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대축일/명절강론

대축일/명절강론 코너 ( 대축일/명절 미사에 관련된 강론자료입니다... )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66 18%
[부산] 세례는 예수님의 실천 안으로 들어가는 입문 의례
조회수 | 2,253
작성일 | 11.01.06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세례 주기를 사양하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내세워 세례를 요구하십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세례 받은 사실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님보다 요한을 더 훌륭하게 볼 위험을 막기 위해 복음서들은 각각 여러 가지 장치들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마태오복음서가 사양하는 요한과 요구하는 예수님님을 부각시키는 것도 그런 장치의 하나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오셨다고 말했습니다. 이 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전합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표현은 왕으로 군림하는 메시아를 노래하는 시편(2장)에서 가져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라는 말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표현은 이사야서가 노래한 고통당하는 하느님의 종에 대한 말씀(42장)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초기 교회가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 구약성서 구절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기대하던 구원자이지만,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통당하는 야훼의 종과 같이, 하느님을 알리다가 고통당하고 돌아가신 분이라는 초기 교회의 믿음을 반영한 말입니다.

그 시대 팔레스티나에는 다양한 세례 운동이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세례자 요한의 것입니다. 그 시대 대부분의 세례 운동은 흐르는 물에 몸을 잠기게 하면서 죄를 씻는, 일종의 정화(淨化) 의례였습니다. 이 운동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여, 혹은 성전에 제물봉헌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죄인이 된 사람들이 그 죄를 씻고 깨끗해지는 의례였습니다.

요한의 세례 운동은 다른 사람들의 것과는 그 유형을 달리 하였습니다. 다른 세례 운동들은 필요에 따라 언제라도 또 몇 번이라도 죄를 씻는 단순한 정화 의례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삶을 바꿀 것을 약속하면서 일생에 단한 번 받는 회개의 의례였습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요한의 세례 운동에 가담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으로부터 예수님에게로 이어지는 회개 운동은 그 시대 유대교가 요구하던 신앙생활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유대교는 율법 준수와 성전의 제물봉헌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자각이라는 이스라엘 신앙의 근본은 율법과 제물봉헌에 대한 집착으로 은폐되고 말았습니다. 요한은 회개를 외치면서 심판하실 하느님을 자각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후에 예수님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자비를 자각하라고 가르치실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운동은 율법과 제물봉헌에 대한 유대교의 맹목적 강요로 이스라엘 안에 대량으로 발생한 죄인들을 하느님이 용서하신다고 가르친 데에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요한의 세례운동은 유대교의 배타성을 배제하였습니다. 루가복음서는 “하느님은 이 돌에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일으키실 수 있다”(3,9)는 요한의 가르침을 전해 줍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내세워 타민족에 대해 가지는 우월감을 비난하는 말입니다. 타민족에 대한 이스라엘의 우월감은 그 민족 집단 안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우월감으로 연결됩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율사와 성전에 봉사하는 제관들의 권위가 과대포장 되면서 함께 계시는 자비하신 하느님이 감춰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 운동에 일시 가담하셨다가 후에 독자적 노선을 가신 분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 운동이 요구하던 바를 더 발전시켜 몸소 실천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요한과 같이 물로 씻는 의례에 얽매이지 않고 사람들의 죄를 직접 용서하는 실천을 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고 주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가 절대시하던 안식일 계명에 대해서도 가히 혁명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생기지는 않다”(마르 2,27). 유대교가 죄의 대가라고 가르치던 병을 예수님은 고쳐 주면서 그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요한이 세례라는 하나의 의례로써 표현하던 바를 예수님은 당신의 삶으로 실천하셨습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세례’라 부릅니다. “내가 받을 세례가 있다”(루가 12,50), 혹은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마르 10,38) 등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을 세례로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예수님의 자각과 실천은 그분을 죽음으로 인도하였고 그 자각과 실천은 요한이 세례에서 요구하던 바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예수님의 세례는 단순한 하나의 의례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 운동에 실제 가담하셨고, 그 세례 운동이 요구하던 바를 당신의 삶으로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우리 죄에 대해 보복하시지 않고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실천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효도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듯이, 하느님을 믿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 실천에 충실하셨습니다. 그분의 실천이 유대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것이었기에 그분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우리의 세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실천은 하느님의 일을 행하신 것이었기에 하느님은 그분은 살려놓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받는 세례는 예수님의 실천 안으로 들어가는 입문 의례입니다. 결혼식이 결혼 생활을 향한 통과의례이듯이,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발생한 삶의 실천을 향한 통과의례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그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주신 실천에는 하느님이 용서하고 살리신다는 자각과 그것을 자각한 이의 실천이 보입니다. 세상은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를 차별하고, 높은 자와 낮은 자를 차별합니다. 그리고 높은 자와 가진 자 편에 서는 것이 현명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은 갖지 못한 자와 낮은 자의 편에서 세상을 보고 그들을 돕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가 행복하고, 우는 자가 행복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일을 실천하는 신앙인은 그것을 자기 삶의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신앙인은 그런 보람에 대한 대가가 십자가가 되어 돌아와도 하느님 안에 모든 희망을 두고 그 십자가를 감수하는 사람입니다. 세례 받은 신앙인은 자기가 가진 것과 자기의 신분으로 허세를 부리지 않습니다. 세례 받은 우리의 실천은 어떤 것인지 오늘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서공석 신부
466 18%
“회개하라는 요한의 가르침 따르자”

오늘은 주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을 상기시키는 축일이다. 4복음서는 모두 가장 오래된 전승 중의 하나인 예수께서 요르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사건에서부터 예수의 공생활에 관한 서술을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 공현축일에 기념하는 구세사의 세가지 시초적 사건중의 둘째에 해당한다. 이 이야기의 외적 표상들은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의 접촉 및 성령의 능력이라는, 말로는 완전히 표현할 수 없는 실재들을 표현하고 있다.

이 접촉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를 나는 어여삐 여겼도다』(마르 1, 11)하는 구약에서 따온 말로 요약되어 있다.
이것은 이사야서의 수많은 노래에 나오는 고통받는 「야훼의 종」이라는 인물을 환기시켜 준다.

"나의 종을 보라…내가 뽑은 자에 대하여 나의 영혼이 만족하노라』(42, 1). 『…그러나 야훼께서는 우리 모든 이의 잘못을 그에게 지우셨도다"(53, 6). 따라서 예수의 세례는 그의 종으로서의 역할을 표시한다. 후에 예수께서는 두번 자기 죽음을 두고 「세례」라는 말로 표현하신다(마태 20, 22: 루가 12, 50).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이 자신을 바쳐 비천한 종이 되고, 모든 죄를 짊어지는 어린양이 되는 것이 예수의 소명인 것이다.

이어 복음서는, "그리고 물에서 올라 오시자마자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마르 1, 10)고 말하고 있다. 이것도 야훼의 종의 노래에서, "나는 그의 위에 나의 영을 주노라"(이사 42, 1)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구약 시대의 하느님 사람들은 자기들 안에 깃든 하느님의 영을 마치 어떤 이상한 능력이 자기를 붙들고 있는 것 같이 체험했다.

그러나 예수의 생애가 보여주는 영으로 충만한 모습은 마치 영이 필요 없는 것 같이 보일 만큼 자연스럽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생소한 것으로 영을 소유하신 것이 아니라고 하겠다. 그것은 자기에 속하는, 자신의 영으로 소유하는 힘인 것이다.

"하느님이 보내신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것은 야훼께서 아낌없이 영을 주시기 때문입니다"(요한 3, 34: 이사 11, 2).

요한이 준 물의 세례는 이 영의 세례에 의하여 새로운 의의가 주어진다. 미래의 신자들에게 주어질 영의 세례의 상징이다. 그래서 동방 전례에서는 예수 공현축일 전야에 다음과 같은 노래를 한다:『오늘 주께서 당신 선구자의 손 아래 머리를 숙이시도다. 오늘 주께서 사람들의 죄악을 물속에 묻으시도다. 오늘 주께서 높은데로부터 하느님의 아들이며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언받으시도다. 오늘 주께서 친히 오셔서 물의 본성을 거룩하게 하시도다. 주께서 요르단 강물에 잠기셨으니, 이는 당신이 씻길 필요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당신 안에 우리를 위한 재생을 준비하시기 위함이로다』. 요한의 세례는 다가올 것에 대하여 준비되어 있다는 표시이지, 그리스도교의 세례처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공격을 받고 있다. 공격하는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점령한다"(마태 11, 12).

요한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고 부르짖었고 따라서 그는 신약성서의 한몫을 차지하고 있다.

"율법과 예언자의 시대는 요한까지이다"(루가 16, 16).

요한은 신.구 양시대의 경계를 이루는 전환점에 서있는 사람으로서 신약성서에 속한다. 그는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길의 일부이다. 요한은 참 빛이신 예수께서 나타나신 지금에는 잊어버려도 좋은 그런 인물이 아니다.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준비를 하도록 가르치는 분이다. 요한의 존재 의의는 시간을 초월한다. 이 때문에 교회는 매년 4주간을 정해 놓고 세례자 요한의 소개를 듣고 있다.

"회개하라" 이것이 요한의 외침이다.

허성 신부
  | 01.06
466 18%
의로움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이다. 주님 세례 축일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이제 본격적으로 공생활을 시작하셨음을 알리는 날이다. 예수께서 받으신 세례는 죄사함을 받기 위한 세례가 아니라 당신의 강한 체험과 결단을 드러내신 사건이다. 그 강한 체험과 결단이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깨닫고 오로지 그 뜻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바로 ‘의로움’을 이루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의로움’이란 하느님의 뜻을 이룩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하느님의 뜻만을 이루고자 하시는 분이기에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 되는 것이고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되는 것이다.

묵상해 보면 예수님 당신의 언행 그 자체가 우리에게 복음이 된다. 하느님의 뜻을 이룩하는 것, 의로움을 이루고자 하는 것 그 자체가 우리에게 또 하나의 구원의 길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마음속에 욕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욕망은 인간의 고유한 생존 방식 중 하나이며 그 욕망을 실현하려고 함으로써 자기의 존재 가치를 느낀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이란 그렇게 거창하지 않다. 인간에게 있어 욕망이란 바로 타인과 같이 되는 것이다. 타인과 같이 됨으로써 자기 존재 가치를 상승시키려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욕망의 기준은 항상 ‘타인’인 것이다. 좋은 아파트를 갖고 싶은 것은 남이 갖고 있기 때문에 내가 갖고 싶은 것이다. 한편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는 경쟁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 경쟁이다. 그러나 인간은 욕망에 의한 경쟁을 한다. 그래서 그 치열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경쟁적이다. 한국의 대학 입시를 상상해 보라. 결국 인간 삶의 모든 고통과 괴로움은 바로 여기에서 파생된다. 모든 환경과 여건이 과거보다 훨씬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삶은 여전히 힘들고 괴롭다.

결국 인간의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 아무리 환경과 여건이 최첨단 시설로 바뀐다 해도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인간은 그 본성상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이 욕망대로 따라가는 것도 문제이다. 바로 여기에서 오로지 하느님의 뜻만을 생각하고 그 뜻을 추구했던 예수님을 생각해 본다. 잘 되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이라 하더라도 동시에 구원의 길로 가는 하느님의 뜻을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 하느님의 의로움을 이루어야 하지 않을까!

이민 미카엘 신부
  | 01.07
466 18%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 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듯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세례’라는 말의 뜻은 씻는 예식, 즉 ‘죄를 씻고 새로운 삶을 산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죄 없는 하느님의 아들인데 왜 굳이 세례를 받으신 것일까요? 예수님 시대의 세례자 요한의 세례 운동은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것 같습니다. 세리나 군인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요한의 설교를 듣고 자신의 그릇된 삶을 뉘우치고 세례를 받음으로서 하느님의 백성으로 돌아 왔습니다.(루가3.10-16) 예수님께서는 이런 세례자 요한의 활동을 인정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부여된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더욱 확고히 하여 구원사업의 시작을 세례로서 세상에 선언하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 사건은 숨겨져 있던 당신의 신적 정체가 계시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 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고 합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가3.22)하고 말입니다.

창세기의 말씀에 따르면 세상 창조때 “하느님의 영이 심연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1.2)고 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영이 예수님의 머리 위에 내려오신 바로 그 성령임을 생각할 때 예수님의 세례는 이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하느님 성령의 행위임을 계시 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오셨다함은 예수에 의해 열어질 새로운 세상은 곧 평화의 왕국임을 암시해 줍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에서 비둘기는 징벌의 시대를 마감하고 평화의 시대를 열어가는 동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창세8.11) 이렇게 예수님의 세례는 나자렛 사람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요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실 메시아라는 사실을 계시하는 엄청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세례 장면은 성서에서 가장 웅장하다할 정도로 신비롭고 위엄있게 표현됩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시고, 하느님의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세례 때는 어땠습니까? 우리 신자들은 대부분 육개월의 예비자 기간을 마치고 세례식을 치릅니다. 여러분은 그 때 하늘이 열리고 신비로운 체험을 하셨나요? 아니면 하느님의 음성을 들으셨나요? 아마도 대부분 그런 체험은 없었을 것입니다. 신비 체험은 커녕 엄숙한 전례 분위기에 압도되고 여기저기서 축하인사와 꽃다발 세례를 해와 조금은 들뜨고 신자 되었구나 하는 감동은 있었지만 그 것도 몇 개월 지나자 금방 시들 해 버리셨을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신부인 저로서 볼 때 새 신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얼마 안가서 눈에 보이지 않거나 타성에 젖은 기존 신자들의 좋지 않은 모습을 닮아 갈 때 안타까움과 실망감이 느껴집니다. 과연 이 들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질까? 이런 이 들에게 세례를 준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유심히 드려다 보면 매 주일마다 끊임없이 찾아오는 교우들, 특히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평일의 성전 자리를 채우는 열심한 신자 분들, 레지오 단원, 소 공동체 봉사자등 이런 사람들 모두가 주님의 세례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세례 받던 그 날은 몰랐지만 바로 이런 모습이 그 날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존엄하신 하느님의 아들이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인간에게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으신 사실은 우리에게 어떠한 삶의 태도가 자신과 세상을 바꾸어 갈 수 있는가를 설명해 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눈앞의 성과와 표징에 메이지 말고 겸손과 성실함으로 세례성사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부산교구 방삼민 신부>
  | 12.24
466 18%
[부산]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성전이 된 우리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찾아가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기 위해 요르단 강으로 몰려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시대 때, 죄를 씻고 정결하게 용서받기 위한 율법의 조항들은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죄와 부정을 씻는 정결예식이라든지, 참회예식들은 대개 큰 부담이었습니다. 많은 시간과 복잡한 예식, 그리고 경제적 비용들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냥 죄의식을 지우지 못한 채 죄인이라 자학하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달랐습니다. 죄 사함을 위해 다른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진심으로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세례를 받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그 선포는 율법과 죄에 찌든 백성들의 마음을 휘어잡아 선풍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각지에서 세례자 요한을 만나러 죄인들이 몰려들었고, 거기에 예수님도 합류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가집니다.‘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의 용서를 위한 세례를 왜 받으셔야만 했는가?’공관복음인 마태오 복음서를 보면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께 물어봅니다.“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마태 3, 14) 그러자 예수님께서는“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 3, 15)라고 대답하십니다.

즉, 예수님의 세례는 하느님의 의로운 뜻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부족한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죄 없으신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낮추셔서 내려오심을, 그래서 죄 많은 우리와 하나되어 있음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전지전능한 신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조건을 가진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뜻을 잘 헤아리고 순명하신 예수님의 겸손된 모습에 하느님은 응답하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 11)

형제 자매 여러분, 그 옛날 세례자 요한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물로 베풀었지만 예수님의 부활 이후 우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나 자신은 하느님의 성령이 머무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세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며, 나 자신이 바로 성전임을 기억하고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부산교구 김병수 시몬 신부>
  | 01.10
466 18%
[부산] 우리의 죄를 사랑하자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선포하시기 전에 가장 먼저 요르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가 세례를 받습니다. 교회의 전례력도 비슷한 의미에서 가장 많은 시기를 차지하는 연중 주간을 주님 세례 축일로 시작합니다.

주님 세례는 그리스도인들의 세례를 미리 보여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주님 세례의 의미를 나타내는데 너무 부족하고 단순한 표현입니다. 주님 세례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나자렛 예수를 요르단강 세례를 통해 (성령의 능력으로) 이 세상의 구원자로 선포하고 세상에 알리는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하늘의 구원소식을 전하는데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전반부는 세례자 요한의 구원자 예수에 대한 증언이고, 후반부는 요한의 증언이 예수의 세례를 통해 실현되었음을 세상에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수많은 사람의 죄가 씻겨져 남아있는 곳에 함께 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없애기 위해 먼저 세례라는 행위를 통해 세상의 죄 안으로 들어와 죄인들과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죄인인 인간을 사랑하고 구원하시기 위해 언제나 죄인인 인간과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 세례는 인간의 죄악에 대한 잘못된 생각과 판단을 고쳐줍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죄악을 사랑하는데, 인간 자신들은 죄악에서 빠져나가려고만하고 죄악을 적극적으로 사랑하지 못합니다.

주님 세례는 인간의 삶 안에서 만들어진 죄악에 대한 진정한 구원의 시작을 알리는 기쁜 소식입니다. 주님의 세례를 받은 우리들도 죄악을 저주하고 피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죄악을 우리의 따뜻한 품에 안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자신을 죄악과 무관하고 구분되어진 사람처럼 생각하며 하늘만 향해서는 안됩니다. 먼저 우리 주위에 널려 있는 죄악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사랑할 때 새로운 희망의 새 하늘, 새 땅이 열립니다.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죄로 가득 찬 물 속으로, 인간의 본능적 욕망 안으로 내려옴으로써 우리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삶을 열어 주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부산교구 김성남 야고보 신부>
  | 01.13
466 18%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언뜻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세례는 모든 인간이 원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원죄와 자신이 지은 죄를 사해주고 하느님의 새로운 자녀로 태어나게 해 주는 은총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도 태어나시면서 원죄를 지니셨고 스스로 죄를 지으셨습니까? 이 물음에 대해서는 누구나 “아니오”라고 단호하게 부정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아마 청취자 여러분께서 많이 들으셨던 설명은 대개 이러할 것입니다. 요한이 준 세례는 죄 사함을 위한 세례가 아니라 회개의 표시이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세례의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또는 죄많은 사람들과의 연대감을 표시하기 위해서라는 설명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우리의 신앙심을 고취시키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성서적인 근거는 미약합니다.

성서적 설명은 예수님의 세례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려는 예수님의 준비된 마음의 표현과 이 표현에 대한 아버지의 응답으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메시아로 선포되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탄 대축일과 주님 공현 대축일로 하느님의 직접 계시를 묵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 하느님께서 직접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납니다. 바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구원자를 뜻하는 성서의 언어가 히브리어로는 “마쉬아흐”이고 이 말이 그리스어 음역에 의해 “메시아스”로 됩니다. 그리고 순수한 그리스어는 “그리스도”입니다. 이 말의 본디 의미는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인데 이 말은 구약 성서에서 임금, 대사제에게 적용되던 말이었습니다. 그들의 임무가 백성을 구원하는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임금이나 대사제가 자신들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참다운 구원자에 대한 기대는 미래의 인물에게로 향하게 된 것입니다.

신약성서는 구약에서 약속된 참된 메시아를 예수님에게서 발견합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생애, 특히 그분의 가르침과 그분께서 행하신 기적들, 그리고 그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사건에서 예수님이 분명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고 증언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과 행적은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제 1 독서인 이사야서 42,1-7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네 개의 소위 “주님의 종의 노래” 가운데 첫째 노래입니다. 이 노래가 묘사하는 주님의 종의 사명이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메시아의 사명과 일치합니다. 주님의 종은 예수님처럼 주님께 선택되고 그분의 마음에 드는 이입니다. 주님의 종은 세상에 공정을 세우고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인물입니다. 나머지 주님의 종의 노래들도 모두 주님의 종이 자신의 사명을 어떻게 수행하는지를 묘사해줍니다. 이 노래들에서 묘사되는 주님의 종의 모습이 예수님에게서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주님의 종처럼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계획을 선포하고 충실히 실천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계시하시고 그분의 뜻을 성취하실 메시아라는 사실이 예수님의 세례를 통하여 공적으로 선포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실현”으로 표현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적 활동을 시작하시면서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서 시작되고, 예수님을 통하여 완성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랑 안에서 평화와 정의를 추구함으로써 건설될 수 있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로 이러한 당신의 사명을 드러내 보이시며 당신을 믿고 따르는 모든 신앙인에게도 같은 자세를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의 세례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선포하고 메시아로서 그분께서 지니신 사명을 설명해 주듯, 우리 신앙인들 역시 세례를 통하여 단지 죄의 사함만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메시아의 사명에 동참할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도록 초대 받은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건설은 먼저 우리 신앙인들에게 우리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삶, 곧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회개의 삶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변화된 우리의 삶 안에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을 때 하느님 나라는 차츰 차츰 완성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부산교구 정영한 루도비코 신부>
  | 01.13
466 18%
[부산] 세례성사의 의미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주님 성탄이 육신적인 탄생이라면, 주님의 세례는 영신적인 탄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날은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이분이야말로 참 메시아시고 하느님의 아들임을 공적으로 선포하며, 더 나아가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의 신성을 가지셔서 아무 죄 없이 잉태되시고, 태어나셨으며 죄지을 수 없으셨던 예수님께서 요한이 베푼 회개의 세례를 받았다고 전합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세례의 중요성을 알려주시고자 스스로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세례성사를 통하여 원죄와 우리가 살아가면서 짓게 되는 본죄들을 깨끗이 사함을 받고, 구원의 공동 상속자로서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런 근거가 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신성을 나누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탄생이 인간과 같아지고자 하신 하느님의 육화였듯이 그분의 세례가 죄 없는 분이 인간과 같아지고자 죄 있는 이들의 모습으로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인간과 같아지셨고, 죄인이 아니었으나 자신을 죄인인 인간과 동일시함으로써 모든 인간을 묵은 인간에서 새 인간으로 변화시키고자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례의 모범을 보여 주심으로써 천국에 들기 위하여 회개한 후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엄숙한 역사적 선언을 하고 계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총입니까? 살다가 죽고 나면 모든 게 끝나는 우리 인생을 끝까지 사랑해 주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사실. 그것에 우리는 매일매일 감사를 드리며 주님의 뜻을 온전히 받드는 삶이 되도록 다함께 노력합시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 22)

▥ 부산교구 신기현 신부 2016년 1월 10일
  | 01.08
466 18%
[부산] 예수님처럼

오늘은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음을 기념하는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세례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 받는 것인데(마르 1,5), ‘아무런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왜 세례를 받으셨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께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라고 묻습니다(마태 3,14). 그러자 예수님은 “모든 의로움을 이루기 위해서”(마태 3,15) 당신이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밝히십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마르코 복음서를 보면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마르 10,35).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하느님이 마련해 놓으신 잔을 마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마시게 될 ‘잔’은 우리 모두가 의로워지도록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십자가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날 밤 겟세마니 동산에서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라고 기도하신 바 있습니다(마르 14,36 루카 22,42와 마태 36,39도 참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르 10,39에서 “내가 받았던 세례”가 아니라 “내가 받는 세례”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당신의 세례는 한 번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라, 일생을 통해 걸어야 할 하나의 길임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시작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죄를 용서받기 위함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 자체가 당신의 사명임을 드러내시는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당신이 걸어야 할 길이 바로 세례의 길임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우리의 의로움을 위해 당신을 십자가 제물로 봉헌하는 것임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이 점이 바로 당신의 사명임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 길을 기꺼이 걸어가십니다. 하느님은 이런 예수님을 두고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따르고자 세례를 받고 이 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세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묵상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기꺼이 자신에게 맡겨진 잔을 마시며,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의 십자가를 잘 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높은 자리에 오르고, 영광스럽게 되기만을 바라며, 우리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벗겨내어 줄 새로운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물론 무엇이 아버지의 뜻인지 모호할 때가 많습니다. 또 안다 해도 마셔야 할 잔이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아버지께 “저에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라며 기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지막 기도는 언제나 예수님처럼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라는 기도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받은 세례는 진정 의미 있는 세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 세례 축일을 맞아서 다시 한 번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를 되새겨 봅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잔은 과연 무엇인지 묵상하며, 그 잔을 기꺼이 받아 마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십사 하느님께 청합시다. 그렇게 우리가 기꺼이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수행해 나갈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 부산교구 염철호 신부 2016년 1월 10일
  | 01.09
466 18%
[부산]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

----------------------------------------------

나는 태어난 지 3일 만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님이 신자라서 ‘물 부음 당하는 세례’를 받았다. 교우촌 공소라 전 국민이 성당에 다니는 줄 알았는데, 초등학교에 진학하니 신자는 우리 동네 사람들뿐이었다. 그리고 이름도 다두, 분도, 마리아가 아닌 또 다른 ‘속명(俗名)’이 있었고 우리가 부르는 이름은 ‘본명(本名)’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첫영성체의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십이단(十二端) 기도문’을외울 때는 ‘나는 왜 천주교 집안에 태어나 이 고생을 하는가?’ 푸념도 했었다. 그럼에도 쉬지 않고 신앙생활을 이어 온 것은 주님 도우심의 은총이라 여긴다.

성탄 시기를 마치는 오늘 교회는
예수님이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심을 기념하는 축일 미사를 봉헌한다. 저마다 세례를 받은 이유는 각양각색이지만 대부분 세례를 받고 신앙에 입문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행복도 얻고 또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세례를 받고도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가 적은 걸 보면 예수님을 닮고 그렇게 살아가기가 어렵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세례받음에 대해 베드로 사도께서는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베드로 1서 3,21)이라 말씀하셨다.

결국 우리가 세례를 받은 것은
천당 입장권을 획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여주신 올바른 양심을 살아내고 이기적 욕심을 버리고 그리스도화 된다는 말씀으로 이해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보여주셨던 공생활의 삶은 욕심 없는 마음,
이타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 손해 보고, 고통스러운 삶도 가치와 의미가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부모가 자녀에게 세례를 줬거나 스스로 개인이 세례를 받는 것은 원초적으로 가진 우리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을 버리기 위한 약속의 행위이다.

우리 각자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비우고 내가 받은 세례를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해주 관찰사가 김대건 신부님께“당신이 천주교인이오?”라고 물었던 질문에 나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

부산교구 김정렬 모세 신부
2021년 1월 10일 <부산교구 주보>에서
  | 01.08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510   [수도회] 신통(神通)한 베드로  [18] 1527
509   [인천/서울] ‘Understand’  [5] 1398
508   [부산/전주/원주/청주]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8] 2017
507   [수원/의정부] 교회의 그리스도적 권위  [4] 1570
506   (백)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2월 22일) 독서와 복음  [10] 1336
505   [수도회] 진정한 복  [21] 3356
504   [부산] 영원한 생명의 나라  [10] 2938
503   [수원] 감사하자  [4] 2947
502   [서울] 깨여 있으라  [9] 3377
501   [인천] 신망애 삼덕  [8] 3224
500   [청주/의정부] 복의 근원은 하느님이시다  [6] 156
499   [전주/마산] 말씀의 덕담  [6] 142
498   [원주/군종]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1] 149
497   (백) 설 날 (음력 1월 1일) 독서와 복음  [12] 3366
496   [대구/안동] 설, 이 좋은 날에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3] 3264
495   [수도회] 한나의 기다림  [27] 3102
494   [부산] 모두 다 하느님께 바쳐진 우리들의 삶입니다.  [7] 2748
493   [대구] 예수님과의 만남  [3] 2492
492   [마산] 나는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하느님께 바칩니까?  [1] 199
491   [수원] 하느님께 자신의 삶을 봉헌하자  [7] 2643
1 [2][3][4][5][6][7][8][9][10]..[26]  다음
 

 

대축일/명절강론 코너 ( 대축일/명절 미사에 관련된 강론자료입니다... )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05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