만남은 대개 계층 간에 벌어지는 갈등의 자리에서, 권력의 다툼 안에 희생된 약자들의 자리에서 더욱 강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시고 집중하시는 곳은 아픔과 슬픔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에서, 신앙인들이 일상에서 만나고 웃고 이야기 나누는 자리를 되돌아봅니다. 의로움을 이루려고 만나는 자리가 있을 수 있고, 죄를 씻기는커녕 서로의 탓을 곱씹느라 죄 속에 허덕이는 피폐한 영혼들을 맞닥뜨리는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끝은 이렇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사야서에 따르면 그 아들은 다른 이의 죄를 대신 짊어져도 말 한마디 없이 죽어 가는 고난받는 종이었습니다. 다른 이를 위하여 대신 죄를 짊어지는 희생을 실천하기 어렵다면, 적어도 서로에게 죄를 짊어지우는 일만큼은 줄여야겠습니다.

의로움은 특정한 상황에서 이를 이루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심과 실천으로 실현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평범한 일상에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자신을 비워 내고, 내어 주고, 참아 주는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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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매일미사 2020년 1월 12일
  |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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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란 씻는 예절입니다. 요한은 실제로 요르단 강에서 온몸을 씻게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마에만 물을 붓습니다. 상징적 행위로 남아 있습니다. 세례의 핵심은 죄를 끊고 악습을 씻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분의 자녀로서 ‘새롭게 시작’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세례성사의 본질은 ‘내적 변화’에 있습니다. 세례를 받는다고 우리 몸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밝은 기운이 좀 더 느껴질 뿐입니다. 하지만 ‘영혼의 세계’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은총의 이끄심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죄를 피하고 사랑을 실천하게 합니다.

죄는 율법을 어기는 행위입니다. 십계명을 위반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을 ‘사랑’으로 단순화하셨습니다. 그분 가르침에 따르면, 죄는 ‘사랑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사랑의 생활을 말합니다. 내게 속한 ‘모든 것’을 다시 사랑하기로 결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례성사는 그런 사람에게 힘을 줍니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하늘의 힘’을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탄생입니다. 올해에도 세례 때의 은총을 기억하며 사랑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베푸는 삶’의 실천입니다. 누구라도 베풀면 받습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의 반전’을 만나게 됩니다. 부활의 은총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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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0년 1월 10일
  |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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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온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이 말씀은, 예수님의 수난을 앞두고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도 하늘에서 들려왔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이 사랑을 기억하시며, 그 힘으로 광야에서의 극심한 유혹도, 그리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 고통의 순간도 견디어 내시고 인류 구원의 길을 가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세례 때 들렸던 이 ‘하늘의 말씀’은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과 하나가 된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선포되었습니다. 세례 이후에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다 하더라도, 설령 어떤 잘못과 죄를 저질렀음에도, 우리를 향해 ‘내 사랑하는 아들 (또는 딸)’이라고 선포하신 이 말씀은 우리 안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큰 문제는 내 존재가 쓸모없다고 느낄 때입니다. 나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낮은 자존감은 늘 우리를 슬픔에 젖어 있게 합니다. 이럴수록 세례 때 받은 이 엄청난 은총을 끊임없이 마음속에 되뇌며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쓰레기를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이든, 또 어떤 처지에 있든지, 노랫말처럼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고, 하느님의 그 사랑은 우리 삶 속에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례가 필요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이유도 바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전하시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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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1년 1월 9일
  |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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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헨리 나웬은
예수회 신부로서 유명한 대학교 교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교수직을 버리고 장애인 시설에 들어가서 시설에 사는 이들의 용변을 치우고, 목욕을 시키고, 밥을 먹여 주는 등 여러 가지 잡일을 했습니다. 힘든 일과 어려운 여건에서도 그는 언제나 기뻐하고 만족스러워하면서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왜 명예로운 교수직을 버리고 그런 고생을 자처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없이 웃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쓴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책에서 그 답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는 높이 올라가는 일에만 신경을 써 왔습니다. 그리고 대학교 교수가 되어 책도 많이 썼고 사람들에게 인기도 얻었습니다. 이렇게 나는 오직 성공을 위하여 더 높이, 정상을 향하여 오르막길만을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한 지적 장애아를 만나면서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인간이란 어렵고 고통스럽게 사는 이들과 함께하면서 내리막길을 갈 때 더 성숙해진다는 것입니다. 나는 인생의 오르막길에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는데, 내리막길에서는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신 것을 기억하는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세례’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세례성사를 받음으로써 예수님과 같은 운명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곧 예수님처럼 살고자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세례로 새롭게 태어난 우리는
이 세상의 법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신 사랑의 법을 따라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천국은 남을 사랑하고 섬기는 데에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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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2년 1월 9일
  |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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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세례는 죄를 씻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까? 어느 자매의 신앙 수기에 있는, ‘평화방송’에서 들었다는 다음의 이야기를 통해 그 이유를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시래기죽을 먹던 시절의 이야깁니다.

어머니는 식사 시간만 되면 상을 차려 놓고
슬그머니 배가 아프다며 나가시고,
우리 여섯 남매는 시래기죽을 서로 차지하려고
얼굴도 들지 않은 채 숟가락을 부산히 움직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늘 배가 아프다며 나가시던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한 그릇이라도 더 먹이시려고
상이 나올 때까지 부엌에서
애꿎은 아궁이만 휘젓고 계셨던 것입니다. 자
식이 굶어도, 병들어도,
월사금을 못 내고 풀이 죽어도
어머니는 모두가 당신이 죄가 많기 때문이라고 하셨지요.
따지고 보면 전쟁 탓이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탓이고,
식구가 너무 많은 탓이고,
피난살이하던 모든 어머니의 공통된 설움이건만,
유독 어머니는 모든 것이 늘 당신의 죄 탓이라고 하셨지요.
이제 그때의 어머니의 나이가 된 지금 되돌아보면,
어머니는 사랑이 많으셔서 죄가 많은 분이었습니다.
죄가 없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
랑이 많으면 죄가 많습니다.”

사랑이 많으면 죄가 많은 법이라는 말은 법률적 논리나 윤리적 논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논리 안에서는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죄를 당신 자신의 죄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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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3년 1월 13일
  |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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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광야 사이로 잔잔히 흐르는 요르단 강에
고개를 숙이신 채 서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세례자 요한의 표정은 경건하고 감격에 차 있습니다. 그의 손바닥에 담긴 물이 예수님의 머리와 얼굴을 적시고 이윽고 예수님께서 빛나는 모습으로 고개를 드신 채 물에서 나오시자, 하늘에 성령의 표징이 나타나면서 성부 하느님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너무나 생생한 표현의 말씀이어서 그런지, 예수님의 생애를 다룬 예전의 많은 영화에서는 이러한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퍽 인상적이고 감동적으로 드러내곤 했습니다.

주님 세례 축일을 맞아
이 장면을 떠올리며 잔잔한 감동을 느꼈다면, 이제 주님의 세례에서 비롯된 우리의 세례에 대한 의미를 되새겨야 할 차례입니다. 성인이 되어 오랜 기다림과 어려움 속에 세례 받은 분이라면 세례를 받는 그 순간의 기쁨과 감격을 생생히 떠올려 보십시오. 유아 세례를 받았다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세례를 받은 신앙인으로 살아온 인생 여정이 어떠했는지 잠시 되돌아보십시오.

무엇보다도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우리의 존재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더욱 새롭게 의식해 보면 좋겠습니다. 이 단순한 성찰이 거듭될 때 인생의 방향은 근본적으로 바뀌어 나갈 것입니다. 사랑받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깊이 체험한 이는 더 이상 이름이나 명예 따위에 갈급할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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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4년 1월 12일
  |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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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유럽에서는 종교 개혁의 선풍이 일었는데
그 가운데 근본주의자였던 후터, 메논, 제논 등은 칼뱅이 주도하는 종교 개혁이 권력화의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가톨릭 교회의 권력을 분양받고자 동참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진정한 제자로 살고자 신앙의 개혁을 한 것이다. 유아 세례는 부모의 신앙 봉헌식에 불과하다. 성년이 되어 직접 자기 일생을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고자 하는 고백의 결단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 진정한 세례성사다.”

유아 세례를 받은 이도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들을 ‘재세례파’라고 하는데,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미국으로 건너가 펜실베이니아 주에 정착한 그들을 ‘청교도’라고도 부른다.

그 후손들은 500년 전통을 이어 지금도
신앙 공동체로 살아오고 있다. 그들은 세례를 대단히 중요시한다. 단순한 입교 예절이 아니라 평생을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겠다는 투신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은 ‘제자도’(弟子道)란 말도 즐겨 쓴다. 스승의 십자가를 진정으로 따르는 삶이 제자의 길이라는 뜻이다.

세례성사가 입교 예식에 불과하면 자신의 삶이 변화될 수 없다.
세상 물신을 숭배하는 삶에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이로 변형되는 은총이 세례성사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왜 인간에게 세례를 받으셨어야 할까?’ 예수님의 탄생과 삶과 죽음과 부활의 궤적은 구원을 향한 인간의 여정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예수님과 하나를 이룰 때 구원의 삶을 살게 된다. 사람은 예수님처럼 하늘의 점지로 태어났는데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투신이 진정한 세례의 삶이며 제자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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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5년 1월 11일
  |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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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당시에 사해 부근의 쿰란에는
독실한 마음으로 수계 생활을 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오늘날의 수도 생활처럼 공동체를 이루고 엄격하게 고행하며 단체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 공동체에 입문하려면 물로 씻는 예식, 곧 정화 예식을 거쳐야 했습니다. 여기서 세례는 회개를 전제한 죄의 용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례가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고 죄의 용서를 받는 것이라면,
굳이 예수님께는 세례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가시어 세례를 청하실 때, 요한도 당황하여 그분을 말리려 하였습니다(마태 3,14 참조). 논리적으로 말한다면 요한이 옳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세례를 통하여, 죄인들과의 연대를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듯이,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우리와 결합하시어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주님의 종은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음으로써 민족들의 빛이 됩니다.

제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만민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그분께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모든 이를 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의인들과 건강한 이들만 당신 백성으로 삼으신다면,
예수님께서 모든 이의 주님이 되실 수는 없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드님으로서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권위와 능력은, 높은 이들의 복종을 받아 내시는 것이 아니라 약하고 죄스러운 모든 이를 받아들이시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우리는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우리와 같은 운명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몸 둘 바를 모르겠고 그저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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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6년 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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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축일의 입당송은 왜 예수님께서 요한 세례자에게 세례를 받았는지 설명해 줍니다. “주님이 세례를 받으시자 하늘이 열렸네. 성령이 비둘기처럼 그분 위에 머무르시고,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네.” 예수님의 세례로 우리에게도 세례의 은총이 폭포수처럼 쏟아졌습니다.

우리는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온몸을 요르단 강에서 씻는 세례는 상징적 행위로 남아 오늘날에는 이마에 물을 붓습니다. 이 상징은 우리의 영혼이 새롭게 태어남을 보여 줍니다. 세례로 우리는 새로운 인생길을 걷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는 제자의 삶으로 변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사랑하는 삶입니다. 죄를 용서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삶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불가능한 삶입니다. 커다란 은총의 선물을 세례 때 받은 우리는,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살게 됩니다. 자신의 것을 모두 끌어안고 내어 주지 않는 이기적인 삶을 살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살아 계신 성령께서는 우리를 날마다 새롭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고통과 슬픔을 이겨 내고 부활의 은총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은 뒤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그저 장식품을 지니듯이 세례명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 세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커다란 은총의 선물을 주는 통로입니다. 세례의 은총에 감사하며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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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
매일미사 2017년 1월 9일
  |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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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물에 빠져 본 사람은 물이 생명의 근원인 동시에 죽음의 위협이 될 수 있음을 압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는 물에 잠겨 세속의 내가 죽고,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생명의 성사입니다.

성당에 들어가면서
입구에 놓인 성수대의 성수를 찍어 성호경을 그을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세례를 기억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음에 감사합니다. 세례는 단순히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형식적인 표지가 아니라, 우리 삶 전체가 하느님의 손길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을 고백하는 거룩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죄로부터 회개의 표지로 세례를 베푼 세례자 요한에게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것은, 그분께서도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와 똑같이, 하느님만이 우리 생명의 주인임을 몸소 보여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내려오시고,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말씀이 선포된 것은,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처럼,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종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성실하게 공정을 펴시며 민족들의 빛으로 오신 분이심을 확인해 주는 장면입니다.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예수님의 영과 결합되었습니다. 그래서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하여 파견되신 예수님의 고귀한 소명에 우리도 동참해야 합니다.

세례명은
내가 천주교 신자임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로서 파견된 소명대로 살라는 책임과 의무를 기억하게 해 주는 것임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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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매일미사 2018년 1월 8일
  |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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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를 통하여 모든 신자는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임에도 하느님의 자녀처럼 살지 못하는 이유는, 세례를 물로만 받고 성령으로는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믿음’을 선물합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어야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늑대에게 키워진 아이는 자신이 늑대라고 믿을 것입니다. 자신이 늑대라고 믿으면 사람처럼 두 발로 걸어 다닐 수는 없습니다. 아이가 사람이 되려면 자신이 사람임을 믿어야 합니다. 사람은 믿는 대로 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하늘에서 들려오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를 들으십니다. 세례는 이렇듯 내 정체성이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 곧 ‘하느님’임을 확고하게 믿게 만드는 예식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하느님입니다. 사람의 자녀는 사람으로 살고,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으로 삽니다. 사람의 자녀는 세상에 집착하며 살고,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 뜻에 ‘순종’하며 삽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는 오늘 제1독서에서처럼 또한 “종”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순종하는 자녀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께 순종하시어, 오늘 제2독서에서 증언하는 것처럼, 세상을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사람이 사람임을 믿으면 두 발로 걷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본성상 사랑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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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매일미사 2019년 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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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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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와 루카 복음에는 “그분은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태 3,11; 루카3,16)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불’로 세례를 준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불’은 ‘정화하는 심판’의 이미지입니다(시편 11,6; 이사 30,27).

이사야는 주님이“심판의 영과 불의 영으로”(이사 4,4) 예루살렘의 오물을 씻어내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불로 오시는 성령을 통하여 그분은 금이나 은을 정련하는 것처럼(말라 3,3) 모든 죄의 찌꺼기를 불태우는 진실한 회개로 이끄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화는 마지막 때에 불의 심판에 대한 준비이기도 합니다(마태3,12; 루카 3,17).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불로 세례’를 준다는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또한 그분의 영인 성령에 의해서 우리가 정화되어 진정한 회개로 이끌어질 것이며, 이를 통하여 우리는 종말의 심판 때에 성숙한 이들이 되어 하느님 앞에 다가갈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에서 ‘어둔 밤’을 강조하였습니다. 이 ‘어둔 밤’은 우리가 모든 면에서 ‘정화’되는 시기입니다. 사실, 우리가 갖고 있는 감각, 생각, 그리고 신앙은 하느님께서 보실 때 온전한 것이 못됩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이 온전히 정화될 때 혹은 우리가 불의 세례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때, 참사랑이신 하느님의 이끄심에 의해서 진정으로 성숙한 이들이 되어서, 이 세상에 참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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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완 로마노 교수(하상신학원 영성신학)
2019년 1월 13일 <수원교구 주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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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세례는 죄를 씻는 일이었고, 죄를 씻는 것이 하느님을 만나는 일로 이해됩니다. 죄를 씻기 위하여 우리는 죄를 찾아내려 애씁니다. 고해소 앞에서 무엇을 잘못하였는지 되돌아보는 일은 꽤나 아픈 일입니다. 고백하건대, 지난 과오를 진정으로 뉘우쳐서 아프기보다 그 과오 때문에 부끄러운 자신을 마주하는 것이 더 아픕니다.우리가 믿는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시지만 세례를 받으십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예수님의 세례는 ‘모든 의로움’을 이루는 일입니다. 예언자 시대부터 ‘의로움’은 하느님과 제대로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그 만남은 대개 계층 간에 벌어지는 갈등의 자리에서, 권력의 다툼 안에 희생된 약자들의 자리에서 더욱 강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시고 집중하시는 곳은 아픔과 슬픔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에서, 신앙인들이 일상에서 만나고 웃고 이야기 나누는 자리를 되돌아봅니다. 의로움을 이루려고 만나는 자리가 있을 수 있고, 죄를 씻기는커녕 서로의 탓을 곱씹느라 죄 속에 허덕이는 피폐한 영혼들을 맞닥뜨리는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끝은 이렇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사야서에 따르면 그 아들은 다른 이의 죄를 대신 짊어져도 말 한마디 없이 죽어 가는 고난받는 종이었습니다. 다른 이를 위하여 대신 죄를 짊어지는 희생을 실천하기 어렵다면, 적어도 서로에게 죄를 짊어지우는 일만큼은 줄여야겠습니다.

의로움은 특정한 상황에서 이를 이루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심과 실천으로 실현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평범한 일상에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자신을 비워 내고, 내어 주고, 참아 주는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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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매일미사 2020년 1월 12일
  |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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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께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한 하느님이시다.’라고 우리 신앙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마주합니다.

마치 어린아이와 늘 함께 있는 보호자처럼
그분께서는 세례를 통하여 우리에게 임마누엘 하느님으로 오십니다. 성자의 강생은 나약한 인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놓으시고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세례는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동참하는 가장 아름다운 결심이며, 사랑의 표현입니다.

세례가 하느님과 만나는 문이라면,
그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면, 오늘 복음 속 예수님의 세례는, 이 세상을 구하러 오신 성자께서 성부와 늘 함께하신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나약한 우리에게 드러내어 보이신 것입니다.

구유에 누워 계신 어린아이의 모습을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보여 주셨듯이,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늘 함께 계심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세례는 영광이고, 예수님께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하시는 사랑의 일치입니다.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던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성부께 순종하시고 예언을 성취하시고자 택하신 겸손의 표양입니다. 성부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에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간인 우리도 주님의 세례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임마누엘의 하느님으로 함께하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가 세례를 통하여 내 삶의 중심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놓는 것처럼, 세례를 받은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시작하고 마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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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
매일미사 2021년 1월 10일
  |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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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   [수도회] 신통(神通)한 베드로  [18] 1527
509   [인천/서울] ‘Understand’  [5] 1398
508   [부산/전주/원주/청주]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8] 2017
507   [수원/의정부] 교회의 그리스도적 권위  [4] 1570
506   (백)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2월 22일) 독서와 복음  [10] 1336
505   [수도회] 진정한 복  [21] 3356
504   [부산] 영원한 생명의 나라  [10] 2938
503   [수원] 감사하자  [4] 2947
502   [서울] 깨여 있으라  [9] 3377
501   [인천] 신망애 삼덕  [8] 3224
500   [청주/의정부] 복의 근원은 하느님이시다  [6] 156
499   [전주/마산] 말씀의 덕담  [6] 142
498   [원주/군종]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1] 149
497   (백) 설 날 (음력 1월 1일) 독서와 복음  [12] 3366
496   [대구/안동] 설, 이 좋은 날에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3] 3264
495   [수도회] 한나의 기다림  [27] 3102
494   [부산] 모두 다 하느님께 바쳐진 우리들의 삶입니다.  [7] 2748
493   [대구] 예수님과의 만남  [3] 2492
492   [마산] 나는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하느님께 바칩니까?  [1] 199
491   [수원] 하느님께 자신의 삶을 봉헌하자  [7] 2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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