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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부활 메세지
조회수 | 421
작성일 | 16.03.26
[청주]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콜로 3,1)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여, 하느님의 은총과 평화가 신자 여러분의 가정과 지역사회에 충만하길 기원합니다.

2. 복음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여인들과 제자들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왔던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멀찍이 서서 그 모든 일을 지켜 볼 뿐이었습니다(루카 23,49 참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으며(요한 20,19 참조), 한편으로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믿었던 기대가 무너지며 실의에 빠졌습니다(루카 24,13-35 참조).

예수님의 부활은 이러한 그들의 절망과 좌절, 두려움과 실의를 기쁨과 희망으로 바꾸어 놓은 사건이었습니다. 빈 무덤에서 예수님 부활에 관한 소식을 들은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달려가 그 소식을 전하였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제자들은 닫아걸고 있던 문을 열고 나와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며 실의에 빠져있던 두 제자는 발길을 돌려 공동체로 돌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습니다.

3.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콜로 3,1). 사도 바오로의 이 고백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를 새로운 생명으로 이끌어 줍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난 하느님의 자녀들로서, 슬픔과 두려움, 죄와 어둠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기쁨과 자유, 용서와 구원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2,000여 년 전, 예수님께 믿음과 희망을 두고 살았던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기쁜 소식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힘의 원천이 되었던 것처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예수님의 부활은 절망을 딛고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됩니다.

4.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보여 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죄를 없애 주시는 당신의 사랑과 그 사랑의 힘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 보이십니다”(『자비의 얼굴』, 22항). 우리는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선포하신 자비의 특별 희년을 지내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에 수록된 ‘매정한 종의 비유’를 보면, 모든 빚을 탕감해 준 자비로운 주인은 자비를 베풀지 않은 매정한 종을 꾸짖습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3) 이 말씀은 자비의 특별 희년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신앙인들의 삶을 성찰하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자비는 참된 하느님 자녀의 식별 기준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자비를 입었으므로 우리도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향한 용서의 삶, 사랑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5. 우리가 발 딛고 사는 한반도는 북한의 핵실험과 로켓 발사, 그에 대한 대응으로 전개된 개성 공단 폐쇄와 연일 계속되는 적대적 대응, 대규모 군사 훈련 등으로 일촉즉발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사회는 물질과 경제 논리 속에서 인간의 가치를 부와 권력의 잣대로 가늠하고, 이웃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약화되어 많은 이들이 소외감과 외로움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빈곤 때문에 고향과 고국을 떠나온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있으며,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생계조차 이어가기 힘든 가난한 이들도 많습니다. 열정과 희망으로 멋진 인생을 꿈꾸어야 할 젊은이들이 갈 곳을 잃고 헤매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아야 할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에만 매달려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어둠이 가득한 이 세상을 위해 주님은 돌아가셨고 마침내 부활하여 우리에게 참 빛과 새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 우리가 어두움과 절망의 고통 속에 있더라도, 우리는 이 세상을 비추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바라보며 예수님을 닮은 제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이요 희망이신 분께서 다시 살아나셨으니, 이제 우리도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부활의 기쁨과 희망이 신자 여러분의 가정과 지역사회에 가득하기를 기원하며, 다가오는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지역 사회의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일꾼들이 선출될 수 있도록 투표에 적극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 : 2016년 3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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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부활의 은총으로
우리가 언제나 새로운,
늘 살아있는 삶을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희생과 보속으로 사순시기를 지내온 우리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풍성한 은총과 평화를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달려온 그 결과는 죽음만이 아니었습니다. 어두운 새벽에 마리아 막달레나는 어둠을 깨트리는 빛을 보게 됩니다. 빈 무덤, 흩어진 수의들이 무언가 새로운 것들을 말해 주려고 합니다. 이제까지 당연한 것으로 여겨온 것들이, 안타깝지만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빈 무덤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그리고 ‘제발’하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들이, ‘혹시나’하고 바라왔던 것들이 흩어진 수의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받은 충격은 얼마나 컸을까요? 그나마 입술을 깨물며 현실을 인정하고 안정을 찾으려 하는데,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만큼이나 빈 무덤과 흩어진 수의들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정리하기에는 힘겨운 사실이었습니다. 적어도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믿음을 갖기 전까지는…….

부활을 믿으며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어쩌면 이상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을 믿는다는 게 정상적인 일일까요? 이른 새벽에 겪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체험은 부활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겪어야 되는 혼란과 믿음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치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어 껍질을 깨고 나와 나비가 되듯이 부활의 신앙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렇게 자기를 포기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제까지 내가 믿고 살아온 사실들을 모조리 꺼내어 버릴 수 있을 때 부활은 점점 내 안에서 그 모습을 만들어 갑니다. 부활이라는 보석은 뒤죽박죽 뒤섞여 있는 어지러운 생활에서가 아니라 한적하고 조용한 내적인 공간에서 자라납니다. 곧 내 안의 욕심, 가치, 기준들을 잘라 버려야만 자리잡고 성장하게 됩니다. 물론 때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그 새벽의 혼란이 파도처럼 밀려왔듯이 우리에게도 주님의 부활은 그렇게 올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의 특별한 체험들을 통해 강한 힘으로 나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의 씨앗은 점점 자라나 나를 성장하게 합니다.

부활은 변화를 가르쳐 줍니다. 이제까지의 내 모습을 버리고 새로운 모습을 찾는다는 것은 분명 두렵고 결단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새로운 삶을 원한다면 희망을 갖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이 필요합니다. 이제는 바뀌어야 될 때임을 알고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도록 노력할 때에 부활의 기쁨은 찾아옵니다. 고집과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와 해방을 누릴 수 있다면 어두운 새벽에 바라보게 되는 빛은 새로운 하루를 열어줄 것입니다. 주님 부활의 은총으로 우리가 언제나 새로운, 늘 살아있는 삶을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청주교구 신동운 요셉 신부
  |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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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들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도 맞는 말처럼 보입니다. 만약 친구가 며칠 후에 자신이 죽을 것이며, 3일 후에 다시 살아난다고 하면 믿지 못할 것입니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이나, 그 말을 믿는 사람이나 다 같이 미친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말했냐는 것입니다. 참으로 믿을 만한 사람이고 그 사람의 삶이 거짓이 없어 보인다면 우리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서도 가능성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가 빈 무덤을 보고 제자들에게 뛰어옵니다. 제자들은 믿을 수 없어 하면서도 마리아의 말만 믿고 주님의 무덤으로 서둘러 달려옵니다. 그들은 그제야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부활을 올바로 전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믿을 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 못해서입니다. 부활의 삶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셨고 우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갈릴래아는 아마도 주님의 복음이 선포되어 가장 열매가 컸던 장소였을 것입니다. 즉 우리들의 삶의 장소를 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제 내 삶의 곳곳에서 새롭게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달려갑시다. 주님의 부활을 믿고 기다릴 이웃들을 향하여 달려갑시다. 주님은 갈릴래아에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 청주교구 김훈일 신부
  |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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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자비의 반대는 정의가 아니다. 그것은 복수다.

교황궁 상임 강론 사제인 프란치스코 카프친회 소속 라니에로 칸탈라매사는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2코린 5,18)라는 코린토서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주님 수난 성금요일 강론을 시작했다. 그의 강론에서 사도 바오로의 이 호소는 단순히 하느님과 인류 사이에 ‘역사적 화해’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 이 역사적 화해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이룩되었던 것이기 때문임을 그는 지적한다. 오히려 이 화해는 이미 세례를 받고 교회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 코린토의 신자들, 이것은 곧 현재의 우리 자신과 관련된 화해라는 점을 칸탈라매사 신부는 강조한다.

그러면 사도 바오로가 이야기하는 하느님과 인간과 화해는 무엇을 뜻하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강론 사제는 우리에게 “우리가 주님의 기도 중에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는 기도를 바칠 때 우리 안에서 그 모든 묵상들에 앞서서 떠오르는 감정들과 생각들의 덩어리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라고 권고한다.

우리의 내면에 떠오르는 하느님에 대한 모습은 “최고의 존재, 전능하신 분, 시간과 역사의 주님”이며 이러한 하느님은 “악으로 뒤흔들린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신적인 벌을 주면서 개입하는 분”이었음을 강론 사제는 지적한다. 그러나 그는 로마서 3, 21에 나온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라고 한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느님은 자비를 행하시면서 정의를 세우신다”는 점을 말한다. 칸탈라매사 신부는 “하느님의 정의는 당신 은총으로 우리를 의롭게 만드신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구원’(시편 3,9)과 같이 하느님은 그것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다.”라는 성 아오구스티노의 글을 인용하면서 “하느님의 정의는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믿는 이들, 당신 마음에 드는 이들을 의롭게 만드시는 행위”인 점을 설명한다.

더 나아가 “하느님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만족하지 않으신다. 보다 더한 것을 행하셨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 자신이 죄를 짊어지신 것이다.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하느님 아드님은 ‘우리를 위하여 죄를 짊어지셨다.’”는 점을 칸탈라매사 신부는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칸탈라매사 신부는 자비의 반대말이 정의가 아니란 점을 분명히 하면서 그 반대는 “복수”라는 점을 지적한다. “자비의 반대는 정의가 아니다. 그것은 복수다. 예수님은 정의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자비를 말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태복수법을 반대하신 것이다. 하느님은 죄를 용서하시면서 정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복수를 포기하신 것이다. 그분은 죄인의 죽음을 원하지 않으시고 그가 회개하여 살기를 원하신다(에제 18,23 참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 하느님께 당신의 복수를 해달라고 청하지 않으셨다.”

▦ 청주교구 반영억 신부 : 2016년 3월 27일
  |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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