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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대전/광주/춘천/원주] 천상에 대한 희망
조회수 | 198
작성일 | 18.11.03
[청주] 천상에 대한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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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 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이들이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언젠가 맞이할 죽음에 두려워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이며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믿고 오늘을 이미 영원으로 알고 최선에 최선을 다해 살면 마침내 주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의 ‘사주'를 믿었습니다.
청년시절에 한 번 위험한 고비를 넘길 것이라는 것과 얼굴이 곱상한 여인과 결혼할 것이라는 것도 용케 들어맞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주에 의하면 그한테는 삼십대에 재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믿고 어디 가서든 큰 소리를 쳤습니다.
‘두고 봐라. 내 나이 마흔을 넘기 전에 너희와 앉은 자리가 달라질 것이다.' 서른 고개를 막 넘었을 때 일자리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어떤 사주를 지닌 사람인데 남의 밑에 가서 일을 한단 말이야'하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몇 년 후에는 친구가 동업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는 웃으며 거절했습니다. ‘이 사람아, 내가 그런 시시한 장사를 할 사람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또 몇 년이 흘렀습니다. 해외로 갈 기회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에게는 돈복이 터지게 되어 있다구.' 하면서 밑이 터지게 가난하게 살다가 그만 일찍 죽게 되었답니다.

그는 저승사자에게 항의했답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나한테는 재복이 예정돼 있었잖습니까?'그러자 저승사자가 한심스럽다는 얼굴로 대꾸했습니다. ‘우리는 기회만을 제공할 뿐이다. 직장 운 한번, 장사 운 한번, 무역 운 한번, 이 세 번의 기회를 다 주었었네'.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주님의 뜻대로 살면서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할 기회가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욕심을 부리거나 요행을 바란다면 그 기회는 그저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편한 쉼이 아니라 자기 힘에 알맞으면서도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쉼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힘들고 어려운 모든 이에게 그 쉼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30) 하시는 예수님의 위로를 받는 것은 하루의 생활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주님의 멍에는 틀림없이 우리에게 위로와 기쁨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성 엘리지오는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오히려 주님이 정하신 때에 죽기를 원한다. 이는 죽음으로써 만이 하늘에 계신 그리운 아버지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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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신부
2016년 11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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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2014년은 두 달이나 남았지만, 전례력으로는 올해도 끝자락을 맞이했다. 전례력으로 마지막 달인 11월은 세상을 떠난 가족, 친지들뿐만 아니라, 세상을 떠난 모든 이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위령성월이다. 11월 1일부터 8일까지는 정성껏 묘지를 방문하게 된다. 오늘은 특별히 연옥에서 단련을 받는 영혼들이 어서 빨리 하느님의 품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기도하는 날이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했던 가족 그리고 친지들을 기억하려는 뜻에서 우리는 묘지를 방문한다. 묘지를 방문하면서 “오늘은 나, 내일은 너”라는 격언처럼, 우리 역시 언젠가는 이 세상과 이별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의 삶이 덧없다는 생각으로 이어지면, 서글프다는 느낌마저 받게 된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은 내 삶에 끝이 있음을, 내 삶이 무상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 신앙인들은 묘지를 방문하며 하나의 희망을 다시금 간직하게 된다. 그 희망이란 우리가 엮어놓은 우리 삶이 우리 자신과 함께 하느님 안에서 소중히 받아들여지게 된다는 것이다. 더불어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와 기도 그리고 자선에 힘입어 우리가 기억하는 이들도 또한 하느님의 자비 안에 받아들여지게 된다는 것이다.

혼자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의 삶은 서로 관련이 있고, 수많은 관계를 통해 함께 연결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말, 행위,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은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이루는 것들에 영향을 주었다. 우리의 삶 역시 다른 사람들의 삶에 흘러들어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영향을 주고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위해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하는 건, 심지어 그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난 후에라도 결코 헛된 게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아주 오래 전부터 서로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죽음의 경계 너머까지 계속되며 서로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해 왔다. 우리는 이런 전통과 믿음 아래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애정과 감사의 마음으로 하느님께 자비를 청한다. 이는 하느님의 뜻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는 신앙을 간직한우리뿐만이 아니라, 당신께서 창조하신 모든 영혼이 구원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연옥에서 단련을 받는 영혼들은 스스로 보속을 경감시킬 수 없다. 이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 사랑을 실천할 기회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아 있는 우리는 연옥에 있는 영혼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 우리가 그들의 몫을 대신해 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그들을 대신하여 기도해 주고, 삶으로 대신 채워 주어야 한다.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단식과 기도, 선행 그리고 무엇보다 미사성제를 통해 은총을 청하는 건 아주 특별한 이웃 사랑의 실천이다.

▦ 대전교구 정동수 신부
  |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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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겸손한 사람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가14,11). 주님께서는 몸소 자신을 낮추셔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마구간에서 그 낮아진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필리2,7-8)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10,45)하신 대로 벌거벗은 채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의 위엄에 대해 대단히 까다롭게 굴었습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하였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특별한 예우를 받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위를 주장하였고 윗자리에 앉을 권리가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나라에서도 역시 그런 위치를 당연히 차지하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그렇다고 혹 누가 만일 윗자리에 앉을 욕심으로 끝자리에 앉는 척한다면 그는 끝자리에 앉은 것이 아니고 따라서 결코 윗자리에 오르지 못할 것입니다.

“잘나가는 파리들만 모여 사는 높은 동네에 어느 날 밑바닥에서 놀던 파리 한 마리가 냉큼 날아들었습니다. 잘나가는 파리들이 물었습니다.

‘아니, 당신은 저 밑바닥 파린데 어떻게 여기까지 날아왔소?’ 그러자 밑바닥 파리가 말했습니다. ‘예, 줄을 잡았지요. 소꼬리를 꽉 잡고 있다가 소가 휙 꼬리치는 덕에 이곳까지 올라오게 됐죠.’ ”. 우리도 줄을 잡아야 하나요? 줄잡고 올라온 것이 그리 배가 아프던가요?

자신을 낮추는 것이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여지는 첫 번째 조건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교만은 지옥의 문을 엽니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교만은 천사를 악마로 만들었으나 겸손은 인간을 천사로 만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힘써 조심할 일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 특히 남보다 ‘내가 낫다’ 는 생각입니다. ‘내가 더 고참이다.’, ‘내가 더 연장이다’, ‘일은 내가 더 했는데 나보다 더 저 사람을 알아주는군.’하는 따위의 말은 물론 그런 생각조차 마음에 두는 일이 절대로 없도록 하십시오.” 하고 겸손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하루라도 겸손함으로 주님을 찬미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야고 4,10). 시편에는 “주님께서는 높으셔도 비천한 이를 굽어보시고 교만한 자를 멀리서도 알아보신다.”(시편138,6).고 적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의 샘’은 겸손한 자의 '마음의 골짜기’로 흘러듭니다.”(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겸손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깊은 믿음으로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주님께 온전히 맡겨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신부 : 2018년 11월 2일
  |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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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죽음을 이기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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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신은 죽음 후의 세계를 진심으로 믿고 있습니까?
1) 믿는다. 2) 아직은 관심 없다. 3) 믿지 않는다.

2. 당신은 지금 현재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1) 준비한다. 2) 죽을 때가 되면 그 때 할 것이다.
3) 준비하지 않는다.

3. 지금 바로 죽게 된다 해도 후회하지 않습니까?
1) 후회하지 않는다. 2) 후회한다.
3)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4.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당신은 지금 무얼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1) 하느님 2) 내 자신과 가족의 행복
3) 세상의 돈과 권력

5. 그렇다면 하느님은 내 인생에서 몇 번째에 계시나요?
1) 첫 번째 2) 두 번째 3)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각 문항에서 자신이 선택한 번호를 모두 합산해 보세요.
·5 : 죽음을 잘 준비하는 사람
·6~7 : 나름대로 잘 준비하는 사람
·10 이상 : 죽음을 준비하고 있지 않은 사람

죽음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바로 우리 주변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렇기에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은 가장 어리석은 삶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리라는 희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 함께 항상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지혜로운 사람들인 것입니다.

죽음을 가장 잘 준비할 수 있는 삶은 유일하게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께서는 늘 하느님과 함께 이 세상을 사랑으로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이기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도 하느님과 함께 이 세상을 사랑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죽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위령의 날’을 기념하는 오늘 연중 31주일, 우리 가까이에 있는 죽음을 외면하지 않으며 하느님과 함께 이 세상을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죽음이 세상의 마지막이 아니라, 천상 고향에서의 영원한 시작이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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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강기표 이사악 신부
  |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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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죽음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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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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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자들은
종교의 생성 이유를 사후 세계에 대한 무지와 불안 등으로 꼽습니다. 모든 인간의 가장 두려운 현실인 죽음, 사실 인간이 공포와 두려움에 싸이는 것도 죽음 때문입니다. 죽게 될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피할 수 없는 이 죽음이 때로는 저주스러운 것이지만, 죽음 때문에 인간은 겸손할 수 있고, 자신의 나약을 인정하기에 하느님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죽음 때문에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죽어가는 사람들, 특별히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이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면서 여러 단계를 거친다고 합니다.

‘퀴블러로스’는
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다섯 단계로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죽음에 자신을 내맡기기를 거부하는 단계이고,
두 번째 단계는
왜 하필이면 죽음의 위협이 자신에게 닥쳤는지 분노를 느끼는 단계이고, 세 번째 단계는
이미 절박하게 다가온 미지의 운명의 세력인 죽음을 피하기 위하여 하느님과 담판을 하는 단계이며,
네 번째 단계는
체념과 절망이 섞인 의기소침의 단계이며,
마지막 다섯 번째 단계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동의하는 단계이다.”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기에
끝내 죽음에 굴복하는 것이 죽음의 단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절대로 버릴 수 없는 신앙은 죽음을 이긴 부활의 신앙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가 이 고통의 바다, 죽음의 위협이 넘실대는 파도를 헤쳐 온 것입니다.

‘조르드 베르나노스’라는 작가는
작품 <가르멜 수녀들의 대화>에서 블랑쉬라고 하는 한 수녀의 입을 통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죽음의 엄청난 고뇌를 피할 길이 없다. 그러나 안심하고 고뇌할 수는 있다.”

그렇습니다.
부활을 믿고 희망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과 다른 것은 죽음에 짓눌린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실 주님의 은총을 믿기에 안심하고 고뇌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시편의 시인은 노래합니다.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시편 2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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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나의 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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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약속’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사도 성 바오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티모테오 2서 3장 16절)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위로와 희망의 말씀에 우리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의 가장 큰 고통인 죽음과 그에 대한 의문도 성경의 가르침을 통하여 우리는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죽음을 극복한 희망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우리 인간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죽음을 극복하는 말씀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확신에 찬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복음 11장 25절~26절)

나아가 묵시록의 저자는
죽음에 대하여 이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묵시록 21장 3절~4절)

이제 우리는 이 같은 말씀에 희망을 안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나날 동안 죽음을 어떻게 잘 준비해야 하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일본 성심수녀회의 ‘스즈키 히데코’ 수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은
살아남은 우리에게 반드시 메시지를 남기고 이승을 떠납니다. 그것은 형태를 달리해서 여러 가지로 표현되지만, 다음과 같은 말로 집약할 수 있습니다. ‘서로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서로를 소중히 해주십시오. 살아있다는 것은 한없이 고귀한 것입니다.’”

프랑스의 ‘아베 피에르’(1912~2007) 신부도 이같이 말합니다.

“죽음은
우리네 삶에서 황홀한 순간이며 환상적인 만남을 가져다주는 눈부신 순간일 수 있다. 인생에는 두 가지 근본적인 것이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절대로 망쳐서는 안 되는 그 두 가지 일은 사랑하는 것과 죽는 것이다.”

결국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있는 우리들이 할 일은,
믿음과 사랑, 불멸의 희망, 용서 등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준비 없이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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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배광하 신부
  |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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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영혼의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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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연옥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교회는 옛부터 돌아가신 분들의 영혼의 안식을 위해서 기도하고 희생하는 것을 아주 큰 애덕의 실천으로 가르쳐 왔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신앙은
오늘 우리에게 연옥 영혼들의 안식을 위해서 미사를 봉헌하고 그들의 죄를 대신 보속해 줄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회는 연옥 영혼들을 위해서 봉헌되어지는 미사의 은총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위대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연옥 영혼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신 성자 그리스도의 성심께 갚음을 드리는 것이며, 동시에 성자의 거룩하신 십자가 제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특히,
아무도 기억해 주지 못하는 연옥 영혼들을 위한 희생과 기도는 그리스도의 제단에 바칠 수 있는 좋은 예물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자께서는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서 돌아가셨고, 영혼들의 구원을 참으로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연옥 영혼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성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과 성인들의 공로에 의지하고 있고, 우리의 공로에 연옥 영혼들이 의지한다는 믿음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분명 성자의 수난 공로를 거저 받고 있으며,
성인들이 하느님께 바쳤던 모든 애덕의 공로를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옥 영혼들은 애덕과 희생을 바칠 육신이 없음으로, 그리스도교의 모든 덕행을 쌓을 수 있는 몸을 지니고 있는 우리의 공로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하루만 연옥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하기보다는 많은 시간을 통해서 그러한 애덕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성자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받고 계시며, 우리가 당신의 성심을 이해하고 우리의 구원은 물론 다른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고 희생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위령의 날을 맞이해서
봉헌하는 미사를 정성을 다해 봉헌하면서,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과 감사의 은총을, 연옥 영혼들에게는 영원한 안식의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오늘 영혼들의 안식을 위한 우리의 애덕이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이어질 수 있는 은총 또한 청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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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동걸 신부
  |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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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 성월인 11월이 깊어 가고 있습니다.
차가운 날씨와 앙상한 나무들은 우리의 마음을 쓸쓸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의 생각도 자주 무거운 주제들에 빠져듭니다. 죽음과 상실, 시간과 ‘끝’, 인생과 세상의 궁극적 의미 등, 바쁜 일상 속에서 잊고 있던 의문들이 늦가을의 적막함과 함께 예고 없이 다가옵니다. “사유는 우리를 슬프게 만든다.”는 한 문학 평론가의 말처럼 이러한 상념은 우리를 우울하게 이끌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무거운 사색의 정서는 분주하고 흩어져 버린 마음의 중심을 발견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위령 성월에
깨어 있는 마음으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오래된 격언을 떠올립니다. ‘죽음’이라는 말은 하나의 봉인과도 같아서 죽음에 대한 생각을 피해 가지 않을 때 인생에서 가렸던 진실들이 눈앞에 나타납니다. 이러한 진실은 어쩌면 여전히 너무 버거운 것으로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인생의 무거운 짐이나 허무함만 확인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죽음을 성찰하는 것은
어두운 굴 끝에 보이는 빛이 희망의 실재임을 확인하는 여정입니다. 그래서 무겁고 쓸쓸한 마음이 아니라 더욱 순수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걸어갈 힘을 얻는 귀한 체험입니다. 그 이유를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다음 말씀이 참으로 잘 일깨워 줍니다. 사색과 묵상의 이 계절에 가장 무거운 인생의 진실을 이 말씀과 함께 깊고 투명하게 바라보고자 마음먹어 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인간의 여정은 삶에서 죽음으로 옮겨 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략)
예수님은 이 시각을 뒤집으셔서 우리의 여정이 죽음에서 삶으로 가는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중략)
그러니까 죽음은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뒤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살아 계신 하느님, 계약의 하느님, 내 이름과 우리의 이름을 지닌 하느님이 계십니다”(『우리 곁의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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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4년 11월 7일
  |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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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   [수도회] 천부당만부당한 예수님의 세례  [6] 2279
518   [인천] 증거자의 모습으로  [12] 2179
517   [부산] 세례는 예수님의 실천 안으로 들어가는 입문 의례  [9] 2217
516   [마산] 신앙생활은 세례를 완성하는 생활  [5] 1784
515   [수원]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9] 2286
514   [서울] 세례의 의미  [17] 2538
513   [안동]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는?  [3] 2128
512   [대구] 세례성사의 은총을 보존하자!  [6] 2346
511   [전주]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하여라...."  [6] 2051
510   [광주] 불멸의 사랑  [1] 362
509   [청주] 주님 세례로 드러난 새로운 소식  [3] 322
508   [원주]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갑시다.  [3] 404
507   [군종] 주님의 형제요 하느님의 자녀  [6] 339
506   [의정부] 세례의 완성  [5] 347
505   [대전] 주님은 세례 받으시러 오십니다.  [6] 2049
504   [춘천] 그리스도 따라 세상의 때 벗자  [5] 2210
503   (백) 주님 세례 축일 독서와 복음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16] 1765
502   [수도회] 일어나 비추어라!  [12] 2666
501   [서울] 공평화의 동체인 인류 가족  [12] 2946
500   [대전] 새로이 동방박사의 여정을 시작합시다.  [6] 3277
1 [2][3][4][5][6][7][8][9][10]..[26]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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