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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조회수 | 3,424
작성일 | 07.09.24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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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가위, 추석으로서 한해의 결실에 대해 감사하는 명절입니다. 그것은 하늘에 대한 감사이고 땅에 대한 감사이며 조상에 대한 감사입니다.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듯이 우리 조상들의 열매는 자손들입니다. 그래서 한가위엔 흩어진 자손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성묘와 벌초로써 효도와 공경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다함께 한자리에 모여 조상께 차례를 지내고 음식을 나누며 친교를 다집니다. 그런 면에서 실향민들을 기억하고 위로해야 할 것입니다.

옛부터 우리 조상들은 농사를 지어 한가위가 되면 가장 잘된 오곡백과를 차례상에 올렸습니다. 연옥 교리도 몰랐던 그들이 선조들의 구원을 위해 차례와 제사를 지냈다면 영혼불멸과 사후심판을 믿는 우리들이 조상들을 위해 어찌 미사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주님이 주신 네 번째 계명을 잘 지켜야 합니다. 즉 부모께 효도를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형제자매 간에 사랑과 정도 나누어야 합니다. 명절에 흩어진 가족이 모였다가 서로 나눌 줄을 몰라서 마음 상해 돌아간다면 조상과 부모께 효도한다고 할 수 없고 즐겁고 기쁜 명절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궁핍해도 한 해 동안 땀흘려 일한 후 수고한 보람에 대한 기쁨으로 흥이 나서 추석 대보름달 아래서 다함께 놀이를 즐기며 춤추고 배불리 먹고 마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나왔을 것입니다. 이 말에서 얼마나 우리 조상들이 한가위를 즐거운 축제로 체험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즐기면서도 한가위를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중용의 축제로 지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이웃 간의 나눔, 가족 간의 화합. 조상 공경의 전통이 차츰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이웃과 떡 한조각이라도 나눌 줄 알고 자식들에게 차례의 중요함과 가족 공동체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는 것이 우리 조상들이 실천한 한가위 문화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부자가 등장합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것인데도 마치 자기 것인양 감사할 줄 모르고 나눌 줄도 모르고 이기적인 삶을 영위한다면 어리석은 부자처럼 멸망한다는 것을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깨우쳐 주십니다. 한가위, 추석은 추수감사절입니다. 비록 궁핍하더라도 한가위에 가족이 하느님과 조상께 감사드리고 서로 가진 것을 나누면서 흥겹고 즐겁게 지낸다면 우리도 조상들처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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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최경용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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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한 은총에 감사를

“오곡백과가 땅에서 났으니, 주 우리 하느님께서 복을 주심이로다.”

사랑하는 형제여러분!
명절의 기쁨을 전하면서 인사를 드립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1년 12달 오늘만 같아라”하는 한가위 명절을 맞았습니다.
여러분도 오늘 조상님들께 차례를 모시고 온 가족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계시겠지요?
여러분들의 각 가정마다 오곡백과의 풍요로움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으로 항상 머물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이 갖는 고유한 명절입니다. 물론 중국에서도 8월 보름에 월병을 빚어 먹으며 즐거움을 나누고, 일본에서도 그와 비슷한 풍습을 일부 지방에서 갖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처럼 민족의 대명절로 지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오늘은 우리 민족 고유의 커다란 잔칫날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명절을 가리키는 말들이 많이 있지요? 흔히 秋夕이라고 합니다만, 이 말은 四書五經 중의 하나인 禮記에 나오는 “朝春日 秋夕月”이라는 표현에서 빌어온 것이라고 합니다. 또 仲秋節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이건 가을에 해당하는 3달을 初秋 中秋 終秋라고 하는데, 음력 8월이 중간에 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이름 “한가위” 혹은 “가윗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이름은 그 역사가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는데, “가운데”라는 말마디와 관련이 된다고 합니다. 음력 8월 15일은 봄부터 시작해서 겨울에 이르기까지 1년중 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면서 달이 가장 둥그렇고 가깝게 보이는 대표적인 명절이기 때문에 한가위라고 부르게 된 모양입니다.

오늘 명절을 가리키는 말들이 많이 있지요? 흔히 秋夕이라고 합니다만, 이 말은 四書五經 중의 하나인 禮記에 나오는 “朝春日 秋夕月”이라는 표현에서 빌어온 것이라고 합니다. 또 仲秋節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이건 가을에 해당하는 3달을 初秋 中秋 終秋라고 하는데, 음력 8월이 중간에 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이름 “한가위” 혹은 “가윗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이름은 그 역사가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는데, “가운데”라는 말마디와 관련이 된다고 합니다. 음력 8월 15일은 봄부터 시작해서 겨울에 이르기까지 1년중 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면서 달이 가장 둥그렇고 가깝게 보이는 대표적인 명절이기 때문에 한가위라고 부르게 된 모양입니다.

오늘 명절을 추석이라고 하든, 중추절이라고 하든, 한가위라고 하든, 가윗날이라 하든, 이 모두가 바로 오늘의 이 풍요로움, 이 넉넉함, 이 복스러움을 함께 나누려는 마음에서 나온 이름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오늘 멀리 떨어져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비옥한 땅을 맡겨주시고 풍성한 결실을 맺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또 한편으로는 오늘의 우리가 있기까지 애써주신 조상님들을 기억하면서 후손된 도리를 다시금 되새기기는 것입니다.

보도를 통해 들어보니까, 이번 명절에도 온 나라가 고향을 찾는 행렬로 줄을 잇고 있습니다. 얼핏 헤아려봐도 1000만을 훨씬 넘는 사람들이 대이동을 한다고 합니다. 아마 고향을 찾아, 부모님을 찾아, 또 친지들을 찾아 전 국민의 1/3가량이 움직이는 모습은 우리 민족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전 세계 그 어디서도 이런 예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오로지 우리 민족만이 갖고 있는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관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이런 풍요로움을 허락하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오늘 복음에서는 소출을 많이 얻게된 어떤 부자 한 사람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아마 기후도 좋고 병충해도 없어서 풍년이 들었나 봅니다. 남아넘치는 곡식단을 바라보면서 부자는 너무도 기뻤습니다. 그리고는 “이 많은 곡식을 어디에 다 보관해야 하나?”하면서 행복한 고민에 젖어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이 부자는 “지금 있는 작은 창고를 헐고, 더 크고 튼튼한 창고를 지어서, 거기에 곡식을 꽉꽉 채워놓고, 그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리라” 하면서 행복해 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바로 그날 밤,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많은 소출이 그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제 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하시면서,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 하느님과 이웃에게는 인색한 삶을 살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오곡백과의 풍성한 수확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풍요로움에 기뻐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하느님께서도 만족스러워 하십니다. 우리에게 이 명절을 기쁘게 지내게 하시면서 천상 도시의 잔치를 미리 즐기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된 부유함을 즐길 권한을 받았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허락된 이 풍요로움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내 것으로만 삼으려 하지 말고, 이웃과 함께 나누려는 마음가짐도 아울러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 하느님, 저희 조상과 저희에게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베풀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이제 주님께 받은 재물을 이웃과 나눔으로써 하늘에 보화를 쌓아, 세상을 떠난 조상과 부모, 형제, 친척들을 천국에서 만나게 하소서. 아멘.”.

부산교구 김정호 신부
  |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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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한 억만장자가 죽으면서 자식들에게 이상한 유언을 남겼다. 유언인 즉, “내가 죽거든 관 양쪽에 구멍을 내고 나의 양팔을 밖으로 내어 놓은 채 장례를 치러라.”는 것이었다. 왜 이런 유언을 남겼을까? 자녀들은 물론이고,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장례식을 치른 후 며칠이 지나 큰아들이 동생들을 불러 모아놓고 아버지의 유산을 몽땅 털어 자선사업을 하자고 했다. 그는 아버지 유언의 뜻을 깨달았던 것이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사람은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와서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불교계의 진리와 같은 가르침이다. 누가 우리 중에 태어나면서부터 땅문서를 손에 쥐고 이 세상에 나왔거나, 돈을 쥐고 나온 사람 있는가? 아무도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죽을 때면 아무 것도 손에 쥐고 갈 수 없는 운명의 존재이다. 일 센트짜리 동전은 고사하고 지푸라기 하나도 쥐고 갈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 어떡하든 많이 가지려 애쓰는 것인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만 사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현대판 금송아지를 인생의 전부이며 목적인양 착각하며 산다. 돈으로 모든 것이 계산되고,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것이 없고 돈이 최고라는 생각은 거의 모든 현대인들의 몸에 베여 있는 사실임을 부정할 수 없다. ‘돈은 더러운 것’이라들 말하지만 이 더러운 돈을 사람들은 다 좋아한다.

돈은 분명히 필요한 것이고 좋은 것이다.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편하다. 그러나 이런 돈이 우리 인생의 전부가 되고,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돈방석에 한 번이라도 앉아 보면 다른 소원이 없겠네, 죽어도 좋겠네!”라는 말을 일삼는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혹자는 “공수래공수거”의 진리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요즘같이 물질이 풍요로운 시절에 태어나는 아이들은 “만수래(滿手來)”의 행운에 빠져있으니 말이다.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으레 “만수거(滿手去)”하려 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가지고 태어나며, 과연 무엇을 가지고 갈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을 가지고 태어나는가? 그것은 우선 생명이다. 생명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 생명이 있으면, 다른 것은 덤으로 주어지며, 많은 것을 자신의 노력으로 가질 수 있다. 시간, 능력, 건강, 재물, 권력, 명예, 배우자, 자녀 등이 그런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에, 즉 육체를 가진 동안에 사람은 이런 소유들을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러서는 모두 소유한 것에서 손을 떼야하며, 놓아두고 가야한다. 결국 이것들을 주신 하느님께 돌려 드려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 복음(루카 12,15-21)에서 보듯이 부자는 밭에서 난 소출을 전부 자기의 것으로 착각한다. 착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부자의 잘못은 자기 영혼에게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고 한 약속에 있다. 사람이 현재의 소유를 마음껏 누릴 수는 있겠지만, 누가 그 미래를 장담할 수 있겠는가? 하느님 말고 누가 감히 한치 앞을 예견하며, 몇 년 앞을 아무 걱정 없다고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장담하던 바로 그날 밤에 부자의 생명은 왔던 곳으로 돌아가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부자가 재산을 부당하게 모은 것도 아니고, 그가 재물을 탐한 것도 아니다. 그저 재물이 자신의 전부이며 생명과 미래까지 보장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그의 잘못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지고 가는가? 물질에 속하는 육체가 없으니 육체와 관계되는 어떤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 따라서 영혼이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을 소유하려고 애써야 한다. 그것은 하느님이 계신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이다. 내가 소유한 것이 많고 적고 간에 한가위의 보름달이 더 커지거나 줄어들지 않듯이 모든 것에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느님께 감사하며, 하늘에 보물을 쌓고 살았으면 좋겠다.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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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저기 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금도끼로 찍어내고 은도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 짓고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지고 천년만년 살고지고

요사이는 달에 우주선이 갔다 오고, 달에 대한 탐사를 넘어 화성까지 탐사선을 보내고 발전이 많이 이루어진 시대라, 별 감흥은 없지만 그래도 나이가 지긋한 분들은 밝게 떠오른 추석 대보 달을 올려다보며 소망을 간구하고, 마음속으로나마 이 노래를 불러본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설날이 한 해의 출발을 뜻 깊게 맞으려는 것이라면 추석은 한 해의 맺음을 알차고, 기쁘게 받아들이는 일종의 감사축일입니다. 농업이 우리의 주업이었기에 생활풍속은 봄이면 씨앗을 뿌리고, 한여름 내내 땀 흘려 가꾼 것을 가을에 수확하는 것에 각별한 뜻을 두어 왔습니다. 그건 땅에 대한 감사요, 하늘에 대한 감사요, 우리에게 삶의 터전을 넘겨준 조상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그리곤 정성어린 식탁을 마련해서 온가족이 모여 차례를 지내고 음식을 나누며 성묘로 하루를 보내곤 하였습니다. 그저 좋다는 말이 있듯이, 이런 추석날을 맞이하면 기쁩니다.

전도서 3장 1절의 표현처럼, “모든 일에 제 때가 있고, 하늘 아래 만사에 제 시기가 있듯이”, 추석명절을 맞이하면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가신 조상들을 회상하면서 효도의 정신으로 차례를 지내고, 조상 묘를 찾아 인사도 하게 됩니다. 이런 것을 일컬어 미풍양속이라고 했습니다.

‘차례’ 혹은 ‘제사’가 자연적인 효도에서 기인한다면, 우리 교회의 위령미사는 어떠한 성격이겠습니까?

“연옥이 존재하고 여기에 갇혀있는 영혼들은 살아있는 신자들의 기도와 특히 미사성제로써 도움을 받을 수 있다”(트리엔트 공의회 <1545-63녀>의 선언)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교우들이 다 함께 모여 기도하고 미사를 지냄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모든 성인들의 통공인 지상의 교회인 우리들이 연옥교회의 영혼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런데 어떤 때에는 어리둥절하기도 합니다. 합동 위령미사를 봉헌한다고 발표하고, 여러번 알려주어도 도무지 관심이 없는 교우 가정이 많다는 점입니다. 미사 예물 때문에 그런 것일까? 그런 이유는 아닌 것 같은데…? 어째든 간에 왜 무관심한가? 만일 신자가정에서 외교인과 같은 제사를 지내지 않고, 그렇다고 성당에서의 합동 위령미사의 대열에도 끼이지 못한다면 정말 슬픈 현실이요, 납득하기 어려운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일년내내 돌아가신 분을 위해 위령미사 한번 드리지 못한다면 깊이 생각해 볼 일이요, 한마디로 악한 표양을 주는 교우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외교인들의 제사를 살펴보면, 지금은 가정의례준칙대로 하는지 모르지만 그 격식이 매우 엄하고 정중했습니다. 출타중인 사람을 제외하곤 다 모이는 것으로 빠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사가 끝난 다음, 제사에 참여한 모든 이가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음복(飮福)의 부분은 특히 인상이 깊습니다. 음복하는 부분은 우리 교회에서의 영성체 부분에 해당한단는 생각도 해 봅니다. 미사참례는 하면서도 성체를 받아 모시지 못한다면, 이는 마치 일반가정에서 제사에 참석하고서도 그곳 음식을 먹지 않는 결례와 비슷합니다. 감히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 성체성사와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추석을 맞아 위령미사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추석 명절에 우리는 불우한 이웃형제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소외된 분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특히 전후방에서 나라를 몸 바쳐 지키고 있는 우리들의 자식인 국군장병들을 기억합시다. 그들에게도 우리와 똑같이 고향산천이 있고, 부모형제가 있지만 추석명절을 맞아도 이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고향도 갈 수 없고, 부모와 형제들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고향,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부모, 형제, 친척들. 이 국군장병들이 바로 살아있는 나의 자식입니다. 추석명절이 군에 가 있는 우리의 자식들에게는 오히려 고통스러운 날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에게 부모님 같은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추석을 지내는 오늘, 모든 연령에게는 따뜻한 자비가, 모든 교우 분들의 가정에 추석이 주는 그 풍요로움 같이 크나큰 은총 있으시길 기도합니다.

부산교구 윤경철 신부
  |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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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앞에 부유한 사람

오늘은 한가위입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이 고유 명절을 지냈습니다. 우리는 세상살이가 아무리 바쁘더라도 이 날만은 가족이 함께 모여, 돌아가신 부모와 형제의 영혼을 위해서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정성껏 준비한 음식으로 제사지내고 음복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들에게 두 가지 주제, 곧 ‘결실’과 ‘탐욕’에 대해서 성찰하고 묵상하게 합니다. 우리의 삶은 주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선물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까지 열심히 살면서 얻은 결실 모두는 주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내가 이 세상에 살고 있고, 가족들이 건강하게 살 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선물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제1독서 말씀처럼 주님께서는 우리가 많은 결실을 맺도록 “비를 주시고 햇빛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주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착각합니다. 현재의 모든 결실은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착각합니다.그 원인은 탐욕에 있습니다. 탐욕이란 주님이 더 이상 내 삶의 중심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물질이 중심이 된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탐욕에 지배된 사람은 결코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지 못합니다. 그저 세속에서 부유할 뿐입니다. 이런 탐욕은 우선 하느님과 관계를 분리시키고, 따라서 나와 부모,형제,친구의 관계도 멀어지며 하며, 결국 나 자신과의 관계도 파괴시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물질을 만드셨을 때 분명히 필요해서 만드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물질이 우리의 삶에 첫째 관심대상이 되고 하느님은 이차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길 때, 물질은 악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물질 그 자체는 본래부터 중성적입니다. 물질을 좋게 혹은 나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을 원하고 사용하는 우리의 마음,의향입니다. 우리가 세상 것들에 대한 너무나 많은 관심으로 인해 하늘 나라에 대한 추구가 소홀하게 된다면 이것은 신앙적으로 악이 되는 것입니다.

수확의 계절인 가을 그 한 복판인 중추절인 오늘, 성경말씀은 ‘결실’과 ‘탐욕’ 두 가지 주제를 통해서 우리들이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삶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 앞에 부유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에 대해서 성찰하고 묵상하게 합니다. 즐거운 명절, 의미있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김영규 안셀모 신부
  |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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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들은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이 풍요의 계절에, 달 밝은 날을 택하여, 그들이 수확한 곡식과 과일로 차례 상을 차려 놓고, 돌아가신 집안 어른들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분들의 노고와 베푸심이 있었기에 후손인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감사드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수확한 풍요로움이 은혜롭다는 사실도 마음에 새겼습니다. 우리나라의 설과 추석, 두 큰 명절을 보면, 베풀어진 것에 대한 감사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두 명절에 행해지는 큰 의례가 둘 다 조상들에 대한 감사를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랍비들의 문서, 탈무드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곳곳에 다 계실 수 없어 어머니를 주셨다.” 어머니의 사랑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읽으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연장하면, 조상들에 대한 우리의 감사는 하느님이 하신 일에 대한 감사이기도 합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교통대란을 겪으면서도 추석명절을 위해 귀성길에 오르는 것은 살아 있는 가족이 함께 모여 돌아가신 어른들의 은혜로움을 기억하겠다는 것입니다. 떠나가신 집안 어른들로 말미암아 맺어진 가족과 친척의 인연들입니다.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과 돌아가신 집안 어른들을 기억하는 마음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한가위에는 형제자매와 친인척들이 함께 모여, 우리 곁을 떠나가신 집안 어른들을 기억하면서, 조상들이 행하신 베풂이 있어 오늘의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함께 기뻐합니다.

인류역사가 있으면서 베풂의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말하면서 베풂의 역사가 하느님으로부터 시작하였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중심이 된 문화권에서 발생한 언어입니다. 아시아의 문화권은 하느님이라는 단어 대신 하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하늘이 주신 조상입니다. 그래서 중국문화권은 효(孝)를 삼강오륜의 으뜸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천생연분(天生緣分)이라는 단어도 씁니다. 하늘이 만들어주신 인연이라는 말입니다. 효는 그 인연을 은혜로운 것으로 알고 감사드리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은 천생연분을 소중히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면서 인간의 도리를 다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집안 어른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그분들로 말미암아 발생한 형제자매를 소중히 생각하며 사랑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효자는 없습니다. 우리의 문화권이 말하는 효라는 덕목(德目)에는 하늘이 맺어주신 인연들을 소중히 생각한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밭에서 많은 소출을 얻었습니다. 그는 큰 창고를 지어서 곡식과 재산을 넣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기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날 밤 그를 불러 가셨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이야기 끝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은 바로 이러하다.’

우리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좁은 시야에 갇혀서 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곡식과 재산이 우리의 생존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이 우리 삶의 보람일 수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의 주인공이 지닌 시야(視野)에는 자기밖에 없습니다. 자기 한 사람이 안락한 생활을 하는 것이 자기 생명의 최대 과제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이 어리석은 생각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주인공은 은혜롭게 베풀어진 생명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가 수확한 것도 베풀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에게는 그가 가진 모든 인연들도 소중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 주인공은 베푸심의 흐름에서 스스로 이탈하여 유아독존(唯我獨尊)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은혜로운 것이 없습니다. 그는 자기 한 사람의 안일(安逸)과 그것을 보장해주는 재물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소위 무원고립(無援孤立)의 경지를 택하였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만을 보고, 우리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생각은 단편적이라, 우리는 많은 순간에 그렇게 살기도 합니다. 이기심과 욕심이 자신을 눈멀게 한 순간들이 없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때에 따라 또 환경에 따라,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하늘이 베푸신 집안의 어른들과 형제자매들이 은혜롭다는 사실을 생각하던 이 계절에 우리도 우리의 시야를 넓혀서 우리 주변을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이 은혜롭게 베푸셔서 주어진 우리의 생명이고, 또한 우리 주변의 생명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확대해 보면서 베풂의 흐름에서 이탈(離脫)하는 우리의 시선을 잠시 멈추고, 돌아가신 집안 어른들과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인연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은혜로우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근본으로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우리보다 먼저 살고 가신 분들도 하느님과 함께 사셨고, 지금은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십니다. 옛날 모세는 이 사실을 이렇게 포현하였습니다. “선조들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다.”(탈출 3,15). 돌아가신 어른들을 위한 우리의 마음은 이제 기도로 표현됩니다. 그분들을 기억하며 바치는 우리의 기도는,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우리도 그 은혜로우신 하느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먹고 마셔서 기쁘기만 한, 한가위는 아닙니다. 하느님이 보이고, 돌아가신 집안의 어른들이 보이며,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소중히 생각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즐겁고 행복한 명절입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하느님이 계시고, 그분 안에 살아계신 어른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베푸신 인연들이 있습니다. 이 계절이 주는 풍요로움을 은혜롭게 보는 그만큼,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우리의 시야는 넓어질 것입니다. 우리와 유명을 달리하신 집안의 어른들과 더불어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기억하고 감사를 드립시다. 하느님은 오늘도 축복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그 축복과 그 사랑을 연장하여 실천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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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추수절이라고도 부르는 구약 초막절과 비슷한 한가위를 맞이하여, 요엘 예언서 말씀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해 주시길 빕니다.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주님은 너희에게 비를 쏟아 준다.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다.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요엘 예언서 2, 23~26 참조)

이 말씀이 먼저 북한 동포들에게 이루어지길 빕니다. 또한 물질적 풍요는 누리고 있지만, 내적 성장이 빈약한 우리에게 이 말씀이 무엇보다도 영적인 차원에서 실현되길 빕니다. 높은 이혼율과 자살률 그러면서 낮은 출산율 그리고 특히 청소년들에 대한 인격적인 교육의 부재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영적 성장의 축복이 내리길 빕니다.
우리 민족은 5천 년 역사에서 어떤 고난과 비극이 닥쳐와도 결국은 이겨내는 끈질기고 강인한 민족입니다. 또한 우리 민족의 장점은 조상을 공경할 줄 알고, 마음이 따뜻하며, 머리가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탈란트를 우리 민족에게 주신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민족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은 우리 민족 스스로 복음의 진리를 찾도록 안배하신 데에서도 드러났습니다. 어떤 사제나 선교사 없이 우리 스스로 복음을 깨닫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이리하여 보편교회에서 유례가 없는 교회가 한국 땅에 탄생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민족에 대한 주님의 한없는 사랑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8월 15일 성모님께서 승천하신 바로 그날, 우리 민족에게 광복의 기쁨을 선사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추석을 맞이하여 우리 민족을 이토록 사랑하시는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날 끊임없이 우리 민족을 돌보신 주님께서 지금의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도록 용기와 지혜와 함께 일치의 정신을 주시길 빕니다. 또한 남북 평화통일을 앞당겨 주시고 다른 민족과 국가를 포용하는 넓은 마음을 주시길 청합니다. 그리하여 세계평화와 일치에 봉사하는 민족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길 빕니다.

오늘 이 기쁜 명절에, 주님께서는 돌아가신 선조와 부모님 그리고 형제 친척들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천국에 들게 하시고, 우리에게는 믿음의 가치관을 확고하게 해 주시길 청합니다.

“주님, 한가위를 맞이하여 저희 민족에게 베풀어주신 당신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모든 민족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님, 저희 민족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부산교구 권지호 신부
  |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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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감사와 나눔의 한가위

즐거운 한가위 명절을 맞이하여 교우님들의 가정에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예부터 땀 흘려 일한 후 얻게 되는 오곡백과는 농민들에게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래서 가을의 결실을 맺도록 태양빛과 비를 내려주신 하늘에 감사드리고, 또한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신 조상님들께도 감사드리며, 서로 노동으로 도와준 이웃들과 감사와 기쁨을 나누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명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부모 형제를 찾고 조상님들께 감사의 제사를 드립니다. 하늘에 감사하고 조상님과 부모형제에게 서로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근본을 잊지 않는 인간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은 모든 감사의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새로운 감사할 일을 불러온다고 합니다. 우리 인간 마음속에는 감사하는 마음과 아울러 고향에 대한 원초적인 향수를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낳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과 조상님이 사셨던 곳 혹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든 곳은 마음의 고향이 됩니다.

추석명절 고향을 찾는 마음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야 할 고향인 하느님 안에서 참 생명의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될 미래의 시간도 희망해야 합니다. 가을 추수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삶의 결실을 맺고 참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 때 우리가 지니게 될 새로운 생명의 삶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장차 우리가 가 있을 먼 미래로부터 현실을 바라볼 때 물질적인 현실에 사로잡혀 고생하는 우리 삶도 새로운 시야를 갖고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희망 없는 삶과 세상 탐욕에 사로잡힌 삶에 대해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개한 한 부유한 사람은 많은 재산을 잘 비축함으로써 삶의 안전을 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달리 그날 밤 그의 목숨을 하느님께서 거두어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스스로 보장할 수 없으니 허락된 하루하루의 시간에 감사드리며 자기만을 위해 살지 말고 서로 베풀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번 명절 하느님과 조상님, 부모 형제들에게 감사드리며 이웃과 서로 사랑과 정을 나누고 아울러 외롭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관심과 사랑이 나누어지기를 기원합니다.

► 부산교구 이찬우 신부
  |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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