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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신앙생활은 세례를 완성하는 생활
조회수 | 1,815
작성일 | 11.01.06
예수님은 세례를 통하여 당신의 공적 활동을 시작하셨다. 우리에게도 세례는 새 생명의 시작이며, 새 삶의 시작이다. 예수님의 세례가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었듯이 우리의 세례도 일생을 통해 완성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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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님의 세례는 예수님의 사생활과 공생활을 가르는 분기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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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축일은 가나 혼인잔치의 첫 기적과 함께 예수님이 누구 신지 그 정체를 온 세상에 공적으로 드러내는 또 하나의 공현(公現)이라 할 수 있다.

세례축일이 예수님의 생애 안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암울한 군사 독재 시대를 지나면서 한 두 번쯤 민주화 투쟁을 하면서, 운동장에 모여 선언문이나 성명서를 낭독하고 구호를 외치며 전의(戰意)를 불태운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를 '출정식'이라고 한다. 출정식은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 왜 이런 일을 하는지를 확인하는 자리인 것이다. 오늘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다. 예수님의 세례는 30년 간의 사생활(私生活)을 마감하고, 당신의 사명을 이루기 위한 공생활(公生活)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세례를 통하여 당신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이제 그 출발을 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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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수님이 세례 때 확인한 당신의 사명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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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1독서에는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믿어주는 자, 마음에 들어 뽑아 세운 나의 종이다, 그는 나의 영(靈)을 받아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 길을 펴 주리라."(이사 42,1) '야훼 종(ebed Yayweh)의 노래'의 한 부분이다. 이사야서에만 이 '야훼 종의 노래'가 네 번이나 나온다. (42,1-9; 49,1-6; 50,1-11; 52,13-53,12)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종(ebed)'이라는 단어는 '노예'라는 뜻으로만 쓰인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모세, 모든 예언자들을 '야훼의 종'이라고 지칭할 때도 사용된 단어이다. 이 '종'이라는 단어는 아래로는 노예뿐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다음으로는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리고 위로는 메시아에 이르기까지를 다 지칭하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 들려온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하신 장면에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란 말은 '내 사랑하는 종'이라고 할 수 있는 같은 단어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면서
이사야가 말한 '야훼의 종'으로서의 삶을 살도록 불림을 받았다고 확신하신 것이다. 그러면 이사야가 말한 '야훼의 종'은 어떤 사명을 지닌 분인가?

오늘 제 1독서는
"너는 만국의 빛이 되어라. 소경의 눈을 열어주고 감옥에 묶여있는 이들을 풀어주고 캄캄한 영창 속에 갇혀있는 이들을 놓아주어라."(이사42,6b-7)하며 야훼 종의 사명을 밝히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세례 때 확인한 당신의 사명인 것이다.
이는 또한 예수님이 자기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확인한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에게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는 것"과 같은 사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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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세례 때 받은 예수님의 사명은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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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받는 야훼 종'은 자신을 바쳐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하느님의 종이다.
예수님은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낼 때까지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루가 12,50)고 하신 적이 있다. 이는 분명 당신의 십자가상의 죽음의 세례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세례 때 받은 당신의 사명을 위해 온 이스라엘을 동분서주하시며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셨다.

인간적으로 도망치고 싶은 두렵고 힘든 사명이었지만,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루가22,42) 하시며 당신의 사명에 충실하셨다. 예수님은 당신이 '고통받는 야훼의 종'으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묵묵히 끌려가.... 죄인들과 함께 처형당할"(이사537-10참조)것임을 아셨고, 끝내 그 길을 가셨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제 다 이루었다."(요한19.30)하시며 숨을 거두셨다.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도 바로 예수님의 세례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세례로 그분의 지체가 되었다. 모든 성사(聖事)가 그렇듯이 세례도 종말론적인 것이다. 세례를 받으면 이미 그리스도의 제자이지만 너무나 부족한 제자인 것이다. 죽는 날까지 세례를 완성해가야 한다.

때로는 각박하고 힘든 현실을 내팽개치고 어디론가 훌훌 도망쳐버리고 싶은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기적인 나는 죽고, 세례로 예수 안에 새로 태어난 생명을 키우고 완성해야 한다. 우리는 매일의 삶 안에서 묶은 껍질을 벗으며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 사랑과 봉사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나날이 새 생명으로 새로 나야 할 것이다. 애벌레가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는 광경은 참으로 신비한 일이다.

우리도 매일의 삶 안에서
세례로 받은 천상 생명의 씨앗을 싹틔우고 가꾸어야 한다. 새로 태어남의 세례를 매일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마지막 죽음의 세례 때 모든 죄의 허물을 벗고, 부활한 예수님이 들어간 그 생명의 나라로 갈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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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유영봉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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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세례와 십자가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복음사가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이 전해주는 이 관계는 유감스럽게 점차 잊혀져갔습니다. 우리가 비둘기 형상과 같은 하느님의 영과 열린 하늘과 그리고 그 틈으로 들려온 소리를 그저 분별없이 물질적이고 회화적으로만 이해하려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증언하고 있는 성경 구절은 결코 그렇게 이해되기를 바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세례에서 이미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하느님의 뜻을 알려주며 땅에서 펼쳐질 하느님의 다스림을 실현하러 파견되신 분으로 드러납니다. 가르치는 말씀에서 뿐만 아니라, 버림받은 이들과 소외된 이들과 업신여김 당하는 이들과 가난한 이들과 죄인들에 대한 그분의 행동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행동과 함께 유일무이한 방식으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하여 버림받고 소외된 이들을 위하여 활동을 전개하십니다. 그렇지만 그에 못지않게 하느님께 순명하는 하느님 마음에 드는 아들로서 하느님의 다스림을 세상에 선포하며 하느님의 뜻도 이루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삶의 모습과 내용 모두가 그분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가운데 담겨져 있음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웃에 대한 관심이나 배려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을 통하여 보여주신 하느님 뜻의 한 부분에 속합니다. 우리는 종종 한 부분을 강조하면서 다른 부분을 놓치기도 하며, 하나를 실천하면서 다른 하나를 무시하기도 합니다. 부분을 전체인 양 내세우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 전체를, 하느님께서 참으로 원하시는 것을 실현하는 것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오늘날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신자들 간의 친교가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서 신자들의 친교는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신자들과 하느님의 친교에서 비롯됩니다. 한 분이신 주님 안에 일치함으로 우리는 하나이며,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아주심으로 우리는 한 형제임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사 후에 신자들이 나누는 식사 자리도 사목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미사 중에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심으로 하느님과 우리 믿는 이들이 이루는 일치와 친교가 그 무엇에 비길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는 점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공동체인 교회에 있어서도 필요한 결과나 성과들은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하느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 3,15)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에게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됩니다. 그와 더불어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우리가 선호하는 것에 따라 취사선택하여, 그것만을 우리의 진정한 원의로 내세워서는 안 될 것입니다. 거기서 선택하는 모든 것은 부분적이며,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제한하고 축소하여 우리의 뜻을 하느님의 뜻으로 교만하게 내세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아 따라 사는 것을 순수한 이웃 간의 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좋게 말해서 인본주의자(Humanist)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따르고자 하는 것은 그분의 모든 사명과 그리고 그렇게 해서 하느님을 향한 그분의 행동 또한 대신 받아들이겠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에서 이 두 가지 점들은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지향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늘 염두에 두고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그분의 행동을 담고 있습니다. 둘 다 모두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그 사명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전해들은 것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인 것을 믿으며, 믿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전해 듣고 받아들여 믿는 이들의 세례에서는 하느님의 뜻이 강하게 드러납니다. 주님의 세례가 공생활의 시작이었듯이, 우리 믿는 이들 각자에게 있어서도 세례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시작하겠다는 구체적이고 강한 표시입니다. 세례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결정하고 그리고 그 삶에 깊이 스며들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당신 삶으로 앞서 보여주셨습니다. 세례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일치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라고 주어지는 의무와 책임입니다. 예수님처럼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우리 역시 고요한 방 안에 침잠할 것이 아니라,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마태 5,13-14)으로서 드러내놓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 교구 내 많은 신부님들이 이동하여 저마다의 신앙공동체에 부임하셨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주님과의 일치로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펼쳐 나가는 친교의 공동체를 이루시기를 기도합니다.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차광호 파스칼 신부
  |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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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내 마음에 드는 아들

주님께서는 세례를 받기 위해 세례자 요한을 찾아가셨는데,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셨는데, 그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 모양으로 주님 위에 내려왔다. 또한,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주님의 세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물속에 잠기셨다가 거기서 다시 솟아오르셨다는 것은 저승에 내려가셨다가 부활하셨다는 상징이다.” 주님께서는 온 인류의 죄를 당신의 두 어깨에 짊어지시고 그 짐을 날라서 요르단 강 속으로 가라앉히셨다. 죄 외에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아지신 주님께서는 하느님과 동등하신 분이시기에 이 세상의 모든 죄와 허물을 떠맡으셨으며 가장 낮은 데로 내려가시어 모든 것을 겪으시며 지옥의 바닥에 넘어져 있는 사람들과도 완전히 하나가 되셨다. 요나 예언자는 성난 파도가 잠잠해지도록 사람들에게 “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시오.”라고 말했다. 참된 요나이신 주님의 세례는 인류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짊어지신 것이며 하느님의 뜻에 “예”하고 응답하신 것이다.

아버지 하느님의 멍에를 순종하여 짊어지신 주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이시며 하느님께서는 성자의 수난과 십자가를 부활의 영광으로 높여주셨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세례 성사는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며 부활을 향한다. 세례를 통해 주님께 속한 우리 모두는 매 순간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로 태어나야 하며 주님의 멍에를 항상 기쁜 마음으로 짊어져야 한다.

▥ 마산교구 고태경 율리아노 신부 2016년 1월 10일
  |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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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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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부터 감추어진 하느님의 신비가 드디어 밝혀졌습니다. 당신의 생명을 피조물들과 나누고자 했던 하느님의 큰 뜻이 드러났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스스로를 낮추시면서까지 당신의 피조물들과 함께 하고 싶으셨습니다. 당신의 것을 모두 내어주면서까지 사랑하고자 하셨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사랑 안에서, 사랑 때문에, 사랑을 위해서 우리와 같아지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영원으로부터 성부와 성령과 더불어 한 분 하느님으로 계시던 말씀이 여기 이 땅에 우리와 같이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창조된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생명의 주인이 피조물이 되어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 되어 오셨습니다. 사랑하시기 위해, 당신께서 사랑하는 이들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주님의 세례 역시 그 연장선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하느님께로 되돌아서야 할 죄인들과 함께 세례를 받으십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오히려 죄인들 틈바구니에 섞여 세례를 받으십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를 씻어내는 세례를 받으십니다. 생명을 부여하신 분이 새 생명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이들과 더불어 세례를 받으십니다.

주님께서 받으신 세례, 그것은 결국 사랑이신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자 함입니다. 사랑이신 분의 명을 살아내기 위함입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의지의 실천입니다. 나의 뜻은 물 속에서 물과 함께 씻어내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채워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이 세례입니다. 사랑이 아니었던 것들,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들을 물속에 남겨두고, 오로지 사랑 그것 하나만을 향해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이 세례입니다. 생명을 갉아먹던 모든 것들을 물속에서 털어내고, 생명이신 하느님께로 되돌아서고자 함이 곧 세례입니다.

지난주 주님 공현 대축일에 이어 오늘 주님의 세례를 통해 예수님의 정체가 또다시 공개됩니다. 목동이나 동방에서 온 현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번에는 하늘에서부터 직접 음성이 들려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는 모든 이들, 하느님의 생명을 간직하고자 기꺼이 사랑을 선택할 줄 아는 이들, 사랑하기에 스스로를 비우고 낮추는 모든 사람의 아들딸들이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성탄 시기를 마무리하는 오늘,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 스스로의 신원을 성찰해보는 소중한 기회로 삼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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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김정우 라파엘 신부 : 2019년 1월 13일
  |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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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하느님을 보여드린 사람, 사람의 길을 보여주신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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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태 2,23)

신비이신 분께서, 그래서 참으로 멀리 계실 것이라고 생각되는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 감히 얼굴을 마주할 수 없는 하느님(탈출 33,19-20 참조)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하여 주신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마태 3,15)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여느 사람”(필립 2,7)처럼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신다. 그분께서 받으신 세례는 단순한 정화예식이 아니다. 하느님의 모든 의로움, 즉 아버지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기 위한 표징이다.(마태 3,15참조)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마태 3,16)

예수님의 세례로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영으로 인간을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창조하시는(마태 6,9-15 참조) 구원활동이 시작된다. 이제 예수님 안에서 아무런 조건이나 제약 없이 하느님과 인간이 소통하게 된다. 감히 다가갈 수 없는 신비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 예수님 안에서 열린 것이다. 구원의 문을 활짝 여신 것이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하늘은 선언한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메시아이시다.(시편 2,6-12 참조) 그러나 하느님의 일을 위하여 자신을 송두리째 희생 제물로 내어놓으신 분이시다.(이사야 42,1 이하 참조) 그분께서 하느님의 마음에 드신 이유이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마르 10,45) 오신 하느님께서 당신이 받으신 세례, 물과 성령의 세례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하느님의 영으로 숨 쉬시며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삶,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그 삶에로,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심을 통해서 사람들이 하느님을 볼수 있게 하셨듯이,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 세례를 통해서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보여 주신다. 이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 하느님을 밝히 보여드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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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원태 클레멘스 신부
2020년 1월 12일
  |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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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예수, 세례 받으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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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마르코 복음 1장 4절)”고, 예수께서는 요한에게 가서 그런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께서는 공생활의 처음을 죄인으로 시작하셨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마르코 복음 15장 15절)”습니다. 그렇게 예수께서는 공생활의 끝을 죄인으로 마무리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무한히 큰 죄를 지으셨습니다.
사랑한 죄, 모든 죄인을 사랑한 죄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죄인임을 자처하며 세례를 받으셨고, 세상 전체를 덮고도 남을 죄를 어깨에 둘러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진짜 죄인은 절대 자신을 죄인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죄인을 혐오합니다.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 이들을 멀리해야만 안심합니다. 그는 아픈 것도, 덜 가진 것도 죄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좋은’ 아파트에 살아도, ‘비싼’ 아파트에 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람을 혐오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그가 혐오하는 대상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 사이가 멀어집니다.

그러나 본디 죄인이 아니신 분은 다른 사람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이들을 가까이하시고, 나아가 당신 자신인 것처럼 대하십니다. ‘굶주린 이, 목마른 이, 떠도는 이, 헐벗은 이, 병든 이, 감옥에 있는 이(마태오 복음 25장 35절-36절)’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사람 사이가 가까워집니다.

2독서 말씀처럼
“악마에게 짓눌린(사이를 멀게 하는)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는 “좋은 일”을 하십니다. 그렇게,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요한 복음 16장 8절)”십니다.

죄인을 혐오하는 것은 나를 혐오하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너’만이 아닌 ‘그 어떤 너’라도 ‘나’처럼 사랑할 수 있는 분 덕분에 우리는 ‘사랑하는 삶을 사는 사람’됨의 길로 초대받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도 하지만, ‘나’를 사랑하는 법을 통해, ‘이웃’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처럼, 그분의 세례도, 우리들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 드러나는 현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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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김정찬 사도 요한 신부
2021년 1월 10일 <마산교구 주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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