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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참 보화를 얻기 위해 썩어 없어지는 밀알
조회수 | 243
작성일 | 17.08.11
참 보화를 얻기 위해 썩어 없어지는 밀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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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12,24) 땅에 떨어져 죽어서 열매를 맺을 그 낱알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곧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생명으로 다가가실 것임을 말해줍니다.

밀알은 생명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지 않고는 결코 어떤 변화도 열매도 가져올 수 없는 '갇힌 생명'일 뿐입니다. 창조와 생명력의 근원이신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시지요. 밀알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세상의 부조리와 불의를 고발하시고, 부활의 영광에 이르시어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삶도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12,25) 자기 자신 안에서 자신을 위해서 살려는 사람은 죽을 것입니다.

이렇듯 제자들은 죽음을 통해 생명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이 세상의 무질서하고 이기적인 선(善)과 그러한 것들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겠지요. 이처럼 우리는 어떤 희생을 치루고서라도 영원한 생명을 선택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생명을 품지 않은 세상을 사랑하면 할수록 죽음으로 치달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 생명을 주신 주님을 충실히 섬겨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라우렌시오 성인(†258)은 죽음을 통해 많은 열매를 맺은 분이었습니다. 그는 로마 교회의 재산 관리를 맡은 일곱 부제 중 수석 부제였습니다. 그는 더 많이 나누려고 심지어 성작까지 팔 정도로 지극한 사랑과 관대함으로 가난한 이들을 보살폈습니다.

로마의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였습니다. 그는 식스토 2세 교종이 사형선고를 받고 사흘 안으로 자신도 순교하리라 예언하자, 기뻐하며 교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이를 알게 된 로마 황제는 그에게 교회 보물을 가져오라고 명령합니다. v 그러자 라우렌시오는 교회의 재물을 고아와 가난한 이들, 소경과 절름발이들에게 나누어주어 버립니다. 그리고는 황제에게 가난한 이들을 데리고 가서 “이들이 교회의 보물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에 몹시 분노한 황제는 그에게 갖은 고문을 가한 뒤 석쇠 위에 눕혀 불살라 죽였습니다. 라우렌시오 부제에게 보물은 세상 재물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라우렌시오 부제는 예수님처럼 목숨 바쳐 많은 열매를 맺는 한 알의 밀알이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과 모범은 로마의 회개와 이교의 종말을 고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됩니다. 우리도 이 성인처럼 영원한 생명을 그리워하고, 목숨을 바쳐 예수님을 따르는 가난한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 특히 교회는 무엇을 보물로 여기는지 정직한 성찰이 필요할 때입니다. 세상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힘을 쓰는 부유하고 힘 있는 교회를 바라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가장 소중한 보화로 삼아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고, 늘 그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교회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의 권한을 하느님 백성을 지배하는 권력으로 행사하고, 이미 권력이 되어버린 사업을 벌이는데 집중하는 교회는 더 이상 하느님의 교회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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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8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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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오늘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내주니, 그의 의로움이 영원히 존속하리라.”

우리 교회 전례력을 조금 알고 오늘 전례력을 눈여겨 본 분은 왜 라우렌시오 순교자의 경축일을 축일로 지내지? 다시 말해서 라우렌시오 축일이 기념이 아니고 축일이지? 하고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 전례는 보통 사도들을 축일로 지내는데 라우렌시오 부제는 사도가 아닌데도 축일로 지내는 것은 그만큼 우리 교회에 있어서 라우렌시오 성인이 중요하다는 뜻이며 로마교회의 기초를 놓는데 라우렌시오 성인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우리 교회는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밀알 하나가 썩어 많은 열매를 맺는 얘기이고, 라우렌시오 성인은 하나의 개인으로서 훌륭히 산 정도가 아니라 바로 로마 교회의 부제로서 훌륭히 살았고 로마교회를 위해서 썩는 밀알이 되었음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부제들이 공동체 살림을 담당하는 거로 나왔듯이 라우렌시오는 교황 식스토 2세의 부제로서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였는데 로마 황제가 교회 재산을 탐내 교황이 순교하게 될 때 곧 뒤따라 순교하리라는 교황의 예언대로 라우렌시오도 순교하게 되었지요.

교회의 모든 보물을 황제에게 바치라는 요구에 라우렌시오는 모든 보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는 황제에게는 가난한 사람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보물을 가지고 오라고 했는데 왜 가난한 사람들을 데리고 왔냐는 추궁을 분명히 받았을 것이고 이에 라우렌시오는 나의 보물은 바로 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는 저와 저희 수도회와 우리교회가 어찌해야 하는지 큰 가르침을 주고, 동시에 큰 부끄러움과 영적인 통증을 안겨주는 모범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정말 나와 우리 공동체의 보물인가? 부자나 큰 후원자는 존중하고 환대하고 감사를 드리고 가난한 사람은 덜 존중하고 마지못해 맞이하며 이분들에게는 감사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닌가?

옛날의 저는 가난한 사람들을 제일 사랑하고 반대로 부자들에 대해서 일종의 증오감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부자들에 대한 증오감이 없으며 그렇다고 가난한 사람들 대신에 부자들이 저를 차지하지도 않으며 가난한 분들과 고통 받는 분들이 여전히 제게는 우선관심자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이 진정 제게 보물인지, 그런 보물들이 내 곁에 있음에 감사하고 그렇게 존중하는지 이런 차원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고, 그렇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저의 사랑이 교만한 사랑이고 시혜적인 사랑이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가난한 분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도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기 합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사랑하지 않고, 그래서 무척 존중하며 사랑하지 않으며, 보물로 사랑치는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많이 받아 많이 가지게 된 사랑을 여유 있는 차원에서 나누는 식입니다.

그리고 머리로는 가난한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하고 강의를 할 때, 특히 프란치스코가 나환자를 만난 것을 얘기할 때도 그렇게 얘기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프란치스코나 라우렌시오와 같이 대성인들 앞에서는 부끄러울 수밖에 없겠지요?!

▦ 작은 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2017년 8월 10일
  |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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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다음, 축제를 지내기 위해 온 헬라인들이 예수님 뵙기를 청하자, 이를 알리는 필립보와 안드레아에게 당신의 때가 왔음을, 곧 “인자가 영광스럽게 될 시간이 왔습니다.”(요한 12,23)하면서, 대답하신 말씀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대체 어떤 힘이 이 밀알을 죽음으로 밀어붙일 수 있을까?
그것은 생명력일 것입니다. 곧 생명의 힘입니다. 생명의 힘이야말로 우리를 죽게 할 수 있는 힘입니다. 그것은 살리기 위해 죽을 수 있는 힘입니다. 죽어야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살리기 위해 죽을 수 있는 힘이 생명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 밀알은 먼저 땅에 떨어져야 하고, 떨어져 죽어야 하고, 죽어 묻혀야 하고, 묻혀 사라져 자신이 없어져야 하고, 그러고서야 비로소 땅에 생명의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니, 죽음의 고통은 자기를 벗어버리고 생명을 드러내기 위해서 꼭 필요할 것입니다. 곧 그 죽음의 고통은 자기를 벗게 하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요, 새 생명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5)

여기에서, “자기 목숨”에 대해서 쓰이고 있는 “미워하다”라는 단어는 셈족의 언어관습에서 “사랑하다”라는 말과 관련하여 쓰여 “덜 사랑하다”, “지고의 가치로 여기지 않다”라는 의미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 대비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당위성을 말해줍니다. 곧 땅에서의 죽음이 생명의 끝이 아니라, 참된 생명(“영원한 생명”)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자신의 발견이며, 참된 실재를 보존하는 길이며, 미래에 대한 신뢰와 의탁, 곧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개방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을 섬기는 일이며, 당신을 섬기는 일은 당신을 따르는 일임을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요한 12,26)

이는 우리 삶의 변형과정, 곧 참 생명에로의 변형과정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아니 예수님과 함께 죽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생명에로의 변형이 옵니다. 그것은 그분을 섬기는 일이요, 그분을 따르는 일입니다.

이는 ‘섬긴다는 것’과 ‘따른다는 것’의 긴밀한 연관성을 말해줍니다. 누군가가 따른다고 말하면서 따르는 그를 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따름이 아닐 것입니다. 또 섬긴다고 말하면서 그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도 진정한 섬김이 아닐 것입니다. 또한 믿음이 없다면 섬기고 따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영광스럽게 될 시간이 왔다.”(요한 12,23)고 알리시면서, ‘당신을 섬기는 사람은 당신을 영광스럽게 할 그 죽음의 길에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당신을 따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나는 그리스도께 함께 죽고 있는가? 그러 하다면 나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이요, 그분을 따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 부활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나는 지금 누구를 섬기고 있고, 누구를 따르고 있는가? 예수님인가, 아니면 나 자신이라는 우상인가, 혹은 세상의 명예나 성공인가?

만일,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면 십자가와 함께 제 몸을 쪼개고 나누어 형제를 섬기고 있을 것이고, 아버지의 뜻을 향하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내 자신을 따르고 있다면 내 몸과 내 뜻을 향하여 있을 것이고, 세상을 따르고 있다면 세상을 섬기고 세상의 가치를 향하여 있을 것입니다. 아멘.

▦ 파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 2017년 8월 10일
  |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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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파스카의 참 행복한 삶

▪ 사랑의 비움과 나눔

문제는 내 안에 있고 답은 주님 안에 있습니다. 끊임없이 죽고 부활하는 파스카의 삶을 통해 주님과의 일치가 깊어갈 때 참 기쁨, 참 평화, 참 자유의 참 행복한 삶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과 독서가 참 행복의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의 상황이 엄중합니다. 요한복음 12장의 구성을 보면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 ‘라자로를 죽이려는 음모’, ‘예루살렘 입성’에 이어 바로 오늘 복음은 당신을 찾아온 이방인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죽음을 예고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뒤를 잇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예견한 상황에서 우리 모두의 경각심을 일깨우십니다. 당신을 믿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 길을 보여 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바로 이런 예수님의 삶을 고스란히 사셨던 성인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라우렌시오입니다. 예수님의 평생 삶이 땅에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삶이셨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의 삶은 더욱 그러합니다.

세세대대 영원히 계속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풍요로운 은총의 열매들이 아닙니까? 오늘도 주님은 우리 모두 세상 땅에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의 삶을 살라고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밀알의 성체로 오십니다.

바오로의 말씀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이 사시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자기 중심의 삶’을 사는 이요,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궁극의 사랑을 주님께 두는 ‘주님 중심의 삶’을 사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자 우리 삶의 의미입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모두이자 존재이유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주님을 섬기는 일이 바로 우리가 진정 할 일입니다. 하여 분도수도공동체뿐 아니라 믿는 이들의 공동체 역시 주님을 섬기는 학원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이들은 주님을 따릅니다. 주님을 섬겨 따르는 이들은 늘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여기 섬김의 삶을 사는 이들과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주님을 섬기며 따르는 이들은 끊임없이 죽어 사는 파스카의 삶을 사는 이들입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버리고 비움으로 충만한 생명을 사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부요하셨지만 우리를 부요케 하시고자 당신을 비워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난은 우리의 부요함이 되었습니다. 이런 부요함에 머물러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우리를 나눠 비우는 파스카의 삶을 통해 깊어지는 주님과 일치의 충만한 삶입니다.

바로 바오로 사도가 파스카의 삶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교회 신도는 물론 우리 모두에게 아낌없이 나누는 삶을 촉구합니다. 가난한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모금활동을 펼치며 코린토교회에서 하신 말씀은 그대로 우리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자발적 사랑의 나눔 활동 또한 주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 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저마다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가진 것이 없어 나눌 수 없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나름대로 하느님의 무한한 선물을 지닌 우리들입니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마음만 있어 사랑의 눈만 열리면 나눌 것은 끝이 없습니다. 다정한 말, 따뜻한 미소와 표정, 사랑어린 눈길, 손길 등 끝이 없습니다. 결국 나를 통해 주님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크고 중요한 나눔은 ‘존재의 나눔’입니다.

이런 진정성 가득한 나눔이 그대로 자기를 비워 부요케 하는 파스카의 삶, 영원한 삶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9장 마지막 구절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선물을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새삼 우리는 내 것이 아니라 주님 선물을 나누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다 하느님께 받은 사랑의 선물인데 내 것이 어디 있나요.

하느님은 기쁘게 나누는 이를,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나눔의 기쁨을 능가할 수 있는 기쁨은 없습니다. 버리고 비움의 구체적 실현은 사랑의 나눔을 통해 이루어 집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나눔의 기쁨으로 충만한 파스카의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잘되리라, 후하게 꾸어 주고, 자기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이! 그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으리니, 영원히 의인으로 기억되리라.”(시편112,5-6). 아멘.

▦ 분도회 이수철 신부 - 2017년 8월 10일
  |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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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 24)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일깨워주십니다.

죽음은 무덤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죽음 없이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죽음과 열매는 이어져있습니다. 열매의 출발점은 죽음입니다.

죽음을 묵상할 때는 언제나 머리를 숙이게 됩니다. 인간과 죽음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방향은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서로를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밀알처럼 십자가에서 삶의 의미를 되찾는 열매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 구속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2017년 8월 10일
  | 08.12
463 57.2%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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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장마 비가 계속 옵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우산”이란 글을 떠올려봅니다.

삶이란 우산을 펼쳤다 접었다 하는 일이요.
죽음이란 우산을 더 이상 펼치지 않는 일이다.
성공이란 우산을 많이 소유하는 일이요.
행복이란 우산을 많이 빌려주는 일이고,
불행이란 아무도 우산을 빌려주지 않는 일이다.
사랑이란 한쪽 어깨가 젖는데도 하나의 우산을 둘이 함께 쓰는 것이요.
이별이란 하나의 우산 속에서 빠져 나와 각자의 우산을 펼치는 일이다.
연인이란 비 오는 날 우산 속 얼굴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요.
부부란 비 오는 날 정류장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리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다.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갈 줄 알면
인생의 멋을 아는 사람이요.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가는 사람에게
우산을 내밀 줄 알면 인생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건 비요.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건 우산이다.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의 우산이 되어줄 때,
한 사람은 또 한 사람의 마른 가슴에 단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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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다음,
축제를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헬라인들이 예수님 뵙기를 청합니다. 그러자 이를 알리는 필립보와 안드레아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때가 왔음을, 곧 “인자가 영광스럽게 될 시간이 왔습니다.”(요한 12,23)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대체 어떤 힘이 이 밀알을 죽음으로 밀어붙일 수 있을까?
묘하게도 죽음으로 밀어붙이는 그 힘은 생명력입니다. 생명의 힘이야말로 밀알을 죽게 할 수 있는 힘입니다. ‘죽을 수 있는 힘’, 그것은 살리기 위해 죽을 수 있는 힘입니다. 죽어야 살기 때문입니다. 결국, 살리기 위해 죽을 수 있는 힘이 생명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밀알이 땅에 떨어져야 하고,
죽어 묻혀야 하고, 묻혀 사라져 자신이 없어져야 하고, 그러고서야 비로소 생명의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니 죽음의 고통은 생명을 드러내기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곧 죽음의 고통은 자기를 벗게 하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요, 새 생명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5)

여기에서,
셈족의 언어관습에서 “미워하다”라는 단어는
“사랑하다”라는 말과 관련하여 쓰여서 “덜 사랑하다”,
“지고의 가치로 여기지 않다”라는 의미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 대비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당위성을 말해줍니다.

곧 땅에서의 ‘죽음’이 생명의 끝이 아니라,
‘참된 생명’(“영원한 생명”)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바로 참된 실재를 보존하는 길이며,
미래에 대한 신뢰와 의탁, 곧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개방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요한 12,26)

이는 ‘섬긴다는 것’과 ‘따른다는 것’의 긴밀한 연관성을 말해줍니다.

누군가가 따른다고 말하면서
따르는 그를 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따름이 아닐 것입니다.

또 섬긴다고 말하면서
그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도 진정한 섬김이 아닐 것입니다.

곧 그분을 따라나섰다고 해서 그분을 따르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따라나서서 그분을 섬길 때라야 진정 따르는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의 성소의 길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분을 섬기지 않고 여전히 ‘따라나선 자신’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집과 가족을 떠나는 왔지만 ‘떠나온 자기’를 아직 떠나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영광스럽게 될 시간이 왔다.”(요한 12,23)고 알립니다. 그리고 ‘당신을 섬기는 사람은 당신을 영광스럽게 할 그 죽음의 길에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그분의 죽음의 길에 함께 할 때 비로소 우리는 ‘당신을 따르는 것’이 됩니다.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마련해 주시는 분께서 여러분에게도 씨앗을 마련해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여러 곱절로 늘려주시고, 또 여러분이 실천하는 의로움의 열매도 늘려 주실 것입니다.”(2코린 9,10).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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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함께 있는 이를 존중하게 하소서!
함께 있는 이를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서 함께 있는 저를 결코 무시하지 않으시듯,
저 역시 곁에 있는 형제를 종중하고,
함께 있는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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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2020년 8월 10일
  |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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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3   [안동]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는?  [3] 2131
512   [대구] 세례성사의 은총을 보존하자!  [6] 2349
511   [전주]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하여라...."  [6] 2055
510   [광주] 불멸의 사랑  [1] 367
509   [청주] 주님 세례로 드러난 새로운 소식  [3] 328
508   [원주]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갑시다.  [3] 409
507   [군종] 주님의 형제요 하느님의 자녀  [6] 344
506   [의정부] 세례의 완성  [5] 349
505   [대전] 주님은 세례 받으시러 오십니다.  [6] 2051
504   [춘천] 그리스도 따라 세상의 때 벗자  [5] 2211
503   (백) 주님 세례 축일 독서와 복음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16] 1766
502   [수도회] 일어나 비추어라!  [12] 2674
501   [서울] 공평화의 동체인 인류 가족  [12] 2948
500   [대전] 새로이 동방박사의 여정을 시작합시다.  [6] 3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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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축일/명절강론 코너 ( 대축일/명절 미사에 관련된 강론자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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