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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서울] 기다린다는 것, 사실 말처럼 쉽지 않다.
조회수 | 33
작성일 | 20.09.15
[인천] 기다린다는 것, 사실 말처럼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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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타임’지에는
흥미로운 실험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네 살 된 어린이들을 방 안에 들어가게 한 다음,
책상에 과자가 담긴 접수를 놓아두었습니다. 연구원은 어린이들에게 잠깐 볼일이 있어 나갔다 올 테니 먹지 말고 기다리라고 말했지요. 그리고 그동안 과자를 먹지 않은 아이에게는 한 개 더 준다고 덧붙였습니다.

연구원은 숨어서 아이들을 관찰했지요.
한 아이는 연구원이 나가자마자 과자를 먹었고, 어떤 아이는 잠시 참다가 견디지 못하고 먹어 버렸습니다. 또 다른 아이들은 먹지 않고 연구원이 오기를 끝까지 기다렸습니다. 잠시 후 연구원은 안으로 들어가서 먹지 않은 아이들에게 약속대로 과자를 한 개 더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자라서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다시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연구 결과는 놀라웠지요. 전에 참지 못하고 과자를 먹었던 아이들은 유혹이 올 때 쉽게 넘어가고 금방 화를 내거나 고집이 셌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참았던 아이들은 신뢰할 수 있는 품성을 지닌 학생으로 성장했으며 학업성적도 뛰어났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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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릴 줄 안다는 것. 사실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내가 있어야 자신이 원하는 것도 결국은 얻게 된다는 것을 자주 체험하게 됩니다. 즉, 이러한 기다림과 인내를 통해서 오히려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어제는 이런 체험을 하나 하게 되었습니다.
인천에서 회합을 끝내고 다시 성지로 들어오고 있는 중이었지요. 평소와는 다르게 이상하게도 길이 많이 막히더군요. 그래서 점점 더 피곤함을 느끼면서 천천히 운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앞을 갑자기 끼어들어오는 차가 있었습니다. 깜짝 놀랐지요. 그래서 경적을 울렸지만, 이 차는 이번에는 옆 차선으로 다시 끼어들어갑니다. 이렇게 차선을 계속 변경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려는 것이었지요.

그 모습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빠서 그러겠지 뭐.’라는 생각으로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차를 잠시 뒤에 다시 볼 수가 있었습니다. 글쎄 강화대교를 막 넘어가려고 하는데, 바로 그 강화대교 검문에 걸려서 갓길에 차가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빨리 가려고 차선을 변경하면서 운전을 했지만, 결국은 저보다도 늦게 가게 되었던 것이지요.

서두른다고,
또 ‘빨리 빨리’를 아무리 외친들 꼭 내가 원하는 데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천천히 인내심을 가지고 행했을 때, 이루어지는 경우가 더 많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에 대해서 어떤 분이나 다 동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 앞에서만큼은 그러지 못하는지요?
즉, 주님께 기도하고 난 뒤에는 곧바로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는 것이지요. 기도의 응답이 지금 당장 이루어져야 한다고 ‘서두름’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그 기도의 응답이 보이지 않는다고 원망할 때는 얼마나 많았는지…….

오늘 우리들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아마 성모님처럼 끝까지 기다리신 분이 있을까요? 15세의 젊은 나이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를 갖게 된 뒤부터, 그 아기가 어른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숨지는 순간까지도 하느님의 일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진리라는 사실을 굳게 믿으면서,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끝까지 기다리십니다.

이러한 기다림이 바로 우리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는 비결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범을 배우라고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까지 서두르기만 했던 내 자신을 반성하면서, 성모님의 기다림을 내 마음에 새길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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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460 73.6%
[서울] 성모님의 마음에 새겨진 예수님의 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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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어린 아기들은 하루에 평균 400번 정도를 웃는다고 합니다.
그에 비해 40세가 넘는 어른은 하루 평균 15번을 웃는답니다. 물론 더 많이 웃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번도 안 웃는 사람도 있고 화만 내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요.

웃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5분을 웃으면 5시간을 운동한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또 사람의 얼굴 표정은 인체 내 위장의 모습과 같아서 찡그린 인상을 가진 사람은 위의 모양도 찌그러져 있다고 합니다. 웃는 것이 이렇게 건강에도 좋고 보기에도 좋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잘 안 웃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어제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었고 오늘은 󰡐성모 마리아 고통 축일󰡑입니다. 이러니 웃을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어제는 주님의 십자가를 기념하고 오늘은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것은 성모 마리아께서도 아드님의 십자가 길로 고통을 함께 걷고, 아파하셨기 때문에 오늘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로 지내는 것입니다.

천주교는 밝고 활기 찬 분위기보다는
절제되고 엄숙한 분위기를 요구함으로
신자들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불교와 개신교, 천주교의
신자나 성직자들의 모습과 분위기는 조금씩 다 다릅니다. 불교 신자나 스님의 모습을 떠올리면 부처님의 모습을 닮은 늘어진 귀와 편안한 얼굴, 불룩 나온 배가 먼저 연상이 됩니다. 또 개신교 신자와 목사님을 생각하면 활기차고 밝으나 좀 가벼운 듯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요. 그에 비해서 천주교 신자와 사제, 수도자들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무겁습니다. 밝고 활기 차기 보다는 근엄하고 절제된 분위기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내의 가르침과도 무관하지 않지요.
우리 천주교는 끊임없이 고통을 강조하고 희생을 요구하며 드러내기보다는 감추고 절제할 것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마치 천주교 신자는
오히려 고통을 좋아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십자가의 고통을 묵상하게 하고, 성당에만 가면 무릎을 끊고󰡐내 탓이오󰡑를 외웁니다. 그렇게 고독한 수도자 같은 인상을 쓰고 있어야지 아주 신심이 깊은 신자라는 느낌이 오는 것도 같습니다.

하느님 앞에만 서면
왜 이렇게 작아지고 주눅이 들게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신자가 되면 지켜야 할 것은 왜 그리 많습니까? 신앙 생활을 오래한 할머니들은 이렇게도 이야기합니다.

󰡒신부님, 용서해 주세요. 사는 게 다 죄지요.󰡓

이러니 웃을 일이 있겠습니까?
마치 부활이 없는 십자가만의 신앙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신앙의 핵심은
궁극적으로 십자가의 신앙이 아니고 부활의 신앙입니다. 십자가는 부활에 이르기 위한 과정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죽음을 넘어선 부활은 영광이고 기쁨이며 그 자체가 희망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믿는 신앙인은 궁극적으로 기쁨과 희망과 영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인은
어떠한 경우에도 실망하지 않고 어떠한 난관 속에서도 희망의 싹을 찾아내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슬픔과 어려움이 닥쳐와도 부활의 그 날까지 인내하며 주님 안에서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신앙인인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성당에만 오면󰡐내 탓이오󰡑하면서 죄인이 되어버립니다. 결코 바른 모습은 아니지요.

교회는
왜 예수님과 성모님의 극심한 고통의 순간들을 󰡐성모 통고 축일󰡑이나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등으로 다양하게 경축하며 기념하고 기리는 것일까요?

이유가 있지요.

우리의 삶은
그렇게 부활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십자가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인간은 고통의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고 그것을 지나서만이 부활의 영광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면
성숙할 수도 없고 발전할 수도 없습니다. 즐겁고 좋은 일만 있다면 사람은 턱없이 교만해지기 십상입니다. 고통 안에서 인간의 본질과 하느님을 깨닫게 되지요.

모순과 한계를 지닌 인간의 삶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는 고통들을 겪으며 우리는 부활을 희망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로마서 5장 3절-4절)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
바오로 사도 역시 고통 중에 바라보는 희망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시련과 고통이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기쁨과 희망을 잉태하는 바탕이 된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큰 십자가를 일생 지신 분이십니다. 루카 복음에서 ‘시메온’은 성모님께 이런 예언을 하고 있지요.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복음 2장 35절)

이 예언처럼 일생을 하느님을 위해서
또 아들 예수님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사신 분이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는 어려움을 겪었고,
아이를 낳자마자 먼 이집트로 피신을 가야했으며, 그 아들이 십자가 처형을 선고받고 골고타 언덕으로 끌려가는 길을 함께 걸으셨고, 오늘 복음에서 알 수 있듯이 마침내는 십자가에서 절규하면서 죽어 가는 아들을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참으로 처절한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이 모든 고통을
하느님 안에서 순명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과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듯이 성모님께서도 마찬가지로 하느님과 아들이신 예수님,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이 고통들을 극복해 내시고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셨습니다. 부활을 희망하고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 고통이 부활로 승화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고 어떠한 믿음도 없는 고통은 처절하고 단지 허무할 따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시대가 고통스럽다고 이야기하지만 시실 우리는 너무나도 기름진 삶 속에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고통스러운 것뿐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속에서 만들어지는 어려움은 우리에게 희망과 부활을 제시해주지만 나의 욕심을 따르는데서 생기는 어려움들은 결코 부활을 잉태하지 않습니다.

나를 죽이고
이웃을 죽이고 모두를 죽이는 파멸을 가져올 뿐이지요. 반면에 세상을 살면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겪게 되는 모든 고통들을 성모님과 예수님처럼 승화시킬 때 그것은 단지 허무한 시련이나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자 부활입니다. 나를 살리고 너를 살리고 모두를 살리지요.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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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잎새>로 유명한 소설가 ‘오 헨리’ 역시 시련과 고통을 승화시킨 사람입니다.

‘오 헨리’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학교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카우보이, 점원, 직공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은행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지요. 그러나 곧 공금횡령죄로 체포되어 3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3년이란 절망적인 시간을 보내면서 헨리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깊이 이해를 하고, 인간이 갖고 있는 위대한 가능성을 깨달았지요. 결국 복역이라는 고통은 한 평범한 사람이 훌륭한 작가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석방된 뒤 헨리는 감옥 생활을 하면서 얻은 풍부한 감성과 경험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작가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불과 10년 남짓한 작가 활동 기간 동안 그는 무려 300여 편에 가까운 단편소설을 썼습니다. 가난한 서민과 빈민들의 애환을 다채롭게 그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가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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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의미한 고통 속에서도 나를 찾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도 예외 없이 생로병사의 과정 속에서 크고 작은 고통들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고통이 하느님과 나를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면
새로운 삶을 찾아내는 희망으로 열매 맺을 수 있지요. 피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고통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에는 죽음이라는 극한적인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것이 유한한 우리 인간이지요.

처절한 십자가 밑에서의 절규 속에서도,
그리고 장사 지낸 지 사흘이나 지나 더 이상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곳에서도 하느님의 뜻 안에서 희망을 잃지 않았던 성모 마리아의 믿음을 우리는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성모님께서 그 모든 고통을 승화시켜 부활에 동참하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성모 통고 기념일의 의미이지요.

오늘 하루도 그렇게 마음 편한 시간만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웃으며 밝게 지내야 하겠지만 부딪히는 많은 문제들로 어찌할 바 모를 괴로움에 처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성모 마리아의 고통에 비한다면 그것은 별 것 아닐 수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결국 승리하셨고 부활에 동참하셨듯이,
믿고 노력한다면 우리 역시 부활의 영광에 이를 수 있음을 여러분과 함께 경축하는 뜻 깊은 날입니다. 어려움 중에도 기쁘게 노력하고 희망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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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 09.15
460 73.6%
유능한 건축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동안 수없이 많은 건물을 지었고, 그가 짓는 아름다운 건물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의 갈채를 받았지요. 그렇게 수십 년이 흐른 뒤 그 역시 은퇴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아내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여유로운 말년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사장에게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훌륭한 건축가를 떠나보내는 것이 못내 아쉬웠던 사장은 그에게 집을 딱 한 채만 더 지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건축가는 사장의 간곡한 부탁에 집을 짓기는 했지만, 이번에도 멋진 집을 짓는다면 사장이 자신을 더욱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잔머리를 굴려서 대충대충 그리고 형편없는 집을 지었습니다.

집이 완공되자, 건축가는 집 열쇠를 사장에게 건네면서 말했지요.

“약속대로 집을 지었습니다. 이젠 고향으로 돌아가도 되죠?”

그런데 사장이 그의 피곤한 얼굴을 보며 어깨를 다독이더니 방금 그가 건넸던 열쇠를 다시 돌려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집은 자네에게 주는 은퇴 선물이네. 평생을 바쳐 나와 일한 것에 대한 보답이야.”

순간, 건축가의 얼굴에 낭패의 기색이 역력했지요. 건성으로 집을 지었던 자신이 더욱 더 부끄러워졌고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는 비만 오면 물이 새고 창문이 덜컹거리는 집에서 말년을 보내며 잔꾀를 부린데 대한 톡톡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지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잔머리 굴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아니 오히려 똑똑하기 때문에 잔머리를 굴리는 것처럼, 아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우직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 나가는 사람이 더욱 더 믿음이 가지 않습니까?

오늘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목격하시는 성모님을 기념하는 날이지요. 사실 우리들은 성모님의 아픔에 대해서는 떠올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영광스러운 면만을 그리고 행복해 보이는 면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픔을 이겨내지 않고서는 영광의 자리에 앉을 수 없음을 성모님께서는 직접 당신의 삶으로 보여주세요.

성모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처럼 잔꾀를 부리지 않습니다.
예수님 잉태의 소식에 대해서도 거부하지 않으며, 첫아이를 허름한 마구간에서 나야하는 서글픈 상황에서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또한 산후 조리도 못하고 이집트로 피신하는 것도 하느님의 깊은 뜻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서운한 말과 행동에 대해서도 단지 마음속에 간직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외아들의 수난을 함께 걸어가야만 했으며, 그 죽음을 직접 목격해야 하는 아픔을 겪어야 하는 순간에서도 하느님을 버리지 않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성모님을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어머니라고 하십니다. 바로 우리 역시 어머니의 삶을 본받아 믿음의 생활을 하라는 또 하나의 명령인 것입니다.

성모님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이제까지 나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의 이 작은 고통이 세상의 어떤 고통보다도 크다고 착각하면서 얼마나 많이 주님께 대한 믿음을 저버렸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믿음이 약한 저입니다.
이렇게 부족한 저입니다. 그래서 성모님께 청합니다.

“고통의 성모 마리아님,
이렇게 믿음이 약하고 부족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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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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