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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순교자 대축일
조회수 | 1,528
작성일 | 12.09.28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그리스도 신앙인으로 살려는 사람은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기 목숨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을 잃는다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과 같이 소중한 일은, 비록 자기 목숨에 지장이 있어도, 과감히 추구하여 우리의 삶이 의미를 지니게 해야 한다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대세에 따라 흘러서 무사히 또 편안하게 생을 마감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돈과 명예를 좇아 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시면서 그분의 삶을 사는 데에 목숨을 잃기까지 혼신의 힘을 다하셨습니다.

오늘은 한국의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북경에서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귀국한 것이 1784년이고, 그 이듬해인 1785년부터 시작된 박해는 조선 조정이 미국과 수호 조약을 맺기까지 약 백 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 동안에 순교한 분들의 수가 만 명이 훨씬 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그분들은 온갖 잔인한 형벌을 다 받았고 비참하게 죽어 가셨습니다. 그 가족들도 하루아침에 비참한 신세가 되어 흩어졌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한국의 그리스도 신앙은 외국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한국인 유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자발적으로 그리스도 신앙을 영입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뿌리도 채 내리기 전에 박해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분들이 신앙을 위해 목숨을 버렸습니다.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그리스도 신앙을 연구하고 그것을 어렵게 국내에 도입 보급한 사실과, 초기부터 시작된 혹독한 박해에서 그렇게 많은 분들이 신앙을 위해 목숨을 버렸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놀랍게 보입니다.

천주교 관계 서적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이승훈이 세례를 받기 약 150년 전의 일입니다. 마태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비롯한 한문으로 된 몇 권의 천주교 서적이 중국으로부터 흘러들어 왔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그것을 서학(西學)이라 불렀습니다. 그 시대 이 문서들을 영입하여 연구한 사람들은 실학파라 불리는 유교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교 국가를 표방하는 조선이 성리학(性理學)의 공리공론(空理空論)에 빠져 있을 무렵, 합리적이고 현실성 있는 학문과 사회 제도를 찾고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이라는 엄청난 민족적 시련을 겪은 직후의 일이었습니다. 이 무렵 실학파가 연구한 천주교는 신앙이기보다는 하나의 세계관이고 사회관이었습니다.

그 무렵의 조선 시대상을 어떤 저자(이이화, 「허균」 한길사 1997, 45-47)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무고로 죄 없는 사람들을 고발하여 감옥에 가게 하는 일이 많아서 백성은 불안하고 서로 믿지 못하는 풍조가 휩쓸었다. 벼슬 팔아먹기와 뇌물과 횡령이 판쳤다. 과거(科擧) 시험 문제가 사전에 유출되는 등 부정이 행해지고 벼슬아치들의 부정부패는 당연한 것으로 되었다. 무리한 토목공사들을 벌려 놓고 관리들은 공사 자재를 횡령하고, 민생고에 허덕이는 백성들로부터 재물을 빼앗아서 매우 사치스럽게 살았다. 결국 임금으로부터 지방 수령에 이르기까지 자기 신분을 보호하기 바빴고, 그것을 위해서는 금력이 필요했다. 임금은 신하들로부터, 신하들은 백성들로부터 재물을 빼앗는 길밖에 없었다.” 절망적인 그 시대의 모습입니다.

이런 여건에서 서학을 공부한 실학파 학자들에게나 후에 신앙을 영접한 초기 신앙인들에게 그리스도 신앙은 대단히 신선하게 보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습니다. 군주(君主)가 절대적이 아니라 천주(天主)님이 계시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질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 법이란 왕이 자의로 만들어서 백성에게 강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하느님이 질서 지어준 자연과 마음의 법, 곧 양심 법을 가르쳤습니다. 노예와 같이 법을 지키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연 이치를 따라 행동하고 자기 양심의 소리를 듣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새로운 세계였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었습니다.

왕의 법은 무자비하고 그 시대 횡행하는 부정부패와 약자에 대한 착취를 방관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런 것들을 조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이 자비롭고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무자비한 법과 제도에 한 마디 항의도 못하고 짓눌려 살다가 죽어 가는 그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정의와 자비와 사랑의 질서가 있고 그것은 우리의 죽음을 넘어서도 지속된다는 말은 현재의 모든 부조리를 한 순간에 걷어내는 기적과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조상제사를 거부한 것은 그들을 박해하는 권력자들에게 큰 명분을 제공하였습니다. 조상제사는 그 시대 유교 가르침의 핵심이었습니다. 신앙인들이 그것을 거부한 것은 유교 국가 체제의 근본 질서를 거부한 것입니다. 왕과 권력 구조의 절대성을 거부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축첩(蓄妾)을 거부하여 유교가 가르친, 남녀 차별의 철칙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사대부(士大夫) 중심의 계급의식도 거부하였습니다. 모두가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라는 의식은 그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습니다. 순교자들 중에는 백정 출신 황일광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천당이 둘이다. 하나는 죽어서 가는 천당이고 또 하나는 양반과 쌍것들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똑같이 존중되는 이 세상의 천당이다.” 백정 출신으로 멸시 당하던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계급의 장벽을 넘어 모두가 같은 형제자매로 통하는 세상은 그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이런 새로운 세상을 위해 그들의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을 실망시키고 불행하게 만드는 왕과 벼슬아치들을 거부하고, 하느님으로 열리는 새로운 질서를 열망하였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을 거슬려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뒤를 따른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들은 바울로의 말씀과 같이 이 세상의 그 무엇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로마 8,39)는 사실을 믿고 형벌당하고 죽어 가신 분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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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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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살린 사람들 - ‘미친 사람들’

오늘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과 이웃 때문에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 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103위 한국 천주교의 순교 성인들을 기념하는 대축제의 날이다. 동시에 우리들도 성인들의 순교정신을 본받아 신앙을 증거 할 각오를 새롭게 다지는 날이다.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어떠한 경로를 통하여 들어왔는지 모르는 신자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세계의 어느 교회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평신도 자체에 의한 선교방식이었다. 천주교(서학)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이미 조선시대 후기 17세기 초엽에 창설된 실학파에 의해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다. 실학파는 전통유학(儒學)의 전근대적인 사고와 가치관에서 탈피, 객관적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眞理)를 탐구하려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태도에서 출발하였다. 18세기 말엽에 이르러 실학파의 학자들은 천주교를 학문으로서가 아니라 종교적 신앙으로 받아들여 소위 ‘비신자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신앙을 실천하였다. 그러나 신자가 되기 위해서 세례를 받아야 함을 알고는 북경으로 가는 동지사 편에 이승훈을 딸려 보낸다. 1984년 이승훈(베드로)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후 관련서적들과 성물(聖物)들을 가지고 귀국함으로써 천주교 신앙공동체는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초기 공동체가 임의로 만들어 실시한 ‘가성직(假聖職)제도’ 또한 교회사에 유례없는 조직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1791년부터 조선의 천주교는 조정으로부터 박해를 겪어야 했다. 초기 천주교에 대한 박해의 이유는 서학의 평등사상으로 말미암은 양반위주의 사회질서 파괴와 유학정신의 근간인 조상제사의 거부였으나, 나중에는 정치적 다툼과 이권이 개입되었다. 모진 박해 중에도 신자들은 중국의 성직자와 1836년부터 프랑스의 선교사들을 영입하여 교세를 확장시켰고 결국 김대건 안드레아와 최양업 토마스 두 명의 방인 사제를 배출하였다. 조정의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100년 넘게 계속되었고, 만 명이 넘는 신자들이 순교했다. 대대적인 박해로는 1791년(정조15) 신해박해, 1801년(순조1) 신유박해, 1839년(헌종5) 기해박해, 1846년(헌종12) 병오박해, 1866년(대원군) 병인박해를 손꼽을 수 있다. 이들 박해 중에서 기해, 병오, 병인박해 때 순교한 103명이 한국 천주교 창설 200주년을 맞아 내한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84년 5월 6일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그들 가운데 최초의 방인 사목자였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와 훌륭한 평신도 정하상 바오로가 대표적 인물이다.

오늘은 비록 한국천주교회의 한국인 성인 93위(사제 1명, 평신도 92명)와 프랑스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성인 10위(주교 3명, 사제 7명) 등 103위 성인의 천상탄일을 기념하고 그들의 순교정신을 가슴에 새기는 날이지만, 우리나라에 순교자가 어디 이들 뿐이랴. 1784년 이 땅에 믿음의 씨앗이 뿌려진 이래 100여년의 박해동안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신앙의 씨앗이 되었고,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한 신자들과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으로 흩어진 신자들의 열정적인 신앙생활과 복음전파를 통해 오늘 한국천주교회는 세계 속의 교회로 우뚝 서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한 사람으로서 가슴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또한 무명(無名)의 순교자들께도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눈을 지그시 감고 우리 선조 순교자들의 박해와 순교 상황을 떠올려 보면 그들은 참으로 ‘미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복음에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일찍이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이 정약용(丁若鏞)의 형으로서 이벽(李檗)과 매형인 이승훈(李承薰) 등과 교유하여 서양의 학문과 사상을 접하고, 가톨릭에 입교, 벼슬을 버리고 전교에 힘썼던 이유도 그가 서학(西學)에 ‘미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로 흑산도로 유배되어 이곳에서 한국 최초의 수산학 관련서적인 《자산어보(玆山魚譜)》를 편찬한 것도 그가 물고기에 ‘미친’ 탓이 아니었겠는가? “재물을 잃으면 적게 잃는 것이고,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며, 목숨을 잃으면 죄다 잃는 것이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목숨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이다. 그렇다고 목숨을 잃지 않을 방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살다 보면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목숨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복음에 ‘미쳐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힘들다면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추종하는데 역행하는 이기적인 ‘자아’와 ‘욕심’을 조금씩 버리는 것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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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버리고 산다는 것

“너에 관한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그럴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너는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여 엄청난 재산을 모으고 장수를 누릴 것인가? 너는 이 미사가 끝난 뒤에 오랫동안 은총 상태에 머무를 것인가? 너는 구원받을 것인가? 그러나 한 가지 질문에서만 다른 대답이 있다. 너는 죽을 것인가? 그렇다. 틀림없이 그렇다.”

인간만이 자기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지금의 내 목숨을 내가 살리고 죽이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누구나 자기 목숨을 살리기 위해 모든 것에 있어 자기중심을 주장하고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신앙인은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사! 람들입니다. 따라서 모범을 보이신 예수님을 따라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지향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려면 ‘버리라’고 하십니다. 사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버리고 있습니다. 쓰레기도 버리고 양심도, 신의도, 가족도, 신앙도 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을 따르려고 버린 것이 아니라 보다 더 내 중심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버리는 것들 입니다. 정작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구는 분명하십니다. ‘자신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삶의 태도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곧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가운데 생기는 어려움과 희생, 아픔을 감! 수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버리는 것과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은 동일한 행위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삶만이 자신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주인이 바로 나라고 고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의 태도를 버리는 것이 바로 자신의 목숨을 살리는 길이요, 구원의 길이다.’이 신앙의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친 분들이 바로 ‘순교자’들이십니다.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고, 우리 삶이 될 수 있기를 함께 기도 드립시다.

부산교구 임형락 신부
  |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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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태 16,24)

제자들이라는 한정된 그룹과 제한된 시기에만 말씀하시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반드시, 가장, 꼭 필요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을 갖추지 않고서 예수님을 따라서는 곤란하다는 말씀이시다.

오늘 기념하는 김대건 신부님과 정하상 바오로성인과 동료 순교자들의 삶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 삶이었다. 로마가톨릭 신앙은 로마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졌다고 한다. 한국 천주교 신앙 역시 한국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졌다. 순교자들의 삶은 한국천주교 신앙의 참 모습이며 신앙의 뿌리이다. 따라서 이 땅의 모든 신자들이 순교 신앙인들의 삶을 따르는 것은 의무이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참 많다. 이곳저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예수님을 찬미하는 노래가 울려 퍼진다. 그러나 믿는다는 자들이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하지는 않는다. 하느님을 믿고 따른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뜻과 욕망을 좇아 살아간다.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재물과 출세와 명예를 더욱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예수님을 섬기며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과 편리만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그릇되고 잘못된 신앙 생활을 깨닫지 못한다. 깨닫지 못하니 옳은 길로 가려고 하지도 않고 타성에 젖어 그렇게 흘러간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의 삶은 자기를 버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이 어찌 예수님의 길을 갈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서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 종교들 중에 어떤 종교가 이렇게 수많은 순교자를 지니고 있는가?

오늘은 한국천주교회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 전체가 기념해야 할 날이다. 요즈음 우리나라 곳곳에는 특혜! 말들이 많다.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에도 십자가를 지지 않는 특혜를 기대하지는 않는지. 신앙의 참 모습과 뿌리를 잊지 말고 순교성인들의 고귀한 삶을 따라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는 참된 신앙 생활을 하자!

부산교구 김성남 야고보 신부
  |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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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와 신앙

오늘은 한국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을 이동 경축합니다. 한국 교회의 역사는 세계의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선교사가 직접 신앙을 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 먼저 학문으로 받아들이고 신앙 생활을 하면서, 선교사를 모셔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더 절실했고 더 철저했고, 목숨을 바쳐서까지 지키려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순교란 목숨을 바쳐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 23) 말씀하십니다.

불교에서도 자신을 버려야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공(空) 이니 무아(無我)니 하면서 자신을 버리도록 요청을 합니다. 이렇게 자신을 버림으로써 공의 상태, 즉 해탈에 이른다고 합니다. 공 자체가 목적지인 셈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에서도 특별히 십자가 성 요한은 무(無)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십자가 성 요한이 이야기하는 무는 목적지가 아닙니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에 불과합니다. 하느님께 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인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지 않는 한 우리는 하느님께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순교 성인들은 이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순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순교를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 30) 우리가 무엇이든지 억지로 하면 그것은 무거운 짐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기꺼이 사랑으로 하느님을 위해서 한다면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일은 가벼운 짐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생전에 우리에게 보여주신 진리입니다.

요즘 혹자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현대에는 피의 순교는 없고 삶에서 순교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언뜻 들으면 맞는 말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전부를 요구합니다. 피의 순교와 같은 전적 투신을 요구합니다.

지혜서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지혜 3, 6) 아멘.

부산교구 김현일 예로니모 신부
  |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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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선교사의 선교 활동 없이 자생적으로 시작한 교회, 가혹한 박해를 통해 성장한 교회, 한국천주교회의 역사는 이분들이 있기에 자랑스럽습니다. 오늘은 이분들을 현양하며 우리가 가진 신앙의 태도를 새롭게 해야 하는 축일입니다.

순교자란 주님을 위해 복음의 가치를 증거하고 피를 흘려 목숨을 바친 신앙인들을 뜻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보면 순교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초기 교회의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박해로 죽었고, 그 박해를 통해 신앙은 더욱 정화되고 굳건해 졌습니다. 결국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교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는 한국천주교회의 순교 역사에서도 증명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옛날과 같은 대규모 박해에 따른 순교 사건은 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서는 순교 정신을 어떻게 해석하고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교부 오리게네스는 “매일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일상적인 순교라고 보았습니다. 피를 흘려 생명을 바치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것이며, 주님을 위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을 기쁘게 받아들이면서 매일 온전한 정신과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복음의 가치를 실천하고 생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기념하는 순교자들을 “피의 순교자”로 부릅니다. 그렇지만 피를 흘려 생명을 바치지는 못했지만 죽음의 순간까지 사목하다가 병사하신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과 협조자들 그리고 근대사 안에서 신앙을 위해 희생된 수많은 신부, 수녀, 교우들을 “삶의 순교자”로 평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순교는 갑자기 이루어지기보다 준비된 이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순교자들에게는 매일매일의 신앙생활에 충실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박해 속에서도 매일 기도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선행을 실천하였습니다. 사제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가 고해성사를 보고 미사에 참례하였습니다. 박해를 피해 모든 것을 버리고 방랑하던 힘겨운 여정 속에서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자신을 내어놓을 용기를 주십사하고 날마다 기도하였습니다.

우리가 순교자적 삶을 산다는 것은 한순간의 다짐이나 생각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가 살아간 삶을 따르는 삶을 살 때 순교자적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부산교구 윤경철 신부
  |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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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의 삶

우리는 흔히 우리의 관습이나 선입관 때문에 어떤 일이나 사건을 한쪽 방향으로만 고정시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자화상 앞에서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은 우리를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하고 판단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믿고 있는 가톨릭 신앙은 역설(Paradox)의 삶으로써 보이는 현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역설의 삶. 이것은 죽음이‘죽음’이 아니라 오히려‘새로운 삶’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가 어리석음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세인들의 통념이라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구원이요 생명임을 믿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역설의 삶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삶 역시 역설의 삶이었습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 24)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자기 목숨을 내어 놓은 분들이 바로 이 땅의 순교자들이었습니다.

이 땅의 순교자들이 천주교에 입문하고 하느님을 믿은 것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고 하는 일이었습니다. 천주교인이 된다는 것은 순교자가 된다는 각오가 있어야만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이 땅에 천주교가 들어올 당시 정국은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경제적 수탈이 심해지고, 엄격한 신분제도에 기초한 사회질서가 흐트러지고, 사분오열 갈린 정치판도 당쟁에만 몰두하여 민심이 땅에 떨어진 시대였습니다. 이런 암울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도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닫고 그 말씀에 삶의 의미를 두게 됩니다. 묻혀있는 보물을 발견한 순교자들은 목숨까지 내어놓으면서“진정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마태 5, 3 참조)고 믿었고“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하늘나라를 차지할 것”(마태 5, 10 참조)임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대로 이 땅에는 우리를 지켜보시는 103위의 성인이 계시고 124분의 복자가 계십니다. 또한 수많은 무명의 순교자들이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기를 기도해 주고 계십니다. 십자가라는 역설의 삶을 통해 우리 모두가 진정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기도해 주시는 분들이 바로 이 땅의 순교자들임을 기억하며 오늘도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순교자의 후손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부산교구 최요섭 요셉 신부>
  |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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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순교자들의 꿈

16세기 종교개혁과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교회는 라틴 아메리카와 아시아의 선교에 눈을 돌렸습니다. 특별히 아시아에서는 신앙과 열심으로 피의 증언이 끊이지 않았는데, 우리나라의 103위 순교성인과 124위 순교복자가 그러하였고, 일본의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이 그러하였으며, 베트남의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이 그러합니다. 그중 우리나라 순교성인들의 독특함은 사회 제도를 넘어서 하느님의 가족이 되는 공동체를 형성한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으며(사회화), 무리를 이룬 집단은 힘과 권력 혹은 기능에 따라 구분되며(계층화), 이렇게 구분됨은 제도와 법에 따라 고유한 신분을 이루는 것(제도화)이 인간 사회의 바탕입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해졌던 18세기의 조선시대는 유교적 질서를 바탕으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제가 뚜렷이 구분되고 확립된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받아들인 선조 신앙인들은 자신의 사회 신분을 넘어 자신과는 다른 신분의 사람들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한 하느님 아버지 아래 모든 이가 한 형제자매란 것을, 제도와 질서를 넘어서는 복음의 빛이 형제성이 실현되는 하느님의 한 가족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이 단순한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해 엄청난 기도와 희생이 뒤따랐을 것입니다. 신분을 넘어서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천지개벽이고, 복음이고, 사회화를 넘어서는 교회화된 모습입니다. 그래서‘죽어도 좋다’라는 감동이 목숨을 내어놓는 증언으로 연결되었습니다. 하느님의 가족으로서 형제애를 나누는 공동체를 실현하는 일, 죽어도 좋을 순교자들의 꿈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제도는 제도를 위해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위해 필요합니다.

“또한 순교자들은 그들의 모범으로, 신앙생활에서 애덕의 중요성에 관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 증언의 순수성이었고, 세례 받은 모든 이가 동등한 존엄성을 지녔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대의 엄격한 사회 구조에 맞서는 형제적 삶을 이루도록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이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중 계명을 분리하는 데 대한 그들의 거부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형제들의 필요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2014년 124위 시복미사 강론 중.

▮ 부산교구 윤정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 2016년 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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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당한다면 너무 억울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순교를 억울한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신앙을 증거하는 기회로 기쁘게 받아들이신 순교자들의 모범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고 여겨집니다.

실제, 우리 신앙 선조들이 즐겨 부르던 천주가사를 보면 견진성사를 받는 것 자체를 순교의 영예를 준비하는 것으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천주가사에는 종종 삼구, 곧 세상, 육신, 마귀의 유혹을 이겨내어서 순교의 화관을 써야 한다고 권고하는 노래도 담겨 있습니다. 이를 보면 신앙 선조들은 순교를 신앙을 증거하는 과정, 그래서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 거쳐야 할 하나의 과정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김대건 신부님께서 마지막으로 교우들을 위해 쓰셨던 편지에도 잘 담겨 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순교하시기 전 감옥에서 신자들을 염려하는 마음에 한글로 된 편지를 남기셨는데, 거기서 신자들에게 삼구를 잘 이겨내고 화관을 써서 마지막 날 주님 앞에서 만나자고 권고하십니다.

자신을 때리고 죽이는 박해자를 적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이 순교하지 못하도록 이끄는 삼구를 적으로 여기는 마음. 예수님께서 마지막 십자가 상 죽음 앞에서 당신을 살해하던 이들을 용서하며 가지셨던 그 마음입니다. 어떻게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나의 믿음을 되돌아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성경은 한결같이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 의탁하는 의인들은 언제나 세상의 반대를 받으며 십자가를 지고 순교의 삶으로 나아간다고 말입니다. 그런 삶이 세상 관점에서 볼 때 어리석어 보이지만, 억울하게 죽음으로써 파멸을 당하는 듯 보이지만 진정 그들이야말로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특히, 오늘 1독서에서 봉독한 지혜서는 김대건 신부님이나 한국의 초기 신앙인들이 자주 부르던 천주가사와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시련으로 우리들의 신앙을 시험하시고, 우리들을 단련하심으로써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드러나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보면 순교의 삶은 모든 신앙인들이 피해 갈 수 없는 삶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 방식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자신에게 주어지는 십자가, 순교의 삶을 피할 수는 없어 보입니다.

결국 신앙을 증거하는 순교의 삶을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나 이와 같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진정으로 살고자 한다면 십자가의 길, 순교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순교의 삶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 앞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 2독서의 사도 바오로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오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을 지내면서 다시 한 번 하느님께 우리의 신앙을 굳건히 지켜나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십사고 청해 봅니다.

▮ 부산교구 염철호 신부 : 2016년 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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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주님을 만나러 갑시다

“천주를 모른다고 한마디만 하면 살려주겠다.”날이 선 칼날이 내 목에 닿아있고 주변에는 고통의 비명과 떨어져 나간 머리가 뒹굴고 있다.‘천주를 믿지 않았더라면’‘천주님 당신께로 기쁘게 나아가리다.’이렇게 내 신앙을 증거하고 천주께 나아가야 하는데. 마음보다 앞서 혼란스럽고 두렵고, 주체할 수 없는 공포로 몸서리쳐진다.‘어떡해야 할까? 목숨이라도 살고 봐야 하나.’‘아니다! 나 비록 천주께 죄인이나 이 세상에서 천주의 사랑으로 기쁘게 살았으니 이제 죽음으로 그 사랑을 증거하리라. 나 천주를 선택했을 때 이미 세상을 버리고 하늘나라를 살리라 결심하지 않았는가! 앞서 천주께로 나아간 형제자매들의 손을 붙잡고 오늘 천국에 들리라. 주님, 저들을 제가 용서하오니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그리고 조선천주교회를 보살펴 주소서.’“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 38∼39) 영화의 한 장면 같지만, 내가 지금 그 자리에 있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간혹 사람들은 순교자들을 향해 어려운 조선 사회의 모습을 빗대어 이렇게 사나 죽으나 매한가지의 심정으로 그저 천국을 바라보며 죽음을 선택했으리라 판단하기도 한다. 그러나 목숨을 내어놓는다는 것, 그것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며, 단순한 순간의 선택으로 될 일은 아닐 것이다. 주님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과 굳건한 믿음이 희망으로 삶 속에 함께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순교자들은 위대하다.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하여 살고 목숨까지 기꺼이 내어놓으셨던 순교자들을 생각하면 그들의 삶 전체가 더욱 존경스러워진다.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깊은 골짜기로, 그리고 삶의 자리에서 은밀하게 천주를, 그 신앙을 자손들에게까지 전하려 애썼던 우리 신앙 선조들 삶의 순교의 모습 역시 존경할 수밖에 없다.

오늘의 신앙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되돌아보면 부끄러울 뿐이다. 우리는 순교자들의 피로 세워진 교회라고 말은 많이 하지만 진정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살아가는 후손들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온전히 신앙이 내 삶에 녹아들어 있는지, 주님과 만나려 얼마나 애쓰며 살고 있는지, 얼마나 용기있게 용서하고 사랑하려 하는지를 말이다. 삶의 순교는 자신을 버리고 비워 내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또 그 자리에 주님의 사랑을 채워나가길 바란다. 그리고 당당히 신앙을 살아가며 외치자. 나는 하느님의 사람이며 하느님의 나라는 영원하리라는 것을.

▥ 부산교구 백성환 안드레아 신부 - 2017년 9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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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십자가 기꺼이 지고 가리라

오늘은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 성인들을 기억하며 우리도 순교자의 정신을 본받아 각자의 자리에서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놓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날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사람만이 진정 목숨을 구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순교자의 정신을 본받으라고 권고하십니다.

하지만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순교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내세가 좋다 한들 현세를 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예수님 때문에, 정의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내 목숨까지 내어놓아야 한다는 말은 왠지 불편한 마음을 가져다줍니다. 거기다 다른 사람들 대신 내가 목숨을 내어놓아야 한다는 것은 억울할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제1독서에서 지혜서는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지혜서는 또 하느님은 순교와 같은 시련으로 의인들의 신앙을 시험하시고, 단련하심으로써 의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드러나게 하신다고 강조합니다. 또한, 의인들의 순교는 번제물처럼 하느님께 바쳐지고, 나중에 하느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 그들의 신앙이 빛을 내며, 모든 이들에게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주님과 함께 영원히 통치하게 될 것이니, 그들이야말로 억울한 죽음을 맞은 이들이 아니라, 주님께 선택받은 이, 주님의 은총과 자비를 가득히 입은 거룩한 이들임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더 나아가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참된 자녀들은 하느님의 도움에 힘입어 모든 것을 이겨내며, 그 어떤 것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그들을 떼어 놓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 복음과 복음 환호송은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때 그들은 참으로 행복하다고 노래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만이 진정 세상 마지막 날 자신의 목숨을 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매번 순교자 축일 때마다 읽고 묵상하는 말씀들이지만, 나라면 과연 기꺼이 순교로 나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나는 정말 순교의 칼날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뻐할 수 있을까? 박해자를 미워하지 않고, 그들을 용서하며 모든 것을 신앙 단련으로 여길 수 있을까?

이런 우리에게 주님의 이 말씀은 조금이나마 위안이 됩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법정에 넘길 때, 무슨 말을 할까 미리 걱정하지 마라. 그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시는 대로 말하여라.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성령이시다.”(마르 13,11)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증언해야 할 것은 내 신앙이 아니라 예수님이며, 증언하는 이도 내가 아니라 성령이십니다. 사람들 앞에서 힘 있는 분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이 점을 잘 기억하고 모든 것을 아버지께 내어 맡긴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당장 코앞에 오지도 않은 박해 상황을 두고 고민에 빠질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상황 안에서 순교자들의 정신을 본받아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어 맡기고 자신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며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듯합니다.

▥ 부산교구 염철호 신부 - 2017년 9월 17일
  |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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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순교 성인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지 못한 나약함과 비겁함 때문에, 무거운 죄책감으로 오랜 시간 짓눌려 살아왔던 시간이 목숨을 잃었던 때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인간의 본능이 손가락질 받을 일은 아니겠지만, 그것 때문에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런 경우를 두고 하신 말씀인 듯합니다.

목숨을 내놓고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의 축일을 만나면 왠지 모를 자신의 나약함과 비겁함에 무거운 짓눌림을 느낍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믿음을 지켰고 옥에 갇혀도 양심은 자유로웠던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정하상 바오로, 101위의 순교자들 이름 위에 아로새겨진 피의 증언은 세상 안에서 그저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비겁함을 채찍질하는 듯합니다. 칼 라너가 말했던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본래의 신학적 문구가 아니라 신앙을 세상 앞에 당당히 드러내 놓고 증거하지 못한 채 그것이 마치 고상한 신앙인 양 비겁하게 숨기고 살아가는 말 그대로의 “익명의 그리스도인” 말입니다.

알 수 없는 두려움 때문에 신분을 감추고 이름을 감추었던 지난날의 비겁함이 자신 안에 그대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압니다. 끌레셔츠의 로만 칼라를 한쪽으로 밀어 넣고 단추 하나를 풀어버리는 순간이 늘 무더운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음을 압니다. 식당에서 그은 움츠린 십자가는 이 길을 함께 가는 동료 사제들의 아픔에도 움츠러들곤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순교 성인들의 축일을 맞는 자신의 불편함은 그들의 숭고하고 위대한 신앙심에 짓눌려서가 아니라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비겁한 신앙이 짓누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신도 저 갈릴래아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지요?” 라고 묻는 이에게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라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가 새벽을 깨우는 닭 울음 소리에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던 회개의 눈물을 함께 따라 흘리며, 딱히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미세한 두려움이 항상 공기처럼 누르기에 참아 드러내놓고 행동하고 말하지 못한 자신의 비겁함을 한국의 순교 성인들에게 고백하며 그분들처럼 순교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해 보았으면 합니다.

▦ 부산교구 김태형 신부 : 2018년 9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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