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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구/마산/수원] 십자가없는 부활이 있을 수 없듯, 고통없는 영광이란 있을 수 없다.
조회수 | 28
작성일 | 20.09.15
매미들은
뜨거운 여름의 2, 3개월을 노래하며 살기 위해 7년이라는 긴 세월을 땅속 어두운 곳에서 애벌레로 지낸다고 합니다. 짧은 생애이지만 자신들에게 주어진 참 삶을 위해 그 긴 고통의 시간을 기다리는 매미의 삶이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모님의 고통의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성모님의 삶은 인간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을 때,
그야말로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처녀인 몸으로 예수님을 잉태하는 순간부터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고, 예수님의 시신을 품에 안은 마지막 순간까지, 33년이라는 짧은 예수님의 생애를 위해서 너무나도 큰 고통을 끌어안고 사신 분입니다.

세상의 어떤 어머니라도
자식이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배신당하고, 죄인으로 취급받아 사형당하는 것을 지켜본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요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로부터 미쳤다,
마귀 들렸다는 등 온갖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았고, 삼년 동안이나 함께 했던 제자들에게서 배신당하는 것을 어머니는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이 모든 고통을 다 이겨냈습니다. 그렇기에 성모님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고통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고통은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피할 수 있는 고통이라면, 일부러 고통을 당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고통도 있음을 우리는 체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내 몸에 종양이 생겼는데
고통이 싫다고 수술을 거부한다면 그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종양을 없애기 위해서 수술에 필요한 칼은 피를 흘리게 하고, 고통을 당하게 하지만, 이 칼은 치유의 칼이고 생명의 칼입니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인 것입니다.

소중한 한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서,
어머니는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이것 역시 피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어떤 때는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떠나야 하는 고통도 있습니다.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 겪는 고통도 있고, 자녀를 위해서 겪는 고통, 부모님을 위해서 겪는 고통도 있습니다.

모두가 피할 수 없는 고통이고,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고통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은 고통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나은 삶을 이루게 해 줍니다.

고통은 우리를 힘들게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의 활기를 불어넣어 주기도 하고, 참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고통을 통해서 참 사랑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인지를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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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해도에서 청어를 잡는 영국의 어부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고생 고생해서 어렵게 잡은 고기를 영국에 가져오면, 성질이 급한 청어는 이미 죽어 있고, 결국 값을 제대로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한 어부는 언제나 살아있는 청어를 가져왔습니다.
어부들이 도대체 어떻게 청어를 살려서 가져올 수 있었는지 물었습니다. 그 답은 청어의 천적, 즉 청어를 잡아먹고 사는 물고기 한 마리를 청어들과 함께 넣어 가지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청어들은 잡혀먹지 않기 위해서 영국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도망 다니다 보니까 죽을 틈이 없었던 것입니다. 좋은 조건에서 운반되던 청어는 다 죽어버렸지만, 고통 중에 있던 청어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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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듯이,
고통 없는 영광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을 지내면서
내가 이겨내야 할 피할 수 없는 고통은 무엇인지를 생각 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이 내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함께 생각 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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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최현욱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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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오늘 고통의 성모 마리아를 기념합니다.
아들 예수의 고통에 온전히 동참하신 성모님의 고통을 생각합니다. 마리아의 운명은 참 기구합니다. 처녀의 몸이면서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들 예수를 잉태하게 됩니다.

일찍이 예언자 시므온은 다음과 같이 예언합니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리니, 그대의 영혼이 꿰찔리리라.” 이미 성모님의 고통은 시므온 예언자를 통해서 예고되었습니다.

성모님은
헤로데를 피해서 밤에 요셉과 아기 예수와 함께 이집트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성모님은
성전에 남아있던 아들 예수를 사흘 동안 찾아 헤매셨습니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골고타 언덕길에서 서로 만나셨습니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아들 예수의 고통을 바라보는 어머니 마리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생각해봅니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를 못 박는 장면을 두 눈으로 보셔야 했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서서히 죽어가는 아들 예수의 죽음을 지켜보셔야 했습니다.

정말 성모님의 마음은
일찍이 시므온 예언자가 예언한 대로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고 요한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는 아들의 고통에 함께 동참합니다. 아들 옆에서 성모님은 죽음 없이 순교의 고통을 맛보셨습니다.

죽음을 앞둔 아들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아들 예수가 힘겹게 말씀하시는 모습을 바라보는 성모 마리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어머니를 생각해서 요한을 당신의 아들로 주신 아들 예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한편 어머니보다 먼저 자신이 이 세상을 마쳐야 하는 아들 예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아마 서로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지 않았을까요?

왜 교회는 오늘 기구한 운명을 살다가 하느님 나라에 가신 고통의 성모 마리아를 기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고통이 따름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복된 고통입니다. 바로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는 고통입니다.

성모님께서 받으신 고통은
인간의 상상을 훨씬 초월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모든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아들 예수의 고통에 기꺼이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믿음이었습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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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배재근 F.하비에르 신부
  |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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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 교회는 고통의 성모 마리아는 기억합니다.
고통의 성모 마리아는 예수님의 십자가 현양 사건과 밀접한 관계를 가집니다. 그래서 오늘 교회는 본기도에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아드님 곁에 서서 성모님도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나누게 하셨으니, 주님의 교회도 그리스도와 함께 수난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하소서.”하고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기도를 통해서 고통의 성모 마리아의 의미를 보다 깊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합니다.
그 잉태는 마리아의 응답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응답은 하느님께서 강생을 통해서 행하고자 하시는 구원에 대한 마리아의 협력입니다. 그 강생 사건이후에 성모님이 된 마리아는 예언자 시메온을 통해서 예수님과 당신에 관한 예언을 듣게 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루카 복음 2장 34ㄴ절-35절)

이 예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겪게 되실 고통과 함께 그 고통에 동참해야 하는 마리아의 운명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마리아의 반응은 성경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선포된 말씀을 통해서 마리아가 그 예언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의 순간 예수님께서 당신 어머니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을 전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에게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를 부탁하십니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십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겪으시는 극한 고통 속에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고통 속에서 마리아는 침묵합니다.

침묵은 동의(同意)의 표현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극한 고통에 말없이 동참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리아는 침묵 속에서 그 고통을 동감(同感)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당신의 제자를 부탁합니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 부탁의 말씀은
우리 교회를 성모님께 맡기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통에 함께 동참하신 당신의 어머니께 교회를 맡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고통을 함께 하신 성모 마리아를 기억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시메온의 예언에 대해서 마리아가 성모님으로서 어떻게 그 고통을 받아들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그 고통에 말없이 동참하고 그 고통에 말없이 동감(同感)했습니다.

고통은 선(善)이 아닙니다.
고통은 피해야 하는 악(惡)입니다. 그러나 고통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악을 선으로 승화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을 온 몸과 마음으로 끌어 안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악(惡)의 십자가는 선(善)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성모님께서도 그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침묵으로 그 십자가의 고통에 동참하셨습니다. 그리고 동감(同感)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모님 안에서 십자가는 아들을 죽이는 악(惡)이 아니라 세상을 살리는 선(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많은 고통과
그 고통을 통해서 일어나는 악(惡)을 체험합니다. 우리가 그 고통을 피할 때 그 고통은 우리에게 악(惡)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고통을 온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 악(惡)은 세상과 사람을 살리는 선(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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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한종민 신부
  |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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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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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어머니는 저를 포함해 아들 셋을 낳으셨습니다. 막내아들이 세 살 되던 해에 일찍 남편을 저 세상에 보내고 막막한 곳에서 세상을 받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갓 결혼한 젊은 20대의 여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리 많지 않았고,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았습니다. 다니던 공장을 그만두고, 회사 앞의 조그마한 가게에서 국밥집을 차려서 집안을 꾸려나갔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나서 어머니의 일을 도와드릴 때에 막내아들은 허름한 국밥집에서 국밥을 나르는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볼까 어머니가 도움을 청하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사제품을 받고 첫 미사를 마친 막내아들에게 어머니는 “김 신부님은 어렵게 자랐기 때문에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신자들을 더 많이 생각해주고 품어주는 사제가 되길 바랍니다”라는 말씀을 건네주었습니다.

그 막내아들이 이렇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아픔을 묵상하다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성모님이 당한 고통은 사랑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성모님의 고통의 길에 주님 십자가의 길이 보입니다. 성모님의 삶이 아름다운 것은 단지 아픔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이고 주님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사랑함으로 인해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문득 지금은 중풍으로 불편하시지만 어머니가 해주시는 국밥이 먹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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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인한 신부
  |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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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칠고 - 하느님 은총과 자비의 물리적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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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교회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어 죽으심으로써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유일한 길이며, 나아가 부활과 생명, 구원과 해방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 영광스러운 십자가 안에는 말 못할 고통이 묻혀있다. 바로 십자가 아래에서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으로 아들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한 여인의 고통이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 성모 마리아께서
일생을 통하여 아들 예수로 말미암아 받으신 고통을 기억하면서 그 고통을 나누고자 한다. 아울러 구원의 역사 안에서 차지하는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며, 그 고통이 그분만의 고통이 아니라 아직도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세상 구원을 위한 우리 모두의 고통임을 각오하려 한다. 그러므로 오늘 기념일이 어제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직접 연결되어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성모께서 겪으신 고통에 대한
구원사적 반성(反省)은 이미 중세기 이전부터 있어왔다. 중세기에 이르러 ‘성모님의 일곱 가지 고통’, 즉 성모칠고(聖母七苦)를 일부 지방교회에서 기념하기 시작하였고, 1600년대에는 수도회로 확산되었고, 1814년 비오 7세 교황이 전체교회에 보급시켰다.

성모님께서는 평생을 두고 아들로 말미암아 마음 쓰시고 속을 태우셨겠지만 그 가운데 일곱 가지 고통을 알아보자.

① 예언자 시므온의 예언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루가 2,34-35)

② 성가정의 이집트 피난

“주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어서 일어나 아가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대가 알려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하고 일러주었다. 요셉은 일어나 그 밤으로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서 살았다.”(마태 2,13-15)

③ 성전에 남아있던 예수를 사흘 동안 찾아 헤맴

“사흘 만에 성전에서 예수를 찾아내고, ‘얘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하고 말하였다.”(루가 2,41-52)

④ 골고타로 향한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서 모자(母子) 서로 상봉하심

“예수께서는 마침내 그들의 손에 넘어가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성밖을 나가 히브리말로 골고타라는 곳으로 향하셨다. 골고타라는 말은 해골산이라는 뜻이다.”(요한 19,16-17)

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 주사위를 던져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마태 27,35)

⑥ 예수님의 시신을 내려 품에 앉으심

“빌라도의 허락을 받아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은 예수의 시체를 내렸다.”(요한 19,38)

⑦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모심

“그 시체를 내려다가 고운 베로 싸서 바위를 파 만든 무덤에 모셨다.”(루가 23,53)

성모칠고 중 ④~⑦에 관한 성서상의 정확한 기록은 없다.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의 길을 동행하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장면을 멀리서나마 지켜보았던 여인들을 일일이 언급하고 있으나(마태 27,55-56; 마르 15,40-41; 루가 23,49), 성모님에 대한 언급은 없다. 성모님에 대한 유일한 성서상의 언급은 요한복음사가의 오늘 복음에 해당하는 대목이다.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있었던 어머니 마리아와 애제자(愛弟子) 요한을 특별히 부각시키고 있다. 복음서를 종합하여 보면 성모 마리아는 과월절을 시작하던 새벽시간에 예수께서 붙잡혔다는 소식을 도망쳐 나온 제자들로부터(마태 26,56) 전해 듣고 달려와, 줄곧 아들 예수 근처에 머물러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리아는 아들의 십자가 길을 동행하였고 가능한 십자가 곁에 있었던 것이다.

말하기는 쉽지만,
마리아는 어떻게 이 모든 시간들을 이겨내었을까? “아들 수난 보는 성모, 맘을 에는 비통 중에 하염없이 우시네.”(부속가 4) 인간의 어떤 말도 표현도 성모님의 고통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성모님께서 겪으신 고통이 어디 칠고(七苦)뿐이겠는가? 아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수많은 고통이 늘 그분과 함께 했을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26절) 오늘 십자가상의 예수님은 당신이 어머니 마리아와 하나임을 확인하신다.

그리고 애제자에게도 말씀하신다.
“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27절)

이렇게 성모님은 마음을 애는 고통 중에 십자가의 신비로 탄생되는 교회의 어머니요 우리 모두의 어머니로 우뚝 서신다. 그분은 일생을 고통으로,

그러나
포기나 좌절함이 없이 아들과 하느님의 뜻을 좇아 끝까지 인내와 겸손으로 구원사업에 협력하셨다. 그러기에 성모께서 받으신 고통과 아픔은 하느님 크신 은총과 자비의 물리적(物理的) 순간들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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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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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고통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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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서 있었다.

진주조개는
속살을 파고드는 진주핵(珍珠核)을 품고 아픔의 세월을 견딥니다. 진주(珍珠)가 커지면서 아픔도 함께 커집니다. 인고(忍苦)의 세월이 지난 후 그 무엇보다 영롱하고 단단한 진주(珍珠)가 태어납니다. 세상 사람들은 진주(珍珠)의 영롱함에 감탄합니다. 진주의 영롱함은 아픔이 뭉쳐져 만들어진 것입니다. 호사(豪奢)와 향락은 쌓이고 뭉쳐져도 빛이 나지 않습니다. 악취가 날 뿐이지요. 고통은 아프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여인 중에 복된 여인’(루카 복음 1장 42절)입니다.
잘 난 남편이나 출세한 아들 때문에 복된 여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부귀영화(富貴榮華)와 호사스러움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복된 여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라는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복된 여인이 되지 않았습니다(루카 복음 11장 28절). 죽음보다 더 큰 고통 때문에 복된 여인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 위에
인생의 뿌리를 내렸기에 복된 여인이 되었습니다(루카 복음 11장 28절).

십자가 아래에서
죽어가는 아들의 비명을 듣고도 혼절(昏絶)하지 않는 독함으로 복된 여인이 되었습니다. 고통 중에서도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복음 1장 38절)하고 기도하며 서있을 수 있었기에 복된 여인이 되었습니다. 마리아의 복됨은 진주(珍珠)보다 더 영롱하게 빛납니다. 고통을 피하려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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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강영구 신부
  |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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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책에서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인 오늘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는 구세사에서 결정적인 순간을 마음에 되새기고,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아드님과 함께 수난하시는’ 어머니를 기념하는 날이다”라는 글을 읽으면서 머리의 다른 한 구석에서는 언젠가 어느 책에서 읽은 글이 생각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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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에 사는 아주머니가
서너 살쯤 되는 자기 아이를 데리고 오랜만에 자기의 집에 놀러 왔답니다. 반가운 마음에 차를 대접하여 함께 마시면서 한참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는데 아이가 그 집에 있는 어항에 손을 집어넣어 물고기를 잡았다가 다시 물속에 집어던지고는 하더랍니다. 주인아주머니는 직접 이야기하기도 그렇고 해서 엄마가 아이를 직접 만류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엄마를 쳐다보았답니다. 그랬더니 아이의 엄마는 아이가 재미있게 노는 것에만 만족하여 아이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피해를 주고 있는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아주 흡족한 얼굴을 하고 있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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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어머니들 중에서
자신의 자녀들이 잘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비단 앞에서 든 이야기가 아니라 하더라도 어머니가 “요즈음의 젊은 어머니들에게 있어서는 자녀가 잘되는 것, 자녀에게 좋은 것이란 도대체 어떠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끔 행동하는 경우가 꽤나 자주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하기야 비단 젊은 어머니가 아니라 하더라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지금 당장 자신이나 자신에게 가까운 사람에게 편하고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만을 옳고 좋은 것으로 여기고, 그렇지 않으면 잘못되었거나 나쁜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어머니가 어떠니 하는 것은 어쩌면 단순한 책임전가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의 미래인 아이의 교육을 상당부분 담당하고 있는 어머니가 당장에 아이가 좋아하거나 아이에게 편하기만 한다면 그것 뿐, 그것이 장차 다른 사람이나 아이가 스스로 책임지면서 살아가야할 미래의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에 대하여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에는 문제가, 아주 큰 문제임에 틀림없습니다.

아주 똑똑하다고 인정받는 어머니도
어찌된 일인지 아이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처럼 너무나 근시안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듯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머니는 백번 양보하여 좋은 어머니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결코 현명한 어머니라고 불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좋지만 현명함에 있어서
다소 부족한 듯이 보이는 오늘날의 어머니에게 마리아는 현명한 어머니로서도 귀감이 되는 것 같습니다.

마리아께서는
다른 어떤 어머니보다 훨씬 어려운 상황에서 키운 아들이지만 아이가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아들이 자신의 영달을 위한 길을 포기하고 모든 사람을 위한 힘든 길을 택하였지만 그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묵묵히 뒤따르셨습니다.

어찌 성모님이라고 하여 아들이 잘 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셨겠습니까.

하지만
그 분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하여 자신의 한 몸을 기꺼이 바치시려는 아들의 길을 고통과 고난을 감수하고 함께 해 주셨습니다. 당장의 눈앞의 이익이나 편안함이 아니라 미래에 모든 사람이 잘 될 수 있는 길을 옳고 선한 것으로 받아들이셨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길로 걷는 아들을
마지막까지 동행하신 마리아의 이러한 마음으로 자녀들을 대하고 이웃들을 대하였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고통 중에서 예수님의 곁에 서 계셨던 성모님과 함께 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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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구경국 알로이시오 신부
  | 09.15
460 45.6%
[수원] 구원의 협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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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다.
교회는 그 다음 날인 오늘을 성모의 통고 축일을 지낸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 날에 지내는 이유는 마리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음을, 즉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깊이 참여하였음을 드러낸다.

이 축일이 오늘로 확정되기 전에는
성지주일 전 금요일에 행해 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마리아에 대한 신심 때문에 한 때 성모님을 "공동 구속자"라는 칭호까지 부여하려 하였으나, 그것은 아니고, "협력자"로서의 역할을 다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것에서부터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 순간까지 어머니로서의 고통을 감수하시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신 성모님의 모습이다. 우리가 작은 마리아가 될 때, 또 다른 구원의 협력자로서 하느님 앞에 서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마리아는
자신의 삶을 항상 그 영혼을 찌를 것이라는(루가 2,35) 시메온의 예언된 예리한 칼에 대한 전망 속에서 살았다. 이 칼이 바로 그의 십자가이다.

이는
이미 파스카 축제 후에 성전에 남아있던 예수를 잃어버림으로 시작되었다(루가 2,41-52). 그리고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에 또한 마리아도 어떤 모습으로 예수께서 가져오신 보편적 형제애를 이룰지를 배우기 위해 당신의 "학교"에서 형성되어야 했다. 그것은 항상 "얻기"위해서 "잃어버림"의 삼위일체적 역동성에 더욱 이끌 것이다.

마리아의 생애에서
절정의 그리고 더욱 고통스러운 순간은 그녀가 십자가의 발 앞에 있으면서 예수의 외침을 들을 때였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 27,46; 마르 15,34).

가장 큰 잃어버림의 순간이다.
십자가 밑의 마리아의 고통은 아들의 고통과 일치한다. 아들의 외침은 당신이 전적으로 하느님과 인류 사이의 일치를 재건하기 위해 인간적 조건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 사랑의 표현이며 아버지께 대한 영원한 응답의 반향이다.

마리아의 침묵의 외침은
당신 아들의 버림에 대한 피조물의 메아리이다. 이 순간에 그녀의 참 정체성이 실현되었다. 당신 아들의 "동반자"가 되도록 영원으로부터 선택되셨고, 이제 처신한 것이 무엇인지 깊은 곳까지 계시되었다.

마리아는 아버지로부터
당신의 아들에게 주어진, 아들이 자신의 버림받음으로 실현할 구원된 새로운 인류와 피조물의 가시적 표징으로 예수 앞에 있다.

그러나 예수는 이 승리에서 또한 자신을 떼어놓아야 한다.
그분은 마리아를 더 이상 어머니로 보지 않는다. 그리고 또 마리아는 가장 위대한 보물, 그녀 안에서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첫 번 잉태의 결실인 아들에게서 떨어져야 한다.

지상에서의 예수의 마지막 행위는
실제로 마리아의 모성을 다른 아들, 전 인류를 대표하는 요한에게로 옮기는 것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어머니와 그 옆에 있는 사랑하던 제자를 보시면서, 어머니에게 `여인이여, 당신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제자에게, `너의 어머니이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부터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6-27).

요한 복음이 가리키듯이
마리아에게는 요한과 함께 십자가의 발 앞에 있음으로써 두 번째 잉태가 실현된다. 그녀의 고통 안에서 십자가를 통하여 쇄신되고 예수가 된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마리아는
이제 당신의 아들을 잃어야 하는 아픔까지 겪으신다. 아들이 죽는 것보다도 이제 다른 아들을 가지시게 된다. 이것이 두 번째 잉태라는 것이다. 그로써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이며,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다.

마리아는 이제 예수님의 어머니로만 머물지 않고
새로운 공동체의 어머니가 되심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혈연관계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관계에서 형성되는 관계이다. 즉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은 내 어머니요, 내 형제요, 자매이다"(마르 3,35)라는 말씀의 확인이라고 하겠다.

"자기 집에"라는 표현은
단순히 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모든 소유를 말한다.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모든 삶을 함께 했다는 의미이다. "모셨다"라는 표현은 제자가 마리아에게 모든 것을 개방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마리아와 제자 사이에 새롭게 맺은 가족관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오늘 이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자신이 더욱 마리아의 삶을 본받고, 이 어머니의 고통을 우리도 함께 하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참된 제물을 바칠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며 도우심을 구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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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09.15
460 45.6%
성지순례 때 에페소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 산속에 성모님이 마지막 여생을 보내신 집이라 추정되는 작은 경당에서 동기 신부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던 때가 기억납니다. 아들 예수의 죽음을 보고 요한과 함께 에페소로 와서 저 멀리 에게해를 바라보고 말없이 돌아서서 산속에 들어가 살았을 성모님. 그분의 마음이 참으로 강하게 와 닿았던 순간이었습니다.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자신의 가슴에 자식을 묻는다고 하는데 아마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이 바로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는 고통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저의 이모님도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군대에서 잃고 20년이 더 지났지만 아직도 그냥 가끔 눈물이 난다고 합니다.

죽어가는 아들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고통,
그것도 인간이 만들어 낸 최악의 사형제도인 십자가 위에서 서서히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절규하면서 죽어가야 했던 아들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고통을 어찌 말로 담아낼 수 있을까요?

그래서 교회는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날에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아드님과 함께 수난 하시는 어머니를 기념하는 날로 성모님의 고통을 기념합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모칠고를 이야기 합니다.

성모님의 일곱가지 고통을 같이 묵상하도록 합시다.

첫째,
예언자 시므온의 예언입니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 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루카 복음 2장 34절-35절)

둘째,
성가정의 이집트 피난입니다. “주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죽이려하니 어서 일어나 아가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알려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하고 일러 주었다. 요셉은 일어나 그 밤으로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서 살았다.”(마태오 복음 2장 13절-15절)

셋째,
성전에 남아 있던 예수를 사흘동안 찾아 헤매는 사건입니다. “사흘 만에 성전에 예수를 찾아내고 ‘애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는다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하고 말하였다.”(루카 복음 2장 41절-52절)

넷째,
골고타로 향한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서 모자 서로 상봉하시는 모습입니다. 특히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말없이 따라가시며 예수님을 바라보는 성모님의 눈길은 참으로 가슴 아픈 장면 이였습니다.

다섯째,
예수님이 악인으로부터 치욕을 당하시고 웃음거리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신음하며 괴로워하는 모습, 결국 축 늘어진 시신을 바라보는 성모님의 마음, 그것은 아드님의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봄으로써 당신께서 몸소 죽음에 참여하시는 것이였습니다. 육신의 죽음보다 더한 죽음을 묵묵히 바라보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 베르나르도는 성모님께 기꺼이 “영신의 순교자”라는 찬사를 보냅니다.

여섯째
예수님의 시신을 내려 품에 앉으십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곧 통고의 성모상이 이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일곱째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모시는 성모님입니다. “그 시체를 내려다가 고운베로 싸서 바위를 파 만든 무덤에 모셨다”(루카 복음 23장 53절)고 했습니다. 이제 성모님께서는 바로 이 죽음을 통해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를 그리고 우리를 당신 품에 안으셨습니다.

성모님께서 자신의 가슴에 묻는 이는 예수님 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입니다.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는 예수님의 유언은 성모님 안에서 그대로 이루어져서, 성모님께서는 이제 믿는 이들의 어머니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계시기에 우리는 참 행복합니다. “고통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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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최광경 비오 신부
  |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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