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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조회수 | 1,946
작성일 | 11.02.21
[부산]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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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예수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세계 3대 종교의 창시자인 불교의 석가모니나 이스람교의 마호멛 처럼 인류의 위대한 성인 중의 한 분으로 생각하고 계시진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2천 년 전 유대인들에게 물었던 질문을 오늘날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물음에 대한 답에 따라 우리들의 삶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은 예수를 다시 살아난 세례자 요한 혹은 엘리야 혹은 예레미야 등 위대한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설마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나 메시아, 그리스도라고는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앞장서는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메시아) 이십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은 초대 사도교회의 신앙을 대변하는 말로서, 이 고백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생명을 주려고 오신 메시아, 곧 그리스도(구세주)임을 알고 전 교회를 대표하여 선언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의 영감을 받아 대답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시몬 바르요나(시몬 바르요나는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는 뜻이다)라고 부르시며 “그것은 사람이 가르쳐 주어서 네가 알게 된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러니 너는 복된 사람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복되다-너는 행복하다” 베드로가 스승 예수로부터 받은 축복입니다. 그 복은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 임하게 하는 복된 사업을 인간이 떠맡는 행복한 사명입니다. 이 모든 복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신앙고백을 한데서 이루어 졌습니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41-42) 베드로를 처음 만났을 때 이미 요나의 아들 시몬을 베드로-케파 라고 명명한 바 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그 이름에 상응하는 신앙고백을 함으로서 그 이름이 단순한 개명의 이름이 아니라 실질적인 사명을 부여받은 이름임을 예수께서는 확인하여 주신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서 저자는 다윗의 자손이며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하느님 왕국을 세우도록  하느님(성부)께서 보내신 예수님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데, 오늘 마태오 복음 16장17-19절에서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를 어떻게 세우시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세 가지를 주었습니다. 첫째는 베드로(바위)라는 새 이름, 둘째는 베드로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겠다는 약속이며, 셋째는 천국의 열쇠입니다.

‘천국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맡김으로써 예수님은 지상에 있는 당신 왕국인 교회의 총리를 임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열쇠’는 베드로가 자신의 후계자에 게 물려줄 직책과 수위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세세 대대로 계승되어 왔습니다.

(마태오복음 16.18)‘내가 이 바위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데 저승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에서 교회를 내리누르지 못할 죽음(죽음)의 세력에 대한 표현은 ‘교회의 영원성’을 암시합니다. 따라서 ‘반석’은 베드로의 수위권에 대해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아무리 베드로의 믿음이 걸림돌이 될 정도로 부족하더라도, 그는 교회 창립의 반석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그가 차지하고 있는 특별한 위치를 잘 말해 줍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베드로를 (수제자로) ‘선택’ 했을까요. 그리고 왜 그를 ‘반석’ 이라고 불렀을까요?

’베드로가 가장 깨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적인 삶의 실패를 많이 경험해서 마음의 넓이, 깊이를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신적인 것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인간적으로 어리석고 부족해 보였지만 사랑으로 채워진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사랑, 완전함, 하느님께로 나아가신 분이십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 안에서 영혼이 계속 성숙해가고, 사랑이 계속 성장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든 인간적인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예수님, 동료 인간을 사랑하려고 하는, 사랑으로 끊임없이 나아가는, 사랑의 힘을 빛나게 하는 인간성을 보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성격은 우유부단하고 소신 없이 행동하기도 하였으며 (갈라 2.11-14), 때로는 단호하기도 하고(사도 4.10, 5.1-10) 경우에 따라서는 무분별하고 경솔하였습니다. (루카 22.33) 또 성급하고 화를 잘 내기도 하였습니다. (요한 18.10)  예수님처럼 물위를 걷다가 빠져서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이 부족하다는 소리도 듣습니다. (마태 14.28-31) 결국에는 모든 사람이 스승님을 버려도 죽어도 배반하지 않겠다고 결심해 놓고 스승님 면전에서 모른다고 세 번이나 배반해 버립니다. (마르코 14.17)

반면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처음 만났을 때 눈여겨보았던 인물입니다. 고기잡이에 베테랑임에도 불구하고 순명하고 믿음으로 따릅니다. 예수께서 중요한 일(거룩한 변모, 죽은 회당장의 딸을 살림)이 있을 때마다 데리고 다닌 인물입니다. 스승 예수께서는 사탄에게 시험받더라도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베드로를 위해 특별히 기도했으며, 형제(사도)들에게 힘이 되어 줄 것을 부탁하기도 합니다.(루카 22.31-32)  오늘 복음에서처럼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스승 예수를 살아 있는 (구세주)그리스도로 고백(마테 16.16-19)합니다.  부활한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베드로에게 나타납니다. 이 모든 점을 종합해 볼 때 온유하면서도 확고한 인물로, 그리고 예수 앞에서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나타나듯이 큰사랑과 충성을 바칠 수 있는 인물로 묘사되기도 하였습니다.(요한 21.15-17)

우리도 베드로 사도처럼 우리의 삶 안에서 겪는 여러 가지 실수나 실패, 아픔들을 통해 사랑이신 예수님, 하느님께로 나아갑시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다가오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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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정웅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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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되찾기

오늘 복음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이십니다”라는 답변 한마디로 엄청난 행운을 얻어 거머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을 전합니다. 따져보면 그날 베드로 사도가 특별히 대단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서, 의아합니다. 그리고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고백은 우리들도 쉬이 바치고 있는 신앙고백이라는 걸 생각하니, 약간 벙벙한 기분도 듭니다.

그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아는 사람들, 즉 주님께서 베푸신 놀라운 이적들을 보고 그 놀라운 일에 대한 소문들을 들었던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말하고 있는지를 물으셨습니다. 어쩌면 당신을 따르는 수많은 군중들이 참으로 당신이 누군지 알고 있는지가 궁금하셨던 것도 같고 그저 무작정, 좋은 구경을 놓치지 않으려는 생각에서 혹은 재수가 좋으면 가끔 공짜 빵을 얻어먹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와르르 아무 생각도 없이 몰려다니는 일을 안타까워하신 것 같기도 합니다. 때문에 그날 그분 질문의 초점이 이러쿵 저러쿵 지레짐작하며 떠들어대는 세간의 평이 아니라 제자들의 심중을 재차 캐물으신 점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지금 우리는 과연 그분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과연 그분을 누구라고 말합니까?
과연 무엇 때문에, 어떤 이유에서 그분을 찾으십니까?
그리고 무엇이라고 그분께 답변하십니까?

주님께서는 오늘도 그분을 열심히 쫓아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려주신 것을 ‘아는’ 믿음의 사람을 만나고 싶으십니다. 때문에 그분을 똑바로 알고, 정확히 깨달아 그분을 따르고 있는지를 물으십니다. 우리가 바치는 기도문들이 그저 외워 읊는 문장이 아니라 참으로 그날 베드로 사도처럼 솔직하고 절실한 나의 고백이기를 원한다는 말씀이라 깨닫습니다. 때문에 우리의 삶 안에서 매일 매 순간에 지극히 개인적인 답변을 요구하시는 것이라 헤아립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주님의 물음에 우리는 모두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세상이 말하고 신봉하는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넘어 주님을 바로 알고
믿음으로 그분의 자녀가 된 그날, 우리에게도 “너는 행복하다”라는 그분의 선포가 틀림없이 선물되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미 “너는 행복하다!”라는 그 큰 축복이 내려진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세상 것들에 쏠려 그 행복을 잊고 세상 것들에 팔려 그 행복을 놓치고 지내는 우리를 안타까워하시는 그분의 고백이라 듣습니다. 부디 우리 모두가 진심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고백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분만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시며 그리스도”임을 온 세상에 자랑하게 되기를 청합니다.

하여 하느님의 뜻을 살아가는 복을 놓치지 않기 바랍니다. 매일 “고난의 증인”이 된 사실에 기뻐하기 바랍니다. 더욱 열과 성을 다하여 그분의 뜻을 살아내는 축복까지도 모두 누리는 복된 신앙인의 살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세상에 눈이 팔려서 놓쳤던, 그 참된‘행복’을 되찾는 우리의 삶이기를 기도드립니다. 아멘

장재봉 신부
  |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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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살아 계신 하느님

애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입니다. 이 축일은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시고, 당신의 지상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2월 22일은 고대 로마에서 가족 가운데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것이 그리스도 공동체에 전해져서 성 베드로 사도와 성 바오로 사도를 기억하는 축일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도의 축일이 6월 29일로 지정되면서, 오늘 2월 22일은 베드로 사도를 중심으로, 교회의 일치를 상징하는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시며, ‘베드로’라는 이 반석 위에 죽음의 세력도 누르지 못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베드로 사도는 사실 인간적인 약점으로 보나, 믿음으로 보나, 그 급한 성격으로 보나,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어 보이는데, 굳건한 반석이라 하시며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더구나 베드로 사도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면서 땅에서 맺고 푸는 권한까지 주셨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약하기만 한 인간에게 교회를 지탱하는 바위가 되고, 땅에서 맺고 푸는 엄청난 권한까지 주실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궁극적으로 교회를 이끄시는 분은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내려오시자, 지상에 교회가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우리 교회의 반석일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성령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반석이 되어 주시고, 그 권위와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이렇게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이 기초가 되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잘난 사람, 똑똑한 사람, 힘 있는 사람이 아니라, 힘없고 가난한 어부 한 사람을 통해 이렇게 엄청난 역사를 하시는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사람들의 능력으로 움직이는 조직체로 바라보면, 여러 가지 문제에서 불합리하고 실망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약점과 모순투성이의 사람들 안에 일하고 계시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바라볼 수 있다면, 교회는 다시 그 권위와 아름다움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믿고 따르는 가톨릭교회입니다.

이제 복음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질문에 주저함 없이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고백은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대수롭지 않게 보이지만, 유다인들은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번역에서는 ‘스승님’이란 표현을 사용하지만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단순하게 2인칭, ‘당신’이라는 표현으로 나옵니다.

이 고백에서 중요한 것은 첫째, ‘살아 계신 하느님’이란 표현과, 둘째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는 표현입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이란 고백은 멀리 생각과 상상으로만 만나는 하느님, 철학적 하느님이 아니라, 실제 우리의 삶 안에서 함께 희로애락을 겪는, 우리와 관계성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에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고백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을 우리의 생활과는 거리가 먼 하늘에 계시는 분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계신 ‘하늘’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곳에 지구 밖의 우주 공간입니까? 아니면 대기권 안에 있는 공간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하느님의 영역을 뜻하는 말로, 우리와 가까이 혹은 함께 계시는 그분의 현존을 의미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늘 살아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가 고백하는 신앙 고백을 우리도 일상생활에서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는 고백은 하느님을 아빠라 부르는, 아드님인 예수님,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인 예수님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성과 동시에 그분의 구원 업적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이시며,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베드로 사도의 신앙 고백이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느끼는 체험, 아빠라 부르며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는 하느님 자녀 체험,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죄와 유혹으로부터 구원받았음을 느끼는 해방 체험, 이런 체험들이 필요합니다.

청취자 여러분, 오늘 하루 예수님을 자주 생각하고, 그분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생활 속에서 발견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데에 그 의미가 있기 때문

이수락 신부
  |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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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의 의미

오늘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은 성 베드로 사도 위에 세워진 교회의 일치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4세기부터 로마에서 지켜왔다. 성 대 레오 교황의 강론(Sermo 4 de Natali ipsius, 2-3: PL 54, 149-151)에 보면, '그리스도의 교회는 베드로의 굳건한 신앙 위에 세워져 있다'고 한다는 강론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온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 베드로가 모든 민족을 구원으로 부르고 모든 사도들과 모든 교부들의 으뜸이 되도록 간택되었다. 하느님의 백성에게는 많은 사제들과 사목자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 모두를 먼저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지만 베드로도 자신의 고유한 권한으로 다스린다.

형제들이여, 이러한 직분의 부여로써 하느님께서는 당신 권능의 위대하고도 놀라운 몫을 베드로에게 부여하셨다. 또 하느님께서는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이 베드로와 같은 권한을 갖기를 원하시지만, 그것은 항상 베드로를 통해서만 주신다.

주님께서 언젠가 모든 사도들에게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하더냐고 물으셨을 때 그들은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호한 대답을 전해 주었으므로 그들은 모두 같은 대답을 했다. 그러자 주님께서 너희들 자신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맨 먼저 주님을 고백한 사람은 사도들 가운데서 첫 자리를 차지했던 그분이었다.

베드로가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즉,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시고, 또 세상의 견해가 너를 오류로 이끌지 못하며, 천상적 감도로 말미암아 교훈을 받고 육정이나 혈통이 아닌 외아들의 아버지이신 그분께서 가르쳐 주셨기에 너는 복되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이어서 "나는 너에게 말한다."고 말씀하셨다. 즉, 내 아버지께서 너에게 나의 신성을 계시하신 것처럼 나도 너에게 너의 높은 위치를 알려 주겠다고 하십니다. "너는 베드로, 반석이다." 말하자면, "내가 부서질 수 없는 반석이고 두 민족을 하나로 만드는 모퉁이 돌이며 누구도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없는 반석이라면, 너도 내 힘으로 견고해진 반석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권한에 참여함으로써 너도 그 권한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즉, 이 견고한 기초 위에 나는 영원한 성전을 짓겠으며 하늘까지 오를 내 교회가 이 신앙의 견고함 위에 세워지리라는 말씀이다. "죽음의 힘도 이 신앙을 누르지 못하고 죽음의 사슬도 이 신앙을 묶어 버릴 수 없다. 이 말은 생명의 말이다. 이 신앙은 그것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하늘로 올려 보내는 것처럼 그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지옥으로 던져 버린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또 지극히 복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주님은 이 권리를 행사할 권한을 다른 사도들에게도 물려주셨으며 또 교회의 모든 주교들에게도 물려주셨다. 그러나 모든 이들에게 나누어 줄 권한을 한 사람에게 위임하시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이렇게 베드로에게 이 권한을 위임하시는 것은 베드로를 교회의 모든 지도자들의 으뜸으로 내세우시기 때문이다.

이상의 내용은 성 대 레오 교황의 강론(Sermo 4 de Natali ipsius, 2-3: PL 54, 149-151)이다. 오늘은 이 강론 내용 중에서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는 성귀 중심으로 함께 묵상하고자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산다. 그 관계, 고리를 연(緣)이라고 한다. 가족과 친척들의 혈연관계에서부터, 같은 고장 출신이라는 지연관계, 같은 학교를 나왔다는 학연관계, 아파트 반모임이나 이런저런 계모임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수많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모든 모임이 그렇듯이 거기에는 모이게 하는 어떤 힘, 어떤 매력을 띠고 있는 구심점이 있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가장 강한 유대 관계는 단연 혈연관계일 것이다.

혈연관계에서 가장 큰 구심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집안(혈연집단)의 어른일 것이다. 가족의 식구들은 명절이 되면 모인다. 또 특별한 때에 모인다. 그 특별한 때란 다름아니라, 집안의 어른을 기억하는 특별한 날이다. 살아계시다면 생일이라든지, 환갑이니 칠순이니 하는 그런 날들이 특별한 날이다. 돌아가셨다면 기일 같은 날이 특별한 날이다. 그 날에 가족들은 모인다. 어른을 축원해 드리고 기억하려고 모인다.

그러니 집안의 구심점은 아무래도 어른일 것이다. 형제들이 저마다 따로 흩어져 살더라도 어른이 계실 때에 잘 모이지만, 어른이 계시지 않으면 덜 모이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이 집안의 어른이 식구들을 모이게 하는 구심점이라는 것을 잘 드러내준다.

교회도 한 식구이다. 신앙이라는 이른바 '신연(神緣) 관계'로 맺어진 한 집안 식구들이다.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 부모나 형제나 자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 신연관계로 맺어진 신앙은 혈연이나 학연, 지연이나 그 어떤 것보다 강한 관계이다. 하느님과 맺은 관계이니 어찌 이보다 강한 인연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생활하는 한 집안 식구들이다. 그래서 서로를 형제 자매들이라 하지 않는가. 교회의 궁극적인 어른은 주님이시지만, 우리가 접하고 느낄 수 있는 교회의 어른도 계신다. 곧 최고 목자이신 교황님이시다. 유식한 말로 교황님은 '그리스도교 백성이 같은 신앙과 같은 통교(친교)를 이루는 일치의 가시적인 원리이며 기초'이시다. 그래서 전 교회가 교황님을 존경하고 사랑을 드린다. 또 교구에는 교구장 주교님이 어른이시고, 본당에서는 본당신부님이 어른으로 계신다. 이분들을 중심으로 우리 신앙의 가족들은 모이는 것이다. 그분들이 구심점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초세기 교회 때부터 이런 신앙의 가족들은 교회의 어른을 공경해 왔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2월 22일)이다. 이날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셔서 온 세상의 교회에 봉사할 권한을 주시고 지상의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한다.

그렇다면 이 축일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이 날짜는 본래 로마에서 가족들 가운데 죽은 이를 기억하는 날이었다. 이 관습에 따라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이 베드로 사도의 무덤이 있는 바티칸 언덕(지금의 베드로 대성전)에서 공경의 예를 드렸는데, 이것이 베드로 사도좌 축일의 기원이 되었다.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를 함께 기념하는 대축일(6월 29일)이 있지만, 갈릴래아의 어부를 교회의 최고 목자로 공경하는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로만 지내게 된 것이다. 그것은 베드로 사도가 우리 교회에서 어른이시기 때문이다.

이날 전례에서, 베드로는 '바위'라는 뜻이다(영성체송). 교회의 반석이며 기초이고 구심점이 되는, 보이는 어른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수난하시고 죽으셨다는 고난의 증인이며, 어른(원로)으로서 형제들이 굳은 믿음을 갖도록 '양들의 모범'이 되셨다(제1독서). 그래서 우리들도 베드로 사도처럼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다는 신앙을 선포해야 한다(복음).

그렇다. 어른이시지만 인간이시기에 약점도 있고 불완전함도 있다. 하지만 주님께 대한 굳은 신앙이 그분을 우리 교회의 어른이 되게 하였고, 우리 믿는 이들의 모범이 되신 것이다. 우리도 든든한 반석, 믿는 이들을 모이고 하나로 뭉치게 만드는 구심점의 힘, 곧 신앙을 다시 고백해 보자. 우리의 교회를 굳건하게 지켜주고 더욱 하나되게 만들어주는 것은 '신앙'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주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더냐"는 질문을 하신다. 그러면 개신교에게서, 여호와 증인에게서, 몰몬교에게서, 통일교에게서...등등 온갖 소리를 들은 것을 나열하여 보고한다. 전부 내 말은 하나도 없고 남에게 줏어 들은 말이다. 그런 모습을 한심하다는듯이 지켜보시던 주님께서 다시 우리에게 질문을 하신다. '남들의 말 말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우리는 그동안 교리나 강론, 서적, 남의 이야기 등을 통해 예수님에 관해 듣고 배워왔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그대로 나의 고백이 될 수는 없다.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동안 제대로 주님을 체험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 보니, 막상 예수님이 누구냐?는 질문에 대답이 막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저 추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얼굴은 벌겋게 달이오르고, 애~또 애~또~~만 연속하면서 대답을 못하고 마는 것이다.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신앙생활이 벌써 몇 해째인데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물어 본다. 물론 그분에 대한 물음과 대답은 한 번으로 끝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변해서가 아니라 그분께 대한 내 이해와 체험이 계속 성장 또는 퇴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심으로 그분에 대해서 묻고 찾는다면 시몬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친히 당신을 열어 보여주실 것이다.

▥ 부산교구 강기정 신부
  | 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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