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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증거자의 모습으로
조회수 | 2,251
작성일 | 11.01.06
신학생 때의 이야기입니다. 신학교에서는 방학생활을 통해 사제가 되기 전에 여러 가지 체험을 하도록 권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4학년 여름 방학을 맞이해서 강원도 사북에 있는 양로원에 한 달 체험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수원 신학교 1년 후배도 저보다 먼저 체험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처음으로 만나는 그 후배녀석이 어찌나 반가웠던지 말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지요. 그 후배와 함께 하루하루 생활해 나가면서 모든 생활에 있어서 너무나 잘 하는 모습에 놀랐습니다. 양로원에 있는 식구들에게 사랑받으며 지내고 있는 이 친구가 원래 이런 친구였나 싶을 정도로 때로는 질투가 났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누군가에게 그 친구의 칭찬을 들으면 질투심에 원래 그런 친구 아니라고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공동체 안에서 인기와 사랑을 제가 받기를 원했던 것이지요.

이처럼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 많은 이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세례자 요한은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라고 과감하게 사람들에게 증언을 하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아니 세상의 죄를 없애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기 위하여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고 계시는 모습을 지금 우리는 보고, 느끼고, 체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 그분의 사랑이 우리에게 얼마나 크게 내려오시는지를 우리의 삶을 통하여 증언하고 있는지 한 번 들여다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증언을 다름 아닌 세례자 요한이 증인이 되어 온 세상에 선포를 하고 있습니다. 바로 증거자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나는 십자가 앞에서 새로운 삶을 찾았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십자가라는 나무가 우리 인생을 변화시킨 것입니까? 아닙니다.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아무리 미사시간에 빠짐없이 출석한다 하더라도 삶의 현장 속에서 하느님을 경험하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누구나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사랑을 이야기 하고 은혜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교회 안에서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당신의 증거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장엄한 성가가 울려 퍼지는 성당 안에서가 아니라 불꽃 튀는 유혹과 욕망의 현장에서 말입니다. 때로는 자기중심적이 될 수밖에 없는 순간에 말입니다. 나의 인기나 명예가 짓밟히려는 바로 그 곳에서 말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존귀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깨달은 우리는 거룩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부르심에 합당한 품위를 부여하시고, 그 부르심을 실현할 힘을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셨듯이 우리의 삶 안에서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 사실을 여러분들 각자의 삶 안에서 가려놓았다면 그 커튼을 젖혀보십시오. 그 커튼을 젖히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삶 안에서 어떤 유혹이나 욕망이 밀려오더라도 세례자 요한의 모습처럼 예수님께서는 진정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증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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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장준혁 바르톨로메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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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한척이 바다 한가운데서 암초에 걸려서 침몰하고 있습니다. 배는 시간이 지날수록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지요.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구명조끼를 착용했습니다. 그리고 선장은 이러한 주의를 주었습니다.

“가지고 있는 물건은 다 버리십시오. 빈 몸으로 구명조끼를 입어야만 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목숨만이라도 건지려고 가지고 있던 것들을 모두 다 버렸습니다. 그리고 맨 몸으로 바다 가운데로 뛰어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은 금괴를 가지고 여행을 하던 중이었어요. 여러분도 생각해보세요. 금덩어리를 가지고 있는데 과감하게 그 금덩어리를 버릴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 역시 그러한 고민을 한참 동안 했지요. 물론 보통 사람이라면 어쩔 수없이 금덩어리를 버리고서 바다로 구명조끼를 입고 뛰어내리겠지요. 하지만 이 사람은 달랐습니다. 우물쭈물 한참을 망설이다가 허리에 금덩어리를 주렁주렁 달아매고 구명조끼를 입고 바다로 뛰어내렸습니다.

이 사람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죽기 위해서 돌멩이를 안고서 바다 속으로 뛰어 들어간 사람과 똑같겠지요. 살기 위해서는 아까워도 금괴를 버려야만 했던 것입니다.

생명만 건지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과감하게 버릴 수가 있습니다. 목숨만이라도 건지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미련 없이 내던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난파선에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나라,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도 가지고 저것도 가져야 한다는 욕심만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지요. 대신 이것도 나누고 저것도 나누는 사랑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날을 기념하는 날인 것이지요. 그런데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에게 세례를 받는다는 사실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죄의 용서를 받을 필요가 전혀 없는 하느님의 아들이 죄 많은 인간들처럼 회개의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바로 하느님의 뜻인 의로움을 이루기 위한 것이랍니다.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늘에서 땅으로 낮아지신 주님, 이제는 인간 앞에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으면서 더 낮아지십니다. 또 장차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을 통해서 더욱 더 낮아짐을 보여주시지요.

이렇게 낮아지면서까지 사랑을 나누어주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의로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의로움을 실천하는 순간, 하늘에서는 이러한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요? 하느님의 아드님도 이렇게 낮아지시는데, 얼마나 낮아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을까요? 또한 사랑의 나눔은 과연 어떠할까요? 그런 모든 나의 지금 모습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하느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주님 세례 축일을 맞이하는 오늘, 세례 받은 내 자신을 다시금 떠올려 봅니다. 얼마나 낮아지고 있으며,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을까요?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조명연 신부
  |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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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받는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성탄절 무렵 우연히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천안지역 아동센타 연합회에서 올린 글을 읽게 되어 소개하고자 합니다.

『아기 예수는 이 땅에 평화와 사랑과 섬김을 위해 오셨습니다. 이 땅에 교회의 존재는 그 분의 본을 받아 사랑을 전하고 나누어야 합니다. 금년 성탄도 새롭게 오시는 그 분을 새롭게 맞이하고 그 사랑 모두 공유했으면 합니다. 폭력으로 날치기 한 예산 중 복지 예산만 구분해 보았습니다. 결식아동 급식 지원금-541억 전액삭감 , 영,유아 예방접종비-400억 전액삭감, 저소득층 에너지 보조금-903억 전액삭감,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예산-1100억 전액삭감, 한시적 생계구호비-4181억 전액삭감, 실직가정 대부사업비-3000억 전액삭감, 연탄보조금-전액삭감, 서울시 독거노인 주말 도시락 보조금-2억 전액삭감, 장애인 차량 지원비-116억 전액삭감, 장애인 활동 보조비 신규신청-전면금지, 노인 일자리 예산-190억 삭감, 사회적 일자리 창출 지원금-340억 삭감, 저소득층 의료비 지원비-880억 삭감, 저소득층 긴급 복지비-1000억 삭감, 기초생활자 급여예산-649억 삭감, 장애아동 무상보육 지원금-50억 삭감, 교육예산-1조 4000억 삭감, 국공립보육시설 신축 예산-55억 삭감, 노인장기요양보험시설 확충 예산-447억 삭감, 장애아 무상보육 지원금-50억 삭감, 보육시설 확충비용-104억 삭감, 청소년 안전시설 지원비-8천만 삭감, 학자금대출 신용보증기금 지원액-1000억 삭감, 긴급복지-1004억 삭감, 저소득층 암 조기검진 및 의료비 지원-45억 삭감, 차상위계층 의료지원-304억 삭감, 농촌학교 무상급식 지원비-85억5천 전액삭감. “쓸모없는 연탄재도 감히 차 버릴 수 없는 배려와 따뜻함이 있는 천안지역 아동센터가 되길 소망하면서, 회장”』

이 글을 읽고 2011년도 우리나라 복지 예산이 온통 삭감을 당한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가난하고 소외되어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전합니다.

이에 하느님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의 어떤 모습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셨을까? 그리고 아마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어울리시면서, 그들도 하느님의 사랑을, 복음을 듣고 느낄 수 있게끔 한 그분의 모습이 마음에 드셨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다짐해 봅니다. 나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로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다는 다짐을 말입니다. 그리고 또 다시 다짐합니다. 내 주위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도 하느님의 사랑을, 복음을 듣고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고 말입니다. 저도 세례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양주용 바오로 신부
  |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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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요즘 사는 세상을 접하다 보면 그다지 밝지만은 않습니다. 목판화가 이철수 님의 글 한 편 먼저 소개할까 합니다. 글과 관련된 그림도 있는 것인데 상상으로 그려보세요. - 시절 탓일까요? 머릿속에 생각이 많습니다. 손은 여전히 목판을 새기고 있는데, 흘러가고 흘러오는 생각이 천천히 흐르는 탁류 같습니다. 어느 곳에서 많은 물 흐르다, 이렇게 겨울 깊어 꽝꽝 얼어버리고, 거기 어디 굳은 바위위에 앉아 춥게 생을 뉘우치는 사람 있으면 이런 그림이 될까요? 건너 바위위에 묵은 탑 하나 서 있고. 답답해서 창을 엽니다. 찬바람 맞아도 시원해지지 않네요. - 목판화가 이철수.

우리는 어두운 이 세상을 바라보면 밝은 빛이 온 세상을 비추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세상을 밝히는 빛이란 저절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태워 밝혀야 하는 고난이 숨어 있죠. 그런데 세상의 사람 중엔 빛을 밝히기 위해 자신을 태워야 하는 고난이 두려워 빛이 되려 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이 빛을 향한 염원에 자신의 삶을 투신하여 빛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이가 있습니다. 오늘날은 자신을 태우는 이 투신의 삶을 지닌 빛의 사람들이 더욱 절실해지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주님의 세례를 이해해 봅니다. 공생활 시작의 의미에서의 주님의 세례는 다음의 성경 구절로 이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루카 12 ,50)

이미 당신의 세례로서 공생활의 출발은 수난과 죽음을 예고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투신하셨습니다. 세례는 수난과 죽음을 향한 투신이었습니다. 수난과 죽음을 자초한 모든 행적. 특히 당시의 제도와 율법, 율법학자나 바리사이, 대사제, 헤로데와 같은 거짓과 위선을 폭로하며 무섭게 꾸짖는 행동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수난과 죽음은 최종적으로 당신의 부활을 통하여 어두운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빛으로서의 희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결국 주님의 세례는 인류에게 빛을 주기 위한 투신의 세례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어두운 세상 안에 빛을 희망해보며 우리의 세례를 바라봅니다. 우리의 세례는 빛을 향한 투신의 세례로 거듭나고 있을까요? 하느님은 투신의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우리도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자녀, 마음에 드는 자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밝게 빛났으면 좋겠습니다.

<인천교구 유승학 마티아 신부>
  |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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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6일에 인천교구 사제 서품식이 있었습니다. 사실 서품식이 끝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요. 특히 항상 하던 부천체육관을 대관할 수가 없어서 이곳저곳을 알아보다가 겨우 대관할 수 있었던 곳이 인천 아시안게임을 위해 새롭게 만든 ‘남동체육관’이었습니다. 이곳은 대관부터 이용하는 것까지 부천체육관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서품식을 준비하는 신학생들도 많이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까지 했던 서품식 매뉴얼이 전혀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어느 날 성소국 수녀님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신부님, 신학생들이 공무원들과 대화를 제대로 나누지 못하는 것 같아요.”

신학생들은 전의 체육관과 다른 처우에 대해 항의를 했었고, 그리고 불친절해 보이는 공무원들의 태도에 공격적으로 말을 했었나 봅니다. 그렇게 대했을 때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공무원들은 원리원칙을 내세우면서 무조건 안 된다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하지만 수녀님께서 가셔서 좋은 말로 이야기하고, 그분들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말을 자주 하셨나 봅니다. 그 뒤 처음에 안 된다는 모든 일들이 다 해결되었고, 결과적으로 거의 만 여명의 많은 신자들과 함께 했던 서품식을 잘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대관료나 사용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저희가 다 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또한 다른 체육관과 비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화를 통해서 특히 그들을 존중하면서 이야기했을 때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지요.

솔직히 자신이 손해 본다고 생각하면 공격적으로 이야기하시는 분을 종종 봅니다. 물론 그 순간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공격적으로 말한 내 자신도 또 상대방 역시 기분이 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만약 나도 그리고 상대방도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면 약간의 손해는 기쁘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왜 아무런 죄도 없는 분이, 그래서 회개할 것도 전혀 없는 분이 굳이 자신을 정화하는 예식이라 할 수 있는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이에 대해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성인은 “당신 자신을 정화하는 예식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물을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셨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필요 없는 세례이지만 우리가 받을 세례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 겸손되이 고개를 숙여 세례를 직접 받으셨다는 것이지요.

주님의 그 뜨거운 사랑을 봅니다. 당신에게는 필요 없을 지라도 우리들을 위해 불편한 길을 마다하지 않으시는 그 뜨거운 사랑을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과연 어떤가요?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자신의 손익만을 따지면서 절대로 손해 보지 않겠다고 행동하는 모습이 얼마나 많습니까?

손해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손해 자체를 보는 것보다는 예수님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셨던 사랑 자체를 보고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사랑받는 자녀, 마음에 드는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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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혼자 모든 것을 하려고 하지 맙시다.

제가 있는 갑곶성지에 오시는 분들은 세 마리의 강아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세 마리 강아지들의 관계는 ‘아빠, 엄마, 딸’이지요. 그런데 자세히 보시면 아빠와 딸은 친한데, 엄마는 늘 혼자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답니다.

소위 이 사회에서 ‘왕따’라는 것을 강아지 세계에서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강아지 세계에서도 ‘왕따’라는 것이 있을까요?

제가 본 사실을 토대로 할 때, 강아지 세계에도 분명히 ‘왕따’는 있습니다.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미워하는 것도 아닙니다. 분명히 이유가 있더군요.

이 세 마리의 강아지 중에서 가장 힘이 센 강아지는 엄마 강아지랍니다. 아빠 강아지가 더 큼에도 불구하고, 노련미(2살 더 많음)로 싸우면 항상 엄마 강아지가 이긴답니다. 그러다보니 자기 맘에 안 들면 아빠 강아지나 딸 강아지를 물어버리곤 하지요. 따라서 이렇게 난폭한 강아지 곁에는 아예 가지 않는 현상을 보이는 것입니다. 심지어 잠을 잘 때에도 아빠 강아지와 딸 강아지는 한 개집에서 같이 자는데 반해서, 엄마 강아지는 혼자서 자고 있습니다. 사실 추운 겨울에 밖에서 키우기 때문에, 분명히 함께 자는 것이 따뜻하련만 이 세 마리는 결코 뭉치지 않습니다.

분명히 엄마 강아지가 제일 힘이 셉니다. 하지만 힘이 세다고 한들, 그 강아지 사회에서 얻는 이득이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추운 겨울에 웅크리고 혼자서 힘들게 자야 하는 것은 물론, 늘 외로움을 간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이 모습을 보면서 문득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입니다. 정말로 당신께서 원하시기만 한다면, 막강한 힘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모든 힘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십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있듯이,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그리고 우리 인간의 구세주이신 분이 인간의 세례를 받으시는 가장 낮은 자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눈으로 보이는 힘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당신 스스로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도 우리들은 왜 이렇게도 힘 센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각종 세속적인 능력의 있고 없음을 강조하고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스스로 선택하신 낮은 자의 모습. 그 모습이 바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리지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지금 내 모습은 과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일까요? 혹시 높은 자의 모습만 취함으로써 스스로 힘든 삶을 간직하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낮은 자의 모습. 그래서 함께하는 삶.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삶이며, 그래서 나의 행복으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이 삶을 향해서 나아가는 오늘이 되길 바랍니다.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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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새로 태어남

어린 시절 저는 안동교구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흰색 옷을 입은 신부님이 저에게 오셔서 이것저것 발라주시고 무엇인가를 물어보시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대답하시고 갑자기 앞으로 불려 나가서 이마에 물을 붓는데, 어찌나 차갑던지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제가 되어 어린 친구들에게 유아세례를 줄 때, 제대회장님이 물을 살짝 따뜻하게 해주시는 모습을 통해서 지난 시간을 떠올리며 웃곤 합니다.

주님의 세례 축일인 오늘, 주님의 세례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이마에 물을 붓는 것이 아닌 온몸을 요르단 강에 넣었다가 다시 나오기를 세 번 반복하는 침례였습니다. 세 번의 죽음을 맞이한 이후의 삶. 그 삶은 바로 적(迹:자취)이 지상에서 하늘나라로 이동되는 표징이며, 또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진실이기도 합니다.

주일이 지나고 나면, 인사이동을 하는 본당이 많을 듯 싶습니다. 사실 저도 인사이동을 하면서 하루 사이에 저의 본당이 바뀌게 되는 것이 놀랍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한 가톨릭 교회 안에 참 좋은 말씀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매일같이 돌아오는 하루를 살면서도 그 하루를 마지막인 것처럼 살고, 당장 내일 떠나더라도 영원히 그곳에서 머물 것처럼 사는 것.”

우리 역시 이 지상의 여정을 살아내면서도 주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며 이 하루를 마지막 날인 것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살아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언젠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아름다운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해 우리 자신에게 세례를 받았을 때 주어졌던 예언직과 왕직과 사제직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묵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과 삶의 모습이 행동으로 드러날 때, 오늘 선포된 복음에서 나타난 성령의 말씀이 글이 아닌 직접적인 은총의 신비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르 1, 11)
“아멘.”

▥ 인천교구 민경덕 베드로 신부 2016년 1월 10일
  |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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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복잠행(微服潛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에 임금이 민생을 직접 살피기 위해서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수수한 차림으로 다녔던 것을 말하지요. 실제로 조선시대의 기록들을 보면 이렇게 미복잠행을 했던 서술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백성들의 생활을 자신이 직접 봐야지만 어떻게 국정운영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도 종종 정치인들이 공개하는 민생투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이 민생투어를 통해 “참으로 많은 것을 느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단지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목적이 더 커 보이는 생색내기와 홍보용으로만 보이기에 공감이 되지 않는 이야기로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진정으로 국민들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냥 한 번 방문하는 일회적인 행동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재래시장 한 번 방문한 것으로 시장 사람들의 어려움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독고노인들의 삶이 비참하다고 하는데, 그들을 한 번 찾아갔다고 해서 온전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국민들과 함께 해야지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올바른 정치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강생하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분께서 유한하고 부족한 인간의 몸을 취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솔직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힘으로 인간의 모든 부조리들을 없애버리고 사랑과 정의가 넘치는 세상을 직접 만드시는 것이 더 옳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의 몸을 취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보여주기 위한 것도 또 생색내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에 완전히 똑같이 인간이 되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 강생하셨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주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이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세례를 통해서 더욱 더 확실해집니다. 아무런 죄도 없으신 하느님께서 고개를 숙여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토록 큰 겸손을 보여주신 이유는 우리 역시 그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이 겸손의 삶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자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영이 내려왔으며,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사랑을 위해 스스로 낮추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얼마나 내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삶을 살고 있었을까요? 그 반대인 내 자신을 높이고 자신의 뜻만이 최고라는 생각으로 교만과 욕심의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우리 역시 사랑 때문에 스스로 낮출 수 있는 겸손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7년 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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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과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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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효과의 법칙이 있다. 우리는 수면에 떠 있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가라앉는다. 그러나 가라앉으려고 하면 오히려 떠오른다. 우리가 무엇을 하려고 애쓰는 순간 우리는 반대의 효과를 만나게 된다. 이것을 역효과의 법칙이라고 하는데 결국 자연스러운 흐름에 몸을 맡길 때 우리는 수면에 떠 있을 수도 있고 가라앉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것이다. 누군들 물에 자신의 몸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유영하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어찌 보면 이러한 자연스러움은 부단한 발버둥을 통해 얻게 되는 결과 혹은 경지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것은 스스로 기약(期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배우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그 일을 해내는 사람이 있다. 공자는 이런 사람을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生而知之者)이라고 불렀다. 나머지는 ‘배워서 알거나’(學而知之者), ‘발버둥을 치고 노력해서 아는 사람’(困而知之者)이다. 그러나 공자는 중요한 것은 나면서부터 알든, 배워서 혹은 억지로 노력해서 알든 결국 알아야 할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동일하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나면서부터 안 사람을 넘어 나기 전부터 아신 분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일을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신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하느님의 일을 자연스럽게 이루는 것이나, 혹은 태어나면서 아는 자(生而知之者)들의 순리에 따른 행동이 아무런 노력도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런 사람은 사람이라기보다 기계에 가깝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와 땀을 흘린 일화를 보면 예수님의 자연스러움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나면서부터 아는 이들의 자연스러움은 노력의 자연스러움이다. 이 자연스러움이란 매시 매초 멈추지 않고 들려오는 하느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는 자기 비움이며 겸손이다. 자기를 비워야 하느님 소리를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노력의 자연스러움은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하나에 만족하지 않으며 지나간 과거에 우쭐하지 않고 미래를 예단하지 않는다. 그래서 겸손하다. “이것이 진리다”라고 외치고는 그것만을 고집하는 것은 참다운 진리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소개할 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고 하신 것도 같은 이유다. 먼저 ‘길’을 가야 하고 그 와중에 진리를 만나는 것이다.

간혹 한 번의 깨달음으로 진리를 알았다고 우쭐대는 사람들이 있다. 겸손치 못한 사람들이다. 개량한복을 입고는 마치 인생을 달관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사람도 있고 때론 머리 깎고 승복 입고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제복이나 수도복을 입고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가르치려 드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 치는지를 모르거나 혹은 외면하거나 아니면 끝없이 답을 찾아가는 삶에서 도망친 자들이다. 그들이 진리를 한 번 마주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붙잡은 진리는 참다운 진리가 아니다. 그렇게 붙잡을 수 있는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명나라 때 왕양명이라는 사람은 그런 진리를 ‘광경’이라고 불렀다. 헛된 그림자, 혹은 찰나에 사라지는 풍경일 뿐이라는 의미다. 참다운 진리를 안 사람은 하나의 광경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스스로 자부하지 않는다. 스스로 “나는 깨달은 자요”라고 교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깨달았다고 여긴 것은 다시 한순간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오늘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눈길이 가는 것이 있는데 하나는 예수님께서 굳이 하지 않으셔도 될 일을 하신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신다는 점이다. 인간에게 세례를 받는 것은 굳이 하지 않으셔도 되는 일이다. 하느님의 아들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 새로 태어남의 세례다. 그것은 예수님의 비유대로 깨끗이 몸을 씻었는데 또 씻는 것과도 같다.

이처럼 굳이 하지 않으셔도 되는 일들이 복음서 곳곳에 등장한다. 예수님의 탄생도 그러하다. 석가모니는 왕궁에서 태어났다. 그것이 그의 깨달음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굳이 인간의 처소가 아닌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 버젓하지는 않아도 아기 누울 자리는 마련됐어야 했다. 좀 지나치다 싶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 절정에 있다. 인간의 ‘정의’로 말하자면 그분의 죽음은 결코 정의롭지 못했는데 그분은 감행하셨다. 오늘의 세례뿐 아니라 예수님의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하나의 역행이며 전복이며 치열함이다. 이러한 역행이나 전복은 스스로를 믿고 하느님 행세를 하려는 인간의 자만을 각성시키는 자비롭고 겸손한 초대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며 하신 말씀처럼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요한 13,15)이다. 극도의 낮아짐과 애씀으로 인해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감행하신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활의 시작, 그리고 죽음에 이르도록 일관된 키워드, ‘겸손을 통한 하느님의 자비하심’이다. 이 겸손은 자부하지 않는 까닭에 오늘 하느님께서 대신 그분을 들어 높여 주신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우리들이 개인적으로 깨달음이나 선행 등을 이유로 자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우리는 가끔 겸손을 내세우면서 칭찬을 구하고, 사랑을 내세우면서 대가를 바란다. 진정한 겸손과 사랑은 인간이 갚아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알아주시는 것이다. 나의 겸손과 사랑을 스스로 자부한다면 혹은 누군가에게 칭찬과 대가를 구한다면 그의 겸손과 사랑은 그것으로 사라진다. 스스로 구했으므로 구한 것을 얻는 순간 사라지는 것이다. “그들은 받을 상을 이미 다 받았다.”(마태 6,2) 하지만 진정한 겸손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 때문에 영원하고 그 자체로 남는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부하지 않으셨고 하느님께서 대신 “너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고 그분을 높여주신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부족하다. 가장 큰 어려움은 언제까지 노력해야 하는가이다. 주님의 세례 축일을 경축하고 기념하는 오늘, 우리의 노력이 예수님의 겸손과 닮아 있길 희망해 본다. 우리의 구원 혹은 그분의 자녀가 됨은 우리의 겸손한 노력에 대한 하느님의 선물이지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전리품이 아니다. 우리가 비록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生而知之者)은 아니지만 겸손한 노력을 통해 도달되는 지점은 예수님의 그것과 같다. 그것은 선물이며 그것을 희망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그래서 우리의 노력은 머물지 않는 희망찬 노력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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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서강휘 신부 : 가톨릭신문 2019년 1월 13일
  |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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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세례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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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성탄),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고(공현), 이제 본격적인 구원을 위한 삶을 시작하십니다. 그 구원의 시작이 세례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요한의 세례는 죄인이 회개하여 새로운 삶을 살 것을 약속하는 예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죄도 없으신 분께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례를 통하여 당신이 누구신지를, 또 무엇을 하시려 세상에 오셨는지를 알리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닫기를 바라십니다.

먼저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을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아들’(루카 3,22 참조)이시라고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오셔서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보면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 죄에 대한 속죄의 대가로 제물로 바치는 죽음을 표징으로 합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가 말했듯이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이시면서 우리 구원을 위해 기꺼이 ‘고난 받는 종’(이사 42,1 이하 참조)이 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의 이러한 사랑에 대한 찬미가를 부릅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
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에게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예수님처럼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세례의 삶’ 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죄와 세상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로마 6,3-4 참조)

세례의 삶은 끊임없이 죄와 세상적인 것과의 싸움입니다. 죄에 대해 죽지 않고서는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갈 수 없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그리고 세례의 삶을 충실히 살아갈 때 하늘이 열리고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자녀’로 받아들여지는 신비가 일어납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품위를 가지고 항구히 세례의 삶을 살아가도록 다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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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최형호 루카 신부 : 2019년 1월 13일
  |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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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게 차를 타고 가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다른 일을 하다가 시계를 잘못 봐서 약속시간에 늦게 된 것이었지요.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차가 많이 밀리는 것입니다. 약속시간에 가까울수록 초조해지고 있는데, 앞 차의 운전수가 딴 짓을 하고 있는지 신호가 바뀌었는데 움직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제는 초조함이 화남으로 바뀌게 딥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앞 차가 가라고 뒤에서 내 차로 부딪혀서 밀겠습니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경적을 울리겠지요. 그래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있나보다.’하면서 차선을 옮겨서 갈 것입니다. 만약에 급하고 화가 난다고 앞 차를 뒤에서 박아버린다면 더 늦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등산 가는 사람이 힘들다고 산에게 “너는 너무 높아. 좀 낮춰줘.”라고 말할까요? 산에게 불평한다는 것이 소용없음을 알기에 그냥 우직하게 산에 오릅니다. 비가 온다고 해서 “비 멈춰!”라고 말하고 화를 낼까요? 아닙니다. 우산을 쓰면 됩니다.

사람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그 사람은 움직일 수 없는 ‘산’과 같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비’와도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대신 변할 수 있는 내가 바뀌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변화하려는 노력을 보고 감동을 하게 되지요. ‘나를 위해서 저렇게 노력하는구나. 나도 바꿀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연약한 인간의 몸을 취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물론 죄로 가득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지요. 그러나 우리들이 스스로 변화할 수 있도록 당신께서 먼저 변화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우리 역시 죄를 미워하고 선을 실천할 수 있도록, 미움과 질투의 삶에서 사랑과 용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 변화할 수 있게 직접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모범은 오늘 우리들이 기념하는 주님의 세례를 통해서 더욱 더 분명해집니다. 아무런 죄도 없으신 분께서 회개의 세례를 받으십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그분께서 왜 물로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분명히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신데 왜 그런 모습을 보였을까요? 바로 그 대답을 세례 받은 후 하늘에서 들린 목소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교만에 차서 사람들을 지배하는 모습이 아니라, 한없이 낮아져서 오히려 사람을 섬기려는 겸손함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 하느님의 뜻을 직접 당신의 몸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지요.

지금 우리는 어떤 변화로 낮아지고 있을까요?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을까요? 나의 모습은 하느님으로부터 칭찬의 말을 들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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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9년 1월 13일
  |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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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세례성사 = 끊어 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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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사제 13년차.
보좌신부 1년을 제외하고는 12년째 본당 외 사목을 하고 있는 지금. 주위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다름 아닌 “본당 가고 싶지 않아?”였다. 누군가는 무슨 문제가 있어서 본당을 못 가는 건 아니냐고 뒷말을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걱정되고 안쓰러운 마음에, 또 누군가는 비슷한 처지에서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그런 말을 건네 왔다.

물론, 새롭게 주어지는 일이 익숙하지 않고,
때때로 생각지 못한 힘겨운 상황을 마주하게 되면, 앞서 걱정하고 아끼는 마음에 해주던 말들이 나 자신을 심하게 흔들어 놓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은 오히려 이렇게 바깥일을 하고 있는 지금이 참으로 내 자신을 건강하게 만들고, 하느님께서 언제든 본당 사제로 살기 위해 준비시키고, 공부시키는 시간이라 여겨져 매일매일 감사하게 일을 배우고 있다.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이다.
교회는 죄 없으신 하느님의 어린양께서 죄인들이 받던 회개의 세례를 몸소 받으심으로써 세례성사를 축복하신 이날을 기억하고 기념한다.

주님 세례 축일을 지내며 우
리 신자분들은 각자 세례 때의 어느 순간을 가장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을까? 세례식(물을 붓는 예식)이나 도유 예식? 흰옷을 입고 촛불을 받던 때? 아니면 다 끝나고 함께 세례를 준비한 이들과 사진을 찍던 순간?

어떤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을지 모르겠지만,
주님 세례 축일의 의미를 되새기며 곰곰이 생각을 해볼 때 개인적으로는 ‘끊어버림의 예식’이 아닐까 한다.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세례성사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하늘나라 시민으로 살기 위해서는 이전에 세속적으로 살던 나와는 과감히 작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세례 때 마귀를 끊어 버리고, 악의 유혹을 끊겠다고 굳게 서약했지만, 나약한 인간인지라 계속해서 되풀이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세례 때의 서약을 기억하며 하느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 잊지 않고 노력해야 하는 그 순간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주님 세례 축일을 지내며
과연 나는 하느님의 사제로서 무엇을 끊어 버리고 절제하고자 애쓰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그러다가 문득 지난 사순 시기를 시작하며 신부님들과 식사 자리에서 이번 사순 시기에는 무엇을 끊어 버릴까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한 선배 신부님께로 부터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무언가를 끊겠다는 그 생각을 끊어버려!” 그러면서 무릎을 쳤던 기억이 났다.

오늘도 난 그렇게 타협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다시금 한 가지 결심을 해 본다.
본당 사목에 대한 미련을 끊고,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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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유영욱 프란치스코 신부
2021년 1월 10일 <인천교구 주보>에서
  |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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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형을 만났습니까? 지금의 배우자 또는 연인이 내 이상형이 맞습니까? 종종 자신의 이상형을 만났다면서 기뻐하는 사람을 봅니다. 그런데 얼마 뒤에 이상형이 아니었다면서 실망의 표정을 짓곤 합니다. 그렇다면 이상형을 만날 확률은 어떻게 될까요? 실제로는 아주 희박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이상형이 될 확률은 100%에 가깝다고 하더군요.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실망하면서 “이상형이 아니다.”라고도 말하지만, 그래도 이상형이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될 확률은 높아집니다. 왜냐하면, 이상형은 찾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완벽한 사랑을 찾고 있다고 하지만, 부족한 사람들이 만나 완벽한 사랑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진정한 사랑으로 만들어 갈 때 꿈꿔왔던 이상형이 보이게 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받으신 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세례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실 세례는 회개를 위해 필요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무런 죄도 없는 하느님이시기에 굳이 회개의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 땅에 참사랑을 만들기 위해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만으로 완전한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오신 것에서 멈추지 않고, 우리가 받아야 할 세례도 직접 받으시고, 아프고 힘들어하는 이에게 위로와 힘을 주셨습니다. 그 모든 활동으로 주님께서는 사랑을 만들어 가셨습니다. 우리의 이상형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이상형이 되어 오신 주님을 보면서, 우리 역시 나의 이웃에게 또 다른 이상형이 되어 주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사랑을 만들어 가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께서는 원하셨고, 그런 이유로 이 땅에 오셨고 오늘 기념하듯이 세례도 받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었기에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온 순간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지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사야 예언자가 오늘 제1독서를 통해 말하고 있는, 하느님께서 붙들어 주는 이, 선택한 이, 마음에 드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주님께서 보여 주셨던 사랑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이 가득한 곳, 최고의 이상형이 가득한 곳. 바로 지금 이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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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2021년 1월 10일
  |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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