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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천부당만부당한 예수님의 세례
조회수 | 2,336
작성일 | 11.01.06
출근시간, 등교시간, 한 바탕 ‘아침대란’을 치룬 한 엄마가 모닝커피를 한잔 마신 후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하기 시작했을 때의 일입니다.

4살 된 막내아이가 엄마를 거든다며 청소기를 꺼냈습니다. 4살 밖에 안 된 아이다보니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말려들어가 있는 청소기 코드도 제대로 뺄 줄 모릅니다. 전원을 꼽고, 스위치를 켰지만, 키가 작다보니 청소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그래도 엄마는 아이가 하는 대로 가만히 둬봅니다. 아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보지만 도움은커녕 엄마에게는 방해만 됩니다. 멀쩡하게 서 있는 화분을 넘어트립니다. 무리하게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보니 자주 전원이 꺼지고 기계에 손상이 갑니다. 사실 아이가 가만히 앉아 있어주는 것이 엄마에게는 훨씬 편한 일인데, 그래도 엄마는 아이가 엄마를 도와주고 싶다는 그 기특하고 갸륵한 마음에 감동을 받습니다. 마음이 흐뭇해집니다. 벌써 아이가 이렇게 컸구나, 귀엽고 대견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엄마의 생각은 그렇습니다. 아이가 청소에 도움이 되든지 말든지 상관없습니다. 그저 엄마를 도와주고 싶다는 아이의 그 마음에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은 것 같습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솔직히 그분께 별 도움 안 되는 우리입니다. 때로 가만히만 있어줘도 좋은 우리입니다. 때로 방해만 되는 우리입니다. 우리의 도움을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겸손하게 우리 인간의 협력을 요청합니다. 우리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십니다. 우리와 함께 걸어가십니다. 답답한 인간의 제도 안으로 자신을 밀어 넣으십니다.

오늘 주님 세례 축일은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한 나약한 인간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으심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 참으로 기가 막힌 일입니다. 정녕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먼저 예수님께 다가가서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아야 당연한 일인데, 반대로 그분께서 세례자 요한을 찾아가십니다. 세례자 요한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손을 통해 세례를 받으십니다.

참으로 이해 안가는 부분입니다. 세례는 축성된 깨끗한 물로서 인간의 죄를 씻는 예식입니다. 세례는 죄인들이나 받는 예식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례는 인간들이나 받는 예식입니다.

그런데 무죄한 어린 양이신 예수님이, 세례가 전혀 필요 없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세례를 받으시다니...

무한한 자기 낮춤, 극도의 겸손, 우리와 나란히 걸어가는 절친한 친구가 되고 싶다는 하느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 예수님의 세례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행하는 기도와 선행, 봉사와 희생, 너무나 보잘 것 없어 보입니다. 별 의미도 없어 보입니다. 하느님께 무슨 도움이 되겠나, 의심합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그 작은 우리의 몸짓들이 하느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도구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작은 우리의 봉헌을 껄껄 웃으시면서, 행복해하시면서, 기꺼이 받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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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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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아 고맙다!

주님의 세례축일을 지내고는
물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언젠가
<물은 답을 알고 있다>(에모토 마사루, 양억관/ 나무심는사람)라는 책을 보곤
물이 얼마나 소중하며
물에게 감사해야 하는지 감동한 적이 있다.
모두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물 연구가인 저자는
우리 인간은 70%가 물로 구성된 존재이며
따라서 물의 신비를 밝히는 것이 인간 생명의 본질을 밝히는 것이라 생각하고
물의 결정체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물은 6각의 아름다운 결정체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일반 자연수는 6각을 띄는데, 수돗물은 그 결정체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물도 소리와 음악을 알아듣는다.
바하와 모짜르트, 베토벤 등의 음악을 들려주면 아름다운 결정체를 보이고
반항과 욕설이 남무하는 헤비메탈 음악을 들려주면 그 결정이 이그러진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물에게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등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 아름다운 결정체가 나타나고
물에게 욕설을 퍼부우면 처참한 모습이 된다.

물은 모든 것을 다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늘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의식을 나누면
물은 그것을 기억하여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신을 보여주고
우리가 늘 나쁜 생각, 나쁜 말, 나쁜 의식에 사로잡히거나
무관심에 사로잡히면 물은 나쁜 기억들을 자신에게 각인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수기를 어떤 것을 쓰느냐가 아니라
물을 어떤 자세로 대하느냐에 따라
그 물이 우리에게 참으로 생명수가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물이 가장 좋아한 말,
즉 가장 아름다운 결정체를 드러내 준 말은
감사와 사랑이란 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H2O라는 물은 감사(2) + 사랑(1)로 표현되는 삶이 가장 복된 삶임을 가르쳐 준다.

세례받은 자의 삶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늘 감사하면서 살고
더욱 더 사랑하면서 살고...

세례 축일을 지내면서
그리고 연중 시기를 시작하면서
매사에 더욱 감사하고
만나는 모든 이를 더욱더 사랑해야 함을 생각한다.

이미 돌아가셨지만
우리 수사님 한분은
냉수 한컵을 드시면서도 천천히 성호를 그으면서
깊이 감사를 드리시고 음복하시곤 하셨다.

그래
이런 감사를 드리면
물도 얼마나 기뻐할까?
정말 책의 저자가 말하듯이 가장 아름다운 결정체를 반짝이지 않겠는가?
그 물이 내 몸속에 영양소를 나르면서
나는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하게 되고
진정 새로난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않겠는가?

하루를 살면서
몇번이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평화를 빕니다>, <축하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등의 아름다운 말들을 사용하는지
오늘은 한번 세어 보자.
이 횟수가 많으면 많을 수록 나는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게 된다.
참다운 세례받은 이로서 새 생명을 잉태하고 나누게 된다.

반대로
하루를 살면서 악담이나 저주, 욕설, 비방, 험담, 시기, 질투, 탐욕 등을 부린만큼
나는 세상에 악을 퍼트리게 되고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망가뜨리게 됨을 의식하자.

하느님, 감사합니다.
여러분, 모두 감사합니다.
물아, 고맙다.
해야, 고맙다.
공기야, 고맙다.
모든 삼라만상아, 고맙다, 정말 고맙다.

작은 형제회 오상선 신부
  |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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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의 약속

세례자 요한은 신약성경에서 매우 특별한 인물입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여자에게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루카 7,28)고 찬사받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요한은 철저하게 예수님을 준비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그는 빛이 아니고 빛을 증언하러 온 사람이었고(요한 1,6~8),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이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는 묵묵히 자신의 소명을 실천하여 사람들에게 회개를 위한 세례를 주고 예수님께도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세례를 줍니다.

이사야에서 말하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는 예언이 이루어지도록 준비하는 이가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물론 제1독서와 복음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세례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들려오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는 소리를 통해 예수님의 신원을 알려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 모든 것들을 준비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봅니다.

세례는 베드로의 깨달음처럼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을, 곧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을 공동체를 새롭게 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베드로 사도는 사도행전에서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유다인들이 혈통에 의해 하느님의 백성이 된 것이라면,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넘어서서 ‘하느님의 경외하고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구원은 유다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이들을 위해 열려있습니다.

세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믿음을 고백하고 죄를 용서받으며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세례 안에서 우리는 죄와 단절된 삶을 살고,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예식에서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예”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이 응답은 세례 때에 한 번으로 족한 것은 아닙니다. 이 응답은 지속적으로 우리의 일상의 삶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세례 때의 응답을 실천해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쉽게 하루에도 여러 차례, 아니 어쩌면 훨씬 더 자주 선택을 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작은 것이던지 아니면 중요한 것이던지 이 선택은 우리의 삶을 드러내 줍니다. 이런 선택들이 모여서 우리의 하루가 되고 이것들이 모여 우리의 삶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를 선택할 때에 우리는 믿음을, 복음을, 그리스도를 그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신앙은 삶과는 동떨어진 것이 될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세례 때의 응답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에 맞추어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세례 축일을 지내면서 자신의 세례를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처음 신앙생활을 하고자 했을 때의 열의와 기쁨과 감사함을 되돌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세례 때의 서약들은 지금 나의 생활 안에서 꾸준히 실천되어야 합니다. 아마도 신앙인들은 매일 매일 세례 때의 서약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는 구원을 향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깨끗이 씻고 또 씻으십시오. 하느님께는 인간의 회개와 구원보다 더 마음에 드시는 일이 없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모든 말씀들과 교회에 성취되는 모든 신비들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계시되고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여러분이 태양처럼 빛나고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원천이 될 수 있도록 마련되었습니다.”(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의 강론 중에서)

<예수회 허규 신부>
  |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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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주님처럼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떠나 있었던 우리가 하느님을 통해 믿음으로 새로이 탄생됩니다. 하느님을 향한 믿음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기쁨을 누리게 합니다.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삶으로 변화됩니다. 하느님의 기쁨은 당신 자녀들인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아닌 그 어떤 것에서도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사랑에서 비롯된 하느님 선물이기에 세례는 삶을 과장하지 않고 겸손되이 받아들이게 합니다.

세례는 사람을 살리는 성사입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하느님 존재를 인정하는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삶 전체를 주님과 함께 나누게 되는 봉헌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세례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인의 인격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례와 삶은 아버지와 자녀들처럼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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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은 어디에 -내적혁명-

오늘 역시 이런저런 단상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수도원은 물론 어디에나 있는 외로운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머물 집이, 잘 방이, 먹을 밥이 없어 가난이 아니라 하느님을 떠나, 말씀을 떠나, 사랑을 떠나 가난입니다.

"하늘아 들으라, 나는 말하리라. 땅아, 나의 말을 들으려므나. 나의 가르침은 빗발처럼 퍼지고 이슬처럼 방울져 흐르며, 햇풀위에 이슬비처럼 내리고 시들은 풀밭 위의 소나기처럼 내리리라."(신명32,1-2).

일상의 사막도 하느님을 찾아 만나면 '낙원의 충만'이 되지만 하느님을 떠나면 '허무의 늪'이 되어 버립니다.

낙원을 갈망하는 마음에 한자'(樂園)'로도 써보고 영어'(paradise)'로도 써봅니다. 사람은, 수도원은 세상 바다에 떠있는 섬이 아니라, 세상 안에 존재하며 세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니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여전히 사람이 문제입니다. 공동체 삶이 얼마나 복잡다난한지 깨닫습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란 말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법 없이 살 사람은 법 없으면 못 삽니다. 심성이 좋고 착하고 맑은 사람은 법이 지켜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법은 적을수록 좋은 세상인데 갈수록 법이 많아지는 복잡하고 험난한 세상입니다.

참 불가사의한 존재가 사람입니다. 대부분이 종교인들이라는 나라인데 도대체 미래가,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갈수록 힘들어지고 어려워지니 말입니다. 빈부의 양극화로 인해 완충 작용의 역할을 해줄 건강한 중산층들이 사라지는 현실도 안타깝습니다. 집은 있지만 가정은 보이지 않습니다.

안식년이라 수도원을 떠나 있지만 결국은 수도원에서 먹고 자고 지냅니다. 가정에 초대되어 밥을 먹은 적도, 잠을 잔 적도 없습니다. 식사 대접도 대부분 음식점에서의 외식입니다.

제 몸 하나 부지하기 힘든 각박한 세상입니다. 예전에는 잘 살든 못 살든 마을이 있었고 머물 집도 있었지만 이젠 잘 살 든 못 살든 머물 곳도 마땅치 않고 사람들 마음에 온기(溫氣)와 훈기(薰氣)도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품격있고 격조있는 인격의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세상입니다. 집, 밥, 일, 돈, 몸의 기본적 생존 조건이 위협받으니 하루하루의 삶이 위태해 보입니다. 악의 세력이, 어둠의 세력이 창궐하는 듯 한데 딱 부러지게 잡아낼 수도 없습니다. 인터넷을 통한 세상을 보면 온통 밀밭이 아니라 가라지밭 같습니다. 어제 읽은 기사 중 한 대목입니다.

-이 나라는 다시 '생존의 시대'로 돌아가고 있다. 옛날에는 훨씬 더 힘들었지만 모두가 함께했고 희망이 보였지만 지금은 혼자 싸워야 하고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 대한민국은 지역갈등과 이념갈등의 불이 세대갈등, 계층갈등으로 옮겨붙는 중이다. 같은 시대를 산다고 해서 시대에 대한 기억이 같은 것은 아니다. 사람은 시대를 몸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정확한 현실 진단입니다. 말 그대로 절박한 '생존의 시대'입니다. 여기서 무너지면 자살이요 견디면 암입니다. 곳곳에서 살려달라 부르짖는 보이지 않는 소리가 들립니다. 생존의 어려움들로 미국 수도원에 있어도 카톡을 통해 이런저런 기도 부탁을 받습니다. 정말 영육으로 건강한 사람, 아니 육에 앞서 영으로 건강한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적은 밖에 있는 게 아니라 안에 있습니다. 나라든 개인이든 안에서의 탐욕과 부패, 불의와 부정, 분열로 무너져 내렸지 밖의 침공으로 무너져 내린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내적중심과 균형을 잃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면 누구도 도와 줄 수 없습니다. 결국은 중심의 문제입니다. 내적 중심에 따른 질서와 평화입니다. 어떤 환경에도 깨어 중심만 잃지 않으면 삽니다.

낙원은 어디에? 바로 길은 어디에? 질문과 같습니다. 낙원은, 길은 밖 어디에도 없습니다. 지금 여기가 낙원입니다. 지금 여기에 길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가 꽃자리 낙원입니다. 중심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믿고 희망할 때 깨닫는 진리입니다. 내 자신이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정말 긴요한 것이 내적여정이요 내적혁명입니다.

"As you are, so is the world(네 정도만큼의 세상이다)."

수십 년 전에 읽은 글귀와 더불어 또 생각나는 구절이 있습니다.

"The more spiritual-, the more real(영적일수록 실제적이다).“

진정 영성가가, 신비가가 되어야 살 수 있는 세상입니다. 믿는 이들은 모두 신비가로 살라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신비가에게는 지금 여기가 낙원입니다. 오늘 주님 세례 축일에 신비가가 되어 낙원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해 드립니다.

첫째,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달으십시오.

우리 모두 이미 세례성사로 거룩함의 여정은, 신비가의 여정은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은 내 사랑이자 운명이 된 획기적인 전환점이 회개의 세례입니다. 주님께 세례 받음으로 바로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기적입니다. 자연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존엄한 품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이 내 삶의 중심,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의미로 확고히 자리 잡았음을 뜻합니다. 오늘 날짜 1월11일과 마르꼬 복음 1장11절의 일치가 참으로 절묘하고 기막힙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딸), 내 마음에 드는 아들(딸)이다.“(마르1,11).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복음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우리 역시 세례성사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아들, 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하느님의 반석 위에 인생 집을 짓고,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것입니다. 이래야 내적으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깨어 낙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아담이 잃었던 낙원을 회복한 우리들입니다.

둘째, 끊임없이 회개의 삶을 사십시오.

세례성사의 결정적 회개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이지만 방심은 금물입니다. 단지 내적여정이, 내적혁명이 시작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내적여정은 내적혁명의 여정이요 바로 회개의 여정임을 뜻합니다. 한 번의 세례의 회개로 완성된 삶이 아닙니다. 삶은 은총이자 과제입니다. 은총에 따른 부단한 깨어있는 수행의 노력이 있어 하느님의 자녀로 성장, 성숙합니다. 끊임없는 회개가 늘 깨어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게 합니다.

어제의 평범하나 강렬한 순간적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아, 이렇게 하면 은총을 받을 수 없지요.“

벨라도 수사님이 친절히 유리컵에 쥬스를 따라 주려는 찰나 유리컵을 거꾸로 들고 있던 저를 발견했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유리컵을 바로 세운 후 따르는 쥬스를 받으며 한 말입니다.

유리창이 투명하면 새들이 부딛혀 땅에 추락하는 경우가 있듯이 저도 유리잔이 투명하여 잠시 위 아래를 착각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아무리 하느님이 은총을 주셔도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있지 않아 낭비되는, 허비되는 은총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하느님 탓이 아니라 내 탓입니다.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라 했습니다. 비상한 회개가 아니라 이렇게 제자리에서 하느님 향해 활짝 열린 바른 자세, 바른 마음으로 깨어 있는 것이 회개입니다. 이런 회개로 깨끗이 비워진 마음에 가득 차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이런 회개가 진정 내적혁명이요 주위를 서서히 밝히면서 변화로 이끕니다.

셋째, 자비롭고 겸손한 삶을 사십시오.

자비와 겸손은 한 실재의 양면이요 함께 갑니다. 회개의 진정성을 보장하는 열매입니다. 이사야서의 예언은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지만 종국에는 우리를 통해 성취되는 것이 하느님의 소원이요 기쁨입니다.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리, 모든 이들이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이런 이가 영성가이자 신비가입니다. 자비와 겸손, 인내와 공정의 신비가입니다. 그대로 주님의 종, 예수님을 통해 실현된, 우리를 통해 실현되어야 할 이사야 예언입니다. 자비와 겸손, 인내와 공정의 하느님이요 이런 하느님을 닮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셨고, 예수님은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려는 이들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하느님께서 회개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우리 역시 자비와 겸손, 인내와 공정을 실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여기가 낙원입니다. 지금 여기에 길이 있습니다.

1.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2.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3.하느님을 닮아 자비와 겸손, 인내와 공정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적혁명의 여정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이렇게 당신처럼 살라고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우리의 사명을 환기시키십니다.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준다. 내가 너를 빚어 사람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이들의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어라."(이사42,6-7). 아멘.

<분도회 이수철 신부>
  |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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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다. 요한의 세례는 죄를 씻는 회개의 세례이기에, 죄 없으신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으셨다. 왜 그랬을까?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우선 두 가지가 떠오른다. 우선 예수님 자신의 의지이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를 통하여 자신의 사명을 확고히 하고 싶지 않았을까? 집과 고향을 떠나 이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의 길을 가기 위해 첫번째 길을 세례로 선택하신 것이 아닐까?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마음을 새롭게 하고 자신에게 주어질 길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지 않았겠는가?

다음으로는 예수님 정체성이다. 예수님은 나자렛에서 목수로 사시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하셨을 것이다. 이제 때가 되어 세례자 요한의 출현과 함께 자신의 정체성이 드러나리라는 희망으로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의 정체성은 세례로 더 분명해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신다. 이는 새로운 창조를 알리는 것으로 보여진다. 창세기 1장 2절을 보면 천지창조의 시작에 아직 형태도 갖추고 있지 않은 세상에 ‘하느님의 영’이 휘돌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내려오는 성령이시다. 세상의 창조에 함께한 하느님의 영이 내림으로써 복음서는 예수께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시는 구세주이심을 분명히 한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한편 비둘기는 노아의 홍수 후에 새로운 시대, 평화의 시대가 왔음을 알리는 성서적 상징인데, 예수님의 왕국이 바로 그러하다는 뜻으로 보여진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세례는 새 생명의 상징이다. 당신 스스로 생명의 근원인 물속에 잠김으로써 당신의 이름으로 베풀어질 세례에 의한 구원을 예표하셨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하기를 세례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간다 하였다.

김태오 신부(마리아회)
  |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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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주님세례축일입니다. 곧 예수님의 두 번째 탄생일입니다. 신적 생명으로의 탄생일입니다. 아기 예수님으로서의 탄생인 첫 번째 탄일이 그의 어머니께서 성령을 입은 날이라면, 이제 이 두 번째 탄일은 예수님께서 직접 성령을 입은 날입니다. 그러니 오늘이 바로 예수님의 진짜 탄생일인 셈입니다. 우리의 탄생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아기로 태어났을 때는 부모에게 축복이 내린 것이지만, 세례를 받는 것은 바로 오리 자신에게 축복이 부어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례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새 탄생’이요, 신적 생명으로의 탄생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첫 번째 주님의 종의 노래’입니다. 여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주님의 종은“내 마음에 드는 이,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을 공정하게 펴리라.”(이사 42,1)고 하십니다.

<제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주신 일을 선포합니다(사도 10,38).그리고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시는 장면을 들려줍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탄생일인 오늘, 우리도 예수님의 세례와 함께 새롭게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새롭게 다시 탄생하는 이 두 번째 탄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세례현장에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그렇다면, 예수님의 세례의 현장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두 가지 신비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하나는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셨습니다. 또 하나는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그렇습니다. 첫 번째 탄생 때는 주님의 천사만 나타났을 뿐이지만, 이제 이 두 번째 탄생 때는 성령이 나타나시고 아버지께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내려오신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그것은 창조의 장면과 같습니다. 창조 때 하느님의 영이 물위를 휘돌아 하느님의 전능을 드러내셨습니다. 이제 똑같은 성령께서 요르단 강물 위로 내리는 것은 바로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짐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비둘기 형상으로 내린 성령께서는 노아의 홍수 때 푸른 잎사귀를 물어온 것처럼, 새로운 생명을 물어오고 은총의 때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줍니다. 곧 죄 사함이 열리고 구원의 때가 시작됨을 알려줍니다.

이처럼, 새로운 탄생인 세례는 새로운 창조,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가리킵니다(로마 6,4).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2코린 5,17; 로마 8,9).곧 성령 안에서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음으로써, 새롭게 창조된 새로운 생명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 안에서는 새로운 생명이 살고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이는 우리가 성령을 선물로 받아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까닭입니다(1코린 12,13).

그리하여 우리도 그리스도의 힘과 성령의 개입으로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된 것입니다(디도 3,4-5). 이로써 우리는 주님을 옷 입듯이 입고서(갈라 3,27),그리스도 안에서 살기 되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사시게 되셨습니다. 참으로, 세례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합일시키십니다. 곧 세례 받은 자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사건, 곧 죽음과 부활이 새롭게 재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콜로 2,12)

세례 현장에서 벌어진 또 하나의 신비로운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들려온 아버지의 선포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아버지로부터 선포된 이 말씀은 <구약성경>에 비추어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시편> 2장에서 이스라엘 왕좌에 오르는 왕에게 적용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이 선언은 예수님을 왕으로 축성하시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곧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세우시는 나라의 왕으로 선포된 것입니다. 이로써, 새로운 세상 당신의 아드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위한 또 하나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단지 예수님만이 아니라 우리를 포함한 온 세상과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를 예수님 스스로 이토록 아름다운 구절로 표현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통해 아버지의 사랑을 입었습니다. 당신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고, 당신의 생명을 입었습니다. 성령의 선물로 거룩해지고 의롭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갖 의로운 일을 이루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신다고 스스로 설명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세례와 함께 우리 죄인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낮추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의로운 일이었습니다.

마치 십자가에서처럼, 자신을 낮추시어 “반역자의 하나처럼,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이사 53,11-12) 죄인으로 세례를 받으심으로 저희를 의롭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바로 우리가 새롭게 태어난 생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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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2019년 1월 13일
  |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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