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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세례의 의미
조회수 | 2,562
작성일 | 11.01.06
오늘은 주님의 세례 축일이다. 이 날은 요르단강에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이분이야말로 참메시아시고 하느님의 아들임을 공적으로 선포하며, 더 나아가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를 다시금 다짐하는 축일이다. 오늘로써 구세주의 탄생을 기리는 성탄시기가 지나고 연중시기가 시작된다.

주님 세례 축일을 맞아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우리 안에 보여 주신 세례의 참뜻이 무엇인지, 우리가 과연 세례의 참뜻대로 구체적으로 생활 안에서 살고 있는지 반성해야 할 것이다.

먼저, 주님의 세례의 뜻은 오늘 제1독서(이사 42,1-4.6-7)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사야 예언서는 주님의 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소위 고난받는 야훼의 종의 네 노래 중 첫 번째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여기서 그 종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하고 있지 않지만 그 종은 하느님의 마음에 들어 선택된 자이고 하느님의 영을 받은 자라고 말하고 있다. 그 종의 사명은 가난한 자와 억압당하는 자에게 정의를 세워 주고 소경의 눈을 열어 주며, 병자를 고쳐 주고, 어두움 속에 있는 이들에게 빛을 주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오늘 복음(마태 3,13-7)에서 예수님께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는 세례자 요한의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여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분이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낮추시고 가난하고 겸손한 자세를 스스로 보여 주심으로써 모든 이가 세례를 통하여 새사람이 되기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소명을 받고 그 소명대로 살기를 바라신 것이다.

이러한 새사람, 새로운 삶의 모습으로의 소명은 사실 그리 쉽지만은 않다. 그것은 자신 안에 고정되어 있는 낡은 틀을 깨고 새롭게 변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처럼 수년을 아니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자신 안에 쌓이고 형성된 것을 갑작스레 변화시킬 수 없다. 또한 세례를 받고 새로운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쉽사리 바뀌는 것이 아니다.

사회에서나 성당에서의 단체생활을 한 번 생각해 보자. 나 자신의 고집을 앞세우고 나의 말만을 앞세우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나 역시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었는가! 이것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아! 그 때 내가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내가 조금만 더 열심히 했더라면, 내가 더 생각하고 행동을 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생길 것이다. 그렇듯이 내가 약간의 인내심을 발휘하고 행동을 한다면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후회스러운 일이 없었을 것이다.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난 우리들이지만 아직도 부족하고 서툰 것이 많은 우리들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하고, 조금만 더 참으며, 조금만 더 열심히 한다면’ 그러한 모습이 어느새 나의 삶 속에 젖어들어 수십 년 동안 내 안에 쌓여 온 두꺼운 벽을 헐어 버리고 새로운 모습이 형성될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오늘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민족들의 빛이 되고,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풀어 주며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또한 오늘 복음처럼 하늘에서 울려 퍼지던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라는 소리를 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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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고준석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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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세례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감을 의미합니다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세례는 예수님의 생애 중에서 그분의 독특한 본성과 사명을 확증하는 사건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인 야훼의 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이 야훼의 종을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수난하고 죽으신 예수님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요르단 강에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는 극적인 장면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에 묘사된 이 극적인 감동이 오늘 제2독서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세례를 준비하는 예비신자에게 주님의 생애 중 핵심적인 세례 사건을 강론이나 교리교육으로 자주 가르쳤다는 것이 베드로의 설교에서 역력히 드러납니다.

세례는 물로 씻음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세례란 ‘물에 빠지다’ 또는 ‘물에 잠기다’라는 뜻입니다. 세례는 모든 허세와 교만, 이기심과 자만심, 물질적인 탐욕과 세속적인 쾌락 등을 물 속에 씻어버리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물은 특히 억압과 수난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로 건너감을 의미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바다를 건너서 노예의 땅 이집트를 탈출합니다(출애 14-15장 참조).

그런데 예수께서는 여느 죄인처럼 자신을 비우시고 물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보통 우리는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께서 왜 죄인이 받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을까?’ 라며 의아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은 ‘우리 죄 많은 인간 안에 들어오셨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세례 사건은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우리 중에 한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의미로, 우리와의 아름다운 일치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세례를 통해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낮추시고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더 충만하게 되시고 드높임을 받으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세례는 하느님의 신비와 사랑을 잘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감을 의미합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께서는 참 생명을 주는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은 우리도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온 것입니다. 세례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영을 받고 그분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세례 축일을 지내면서 동시에 우리의 세례성사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도 세례 때의 마음을 잘 간직하고 있는지 묵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예수님처럼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 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
  |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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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하느님을 믿고 삽니다

"마귀를 끊어버립니까?"
"끊어버립니다."
"천지의 창조주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세례 받을 때의 기억이 생생이 떠오르는 문답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단호히 고백하며 하느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지요. 그런데 과연 지금 그렇게 결심한 대로 이기심을 끊어버리고 하느님만을 믿으며 살고 계십니까?
 
오늘 주님 세례 축일은 세례 받은 모든 이가 인간의 욕망과 세상의 흐름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합니다. 이제까지 나 중심적이던 내 삶과 신조는 세례를 받는 순간 모두 사라지고 예수님 사랑과 말씀으로 새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세례 받기 전과 똑같이 욕심이 앞서고 세상적인 일에 나의 중심이 더 가 있다면 다시 되돌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삶의 중심으로 다시 와야 하지요. 세례 받는다는 것은 마치 이런 것입니다.
 
어느 날 깡패 한 사람이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기 전에 사람들이 깡패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무엇을 믿고 삽니까?"
깡패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먹을 믿고 삽니다."
 
이렇게 나를 믿고 살지 누구를 믿고 살겠냐고 힘자랑을 하며 깡패는 사오십 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음을 달리 먹고 세례를 받게 되었지요. 그러자 친구들이 물어봅니다.
 
"너 세례는 왜 받느냐? 이제 무엇을 믿고 살려고 그러냐?"
그 때 이 깡패가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이제 나는 하느님을 믿고 산다!"
 
그렇습니다. 이제까지 나를 믿고 나의 욕망을 채우며 살아왔다면,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지금부터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삶을 희망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의 삶과 믿지 않는 사람의 삶은 다를 수밖에 없고 또 달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으면 변화돼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나 아우구스티노 성인처럼 세례를 받고 즉시 변화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특별한 경우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의 꾸준한 노력을 통해 서서히 변화됩니다.
 
제 얼굴을 한 번 보십시오. 보시기에 깨끗하지요? 어떤 때 저는 하루에 두 번씩 면도를 합니다. 유난히 수염이 많기 때문이지요. 하루라도 수염을 깎지 않으면 덥수룩해지는데 만약 한 주간 내내 면도를 안 한다면 얼굴에서 수염만 보일 것입니다. 1년 365일을 하루도 안 빠지고, 어떤 때는 하루에도 두세 번씩 면도를 해야 지금의 얼굴이 유지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 한 번 결심하고, 일주일에 주일 미사 한 번 참례하는 것으로 삶이 변화되기를 바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매일 돌아보고 다짐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이 하찮은 수염도 매일 깎아야 하는데 하물며 세상의 수없이 많은 유혹 속에서 하느님 말씀을 따르는 일에는 얼마나 많은 노력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매 순간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새롭게 태어나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예수님처럼 변화되어 가는 것을 말하지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닮듯이,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실천하려 노력하면 역시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
 
오늘 주님 세례 축일을 맞아 예수님과 하나가 되겠다는 세례 때 약속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봅니다.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아서 마침내 예수님과 성모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화된 여러분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기양 신부
  |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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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인간성으로

제가 사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교우들은 저를 전폭적으로 신뢰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신부님 신부님 불러준다고 하더라도 저는 기껏 물성의 세계에 사는 육신적 존재일뿐입니다. 지성과 의지보다 생래적 본능의 행위에 더 가깝습니다. 식욕 수면욕 성욕 소유욕 명예욕 앞에 어쩔 수 없는 나약성을 절감합니다. 감히 완덕에 이르기는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그래도 행복한 생을 얻고 싶은데 어쩌면 좋을까요?

그러므로 스승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과의 합일로 우리는 육신적 한계를 넘어 영원 생명을 희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신성과 온전한 인성을 동시에 가지고 계십니다. 신성은 은총 지위로서 하느님의 손에 달렸으나 예수의 인성은 생각과 성품과 삶을 닮아가며 결합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인간성! 그에 의한 온전한 합일이 완덕의 길입니다. 오직 스승 예수의 인간성을 찾으며 따라야 합니다.

이것은 제가 동참하는 예수살이 공동체의 공동고백이고 영성 수행의 방법론입니다. 하느님이 육화하심으로 인간의 출처가 분명해졌고 그분이 세례를 받으심으로 구원의 길이 분명해졌습니다. 인간이 육신적 본능의 차원에 머무는 것만은 아니며, 인간의 본성을 지닌 채로도 하늘을 열 수 있고 ‘하느님께 사랑받고 마음에 드는’ 삶의 길이 있다는 각성입니다. 그분은 말로 가르치고 손짓으로 방향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앞장서 인도하십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인간성, 그것이 하늘과 교접하는 길입니다.

박기호 신부
  |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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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는 영혼의 촛불을 밝히는 것

아버지스스로 그늘을 만들지 않는 한 햇살은 어디에든 다녀가고 스스로 가치를 낮추지 않는 한 우리는 소중한 사람입니다. 아침에 따뜻한 차 한 잔이 그리워지는 까닭은 허기진 배만큼이나 덜 깬 영혼에 따사로운 햇살 한 줌 뿌려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지속적으로 펌프질하는 심장이 없다면 생명이 지속할 수 없는 것처럼 영혼을 펌프질하는 신앙이 없다면 살아 있음도 살아갈 일도 그리 많은 의미를 간직하지 못할 겁니다. 아침 햇살이 감미로운 빛깔로 감긴 눈을 뜨게 하듯이, 그렇게 마음 깊은 곳까지 비추는 신앙이 있어 영혼은 기지개를 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례 받았던 그날이 이마에 새겨진 인호만큼이나 가슴 깊이 자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천상의 빛 속에 자리하신 분께서 지상 세례를 받던 그날 하느님은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고 축복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축복은 오늘도 세례 받는 모든 이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신앙은 세상을 밝히는 빛을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작은 촛불 하나를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반딧불이 폭풍에도 빛을 잃지 않는 이유가 빛이 자기 안에 있기 때문이듯 세례는 내 안에 영원히 꺼지지 않을 빛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어두움의 장막만이 짙게 드리워진 듯한 세상에, 모진 비바람마저 덤으로 주어진 것 같은 세상에서 스스로를 지탱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밀려나고 빗겨가기를 반복하는 것이 일상이고 보면 내 안에 중심 잡는 것조차 버거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그늘을 만들고 스스로 촛불을 꺼버리는 어리석음을 간직한 것도 우리였습니다. 하지만 세례 때 주어진 초는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언제든 다시 밝혀질 수 있습니다. 분명 세례를 통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촛불이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영혼의 초를 간직한 것은 맞습니다. 그 초는 지속적인 신앙생활을 통해 때로는 꺼지고 밝혀지기를 반복할지 모릅니다. 우리 영혼이 주머니 없는 하얀 옷을 입고 천상 문에 다다를 때까지 말입니다. 켜지지 않은 초가 그 의미를 다하지 못하는 것처럼 어쩌면 우리 영혼에 주어진 초가 지속적으로 켜지지 못한다면 분명 천상 문에 이르는 길을 밝히지는 못할 겁니다.

세례 때 밝혀진 촛불이 때로는 비바람에 흔들릴 수도 있고 때로는 연약함에 꺼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촛불을 밝히고 있는 한 우리 영혼의 항로는 길을 잃지 않을 수 있고, 그 항로를 따라 다른 이들도 뒤따를 수 있습니다.그때 세례 때 밝혀진 촛불은 단지 나만을 위한 빛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영혼의 빛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해서 오늘은 우리 영혼 깊은 곳에 밝혀진 촛불이 제대로 켜져 있는지 확인해 볼 일입니다. 아니 매 순간 그 촛불이 꺼지지 않았는지 꺼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해 볼 일입니다.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삶이 없듯이 우리영혼에 밝혀진 빛조차 때로는 우리 스스로 그늘 속에 잠재울 수 있고 우리 스스로 그 가치를 낮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권철호 신부
  |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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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여섯 살 부터 선생님

한국 교회에서 성직자와 수도자는 대부·대모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외국 에서는 그렇게 엄격하지 않다. 내가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 한 여자 아이의 대부가 되었는데, 대녀의 이름은 안 클로드이다.

그 당시 나를 아껴주시던 신부님이 주말이면 조카의 집에 나를 데리고 갔다. 그 집의 여섯 살 된 클로드가 불어 선생님이 되어주었다. 한 번은 내가 수술 후 요양을 하고 있는데 이 아이가 문병을 왔다. 자신의 제자에게 꼭 문병 가야 한다며 직접 초콜릿 케이크를 만들어 어머니에게 들리고, 보졸레 포도주 한 병은 할머니에게 들려 자기는 공주처럼 찾아와 나를 감격시켰다. 나중에 클로드가 아직 세례를 받지 못했으며 첫영성체를 준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귀국할 무렵 감사 편지를 쓰며 꼭 신자가 되기를 빈다고 했더니 곧바로 ‘나의 대부가 되어 달라’는 답장이 날아왔다. 그 아이의 부모와 상의했더니 딸아이의 요청을 받아주면 좋겠다고 하여 난생 처음 대부가 되었다.

클로드는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고 생각을 많이 하는 아이였다. 내가 편지할 때마다 한국 부모들이 자녀에게 바라듯이 ‘공부 열심히 하라’고 권해서인지 대녀는 머리가 아주 명석하여 월반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지난 여름 파리에서 만났을 때 20대 젊은 나이로 대학 강단에 서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 총명한 눈매와 희망에 벅차 있는 모습을 보며 나도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오늘날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지닌 문화적 감수성을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세례 때에 나와 맺은 인연으로 가톨릭 신앙을 사는 데는 변함이 없으리라 확신한다.

오늘 예수님의 세례 축일을 지내며 우리의 대자·대녀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그분의 생명이 충만하기를 빌며, 이들이 주님의 자녀로 성장하도록 도와주어야겠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ㄴ).

<서울대교구 구요비 신부>
  |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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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

「햄릿」은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가 쓴 세계적인 명작입니다. 이 희곡에는 전형적인 비극의 인물로 복수의 화신인 덴마크의 왕자 햄릿이 등장하는데 극중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독백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쪽이 더 사나이다울까.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받아도 참고 견딜 것인가, 아니면 힘으로 막아 싸워 이길 것인가.” 극중 내내 고민하던 햄릿은 결국 복수 끝에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데 죽느냐 사느냐의 선택에서 방황하는 햄릿은 흔히 현대인의 상징으로 비유하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햄릿처럼 언제 어디서나 항상 선택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20세기의 철학자들은 현대인들을 자유선택에 맡겨진 ‘선택의 인간’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선택을 하시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예수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오죽하면 요한이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텐데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라고 말했겠습니까.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스스로 고백한(요한 1,27)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선택입니다. 더욱이 사람들은 요한을 찾아가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여야만 세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마태 3,6).

예수님은 천지가 생겨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시던 말씀이자 생명이자 빛이시므로 죄의 어둠은 있을 수가 없었던 하느님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므로 고백할 죄가 없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러 오시자 요한은 몹시 당황했던 것입니다. 요한이 사양하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 그 일들이 바로 성서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하신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의 단 하나의 이유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셔서 사람의 아들이 되어 초라한 구유에 뉘어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셨으므로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좇아서(마태 26,39)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죄 많은 인간들과 하나가 되시기 위해서 스스로 죄인이 되어 세례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죄를 씻기 위해서 세례를 받았다면 주님께서는 오히려 우리와 같은 죄인이 되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길임을 예수님은 깨닫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들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을 생각하기보다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마태 16,23 참조) 베드로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가 하느님의 길보다 사람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햄릿처럼 항상 두 가지 중의 하나를 선택하여 고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느님의 일이냐 아니면 사람의 일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예수님은 항상 하느님께서 원하는 일을 선택하심으로써 우리들에게 그 정답을 몸소 행동으로 실천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최인호 베드로 / 작가>
  |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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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예수님이 되기 위해

같이 사는 꼬맹이 친구들이 가끔씩 제게 떼를 씁니다.
"신부님, 어떻게 해야 세례받을 수 있어요?"
"세례 준비 기간이 왜 그렇게 길어요? 저 잘할 자신 있는데, 한달 안에 좀 안될까요?"
세례받기를 너무도 간절히 청하는 몇몇 꼬맹이들을 따로 불러서 조용히 물어보았습니다.
"도대체 왜 세례받고 싶어 하는데?"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대체로 '영성체'를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미사 도중에 자기들끼리 나가서 하얀 뭔가를 받아먹는데 도대체 그게 뭘까? 과연 어떤 맛일까?'하는 것이 너무도 궁금하답니다.

그리고 다들 '딱 까놓고' 말들은 안했지만 대체로 지난해에 거행된 세례식을 기억하는 듯했습니다. 세례식 때에 예비신자들이 다들 그럴듯하게 옷을 차려입고 신부님들과 함께 입장하는 모습들, 세례식이 끝난 후 답지하는 많은 선물들, 꽃다발 등에 대한 강렬한 기억이 세례를 받아야겠다는 소망과 전혀 무관하지 않은 듯했습니다.

세례를 받는 사람들 가운데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세례받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만사가 잘 안 풀리고 하는 일마다 늘 꼬여서', '기도를 통해 육신의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가정에 우환이 많아서 세례받으면 좀 낫겠지 하는 소망으로' 세례받기를 원한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세례 축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전혀 죄가 없으셨기에 회개할 필요가 없으신 분께서 우리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오시기 위해서, 우리와 친구가 되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세례가 필요 없으신 분께서 한 부족한 인간의 손에 의해 세례를 받으시는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참된 겸손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억을 잠시 되살려 세례예식 때를 돌아보십시오. 우리는 사제 앞에서 '세례받기를 원합니다'하고 청했습니다. '세례받기를 원합니다'라는 말은 다른 말로 '성인(聖人)이 되기를 청합니다'라는 말과 동일합니다.

성인은 또 어떤 사람입니까? 성화(聖化)의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성화의 길은 걷는 사람은 더 완전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완전한 사람 가운데 가장 완전한 사람이 예수님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세례를 받겠다는 것은 또 다른 예수님이 되겠다는 의사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먼저 극심한 고통을 체험한 인간, 가장 깊은 슬픔을 체험한 인간, 십자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고통과 십자가의 인간이셨습니다.

결국 세례를 받겠다는 것은 세례식 이후의 파티, 금으로 된 묵주반지, 세례와 동시에 주어지는 그럴듯한 세례명 등 잿밥과는 거리가 먼 행위입니다. 또 세례는 건강이나 성공, 만사형통의 보증수표가 절대 아닙니다.

세례식의 기쁨은 잠시입니다. 즉시 다가오는 것이 고통이요 십자가입니다. 결국 그리스도 신자가 되겠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 손해 보겠다는 것, 세상과 거꾸로 살겠다는 의사표명입니다. 세례를 받겠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바보 같은 인생을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이 세상에 전부를 걸지 않겠다는 각오입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제 우리가 완전히 깨끗해졌다는 말도 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지만 지속적 회개의 여정을 충실히 걷겠다는 말과도 동일합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제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는 말이 아니라 이제 험난한 구원의 여정을 출발한다는 말과도 동일합니다.

세례식 때 설렘이나 좋은 느낌, 많은 사람들의 축하인사, 꽃다발, 축하선물, 축하행사, 감격스런 미사와 첫영성체…. 이런 것들은 사실 잠시뿐입니다. 곧 이어 다가오는 부담들은 만만치 않습니다. 주일미사 참례에 대한 막중한 부담감, 복음을 선택함으로써 감수해야할 손해들, 회의감, 무의미….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십자가를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고뇌의 쓴잔을 받아 마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남들이 가기 싫어하는 십자가의 길을 걷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삶의 매순간 선택의 기로에서 예수님 그분을 지속적으로 선택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평화신문
  |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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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새 날은 새 마음과 함께 시작됩니다.

제가 어느 책에서 읽고 가끔 되새겨보는 구절이 있습니다. ‘진정한 새해는 해가 바뀔 때가 아니라 우리 마음이 새로워질 때 시작됩니다. 동트는 날이 새날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형제자매로 보일 때 새날이 밝아옵니다.’ 어떻게 해야 마음이 새로워져서 다른 사람을 경쟁과 투쟁의 대상이 아니라 형제자매로 보게 될까요?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면 그렇게 될 것 입니다.

죄와 잘못으로 얼룩진 세상이지만, 하느님은 이런 세상마저도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의 외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요한 3,16 참조)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복음)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죄인들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이 죽기보다는 회개하여 살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전하고자 하셨고,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분이셨습니다.(제1독서) 또한 고통과 죽음의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이들을 ‘두루 찾아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제2독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생생하게 전해 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예수님처럼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면서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로 거듭나게 됩니다. 하느님은 좋은 부모님이 그러하듯, 잘나고 성공한 자식만이 아니라 그렇지 못한 자식도 품어주고 아껴주십니다. 그러니 자신이 못났다고 자책하거나열등감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남들이 나를 못생겼다, 능력 없다, 가난하다, 이혼했다, 직업이 없다, 병들었다, 늙었다고 업신여겨도 낙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에게서 사랑의 눈길을 거두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너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보증을 받습니다. 동시에 ‘너는 그 사랑을 전해야 한다’는 과제도 받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나와 생각이 달라 꺼려지는 이들, 내게 상처를 주어 미워하고 있는 이들도 그 사랑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어두운 세상과 못난 인간마저도 사랑하시어 당신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 역시 그런 세상과 인간을 감싸 안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주님 세례 축일로 성탄 시기가 끝나고 연중 시기가 시작됩니다. 축제는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일상은 새로움이 거의 없고 그렇고 그런 생활의 반복이라 따분하고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런 삶 속에서도 우리 곁에 계시면서 우리를 도와주고 이끌어주십니다.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낡은 세상에서도 거듭 새로운 마음을 지니면서 사랑의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서울대교구 손희성 신부>
  |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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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정체성 인식은 역동적인 삶의 출발

오늘 복음(마르 1,7-11)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해 줍니다. 예수님의 다양한 특성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인간적인 특성을 강조해서 전해 주는 마르코 복음서는 첫 부분에서부터 예수님의 삶을 그토록 역동적이게 한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줍니다. 예수님 위에 내리신 성령이야말로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며, 그분의 삶을 역동적이게 한 바로 그 힘입니다.

"예수께서 요한한테 세례를 받으셨는데, 물에서 올라오시자 곧 하늘이 갈라지며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리는 것이 보였다"(9-10절). 하늘이 갈라졌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새롭게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셨다는 성령의 통교를 의미합니다. 성령은 우선 예수님에게(10절), 다음으로는 예수님을 통해 메시아 공동체에 선물로 전달될 것입니다.

아가서(2,14;5,2.12)와 요나서('요나'란 히브리말로 '비둘기'라는 의미)에서 보면 비둘기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선교적 신앙공동체를 표상해 줍니다. 이처럼 성령을 비둘기 모양으로 묘사한 것은 예수님 위에 내려오신 성령과 신앙 공동체가 체험한 성령이 동일하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세례 사건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나는 너를 어여삐 여겼노라"라는 표현은 고통받는 '야훼의 종의 노래'를 연상케 합니다(이사 42,1). 하지만 마르코 복음서는 이사야서의 '종'이라는 표현을 '아들'이라는 2인칭으로 바꿈으로써 메시아적이고 왕적인 시편이라 할 수 있고, 시편 2,7의 '너는 내 아들, 나 오늘 너를 낳았노라'를 염두에 둠으로써 고통보다는 부활하신 분의 승리를 더 강조해서 전해 줍니다.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표현은 즉시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는 창세기의 장면(22,2.12.16)을 연상케 합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언자적 도유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이사야서 42,1을 인용하여 하늘로부터 울려온 음성을 소개함으로써, 예수께서 감내해야 할 수난과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실존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깨닫게 해 줍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심으로 그분의 존재 의미와 근거가 온 천하에 분명하게 표명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세례 사건을 통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위대한 구원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 세례 축일은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우리 실존의 근거와 의미를 되찾으며, 예수님처럼 우리도 역동적인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세를 갖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이 바로 그 순간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서울대교구 안병철 베드로 신부>
  |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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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날입니다. 주님 세례축일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누구한테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우리는 예수님께 세례를 준 요한을 세례자 요한이라고 부릅니다. 요르단에서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우리가 받는 세례는 죄를 용서받는 세례이고 또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 세례라고 배웠는데 과연 예수님께서도 이 세례가 필요한 분이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처럼 세례를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는 분이신가?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죄가 있어서 세례를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요한 복음 1장 29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던 분이며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와 같이 죄 사함의 세례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세례를 받아야 함을, 그리하여 다시 태어나야 함을 몸소 보여주시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의 공생활이 이제 시작되었음을 알려줍니다. 따라서 주님 세례 축일인 오늘부터 교회 전례력으로 연중 제1주일이 시작됩니다.

또 주님 세례 축일을 지내면서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세례 받을 당시의 신앙 고백을 나는 잘 지키며 살고 있는가 하는 자기 검토에 관한 것입니다. 나의 삶과 신앙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오늘 우리 모두가 한번 가져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천지의 창조주,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겠다고 고백하고 세상의 모든 유혹과 마귀의 모든 것들을 끊어버리겠다고 다짐을 하였습니다. 즉, 나의 주님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며 세상의 모든 유혹과 인간적인 모든 욕망으로부터 오는 것들을 단호히 끊고 주님만을 따르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나는 처음의 이 고백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신앙을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신자답게 살아가고 또 그러한 모습이 세상에 희망을 주고 우리에게도 새로운 힘을 줍니다. 그런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많은데 세상은 더 악해져간다는 비난도 동시에 받고 있는 것이 또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신자라고 하면서도 성당 안에서와 세상에서의 삶이 다르다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흐름에 중점을 두고 출세와 재물에 인생의 목표를 맞추고 살아가는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불행의 원인입니다. 수천 년의 구약성경의 역사를 보고 또 2000여 년의 신약성경의 역사를 보아도 불행의 원인은 재물과 권력을 마치 하느님인 양 섬기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로 잡아가는 힘은 역시 하느님을 중심에 모실 때입니다. 수천 년의 역사와 신앙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내용입니다.

우리 시대는 그 어떤 시대보다도 하느님 외적인 것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성향이 아주 농후한 시대입니다. 재물의 축적과 세상의 출세를 위해서 모든 것을 양보하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불행입니다. 이 시대는 그 어떤 시대보다도 풍요롭고, 또 그 어떤 시대보다도 많은 문명의 혜택을 받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장 불만족스럽고 가장 고독하며 또 가장 살아가기에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기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더 많이 공부했고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편해졌는데 말입니다. 문제는 삶의 목표입니다. 목표가 잘못되었습니다. 행복을, 또 희망을 얻을 수 없는 곳에 목표를 두고 애를 쓰며 살기 때문에 허탈과 불행과 번민이 따라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의 출세를 위해서 모든 것을 양보하는 가정이 참으로 많아졌습니다. 자녀의 세상적인 성공을 위해서 신앙도 희생하고 부모도 희생하고 조부모도 희생하고 온 가족이 다 희생을 합니다. 그렇게 하면 당장은 뜻한 대로 잘 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문제가 어렵게 꼬이고 맙니다. 자녀가 출세하면 그 모든 희생을 보상받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게 안 되는 것이 세상사입니다. 오히려 삐뚤어지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만 양산해 내게 됩니다. 하느님과 부모에 대한 공경을 배우지 못했기에 자녀들은 하느님과 부모 역시 이해 관계로만 따집니다. 그리고 이해 관계의 중심에는 세상을 편히 살아가게 하는 재물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계산해 보아서 부모가 나에게 소용이 있다면 모시지만 그렇지 않으면 외면하는 것이 우리 현실의 불행한 모습입니다. 근본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자녀의 세상적인 출세만을 지향하는 것에서는 희망과 행복이 비롯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도 허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내 삶의 중심과 내 자녀의 종교 교육을 하느님께 의탁한다고 주님과 약속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세적인 출세를 위해서 다 면제를 해주고 말았습니다.

주일에도 이렇게 말하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곧 시험 보는데 학원에 가야지." 그래서 중 고등학생 때 냉담자가 속출하고 결혼할 때에는 조당자가 되어서 신앙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그러다가 이제 부모가 돌아가시게 되면 장례 미사도 제대로 못 지내게 되지요. 엉뚱한 짓도 하게 됩니다. 부모님을 절에다 모신다고도 하고 부인을 따라 이상한 교회에 나간다고도 합니다. 연도를 바치는 교육을 안 받았으니 기일이 되어도 기도할 줄을 모릅니다. 부모는 돌아가셔서 연옥에서 단련을 받고 있는데 그 부모를 위해서 기도조차 할 줄 모르는 자식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 세대 부모들의 신앙관이고 자녀 교육입니다.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부모를 공경하겠습니까?

바로 잡아야 합니다. 우리 삶의 중심과 인생의 희망이 세상의 성공과 재물,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너무나 현세적입니다. 영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은 뒷전이고 외적인 것에만 몰두합니다. 자기를 닦고 신앙을 키우는 노력은 보이지 않고 다이어트나 성형 수술 등으로 외모를 가꾸는 데에 열중하는 모습뿐입니다. 그러니 정신은 빈약하고 영혼은 허약하기 그지없습니다. 모두가 잘못된 교육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두 번째 생각할 것은 모든 은총과 축복의 근본이 주님이라고 믿고 또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세례 전의 우상 숭배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하면 아직도 엉뚱한 곳에 가서 답을 구합니다. 엉뚱한 곳을 찾을 뿐만 아니라 심심풀이로 사주 팔자를 보고 그보다 더 심하면 무당을 불러 굿까지 벌이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우상 숭배이지요. 구약성경 시대에는 죽을 죄에 해당되어 처단까지 받는 큰 죄입니다. 지금도 신자들 중에는 엉뚱한 곳을 찾아가 이사할 날짜를 물어보고 결혼 날짜를 잡고 하면서 성당에 와서는 오직 주님뿐이라고 기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어리석음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만복의 근원은 주님이시며 우리 생명의 주관자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면서 동시에 또 다른 엉뚱한 행동을 한다면 어떻게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어려운 난관을 극복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어렵고 힘들 때 주님께 의탁하고 기도하며 오직 주님의 축복만을 진실 되게 간구 하는 모습으로 우리는 다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 삶은 결코 이 세상만이 아닙니다. 영원한 세상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만을 살기 위해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후에 열릴 천국과 연옥과 지옥의 또 다른 차원의 삶을 믿으며 또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 때 주님의 말씀대로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세상의 흐름을 쫓기보다는 주님의 뜻에 따라 합당하게 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미국의 하버드 대학에 헨리 뉴웬이라는 교수 신부가 있었습니다.
신학 교수인 뉴웬 신부는 많은 저술 활동을 벌였는데 쓴 책마다 베스트 셀러가 될 정도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정받는 사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뉴웬 신부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라르슈 공동체'라는 중증 장애자 시설에 봉사자로 들어갑니다. 그 곳에서 그는 중증 장애인들을 목욕시키고, 용변을 치우고, 식사 시중을 들고 빨래를 하는 등 이제까지의 삶과는 또 다른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뉴웬 신부에게로 쏠렸습니다.

“신부님, 왜 이렇게 사십니까? 이런 곳에서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다시 강연과 저술로 사람들을 인도해 주십시오.”

그래도 뉴웬 신부는 아무 대답 없이 웃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게 살았습니다. 나중에 '예수의 이름으로' 라는 책을 냈는데 그 책에서 뉴웬 신부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올라가는 길만 신경을 썼다. 어렸을 때는 천재라는 소리를 듣고 언제나 1등으로 달렸으며 하버드 대학의 교수까지 되었다. 오직 성공을 위해서 더 높이 더 크게 꼭대기만을 향해서 달려왔다. 그러나 중증 장애자를 만나면서, 어렵고 고통스럽게 사는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내리막길을 내려가면서, 내가 더욱 성숙해지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오르막길에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지만 내리막길에서는 복음의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병들고 힘든 사람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재물, 돋보이는 외모 등에는 욕심과 좌절만 있을 뿐 예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에만 중심을 두는 삶에는 행복과 희망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 세례 축일인 오늘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겠다는 세례 때의 약속을 되새겨 보고, 주님 안에서 내 삶과 자녀 교육 또 그 밖의 모든 인간 관계가 합당하게 이루어지기를 노력하고 또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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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교우 여러분!(사제와 신자들끼리는 무조건 사랑 하라고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관계이니, 서울주보에 쓰는 저의 첫 문장도 강론할 때나 글을 쓸 때처럼 똑같이 썼습니다.)

오늘은 마침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요르단 강에서 요한으로 부터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루카 복음은 하느님의 말씀을 빌려 이렇게 선언합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 다.”(루카 3,22) 이 천상 선언은 초대 교회 공동체의 신앙고백이자,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해야 할 믿음의 근거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 마음에 드는 딸인데 우리가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언젠가 본당의 세례식에 참여한 어느 교우가 보내준 글의 일부입니다. 교우 여러분들도 자신이 세례 받을 때를 떠 올려 보시면 좋겠습니다.

“예비 신자들의 환한 모습을 보면서 저의 세례성사 때의 모습이 떠올라 미사 내내 조용한 설렘과 함께 그날의 기억과 제 신앙생활을 더듬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의 은총이 제 마음에 이슬처럼 내렸습니다.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25년 전 강렬한 힘으로 당신의 자녀로 불러 주셨지만, 저는 세상의 소리만을 듣느라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느끼지 못하는 신앙의 ‘어둔 밤’을 헤맸습니다. 제가 힘들어서 절실히 찾았을 때 제 기도에 귀를 막고 계신 하느님, 저를 잊어버리신 하느님이라고 확신하며, 철저히 외면하고 살았던 시간도 있었음을 이제야 눈물로 고백해 봅니다. 세례성사 내내 세상의 죄에서 벗어나기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하느님, 그리고 넘어진 저를 다시 일으켜 세워 살게 하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저의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이 제 인생의 어떤 고통 앞에서도 숨길 수 없이 제 삶으로 증거되어 매력적으로 드러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제1독서에서 예수님의 사명이자 세례 받은 우리 모두의 사명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풀어주 기 위함이다.”(이사 42,6-7) 세례 축일을 통해서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신앙인이 미움과 불신, 폭력과 테러 등의 죄와 상처로 얼룩진 오늘의 세상에 구원과 해방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를 촉구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하느님으로 부터 성령과 힘을 받고(사도 10,38 참조) 새로 태어난 것임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영적으로 살고 있는지, 그리고 평화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 마음에 드는 딸로서 합당하게 살고 있는지 묵상하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 서울대교구 홍인식 마티아 신부 2016년 1월 10일
  |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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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예수님은 이런 분이시군요!

1. 예수님이 받은 세례는 어떤 세례입니까?

예수님께서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어린 시절을 다 보내고 성인이 되셔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분은 먼저 고향 사람들과 함께 요르단 강으로 가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셔서 하느님 백성이 된 이스라엘이 로마제국 황제의 통치를 받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치욕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 원인이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기에, 요르단 강에 와서 세례 예식을 하면서 민족 전체가 회개하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시지만, 자신이 속한 이스라엘 민족의 일이기에 기꺼이 동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세례자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을 정도로 겸손한 분이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로마제국의 식민 통치를 받는 동족의 여러 가지 고통을 같이 아파하시고 그들의 행동에 동참하시던 분이 분명합니다.

2. 예수님의 자세와 기도

오늘도 교회는 온 백성 가운데서 겸손하게 자리매김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복음은 온 백성이 겪는 고통을 함께 짊어지고 문제 해결을 위해 그들과 머리를 맞대고 함께 해결책을 찾아 나서기를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동족은 어떤 고통을 겪으면서 살고 있는가? 오늘 지구촌의 이웃 사람들은 어떻게 파괴되고 소외되고 있는가? 어떻게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하고 있는가? 어느 나라에서든지 젊은이들은 절망하면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풍요한 시대에 부모들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아무 대책도 없이 길거리로 뛰쳐나와 방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요한 환경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 사이에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기도를 열심히 하십니다. 우리도 사람들이 곤란을 겪는 일상 삶의 한가운데서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을 배워야 하겠군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께로 되돌아가자는 회개 운동을 하고 있는 현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느님과 깊은 일치를 이루시며 기도하고 계십니다.

3. 그때 내리신 비둘기 모양의 성령

그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모습으로 예수님 위에 내리셨습니다. 비둘기라고 하니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사건이 생각납니다. 타락한 인류가 벌을 받지만, 하느님께서 노아와 가족들을 홍수에서 구출하십니다. 그 결정적인 때에, 비둘기가 싱싱한 올리브 잎을 물고 노아에게 돌아온 장면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비둘기의 형체로 예수님 위에 내리셨음은 모든 인간에게 구원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표시가 아닌가요?

예수님께서 전도를 시작하실 때 ‘주님의 영이 내리셨습니다’(루카 4,18). 사도행전 2장에서 보듯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불꽃과 같은 혀 모양을 한 성령강림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온 백성에게 이렇게 당신 모습을 드러내실 때부터 성령께서 예수님 위에 내려오시더니 이제는 우리 모두 위에 내려오십니다. 예수님과 하나되는 세례성사를 받은 우리가 주님의 소집에 응답하여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심으로써 가능하게 된 일입니다.

4.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여기서 예수님이 하느님 아드님이라는 사실이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확인되고 있습니다. 덕분에 우리도 하느님 자녀가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이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갈라 4,4-6).

하느님 마음에 드는 아들은 이런 분입니다.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겸손하여 큰소리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분입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이사 42,1-3).

▥ 서울대교구 조수욱 신부 2016년 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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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동의 한 식당엘 갔습니다. 드러나지는 않지만 맛있는 집으로 입소문이 난 곳입니다. 기대한대로 음식은 정갈하고 맛이 있었습니다. 음식점의 벽에는 그곳을 다녀오신 분들의 이름과 글이 가득 붙어있었습니다. 그 중에 제 눈에 들어오는 이름과 글이 있었습니다. 추기경님의 이름과 글이 있었습니다. 식당의 주인은 천주교 신자였고, 추기경님께 부탁을 해서 소중한 글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글을 남기신 분들도 음식이 맛이 있었기 때문에 기꺼이 적어 주셨을 것입니다. 식당의 주인도 저명한 분들의 글을 받는 것이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대전 가톨릭 대학교로 들어가는 초입에는 ‘평화정’이라는 정자가 있습니다. 길 이름도 ‘평화로’였습니다. 평화정 앞에는 안내문이 있었습니다. 2014년 교황님께서 대전 가톨릭 대학교엘 방문하셨고, 마을 분들은 교황님의 방문을 기념해서 기꺼운 마음으로 정자를 지었고, 마을의 길 이름도 교황님을 기념하는 의미로 ‘평화로’라고 정한 것 같습니다. 교황님의 방문은 대전 가톨릭 대학교에는 큰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교황님께서도 기쁜 마음으로 잠시 머물다 가셨을 것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표시로 세례를 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들었습니다. 정의와 평화를 이야기 하였습니다. 올바른 길을 준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세례는 충분히 의미가 있었고, 사람들도 세례자 요한의 권위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 하십니다.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기 때문에 세례의 품격은 더욱 깊고 높아졌습니다. 세례는 단순히 몸을 씻는 행위가 아닙니다. 세례는 지난날의 모든 죄를 용서받는 하느님 은총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세례는 이 세상에서의 평화를 추구하는 것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몸소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하느님의 아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자세를 보여주셨습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과 권한이 있지만 섬기려는 삶을 사시려는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세례를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은 특혜를 받고 섬김을 받고 그래서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삶은 갈대가 부러졌다하여 잘라버리지 않는 삶, 심지가 깜박거린다고 하여 등불을 꺼 버리지 않은 삶 이였으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을 걸어가는 삶 이였습니다. 소경들의 눈을 열어주고, 감옥에 묶인 이들을 풀어주고 캄캄한 영창 속에 갇혀 있는 이들을 놓아주는 삶이었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세례 받은 신앙인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봅니다.

첫째, 바른 인생길을 가야합니다. 갈대가 부러졌다하여 잘라 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고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아니해야하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을 살아야합니다. 그래서 소경의 눈을 열어주고, 감옥에 묶여 있는 이를 풀어주는 이가 되어야합니다.

둘째, 오늘 세례자 요한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모든 영광과 기쁨은 하느님께로 돌리는 겸손함이 있어야합니다.

셋째, 하느님께서는 차별 대우를 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다 받아 주시듯이, 세례를 받은 사람은 모든 이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의 세례 축일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변화된 삶을 살았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세례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이름이 예뻐서, 부르기 좋아서, 생일에 가까운 축일이 있어서 세례명을 정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명을 정하는 것은 이미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성인과 성녀들의 삶을 본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분들의 도움을 청하며 세상이라는 험난한 파도를 이겨내기 위해서 세례명을 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나의 세례명을 한번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아직 세례를 받지 못한 분들은 죄의 용서를 받으며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세례’를 잘 받을 수 있도록 열심히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 2017년 1월 9일
  |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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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받으신 예수님의 참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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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의 설교를 들으며 백성들은 메시아가 이제 곧 오시리라는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세례자 요한이 바로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점점 굳어져 갔고, 일부에서는 구세주로 추앙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세례자 요한은 예언자요 선도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 영원히 다윗의 왕좌에 앉아 백성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도 감히 근접할 수조차 없는 분으로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메시아께서는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폭포수와 같이 쏟아 부어 주십니다. 그렇지만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벌을 주시고, 파멸의 불에 태우실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물로 베푼 세례는 다가올 구원의 때를 준비하는 의미이지, 구원의 도래 자체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때를 시작하십니다.

그런데 이 구원의 때를 시작하시는 예수님께서 겸손되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기 위해 모여든 이들 중 하나가 되시며, 회개하는 많은 죄인들 중의 하나가 되십니다. 그리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사람들 중 하나가 되어 기도하십니다. 회개의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면서 하느님께서 내리실 성령을 받을 준비를 하십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높이 들어 올려 주십니다. 먼저, 예수님 위에 하늘이 열립니다. 지금까지는 닫혀있던 하늘이 열릴 종말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 당신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 당신 앞에서 산들이 뒤흔들리리이다.”(이사 63,19)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께서 그분 안에서 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하느님을 드러내시는 신약의 베텔(창세 28,17-19 참조)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비둘기 모양으로 성령을 내려주십니다. 하느님의 성령께서 예수님께 머물며 메시아로서 하실 업적을 이루실 것이니, 새로운 창조, 계시, 생명과 지혜의 열매를 내실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목소리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메시아로서 우리들의 왕이시며 사제이심을 하느님께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회개하는 마음으로 세례를 받아, 성령을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예수님의 왕직과 사제직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다시 한 번 깊이 성찰하고, 이제 시작될 연중 주일들을 통해 우리 인류의 메시아, 왕이시며 사제이신 예수님께서 구원의 때를 열어 가시는 여정을 함께 따라가며 참 제자가 되어가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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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일 알렉산델 신부 : 2019년 1월 13일
  |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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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딸인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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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시기의 마지막 날 맞이하는 주님 세례 축일은 평범한 나자렛 생활을 접고 하느님 나라의 오심을 선포한 예수님의 공생활이 시작된 날이기도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이어진 공생활의 출정식으로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구원으로 인도해주기 위해 손수 인간이 되시어 오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왜 스스로 세례를 받고자 하셨을까요? 세례자 요한이 말한 것처럼,오히려 예수님한테 세례를 받는 게 정상인 것으로 보이는데, 무엇 때문에 세례를 받기로 하셨을까요? 이렇게 해야만모든 의로움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이런궁금증을 안고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고 강변으로 나오시는 예수님 위로, 성령께서 비둘기 모습으로 내려오면서 하시는 말씀을 마음에 되새기며 다시 한번 들어봅니다.“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순간 이것이 예수님의 의도였구나 싶었습니다. 세례를통하여 예수님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 하느님 마음에드는 아들이심이 드러났듯이, 예수님을 따라 세례를 받은우리 역시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딸, 하느님 마음에 드는아들딸이 되는 것이 모든 의로움의 실현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낍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하느님이 우리를 먼저 아들딸이라고 불러 주셨기 때문이며, 그러기에 하느님이 우리를 아들딸로 선택해주셔서 하느님의 아들딸인 것이 우리의 ‘신원’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모두가 자기 ‘아버지’와 잘 지낸 건 아닙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아버지’라는 사실에 모두가 마냥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예수님의 아버지이자 우리의 아버지는 우리가 체험한그 ‘아버지’를 뛰어넘는 ‘아버지’이심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십자가를 향한 고통의 여정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부르셨고, 이제는세례 받은 우리가 당신의 여정에 참여하여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딸이 되도록 가르쳐 주십니다.

사도 베드로 역시 세례를 통해 모든 인간이 사랑받는 아들딸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사도 10,34-35)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올해에도 잘 되는 일도 있겠고 잘 안되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잘났건 못났건 우리는 모두 사랑받는 하느님의 아들딸입니다. 이것만 꼭 기억하면서, 역시 위로가 필요한 우리 이웃들에게 이‘기쁜 소식’을 전해주면서 참으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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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신희준 루도비코 신부
2020년 1월 12일
  |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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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르코 복음 1장 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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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일을 기념하는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아무런 죄도 없으셨던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던 것은 죄와 죽음으로 얽혀있는 인간들과 깊은 유대를 맺고 있음을 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비우고 낮추시어 우리 중에 한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육화의 신비가 이 사건에서 온전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신 직후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시고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하늘의 음성이 들려왔는데, 이는 예수님의 신원과 사명을 드러내는 하늘의 증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세례는 요한이 예고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이 선포되고 그로부터 구세주로 오신 그분의 공적 사명이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일생을 통하여 당신의 아버지가 또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알게 하셨습니다. ‘아빠,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바치는 주님의 기도(마태 6,9-15)를 가르쳐 주신 것에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마태 28,19)주라는 마지막 사명 수여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당신의 아들, 딸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예수님께서 밝혀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전해주신 놀라운 새로움입니다.

주님 세례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봅시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감히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이 근원적 관계는 그 무엇으로도 부정될 수 없고, 그 무엇으로도 소멸되지 않습니다.

비록 지금 우리의 모습이 하느님 앞에 떳떳지 못하고,
하느님 아닌 것에 대한 애착과 미련과 욕망으로 우리의 내면이 몹시 불편하고 일그러져 있을지라도 하느님은 여전히 우리를 당신의 사랑스러운 아들이요 딸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스스로가 자신을 포기하고 싶은 그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로 택한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가 바로 당신의 아들이요 딸이라고 거듭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부족하고 합당치 않은 우리의 모습에만 머물지 말고, 아무런 조건이 없는 하느님 사랑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도록 용기를 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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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유승록 라우렌시오 신부
2021년 1월 10일 <서울대교구 주보>에서
  |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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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하느님의 공정을 실천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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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주문진항에 ‘방사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해변의 모래가 파도에 쓸려 내려가 유실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고마운 녀석이지요. 하지만 생김새가 흉물스러워 사람들 관심 밖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이 ‘도깨비’라는 인기 드라마의 촬영장소로 쓰이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극 중 도깨비 역할을 맡은 공유씨가 여주인공에게 꽃을 주며 고백하는 장면의 배경으로 쓰인 덕에 인기 관광지가 된 것입니다. 그 장소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사진을 찍으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특별한 기분을 느낄 수 있어 많은 사람이 그곳을 찾는 것이지요.

오늘은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죄의 용서’와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남’이라는 세례의 ‘효과’를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죄를 짓지 않으시며 이미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세례의 품격’을 높이시기 위함입니다. 물에 당신 몸을 담가 거룩하게 만드심으로써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는 중요한 도구로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죄를 씻는 ‘정결례’에 불과했던 세례를 당신이 직접 받으심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라는 거룩하고 복된 지위를 교회의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성사’로 들어 높이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례를 받고 나오신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교회의 전승에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직접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베푸신 세례는 요한이 베푼 세례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요한이 베푼 ‘물의 세례’가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되돌려 구원받을 준비를 시키는 역할을 했다면, 예수님께서 베푸신 ‘성령의 세례’는 준비된 이들의 마음속에 성령의 숨결을 불어넣으시어 영원한 생명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깨끗이 씻어 준비한 그릇에 예수님께서 ‘생명의 밥상’을 차려주신 것이지요.

그 ‘생명의 밥상’은
오직 하느님의 자녀들만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은 세례성사를 통해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시작’됩니다. 즉,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거룩한 생활로 자신이 ‘생명의 밥상’을 받아먹기에 합당한 사람임을 계속해서 증명해내야 합니다. 그 증명의 과정은 영성체 예식 직전 바치는 ‘백인대장의 기도’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좀 더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제1독서인 이사야서에
그 노력의 구체적 방향과 내용이 제시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리기 위해서는 그분의 ‘공정’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공정’은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만 잘해주는 반쪽짜리가 아니라, 나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사람들, 나에게 피해와 상처를 주는 사람들을 용서와 더 큰 사랑으로 품어 안는 것입니다. 또한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것’입니다. 즉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실천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속에 ‘희망’과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용기’를 심어주는 것입니다.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세상의 거센 저항에도 ‘기가 꺾이지 않고’ 끝까지 하느님의 공정을 실천하면, 하느님께서 이름을 불러주시고, 손을 잡아주십니다. 비로소 우리는 죄의 어둠에서 벗어나 구원의 빛 안에서 살 것입니다. 하느님께 사랑받는 자녀로 새로 태어나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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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신부
2021년 1월 10일 <가톨릭평화 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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