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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축일/명절강론 코너 ( 대축일/명절 미사에 관련된 강론자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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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하여라...."
조회수 | 2,070
작성일 | 11.01.06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마태 3,15)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할 무렵,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기 위해 요한을 찾아오십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선생님께서 제게 오십니까?”(마태 13,14) 하며 굳이 사양합니다.

요한은
죄의 회개를 상징하며 용서의 길을 여는 물세례를 베풀었지만, 주님께서는 죄로 얼룩진 모든 허물을 태워버리고 그렇게 정화된 사람 안에 하느님의 생명을 가득 채우는 성령의 불로 구원의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자격도 없으며, 또 주님께서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실 필요도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이다.”(마태 3,11) 고 하시면서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 분’(마태 18,14)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라도 잃지 않고 세상 모두가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곧 아무런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하느님의 뜻대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요한의 물세례가 상징하는 죄의 회개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모범으로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세상의 죄인들을 대신하여
하느님 앞에 회개하는 그들의 마음을 봉헌하시기 위해서였으며, 앞으로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해 물로 세례를 받을 신앙인들을 위하여 세례의 물을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으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를 위해 스스로 죄의 멍에를 메시고 회개를 위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로써 그리스도인들에게 물로 베풀어지는 세례를 용서와 생명을 선물하는 성령의 불로 베풀어지는 세례로 승화시키셨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가 받은 세례, 그리고 앞으로 세상 사람들이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받게 될 세례는 죄와 죽음을 없애고 하느님의 생명을 선물로 받게 하는 구원의 입문성사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세례 축일을 지내는 우리는
세상과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모두 구원으로 이끄시기 위하여 스스로 낮아지셔서 죄인의 멍에를 메시고 몸소 회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용서와 생명을 선물하는 성령과 불로 베풀어질 구원의 세례를 마련해주신 주님께 깊은 감사의 찬미를 드려야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또 주님의 공로를 헛되게하지 않도록 죄와 죽음의 길을 벗어나 하느님 아버지를 향하여 늘 생명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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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주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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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자녀로서의 삶은
예수님처럼 성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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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 17)

오늘은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전혀 죄가 없으시고, 회개할 필요가 없으신 분께서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남이 무엇인지 알려 주시려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특히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아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아들로 우리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우

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겠습니까?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자녀이며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였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떳떳하게 이 세상에서 사셨습니다.

또한 우리도 예수님처럼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된 만큼 자부심을 가지고 떳떳하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된 만큼 제2의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손해보는 삶을 살겠다는 것이고 예수님처럼 이 세상의 일보다는 하느님의 일을 우선으로 살겠다는 각오요 결심이요 선택이며 결정이고 행동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서 십자가를 선택한다는 것이며, 남들이 가기 싫어하는 십자가의 길을 걷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산다는 것은 매순간 이 세상의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선택하고 지속적으로 따르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 이제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봅시다.
그리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자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자녀가 되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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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이상섭 신부
  |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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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비움과 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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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나는 너를 어여삐 여겼노라.” (마르 1,7-11)

우리가 받게 되는 세례를 생각해 봅니다.
교회교리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세례성사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기초이며, 성령 안에 사는 삶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다른 성사들로 가는 길을 여는 문이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며,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교회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 그 사명에 참여하게 된다.”(교회교리서 1213항)

워낙 많은 측면을 고려해서 만든 정언적 문장이라 세례에 대해 빈틈없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세례의 위치, 성령과의 관계, 우리가 받게 되는 은총, 그리스도와의 관계 등 참으로 여러 관점들이 잘 정돈된 문장입니다. 그래서 그 많은 교리교육이 필요한 가 봅니다.

그럼에도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 못 가서 쉬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혹시 우리가 세례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은 아닌가요? 이런 궁금증을 갖고 오늘 복음을 묵상해 봅시다.

오늘 복음은 마치 한편의 시나리오를 보는 듯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뒤에 오실 분에 대한 예고를 하는 장면과 드디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면서 그분이 확연이 드러나는 장면으로 절정을 이룹니다. 아마 카메라의 앵글을 잡게 된다면 세례자 요한의 얼굴을 지나 점점 크게 그리고 분명하게 예수님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입니다.

요르단 강가 요한이 베푸는 세례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주님으로 생각한다면 먼저 이해를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했다는 외적 표지’로 세례를 주었기에 과연 예수님께서 요한의 세례를 필요로 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과연 주님이 회개를 필요로 해서 세례를 받게 되었을까? 이 점에서 교회의 설명을 들어 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모든 의로움을 이루시고자 죄인들을 위한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자청하여 받으셨다. 예수님의 이 행위는 당신을 ‘비우심’을 나타내는 것이다.”(교회교리서 제1224항)

설명대로라면 주님은 회개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모든 의로움을 이루시고자’ 요한의 세례를 자청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마 주님은 세례자 요한의 ‘회개의 외침’에 동의하셨고 많은 사람들에게도 이 세례식에 참여하는 것이 의로움을 드러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한편, 교회교리서는 주님의 수동적 모습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 세례를 위하여 스스로 ‘비우셨다’는 적극적 설명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비움’과 ‘채움’, 우리는 짝을 이루는 이 단어를 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숨돌릴 틈도 없이 주님의 이 ‘비움’이 무엇으로 채워졌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복음사가가 대답해야 할 내용입니다. 다행히 마르코는 그 대답을 잊지 않았습니다.

“나는 너를 어여삐 여겼노라”(마르 1,11)

언뜻 보면 하늘에서 주님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표현으로 보이지만 본래는 “하느님이 일정한 사명을 부여하려고 선택하셨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궁금증은 이제 매끈한 한 문장으로 정리가 될 듯합니다. 곧, ‘주님은 자신을 비우고 세례에 임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사명을 받으셨다.’

이런 설명이 자연스럽다면 세례는 주님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 됩니다. 요한한테서 받은 세례는 모든 의로움을 위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주님은 자신의 새 사명을 아버지 하느님한테서 받게 되는 결정적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머리를 옮겨 우리의 세례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비워야 채워진다”는 말은 이미 오랜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그리스도인을 결정하는 그 중요한 자리에 있음은 대단히 음미할 만한 일인 것입니다. “자신을 비워야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 모두는 바로 이 과정을 통과해야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보다, 자신의 지혜보다, 자신의 능력보다도 오히려 그것들을 비워야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런 분들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고민은 모두가 완전히 자신을 비우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처음에는 ‘그러겠다고’ 다짐을 하면서도 이내 자신의 것들을 앞세우기가 습관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당연히 자신을 비우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뿐일까요? 반대의 경우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인의 사명인, 하느님의 나라를 증거 하는 현장에 오히려 박차고 나간다면 자신을 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전함으로써 자신을 비운다.” 바로 이점이 우리 교리 교육에서 부족한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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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김진룡 신부
  |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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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례를 받으려고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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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 : “왜 세례를 받으려고 합니까?”
예비자 : “신부님, 저는 아버지라고 하면 매일 욕하고, 때리고, 술 먹는 기억뿐입니다. 그런데 종교 활동에 나오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소개하면서 항상 맛있는 간식을 주고, 밝은 미소로 맞아주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잘못한 사람들을 안아주는 따뜻한 존재라면 믿어보고 싶어서요. 저도 출소 후에 언젠가는 아버지가 되고 싶거든요. 그래서 하느님이라고 하는 아버지를 믿고 따르면서 배우고 싶습니다. 세례 받고 싶습니다.”

지난 성탄을 앞두고 교도소 세례식전 면담에서 한 젊은 형제가 제게 했던 이야기입니다. 기도문을 잘 외우거나, 교리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세례받기에 부족함이 없기에 이제는 파란 수의에 적힌 숫자가 아닌 다니엘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사제 : “세례식 앞두고 유혹이 있을 수 있으니 조금만 더 주의하면서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예비자 : “예 신부님!”
(하지만 세례식 이틀 전 방에서 동료와 다툼이 있어 조사실에 일주일 감금이 되었고, 세례식에 참석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주 후에 조사를 마치고 미사에 참석하였습니다. 억울해하며 눈물을 보이고, ‘세례를 허락하지 않는 하느님이 원망스럽습니다. 하지만 교도소 안에서 의지할 곳이 없기에 다시 교리 받고 다음을 준비하겠습니다.’라고 아쉬워했습니다. 다음 주에 이 형제만을 위한세례식이 있었고, 신자 수형자들의 축가와 봉사자들의 축하에 이 형제가 다시 한 번 눈물을 흘리며 인사말을 하였습니다.)

예비자 : “이제야 알겠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세례 받았으면, 어쩌면 그냥 지나갔을텐데… 이렇게 저만을 위한 세례식을 허락해 주신 하느님이 저를 특별하게 사랑해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루포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더욱 활기찬 모습으로 살아가는 형제님의 소식입니다.

오늘은 주님세례축일입니다. 우리가 받는 세례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복음은 이렇게 알려줍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받는 세례를 통해 얻는 삶에 대해 이렇게 전해줍니다.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주기 위함이다.”

우리는 세례 때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면서 하얀 옷과 밝은 촛불을 받습니다. 해방과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그 귀한 선물에 배제되는 사람은 없다고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세례는 걱정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왜냐하면 걱정과 두려움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생기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하느님께 선택과 사랑을 받는 것이고, 어제의 잘못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의 무게에 나 혼자 맞서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헤쳐 나가는 것입니다. 세례 때 받은 은총을 기억하며 걱정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기쁨과 해방의 삶을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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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유승현 마리오 신부
2019년 1월 13일
  |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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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하느님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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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가시어 세례를받으신 것을 기념한다. 예수님께서는 명백하게표현된 의향을 가지고, 즉 세례를 받기 위해 많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오신다. 그분께서 세례를 받으시려 하다니 이상한 일이 아닌가? 위대한 권능을 갖고 있는 ‘더 훌륭한 분’이 어떻게머리를 수그릴 수 있는 것인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어찌하여 물로 씻겨지고자 하시는가?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하늘이 열리며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아들임을 강렬하게 체험하신 것이다.

과거 그 어느 때에도 하느님께서 친히 ‘내가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불러 주신 사람은 없었다. 이는 단순히 세상에 예수님을 소개하거나개인적으로 예수님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당신 자신으로인정하시기 위해서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곧 시작하시게 될 활동이 시작부터 명백히 신적인 보증을 받았다는표시다. 내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이라는체험, 하느님께 인정받는 것보다 더 벅찬 체험이 인간에게 또 있을까? 우리가 오늘 세례 축일을 기념하는 것은 예수님의 하느님 체험을우리의 마음에 새기기 위함이 아닐까?

우리는 세례 때 어떤 체험을 하였던가? 뭔가새로운 것을 체험하지 않았던가? 직접적이든간접적이든, 체험으로든 지식으로든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함께 기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때 그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많은 이들이 세례를 준비하면서 세례를 받으면 목표에 도달한 것으로 생각하고 더 이상 성당에 나오지않는 이들이 많다. 그들이 세례 때 기뻐한 것은일종의 군생활을 제대하는 것이나 학교 졸업식때 느끼는 기쁨 정도로 여기는 것은 아닐까. 예수님처럼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게 되고, 인생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며새로운 삶이 펼쳐지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한다.

새로운 삶이란 어떤 삶일까?
세례로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은 주님의 종처럼(이사 42,1-4 참조) 자기에게 상처를 준 이에게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는다. 자기를 괴롭혔다고 그를 부러 뜨리지도 않으며 더군다나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다. 또한 세례 받은 사람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사도 10,34 참조). 차별하려는마음을 없애준다. 모든 이들을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대하게 된다.

세례 받을 때의 그 느낌을 내 인생에 다시 되살리는 나날이시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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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정세진 토마스 신부
2020년 1월 12일
  |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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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그리스도적 삶을 위한 은총의 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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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예수께서 친히 세례자 요한에게 오시어
세례를 받으셨음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자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마르코 복음 1장 4절-5절 참조)고 복음은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 세례의 대열에 합류하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죄’는
율법에 충실하지 못한 삶을 의미했습니다. 그렇게 율법에 불충실한 삶이 곧 하느님의 무서운 진노와 징벌을 불러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시대를 희망하고 기대하면서도 엄격한 율법에 따라 살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세례는 죄를 씻음으로써 자신들을 향한 하느님의 진노를 거두시게 할 필요충분조건과도 같은 것으로 이해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새롭게 체험하게 되었고, 예수의 이름으로 받게 된 세례의 더욱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세례가 그저 죄에 대한 벌을 면제받는 조건으로 채워야 하는 예식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생명을 받고, 그분의 마음에 드는 사랑스러운 자녀로 살아가기 위한 은총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복음서가 전하는 주님 세례 이야기들 역시
그런 세례의 원형을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찾고자 했던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세례 이후 본격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명 수행하시면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고, 그분 마음에 드실만한 삶을 살아가십니다. 마귀들을 쫓으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시며, 죄인들을 위한 구원을 선포하시며, 온갖 멸시와 소외 속에서 신음하는 이들과도 함께 해주시면서 당신 자녀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 주십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께서 이렇게 세례 후에 보여주신
그리스도적 삶이야말로 그분께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삶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이들에게 오늘도 그분께서는 말씀해 주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코 복음 1장 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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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김시몬 시몬 신부
2021년 1월 10일 <전주교구 주보>에서
  |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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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세례는 십자가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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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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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말은,
‘메시아’(구세주)를 뜻하는 말입니다.

“내 뒤에 오신다.” 라는 말은,
자기는 메시아가 아니며 메시아의 선구자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라는 말은,
메시아와 비교할 때 자기는 그분의 노예만도 못하다는 뜻으로, 그만큼 자기 자신을 낮춘 표현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렇게 자신을 낮춘 것은,
예수님의 위대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구원받아야 할 인류에 속한 세례자 요한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위대한 분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이라는 말은,
요한의 세례는 물로만 주는 세례, 즉 회개했음을 표시하는 세례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세례는 죄와 벌을 모두 사해주고 인류를 구원하는 성령과 불의 세례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메시아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으로서
회개, 보속, 세례가 모두 필요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분으로서, 또 인류의 죄의 보속자로서, 그리고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요한에게 가셔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예수님의 겸손과 순종을 나타냅니다.

‘물에서 올라오신’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본격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나아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늘이 갈라지며’라는 말은
원래 하느님의 나타나심을 표현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지금의 ‘성령의 내려오심’은 하느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라는 말은,
비둘기 모습으로 성령께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내려오심’이라는 상황이, 또는 그 장면이 비둘기가 내려앉는 것과 같았다는 뜻입니다. (새가 내려앉는 것처럼 성령께서 내려오셨다는 것입니다.)

마르코는 이 사건을 예수님만 보신 것으로 기록했는데,
옆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뭔가를 보고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여기서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에는
‘외아들’이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말은,
단순히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인류 구원이라는 사명을 맡기려고 특별히 하느님께서 선택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유일하고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는(선언하는) 말씀이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하느님께서 직접 증언하신 말씀입니다.

1)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있었던 일을,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할 때 했던 말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

두 장면 모두 인간에게
‘하느님의 신비’를 드러내 보여주신 장면인데, 예수님의 탄생과 예수님의 세례는 모두 ‘하느님께서 직접 하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그 ‘하느님의 신비’를 ‘삼위일체의 신비’라고 부릅니다.)

2)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회개의 세례를 받으신 일은,
‘하느님이신 분께서 사람으로 오신 일’에 속한 일입니다. 그 일을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예수님의 ‘낮춤’과 ‘비움’은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한 일이기도 하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물에 빠져서 죽어가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구조대원이 물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들 위치로 내려오신 분이고, 사람들과 같아지신 분입니다.)

우리가 받는 세례에도 ‘낮춤’과 ‘비움’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세례는 자신이 구원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일이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3) ‘낮춤’과 ‘비움’이라는 점에서
예수님의 세례는 십자가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일이고, 당신의 모든 것을 바치신 일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은 이 세상에 태어나실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는 세례도 십자가의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뒤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뒤를 따르는 일 자체가(신앙생활 자체가)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세례는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 뒤를 따르는 일의 시작입니다.

4) 십자가는 십자가로 끝나지 않고,
승리와 영광으로 이어지는 일이고, 부활과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받는 세례도 승리, 영광, 부활,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에 고난과 시련을 겪기도 하지만, 그것은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에서 잠시 거쳐 가는 중간 경유지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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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1년 1월 10일
  |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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