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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축일/명절강론 코너 ( 대축일/명절 미사에 관련된 강론자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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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조회수 | 2,314
작성일 | 11.01.06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로 그동안의 성탄 시기가 마감되고 오늘부터 새로운 연중 시기가 시작됩니다. 주님의 공현이 예수님의 기원(起源)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세례는 예수님의 공적인 사명(使命)의 시작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탄 시기 동안 예수님께서 강생하시어 우리와 함께하심에 대하여 묵상하였다면, 예수님의 세례는 이제 우리와 함께 적극적으로 공적 활동을 시작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과 사랑과 순명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하기를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 27)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요한에게 세례받기를 원하십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들 대열에 함께하시어 세례를 받으시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겸손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 6~7).
  
또한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의 세례에 함께하심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말씀처럼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주기”(이사야 42, 7) 위해서 우리 죄인들과 함께 하십니다. 이는 나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강생하시는 주님의 사랑 즉, 성탄과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드리는 것을 주저하자 예수님께서는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요한 3, 15)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사야 예언서에서 말씀하신 하느님의 의로운 뜻에 순명하신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순명을 통하여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영이 예수님과 결합되는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 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함께하셨기에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주실 수 있었음을 깨달았다.”(사도 10, 38)고 베드로 사도는 고백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세례 축일을 지내면서, 세례를 통하여 주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며 떨리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신앙을 고백했던 첫 마음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때를 떠올리며 예수님께서 세례 안에서 보여 주셨던 겸손과 사랑, 순명의 모습으로 힘차게 연중 시기를 시작할 때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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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이승남 세바스티아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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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누구십니까?

우리는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것을 복음을 통하여 기억하며 기념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 강에서 물로 베푼 세례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그리스도 예수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요르단 강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와 상징을 갖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조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당신의 백성을 모세와 함께 홍해(紅海)를 건너게 하심으로써, 그리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혹독한 믿음의 시험과 훈련 과정을 통해서, 마침내는 여호수아를 통해 요르단 강을 건너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홍해를 건넌 것은 400년 동안의 이집트 종살이에서 벗어남을 의미합니다. 요르단 강을 건너는 것은 40년간의 광야생활을 통해 노예근성을 죽여 버리고 새롭게 태어난 자유로운 하느님 백성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의 주인이 됨을 뜻합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강에서 그 물로 세례를 줌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이 죄악에서 해방되고 죄악의 근성과 습성(원죄와 본죄)에서 완전하게 구원되는 새로운 출애굽, 빠스카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참되고 영원한 출애굽, 빠스카 즉 불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해방과 구원을 희망하며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완성을 기다리고 있었던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야 말로 바로 그 구약에 예언된, 세례자 요한이 기다리던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당신의 몸을 요르단 강물에 담금으로써 모든 인류의 죄악과 죽음을 죽이시고, 또한 물에서 일어나심으로써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사랑과 생명이 넘치는 하느님의 나라를 주시는 것입니다. 아멘.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완성하시게 됩니다. 예수님은 나와 인류의 죄를 대신하는 속죄양이 되시어 십자가위에서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나를 죄악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죽음의 세력에서 구원하여 주십니다. 아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계시(啓示)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고 세례받은 당신은 누구 십니까?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받는, 구원받은 자녀임을 확신(確信)하십니까? 당신은 이러한 확신으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구원의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수원교구 주보
  |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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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적인 세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적 삶

오늘은 새 해 들어 두 번째 주일로서 주님세례축일입니다. 주님께서 장성하여 세례 받으시는것을 기념하며 아쉽지만 교회는 오늘 주일로서 성탄시기를 끝내게 됩니다. 이 축일의 의미는 하느님이며 사람이신 주님께서 피조물이며 인간인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죄를 사해주시는 분(예수님)이 죄의 사함을 받아야 하는 사람(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구원사업을 하시기에 앞서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시고,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서 성령과 일치하는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과 분명히 다른 것은 우리는 우리 구원을 위하여 세례를 받지만, 주님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가 우리를 위하여 죄없으신분이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비우심으로 세례를 받으신것 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1224 항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세례성사가 예수님의 지극한 겸손과 낮추임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생각하고 주님의 은혜에 더욱 보답하는 삶을 살 것을 결심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주님의 세례를 기념하면서 진정으로 우리의 세례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세례성사가 다음과 같은 은총을 전달한다고 가르칩니다.“ 세례의 효과 또는 세례의 은총은 풍요로운 것이다. 이 은총으로 세례받은 사람은 원죄와 모든본죄를 용서받고, 성부의양자, 그리스도의지체, 성령의 성전이 되어 새롭게 태어난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한 몸이 되고,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가톨릭교회교리서1279 항참조)

이를 다시 요약하면 세례성사는 어떤 외적인 자격이나 명예를 얻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회심을 통해 교회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외적인세례 이면에 내적인 회심이 더욱 중요함을 다음 말씀으로 깨우쳐줍니다.“ 세례는 몸에서 더러운 때를 벗기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양심으로 살겠다고 하느님께 서약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I 베드3, 21)

우리는 그리스도의 세례를기념하고 그분의 겸손과 희생의 모범을 본받으며, 외적 형식에 치우친 세례가 아니라 진정으로 복음적 삶을 통하여 주님의 모습을 본받는 참된 신자로서의 삶이 더욱 중요함을 생각하고 올 한해는 내적으로 더욱 충실한 삶을 살것을 다짐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과연 주님의 세례성사의 은총을 받고 사는 사람으로서 그 내용에 걸맞게 잘 살아가고있는지 생각해봅시다.

전합수 신부
  |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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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다

위 제목은 하늘과 땅에서 최고의 뉴스가 될 만한 기삿거리입니다. 하느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직접 찾아가셔서 세례를 받으심은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아무런 죄도 없으신 하느님의 아들이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신비와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은 철저히 인간이 되셨음을 보여주신 의지적 행위입니다. 그동안은 당신 주변 조연들의 역할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셨다면, 이제부터는 주연으로서 그 역할을 전개하실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을 통해 몇 가지 묵상을 하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셨지만 철저히 인간이 되셨습니다. 인간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셨으면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을까 묵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나 자신부터 철저한 인간이 되고자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예수님이 되고자 했던 그 순수한 인간이 되는 것 말입니다. ‘무엇을 하든 먼저 인간이 되어라.’라는 말처럼 참된 인간성을 지닌 존재가 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인간다운 인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 자녀로서의 품위를 누리는 길이라 여겨집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셨지만, 인간으로 세상에 오시어 죄인들이 받는 세례를 받고 인간의 굴레를 받아들이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받은 세례를 받아들여 하느님의 굴레,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례의 은총으로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지은 죄, 우상숭배들, 겉치레와 거짓, 은밀한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져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며, 내 마음에 드는 아들?딸”이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매일같이 듣고 사는 것입니다. 그보다 큰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셋째, 내가 받은 세례를 정화하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와 물로 모든 죄의 씻김을 받은 세례성사의 은총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고 첫영성체하던 때의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 하느님 안에서 행복해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부귀영화, 사회적 명예와 욕망의 세속적인 세례를 받아들이고 은밀하게 즐겼던 자신을 돌이켜보고 반성하며, 본래 받았던 하느님 세례의 은총을 회복해야겠습니다. 이를 위해 교회는 고해성사를 보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넷째,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인간 앞에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옳음에 순명하며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학식이 높다고, 가진 것이 많다고, 지위가 높다고, 미모가 뛰어나다고, 육신이 건강하다고 뽐내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진실과 사랑 앞에 자신을 겸손되이 내어 놓고, 마지막 부족함의 허물까지 없애고 순수한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겸손함이 참으로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다섯째,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극진히 존중해 주십니다. 그동안 세례자 요한이 베풀었던 인간의 세례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세례를 줄 수도 있는 분이셨지만, 세례자 요한이 행해왔던 바를 존중하고 그의 세례를 완전한 것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그에게 다가가십니다. 상대가 틀리거나 잘못되지 않았다면, 끝까지 존중해 주는 자세를 예수님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여섯째,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협조자가 되어 주시며, 때가 되기까지 자신의 때를 기다리십니다. 보통 사람들은 누군가의 협조자가 되어 주기보다는 협조자를 옆에 두고 군림하고 싶어 합니다. 또한, 인생의 조연으로 살기보다는 주연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협조자이며 위로자로서, 요한의 두 팔과 두 다리에 힘을 불어넣어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우리도 때를 기다리며 누군가의 협조자이며 위로자로서 살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 인간은 죽으면서 ‘껄껄’거리며 죽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더 잘 해줄 걸, 용서해줄 걸, 사랑해줄 걸, 고백할 걸, 웃어 줄 걸 등 다 못 해준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후회하며 세상을 마치는 모습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주님 세례 축일을 지내며 후회 없는 나의 인생이 되기를 다짐하며, 여러분도 세례의 은총을 새롭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최인각 신부
  |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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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주님 마음에 드는 아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이 친히 붙들어 주시고 선택하시어 당신의 영을 부어 준 ‘주님마음에 드는 이’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는 민족들에게 나아가 주님의 공정(公正)을 펼칩니다. 그가 펼치는 공정은 주님에게서 비롯하는 것이기에 그 안에는 자기주장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그는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습니다.’ 그저 주님의 공정하심을 믿고 성실하게 펼쳐나갈 따름입니다.

중국의 현자인 노자(老子)도 《도덕경》 17장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가장 훌륭한 통치는 백성들이 통치자가 있는지 없는지 도통 관심을 두지 않는 통치이다.(太上, 不知有之) … 그 통치자는 한가로이 유유자적하며 자신의 말을 아껴 함부로 자기주장을 하지 않는다.(悠兮其貴言) 그래서 백성들은 공을 세우고 일을 완수한 다음 모두 말하기를 ‘내가 본래 이정도야’하고 자신만만해 한다.(功成事遂, 百姓皆謂 : ‘我自然’)”

가만히 이 시대의 통치자들을 바라봅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내는 수많은 자기주장과 변명 속에서 초라해진 그들의 음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공정하심을 알지 못합니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현상에 골몰하며 자신의 올바름을 주장하기에 급급합니다. 그들에게 부러진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는 쓸모없는 것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를 통해서 드러나게 될 주님의 영광을 볼 줄 아는 마음의 눈이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오늘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에게서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이루어집니다.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주시고’,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은 예수님은 이제 만민에게 나아가 주님의 공정을 펼치십니다. 그가 펼치는 공정은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 그대로입니다. 이미 오래전에 세례 받은 저 자신의 자화상이 주님의 십자가 앞에 자연스럽게 투영됩니다. 그리고 내가 펼쳐야 할 주님의 공정을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너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이 자꾸 가슴을 찌릅니다.

<수원교구 이근덕 헨리코 신부>
  |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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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속에 두 명의 세례자가 등장한다. ‘물’로 세례를 베푸는 이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는 이다. 어느 쪽이 더 매력적인가? 흔한 물보다는 신비롭고 영적이며 이글거리는 불꽃의 강렬한 이미지를 동반하는 세례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발언은 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의 입을 통해 증언되고 있다. 같은 종류의 물건을 내다팔든지 정치 유세를 하든지, 내 물건이 잘 팔리고 내가 입신하여 승승장구하기 위해 상대방의 ‘제품’을 형편없는 것으로 평가절하하고 상대의 인격을 깎아내리는 경우가 다반사일 터인데, 복음 속 요한 세례자는 오히려 상대를 높이 치켜세운다. 많은 이의 눈에 요한 세례자는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확실한 눈도장을 받고 있던 대세였다. 그가 지닌 화려한 이력도 한몫을 차지했다. 세례자, 설교자, 광야 은수자,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 상담치료사, 독설가(‘독사의 자식들아’), 도로공사 사장(‘길을 곧게 내어라’), 패션리더(‘낙타 털옷’과 ‘가죽 띠’), 자연섭생가(‘메뚜기’와‘들꿀’) 등. 유리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백성의 예상과 환상을 뒤엎으며 또 다른 인물을 스스럼없이 소개한다. 요한보다 더 위대한 ‘그분’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의 발언을 통해 세간의 궁금증과 관심이 증폭되는 대목이다.

그 즈음, 요한이 증언한 또 다른 세례자가 요한의 세례 터에 등장한다.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이다. 요한에게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 내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을’ 정도로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분, ‘성령과 불로세례를 주시는’ 분이라고 찬사 받은 그가 많은 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스스로 몸을 낮춰 물로 세례를 베푸는 이에게 세례를 받는다. 모든 논쟁과 소요가 사라지고 고요함 속에 숨을 멎게 하는 장면이다. 누군가에게는 라이벌 관계라고 여겨졌고, 누군가는 한쪽의 승리를 확신했을 상황에서, 두 세례자는 세상의 모든 예상을 뒤엎어버린다. 요한은 상대를 한없이 치켜세우고 자신을 낮추었지만, 그 상대는 거만하거나 범접하기 어려워 대면조차 할 수 없는 분이 아니라 그 역시 겸손과 섬김의 자세로 요한과 화합하는 이 장면에서 세상의 논리와 계산이 형편없이 빗나가버린다. 아니, 세상에 큰 깨우침을 주고 있다. 또한, 이 세례는 성부 하느님께서 성령과 함께 한결같은 사랑으로 후원하는 새 여정의 시작임을 공표한 사건이다.

주님의 세례에 비추어, 내가 받은 세례는 어떤 모습이었나? 또 내 가족들이 앞으로 받을 세례는 어떤 세례이길 원하는가? 내 논리와 판단에 따라 자녀에게 신앙을 대물림해줄 것인가? 아니면 한없이 부족해 보여도 자녀가 하느님 사랑에 의지하며 신앙의 첫걸음을 뗄 수 있도록 화합할 것인가? 아직도 우리의 세례는 선택의 기로에서 방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수원교구 박현창 베드로 신부 2016년 1월 10일
  |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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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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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세례 축일’은 예수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죄 없으신 분께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루카 3,3)를 받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마태 3,14) 우리도 요한처럼 그분을 만류해야 하지 않을까요?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전하며,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를 향해 귀를 기울이도록 초대합니다.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1-22)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세례는 무엇보다 그분께서 하느님 아버지와 맺는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명백히 드러내 보이는 사건입니다. 그분께서 ‘사랑하는 아들’로 불린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죄 많은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가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죽을 운명, 비천함과 나약함을 온전히 당신 것으로 받아들인 그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과 닮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세례는 또한 그분께서 장차 선포하실 하느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미리 알려주는 사건입니다. 하느님 나라란, 정치적 혁명을 통해 실현할 나라도, 마술과 같은 능력으로 우리를 죄와 악으로 물든 세상으로부터 구해내는 환상의 나라도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나라입니다. 죄와 악이 난무하고 온갖 위험과 시련이 도사리는,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바로 우리의 삶 안에서 실현될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인간의 가장 깊은 열망에 맞닿아 있는 나라입니다. 온갖 종류의 속박으로 인간을 옭아매고 무거운 짐으로 내리누르는 죄와 악의 현실로부터 근본적으로 해방되기를 바라는 인간의 간절한 바람에 답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죄 많은 인류의 역사 한가운데로 뛰어드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세례는 우리가 받은 세례를 기억하도록 합니다. 세례는 단순한 예식적 절차도, 지나온 과거를 마술처럼 깨끗이 씻는 정결례도 아닙니다. 세례는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것이며, 그분과 함께 묻히고 그분과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로마 6,3-4 참조) 세례를 통해 신앙인은 죄로 각인된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죄 속에서 간절히 열망하던 구원의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주님의 세례 축일은 우리 안에 이미 시작된 이 아름답고 장엄한 ‘탈출기’를 상기시켜줍니다. 죄로부터의 탈출이며 ‘자유와 평화’라는 약속의 땅을 향한 여정입니다. 그 여정은 단 한 걸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의 변화와 성장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물에 잠기는 세례가 죽음을 의미하듯, 변화와 성장을 위해서는 자신을 죽이는 고통이 수반됩니다. 그러나 그 길이 기쁜 이유는, 우리가 찾아 나선 자유와 평화를 그 길 위에서 미리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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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한민택 신부 : 평화신문 2019년 1월 13일
  |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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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 강물 속에 스며든 하느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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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루카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자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상으로 그분 위에 내리셨고, 하늘에서는 하느님의 아들임을 선포하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주님 공현 대축일’이 구세주의 탄생이 동방박사를 통하여 세상에 드러난 사건을 기념한다면,‘주님 세례 축일’은 예수님이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 하느님의 아들로 선포된 사건을 기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세상에 공적으로 드러난 사건이라는 점에서 주님공현 대축일과 주님 세례 축일은 깊이 연결되어있는 축일입니다.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인간’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 그리고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루카 3,16) 세상의 물로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얼마나 자신을 낮추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만물을 지어내신 분께서 피조물이 되어 오셨음은 하느님이 하느님이심을 포기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신 백성을 너무나 사랑하신 까닭이었습니다.

죄인이 회개의 표시로 받았던 물의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는 것뿐 아니라 죄인인 우리와 온전히 같아지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사랑할 힘이 더는 없다고 생각될 때, 인내심이 바닥났다고 생각이 될 때, 끝이라고 생각될 때 하느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그 낮춤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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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김창해 요한 세례자 신부-2019년 1월 13일
  |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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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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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백성에게 오신 주님의 성탄을 경축한 교회는 오늘 주님 세례 축일을 거행함으로써 성탄 시기를 마무리합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는 하느님 자녀로서 주님의 은총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항상 우리에게 집중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당시 하늘이 열리며 들린소리였습니다. 이후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뜻’에 따른 삶을 사셨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로서 주님의 삶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고, 공동상속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7-8). 이는 오늘 제 1독서의 이사야서에 나타난 종의 모습과도 흡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선택하신 ‘마음에 드는 종(주님의 종)’을 통해 이 세상에서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감옥은 어두운 지하 감옥으로 빛을 볼 수 없는 곳에 갇혀서, 아무도 자신의 힘으로는 그곳에서 벗어날 것을 희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주님의 종’은 민족들의 빛이 되고,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줄’ 것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그 순종으로‘주님의 종’ ‘우리 인간의 종’의 삶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가 죄의 노예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아담으로부터 멀어졌던 하느님과의 관계를 예수님을통해 회복시켜주시고, 우리 인간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하느님과 일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고백처럼 예수님께서는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주십니다(사도 10,38 참조).

세례자 요한에게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사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명을 주십니다.“너희는 가서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2-20).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이들이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기쁨을 경험하도록 도와주면서, 우리의 모범이신 예수님처럼 그들에게 하느님께나아가는 길을 밝혀주어야 합니다. 사도들의 선교사명을 우리도 끊임없이 수행하면서, 우리 모두 주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로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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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남승용 십자가 요한 신부
2020년 1월 12일
  | 01.11
466 18.8%
[수원] 죽어야 다시 살아나는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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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0년은
저에게 죽음에 대해 많이 묵상하게 했던 해였습니다.

1월에는 제 부친이, 7월에는 유학 시절 제 학위 논문지도를 해주셨던, 그곳 표현으로 “박사 아버지 신부님”이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두 분 모두 갑작스레 돌아가신지라 허망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나 가까운 지인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종종 할 말을 잃어버립니다. 죽음이라는 어마어마한 실재가 우리를 압도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상실감에 우리는 큰 슬픔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죽음은
그저 슬픔의 대상으로만 머물지 않습니다. 죽음으로 인해 할 말을 잃은 우리의 입이 다시 열려 하느님을 찬양하는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부활을 체험합니다. 바로 ‘세례성사’를 통해서입니다.

본래 세례예식은 요한 세례자가 요르단강에서 한 것처럼
몸 전체를 물에 담그고 나오는 방식입니다. 이는 ‘물속으로 들어가면서 지금까지의 나는 죽고, 물에서 나오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을 상징하며, 이 부활의 체험은 우리가 의식하든 못하든 우리의 신앙 안에 살아 있습니다.

지난 12월 4일에 교구 사제서품식이 있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극히 제한된 인원만 참석한 가운데 서품식이 이루어졌지만, 서품 미사의 은총은 조금도 덜하지 않았습니다. 서품식 중에 수품 후보자들이 바닥에 엎드리는 예식이 있습니다. 이 예식은 가장 낮은 자세로 봉사하겠다는 의미와 함께, 바닥에 엎드려 죽었다가 다시 사제로 태어난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해 신학교에서 1년 동안 함께 격리 생활을 하며 동고동락했던 부제들이 사제로 태어나는 순간은 개인적으로 큰 감동이었습니다. 부제들이 바닥에서 일어나 안수를 받고 제의를 입은 후, 제단으로 올라갈 때, 오늘 복음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시는 예수님과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우리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긴 하지만,
환멸이나 절망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죽음이 있어야 부활도 있고, 부활을 통해서만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천 년 전 예수님에게도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의 두려움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당신의 구원사업을 끝까지 완수하실 수 있었던 것은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늘 함께하시고 구원해주시리라는 확신!

오늘 주님 세례 축일을 지내며
예수님의 이 확신이 우리의 믿음이 될 수 있도록 다짐합시다. 아울러
새로 태어난 사제들의 성화를 위해서도 기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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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박찬호 필립보 신부
2021년 1월 10일 <수원교구 주보>에서
  |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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