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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주님은 세례 받으시러 오십니다.
조회수 | 2,070
작성일 | 11.01.06
주님은 세례 받으시러 오십니다(3,13).

오시는 분 앞에서 요한은 주님께 죄인들이나 받는 세례를 거절하는 겸손과 공경의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요한은 당시에 다양한 종류로 이루어지는 세례를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공동체에 개종자(추종자)를 받아 들이는 히브리 세례,
사해의 연안 위에서 매일 반복된 엄하고 이단적인 교파의 세례,
다른 종교 운동의 세례,

요한은 자신의 세례가
성령으로 주님에 의해 약속된 이름과 얼굴을 향해가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요한 자신의 세례만이 주님을 받아들이는 이 백성을 변화시킬 것으로 믿었습니다.

결국 요한은
그의 이름과 얼굴 모습을 지금 여기에서 계속 전하고 있고, 수세기의 기다림과 성령으로 인한 세례를 받아들이는 첫째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신의 겸손에 참으로 가까이 하시는 분은 오시는 주님이십니다(14).
예수님의 대답은 간결합니다. 반복 없이 지금은 이대로 하시오(15).
마치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으려 하실 때 베드로가 거절하는 장면과 연상됩니다. "내가 하는 것을 지금은 너는 그것을 모른다."(요한 13,7)

하느님의 일이 제지되어서는 안됩니다.
베드로에게 그 설명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요한에게도 그렇습니다. 신중하고 신비로울 뿐입니다.

전통적으로 그 설명은 이렇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신다면, 우리에게 모든 의로움이 충만히 이루어진다는 설명이 적합할 것입니다(15ab). 이러한 설명에 요한은 세례를 허락합니다.

예수님께서 겸손한 모습으로
세례를  받으시며 당신 백성에게 마음의 회개와 죄의 용서를 보여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도 영으로 아들을 통해 모든 의로움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어떠한 하느님 의로움인가?

하느님의 의로움은
당신 백성을 위해 무엇보다 자비와 은총 충만함을 즉시 선사하시는 개입입니다. 의로움의 길은 요한에 의해 시작되고 열렸습니다. 주님께 신뢰하는 세리들, 창녀들이 받아들여진 길입니다(마태 21,32).

이제 의로움은 신비로운 모양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그 세례는 십자가와 영광에 열려있습니다. 모든 의로움입니다. 물, 침수, 영,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늘은 그리스도를 위해 당신 역사적 삶 시작부터 끝까지 열려 있습니다.

열린 하늘과 아버지 가슴으로부터
높은 곳에서 비둘기 같이 영이 아들, 인간성 위에 내려옵니다.
영이 내려와 사제, 왕, 예언자, 신랑으로서 주님을 축성합니다.
주님은 먼저 십자가 상에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당신 인성을 부수어야 하고,
마지막 인성을 취해야 하며,
당신 자신,
살아 계신
영 자체가 되셔야 합니다.
마지막 아담,
늘 성령을 주실 수 있는 분(고린 15,45),
이 위에 항상 돌아와야 됩니다.
이제 하느님의 백성이 영의 거처입니다(16).

고요함 속에서 영을 받으면서
그리스도의 순종과 온순함이 지금까지 소개됩니다.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영의 활동은
아들 위에 내려앉기 위해 옵니다.
세례는 삼위일체적 현시, 신현입니다.
아버지의 개입이 필요합니다.

매번 ’나와 아들’은 영의 현존 업적, 순간을 특별히 합니다.
주님의 세례,
거룩한 변모,
부활 때,
이는 나의 아들입니다.
아들은 오직 영에 의해 세례받는 자입니다.

이제 구약에 하느님은
당신 아들을 다양한 형태 하에 나타나는 인격체로 드물게 그러나 정확하게 가르칩니다. 아들은 역시 신랑을 가르키기도 합니다.

"사랑스런" 아들(hoagapts)(창세기 22 ; 아브라함의 유혹) hoagapts의
히브리 본문은 jahd(유일한 2.12.16) 사랑스러운 독생자(시기의 충만에) 희생적 제물입니다.

아버지께서 분명히 죽음에 처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내게 기쁨이 된다." eudok은 -에 대해 좋게 생각한다. 만족스럽다. ∼위해 승인을 현시하고, 향하여 기쁨을 표시한다(루카복음 2장 14절)라는 뜻입니다.

큰 물은 역시 죽음의 표징입니다(이사야 예언서 28장 2절, 15절-16절 ; 17장 12절-13절). 시대의 끝에 다시 세워지고 살아난 메시아적 백성의 새 성전은 모든 것을 낳게 하고 살게 하는 하느님의 영, 생명의 물줄기가 발산될 것입니다(에제키엘 예언서 47장 2절 : 요한복음 19장 34절, 30절 : 묵시록 22장 1절-2절).

부활한 양의 승리의 목소리가
그렇게 큰물의 소리와 유사합니다.
물은 이제 죽음의 징표가 더 이상 아닙니다(묵시목 1,15).
왜냐면 큰물은 십자가의 무거운 세례,
희생적 죽음에서 전환된
하느님의 아들에 의해 취해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성령 충만으로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세례의 순간으로서 선물로 오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세례는 영,
부활을 위한 십자가 축성,
무덤으로 끝난 세례의 참 시작입니다.

세례는 하느님과 사람 앞에 당신 생명의 참 시작입니다.
세례 받으신 주님의 삶은 인간을 방문하시면서
왕국을 준비하시면서 지나가시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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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곽승룡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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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신자가 한 예비자를 데리고 사막을 횡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신자는 손이 없고, 다른 신자는 벙어리였습니다. 가지고 간 물은 없어지고, 거기다 예비자는 열사병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신자들에게 세례를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나 물이 한 방울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래를 사용키로 결정하였습니다. 손 없는 신자가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는 경문을 외우는 동안 벙어리 신자는 모래를 예비자 머리 위에 부었습니다. 그리고 예비자는 죽었습니다. 이런 경우 이 세례는 유효할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유효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물을 사용해야 하며 물 붓는 신자가 직접 경문을 외워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경우 그 예비자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신자가 받은 세례를 우리는 화세라고 하고, 바로 그 예비신자는 화세를 받았던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주님의 세례를 기념하는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전례주년으로는 이 축일로 성탄 시기가 끝나고 연중 시기가 시작됩니다. 주님 세례 축일은 예수님의 공생활이 시작되었음을 선언하는 날입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공적으로 당신을 드러내시며 활동을 시작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아무런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에 내려가셔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참회의 세례를 받으셨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세례는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받았던 그런 단순한 참회의 세례가 아니었습니다. 죄를 사해주시는 분(예수님)이 죄의 사함을 받아야 하는 사람(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구원사업을 하시기에 앞서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시고,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서 성령과 일치하는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과 분명히 다른 것은 우리는 우리 구원을 위하여 세례를 받지만, 주님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가 우리를 위하여 죄 없으신 분이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비우심으로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1224 항 참조). 그러하기에 복음사가도 예수님의 세례 때 아버지가 나타나시어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시고 그분의 머리 위에는 예언직․사제직․ 왕직을 주시는 성령께서 나타나셨다는 것을 통하여 예수님의 세례가 바로 “하느님의 새 백성”의 성사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세례 축일을 맞이하여 우리들은 다시 한 번 우리들이 받은 세례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면서 세례를 받은 자로서의 그 동안의 생활을 반성해 보고 새로운 결심,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결심하여야 하겠습니다.

옛날에 서울주보에서 본 글을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무당 할머니’라고 불리던 교우 한 분이 계셨습니다. 일생을 무당으로 사셨는데 늘그막에 천주교로 개종하셨습니다. 그래도 이웃들은 계속 ‘무당 할머니’라고 불렀고, 교우들도 그렇게 불러서 애칭처럼 되었습니다. 연세가 높으셔서 보행이 불편했고, 자식이 없어 부축해 드리는 사람도 없고, 욕실이 침실에 달려 있지 않고 허술했지만 할머니는 매일 목욕을 하셨습니다. 미끄러운 욕실에서 넘어지실까, 추운 겨울에는 감기에 걸릴까봐 이웃들이 걱정을 해도 막무가내셨습니다. 무당 시절에 매일 목욕재계하시던 습관 때문이었고, 세례 받으신 후에는 매일 예수님을 모시기 위한 준비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성체를 받아 모시는데 목욕을 안 한다는 것은 할머니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저도 매일 샤워를 합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몸을 씻으며 머리도 감습니다. 그러면 어제 있었던 모든 부족한 행실을 씻어내는 것 같아 미사를 드릴 때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나 특히 새벽미사가 있는 날 늦잠을 자서 겨우 세수만 하고 미사를 드릴 때면 기분이 영 좋지 않습니다. 비록 외적인 간단한 씻음이지만, 우리의 내적인 씻음을 준비하며 새롭게 만들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세례라는 씻음은 언젠가 한 번 지나간 일입니다. 그러나 무당 할머니가 매일 접신(接神)을 위하여, 그리고 나중에는 주님을 모시기 위하여 목욕하셨듯이 세례의 씻음도 매일의 삶 속에서 신선하게 재현시킬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늦은 밤, 스승과 제자들이 화톳불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이런 저런 잡담들을 나누다가, 문득 하늘에 빛나는 달과 별들을 바라보면서 모두들 침묵에 잠겼다. 한참 동안 이어진 침묵 끝에 스승이 입을 열었다.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되는 때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한 젊은이가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멀리 있는 짐승을 보고 그것이 개인지 양인지를 분별할 수 있으면, 그 때가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되는 때 아닐까요?”
“좋은 대답이군,”스승이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답은 아닐세.”
제자들은 잠시 의논한 끝에, 두 번째 젊은이가 대표로 말했다.
“빛이 나뭇잎에 내릴 때 그것이 소나무 잎인지 참나무 잎인지를 분별할 수 있으면 그 때가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되는 때입니다.”
이번에도 스승은 고개를 저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훌륭한 대답이지만, 역시 내가 찾는 답이 아니네.”
제자들은 머리를 모으고 생각해보았지만 답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스승에게 간청했다.
“아무리 궁리해 봐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해주십시오.”
스승은 제자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살펴보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 눈을 들여다 볼 때 형제나 누이가 보이면 아침이 밝은 것이고, 형제도 누이도 보이지 않으면 아직 캄캄한 밤중이라네.”

참으로 그러합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가 누구든 간에, 형제로 누이로 보이지 않으면, 그러면 해가 벌써 중천에 떠 있어도 아직 캄캄한 밤중인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가 누구든 간에, 형제로 누이로 보이면, 그러면 아직 캄캄한 밤중이어도 벌써 환한 대낮인 것입니다. 밤과 낮이 저기 어디에 있지 않고 바로 우리들의 눈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아버지가 나타나시어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 또한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아들딸이 되었으며, 하느님의 마음이 우리 마음에 심겨졌습니다. 또한 매 미사 때마다 성체성사를 통하여 신의 아들딸로 매일 매일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들이 이웃을 바라볼 때에 이웃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우리 마음에 받아들여지는 사람들로 보일 때에 우리는 세례의 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며, 우리 이웃이 아직도 미움과 분노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에는, 세례를 받기는 하였지만, 세례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직도 머리는 아침이 밝았는데, 가슴은 아직 어두운 밤중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다 함께 이 미사를 봉헌하며 주님께서 우리 머리의 아침이 우리 가슴을 채우는, 그리하여 온몸이 환하게 밝아지는, 그 때를 향하여 지치지 않고 걸어가게 도와달라고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세례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진정한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게 도와달라고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 때에 하느님은 우리들을 바라보시며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민병섭 신부
  | 01.06
466 18.4%
[대전] 새로운 출발을 다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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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전례주년으로는 이 축일로 성탄 시기가 끝나고 연중 시기가 시작됩니다. 주님 세례 축일은 예수님의 공생활이 시작되었음을 선언하는 날입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공적으로 당신을 드러내시며 활동을 시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럴 이유가 없었지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행위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향하여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비둘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천상의 모든 분들이 그분의 세례를 지켜보았다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만 일어난 사건일까요?
누구나 세례를 받으면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그만큼 세례는 위대한 사건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늘의 응답이 있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라는 말씀이 있었고, 성령께서도 오셨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이 세례를 받으면 그만큼 하늘에서도 기뻐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았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기뻐하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몰랐을 뿐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세례 축일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세례를 되돌아보는 날입니다.

세례를 받은 뒤 우리는 한동안 많이 달라졌었습니다.
죄를 피하려고 했고,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기도에 힘쓰며 성사 생활을 가까이했습니다. 삶을 긍정적으로 보았고, 미래에는 희망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러한 열정의 불씨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때의 자세를 되찾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죄를 씻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죄와 연관된 신앙에 머물고 있다면 바꾸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죄가 아니라 은총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죄를 피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은총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갈까?’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세례성사의 교훈입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당장에 변화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변화의 출발은 언제나 내 쪽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니 주님의 세례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는 또다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해야겠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은총으로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오늘의 복음 말씀을 기억하며 세례성사의 힘을 청합시다(이상 매일미사).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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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방윤석 신부
  |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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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구원의 사명인 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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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교회는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신 것을 기념하여 전례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대단히 중요한 사건으로 지난날 우리가 받았던 세례를 생각하게끔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다는 사실은 아주 놀라울 만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봉헌될 준비가 되어 있는 흠 없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기에 그분에게는 세례가 필요하지 않음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을 대신해 세례자 요한은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제게 오시다니요?”(마태 3,14)

예수님께서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 3,15)라고
하시는 말씀은
어쩌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신
강복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창세 1,28 참조).

예수님께서 스스로 세례를 받으셔야
모든 의로움을 이룰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당신이 세례를 받아야 하는 근본적인 목적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천주교 대전교구 사목기획국, 예루살렘 성경공부 59쪽 참조)

1. 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는 사라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2. 겸손을 보여주기 위해
3. 아버지 하느님과 성령과 세레자 요한으로 하여금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증명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해
4. 유대인들의 세례를 폐지하고 당신의 세례를 세우기 위해

성경에서 ‘의’나 ‘정의’의 의미는
하느님의 약속이 신실히 지켜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어김없이 실현되었고 실현될 약속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 안에서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세례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사건이면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의 표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우리들이 당신의 자녀,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이사 42,1)로 올려 짐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통하여
인류의 구세주로서의 당신의 사명을 깨달았듯이 우리들도 세례를 받음으로 인하여 세상을 변화시키고 구원으로 인도할 사명을 부여받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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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변윤철 다미아노 신부
  |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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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변화된 증거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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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는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하는 입문 성사로 은총의 시작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 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에게 내려오시어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들었던 것과 똑같은 말씀이다.
이 말씀으로 우리는 용기를 잃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없이 끝까지 올바른 삶의 길을 세상에 증거하는 힘을 얻었다.

세례에 의해서
신앙의 눈을 뜨고 귀가 열려서 진정한 자기의 삶의 변화가 있어야 세상의 빛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증거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신자의 도리요, 의무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구성원 각자는 자기 변화를 통해 증거의 삶을 드러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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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동안
신앙생활을 몸으로 보여 주는 열심한 신자들이 내 주위에 있다.

그 중에서도 대단한 신심으로 성실하고 근면한 40대 초반의 한 자매는 완고하신 시부모님을 모시고 시동생 식구들까지 함께 사는 대가족의 큰며느리인데 시아버님을 온몸으로 설득하여 열심한 신자로 변화시켰다. 그 자매는 논일, 밭일 등 가사 일까지 열심히 하면서, 매일 새벽 3시간씩 성체조배, 레지오, 성령기도회, 성가대, 미사해설, 구역반일, 자모회일, 본당의 각종 궂은일까기 완벽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말없이 봉사하며 남다르게 이웃사랑을 실천하면서도 늘 기쁘고 환한 미소를 짓는 그 자매를 보면 깜짝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자매를 이끄시는 성령의 힘이 이렇게 큰가하고 묵상하게 된다. 그런가하면 일부 신자들은 증거의 삶이 가시밭길인 양 변화를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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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공동체의 공동선을 위해서라도
기도와 희생 봉사의 삶은 신자로서의 도리건만 스스로 나약한 신자라 칭하며 겉에서 맴도는 신자가 있다보니 선교에 장애가 되기도 한다.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변화의 삶을 두려워하는 신자는
약한 사람끼리 이해관계에 얽혀 작은 것에 상처받아 쉬게 되는 경우도 있다. 스스로 착각 증세를 일으켜 허우적거리는 성령 부재의 신자들을 볼 때 마음이 무척 아프다. 성령의 불로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간절한 기도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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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윤세병 신부
  |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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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현재에서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소중한 추억. 아름다운 추억, 특별한 추억들이 점점 우리 삶의 모질고 거센 세파에 밀려 속절없이 사라져가는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합니다.

그러나 추억이 아름다운 것은 다시는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시간 속에 내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거를 추억으로만 기억하면 현재와의 연계는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가 현재를 향해 열려 있지 않으면 과거 그 자체에 닫혀버리는 것이 됩니다. 세례 받았을 때 물이 이마 위로 쫄쫄 흐르는 부드러운 물줄기 느낌이 왠지 너무 좋았던 추억들을 떠올리면서 상실한 세월을 다시 찾아보는 꿈을 꾸었으면 합니다.

오늘은 성탄 시기가 끝나는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대림절부터 시작하여 성탄 시기 동안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드러나시는 신비를 묵상하였습니다. 성탄 대축일에는 예수께서 마리아와 요셉과 목동들에게 드러나심을 기념하였고, 공현 대축일에는 동방박사들을 통해 온 세상에 공적으로 드러나심을 묵상했는데, 오늘은 하느님께서 직접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드러내시는 신비를 기념하며 성탄 시기를 마무리합니다.

그리스도교인이 되는 첫 성사(聖事)인 세례성사는 그리스도께서 수난 전 또는 부활 후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만민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명령에 의거합니다.(마태 28, 19) 세례성사를 받음으로써 죄 사함을 받으며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그리스도 신비체의 일원으로서 그분의 정신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 신비체 생활은 교회 생활에서 실질화(實質化) 하는데, 영세한 교우는 교회 생활의 영신적인 권리와 의무를 가지게 됩니다. 역사적으로는 고대에 에세네파(Essenes)는 매일 목욕의 형식을 행함은 깨끗한 생활추구의 상징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이스라엘 민족에 입교하는 예식으로 행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이 세례를 “예수의 이름으로” 행할 연계적 의미를 주었고, 동시에 죄인들과의 가교(架橋) 역할을 암시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3년의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시발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 즉 파스카의 신비를 예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고 난 후 본격적으로 하느님의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므로 공생애가 시작된 것처럼,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3-4) 하는 말씀과 같이 과거의 죄악의 생활에 대해서는 죽고, 예수님과 함께 성령에 이끌림을 받는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오늘 미사 중에 받은 세례식을 갱신하는 마음으로 세례의 중요성을 인식하시고 죄에 대하여 죽고, 하느님의 의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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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정지풍 아킬레오 신부
2016년 1월 10일
  | 01.08
466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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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태중교우는 아닙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세례를 받고 첫영성체를 함께 하였습니다. 제가 세례 받았을 때를 회상해 보면 교리 내용이 기억나기보다는 호되게 준비했던 추억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예비자 교리반에서 성지순례를 오시면 간혹 당시의 제 기억들을 나누어 드리는데, 제 이야기를 듣고 나서 지금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예비자들을 보며 괜히 뿌듯함을 느끼곤 합니다.

첫영성체 교리가 막바지에 이르면 ‘찰고’를 해야 하는데
넘어야 할 이 산은 아이들뿐만이 아닌 어른 예비자 교리반에도 예외 없이 매우 높은 산입니다. 암기식 교육에 익숙지 않기 때문인데 담당 수녀님이 교리와 주요기도문 암기 상태를 확인하지만 주임 신부님 앞에서 대답하는 것 자체가 긴장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기도문을 다 외우지 못하는 친구가 생겼는데, 당시 주임신부님의 불호령과 함께 한 사람도 낙오 없이 모두가 통과할 때까지 2주간 연장했던 보충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첫영성체 하면 이 시간이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물에 잠겨 숨 못 쉬는 고통의 시간에 동참한다는 의미를 찾을 줄 알았으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 순수하고 까불기만 했던 어린 마음에 ‘세례받기가 이렇게 힘든건가? 이럴 바엔 그만 두어야겠다!’,‘연대책임은 과연 나랑 무슨 상관인가?’ 당장의 아픔만 보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솔직히 저랑 같이 첫영성체 교리 받았던 친구들 중에 성당 다니는 사람은 제가 유일한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
그리고 또 사목자로서 세례를 베풀고 준비하는 입장에 서 보니 나 혼자만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준비했던 주위의 모든 사람들, 가정에서는 부모님의 노력을 비롯하여 교리교사와 봉사자, 수녀님들의 관심과 노력이 오히려 더 컸음을, 오히려 이 부분이 더 커야 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례 받은 후대부모들의 지속적인 관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쉽게 가는 것이 능사가 아닌
신앙의 첫 단추라 말할 수 있는 ‘세례성사’는 잘 준비해야 합니다. 특별히 준비하는 기간이라 말할 수 있는 첫영성체 교리, 예비자 교리 기간이 은총의 시간임을 준비하는 이들이 느낄 수 있도록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함은 세례자 요한과 성령의 비둘기, 그리고 하느님의 음성이 예수님의 세례를 중심으로 주변에 배치된 모습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관용을 빙자하여 남용되는 세례가 아닌
모두가 한마음으로 준비했던 세례 때의 다짐을 되새겨보며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이 절박했던 시기에 신앙의 선조들은 어쩌면 준비된 세례만으로도 순교의 삶에 동참했기에, 우리 역시도 이러한 모범을 따라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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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정찬 사도 요한 신부
2021년 1월 10일 <대전교구 주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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