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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새로운 한 해는 하느님의 가장 큰 선물이다
조회수 | 3,066
작성일 | 07.12.02
묵상길잡이: 섣달 그믐과 정월 초하루는 해가 뜨고 지는 똑같은 하루이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하루이다. 누구에게나 일년은 365일이고 한 주간은 7일이지만,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추구하느냐에 따라 그 값어치는 전혀 달라질 수도 있다. 내가 어디쯤 가고 있으며, 이 시점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깨어 준비하며' 살아야겠다.

1. 우리 민족과 설 명절

우선 설 명절을 맞이한 신자 여러분의 가정에 하느님의 축복과 평화를 빕니다.
우리의 설 명절은 우리 민족사의 흐름에 따라 그 명암(明暗)을 함께 하여왔다. 삼국시대부터 민족적인 명절로 지켜오던 설날은 일제(日帝) 36년 동안 계속 박해를 받으며 겨우 그 명맥만을 유지해 오다가, 해방을 맞으면서 명절로서의 위치를 되찾았다. 그 후 5·16 쿠데타를 겪으면서 '조국 근대화'의 기치 아래 마치 설이라는 민족의 축일이 근대화의 큰 장애물인 양, 소위 군사문화에 의해 수난을 당하였다. 그러다가 '89년부터 다시 민족의 명절로서 대접을 받으며 복권(復權)된 셈이다.

우리 민족은 수많은 외침(外侵)을 받았지만 슬기롭게 난국을 극복하고 끈질기게 단일 민족으로서의 공동체성을 지키면서, 같은 언어풍습과 문화유산을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뿐만 아니라, 일찍이 혜초는 인도에까지 가서 불교를 배워와 불교문화를 꽃피웠고, 유교도 한국에서 그 학문적 체계를 크게 세웠다. 또한 우리 선조들은 스스로 진리를 탐구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계시진리를 깨달아 이 땅에 자생적 교회를 세우는 세계 교회사에 보기 드문 업적을 남겼다. 이렇게 볼 때 우리민족은 특별히 종교적이며 문화를 숭상(崇尙)한 민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설 명절은 이러한 민족의 맥락을 함께 생각하면서 조상님들의 은덕(恩德)을 기리기에 합당한 날이다.

2. 정월 초하루가 갖는 의미

어제 섣달 그믐과 정월 초하루는 해가 뜨고 지는 똑같은 하루이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하루이다. 인간은 영원에서 영원에로 흐르는 변함 없는 시간에 눈금을 매겨 날 수(數)를 헤아리며 시간의 흐름을 가늠한다. 그리고 그 시간에 저마다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추구한다. 누구에게는 똑같이 1년은 365일이고, 하루는 24시간이다. 그러나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수험생이 보내는 1년과, 무위도식(無爲徒食)하며 허송세월 하는 사람의 1년이 같은 값어치 일 수는 없다. 겉보기엔 같은 인생이지만 매일의 시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찾느냐에 따라 너무나 다른 삶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자기가 부여하고 추구하는 만큼의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제는 묵은해의 꼬리였지만, 오늘은 새해 첫날 모든 가능성과 기대와 꿈이, 터져 나오는 석류알처럼 가득한 희망의 새 날, 정월 초하루 설날이다.

우리에게 열린 새로운 한 해는 지난해의 모든 부족과 죄스러움을 기워 갚을 수 있는 속죄의 시간도 될 수 있으며, 새로운 계획과 꿈을 시험해 볼 수 있는 희망과 창조의 시간일 수도 있다. 이러한 은총의 시간을 허락하신 주님께 깊이 감사 드리자. 오늘 제2독서의 야고보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들은 내일 우리들의 생명이 어떻게 될지는 알지 못한다."(야고 4,13) 우리 주변에는 많은 이들이 이런 새로운 기회를 갖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시간은 모든 가능성이 다 담긴 가장 귀한 선물이다. 새해를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 드려야 마땅하다.

3. 날 수 셀 줄 아는 지혜.

이 귀한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내 인생을 내 멋대로 사는데 왜?" 라는 자세는 잘못이다. 태어나고 죽는 것이 내 뜻에 달린 것이 아니라면,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어찌 내 마음대로 낭비해도 좋을 시간이겠는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 저런 일을 할 것이다."(야고 4,15)는 제2독서의 말씀대로 우리의 시간이 온전히 주님의 손안에 있음을 한시도 잊지 말자. 우리의 존재가 주님께 달려있음을 잊을 때 경거망동(輕擧妄動)하게 된다.
나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지"를 스스로 헤아려야 한다. 이 시점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반성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의 말씀처럼 '주인이 돌아올 때를 기다리며 깨어 있는 종'(루가 18,12)의 자세로 사는 생활이다. 기도하며 매일을 초하루같이 새롭게 임해야 하겠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민수6,24-25) 이렇게 서로 은총을 빌어 주자.

마산교구 유영봉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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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고유의 최대 명절인 설날을 맞았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서 올 한 해에도 늘 건강하시고 또 여러분의 가정이 주님의 평화와 기쁨 누리는 가정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우리 교회는 우리 고유의 명절인 설날을 대축일로 정하고 우리 겨레 모두와 함께 설날의 기쁨을 함께 나누려고합니다. 설 혹은 설날을 한자로 신일(愼日)이라고 씁니다.

설날 곧 신일이란 근신하여 경거 망동을 삼가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슬기로운 우리의 조상들은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첫날에, 그 해의 운수가 결정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 속담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작이 좋아야 끝도 좋은 법입니다. 그래

서 우리 겨레는 옛날부터 한 해의 첫날을 설날이라고 이름을 짓고 몸과 마음가짐을 경건하고 바르게 가짐으로써, 벽사초복(辟邪招福), 즉 사악함을 몰아내고 복을 불러들였던 것입니다.

설날에 몸과 마음을 바르게 가지기 위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야 하는 법입니다. 사람들이 경거 망동하여 화를 불러들이고 재앙을 초래하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뜻에서 우리의 고유 명절인 설날은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날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리길이 멀다 하지 않고 고향을 찾아가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고,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나신 조상들을 위하여 제사를 바치는 것도 그 때문이고, 웃어른들에게 세배를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향을 찾음으로써,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됩니다. 고향이라는 텃밭에서 우리는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고향은 우리의 선조들이 살았던 곳이고, 친척과 가족들, 그리고 정답던 이웃들이 살던 곳입니다. 고향, 바로 그 속에서, 비로소 나는 내가 누구인가를 발견합니다. 타향도 정들면 고향이라 하지만, 그러나 타향은 남남이 모여서 사는 곳입니다. 타향에서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모두가 남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향은 그렇지 않습니다. 끈끈한 인정으로 서로 인간 관계를 맺고 살았던 곳이 고향입니다. 고향 안에서 나는 조상들의 후손이며, 한 가족의 대를 이어 온 사람이며, 아버지이며, 아저씨이며, 그리고 자식입니다. 그래서 고향은 어머니 품속같이 포근하며 아늑할 뿐 아니라 나의 위치를 발견할 수 있는 곳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명절이면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고향으로 고향으로 발길을 향하는 것은, 그곳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명절이면 조상들을 위한 차례를 지내는 것도 그렇습니다. 조상 제사를 통해서 우리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후손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이며,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온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단순히 우리보다 먼저 가신 조상들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우리의 후손들에게 조상들의 유업을 기리게 하고, 그분들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로부터 충효(忠孝)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던 우리 겨레는, 이렇게 제사를 통해서 선조들의 유업을 기리게 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법과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법을 터득하게 했던 것입니다.

정조 차례(正朝茶禮), 즉 설날 아침에 조상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고 나면, 웃어른들에게 새해의 첫 인사를 큰절로써 올렸는데, 이것을 세배라고 합니다. 이 세배 역시 우리 자신들이 누구이며, 또 나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확인하는 절차입니다. 어른들은 어른답게 아랫사람들로부터 세배를 받고, 절 값과 더불어서 덕담(德談)으로 아랫사람들에게 한 해의 축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아랫사람들은 어른들에게 세배를 함으로써,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의 자리를 알게 된다는 것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를 알게 되는 지름길이 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어머니는 어머니답게, 그리고 자식은 자식답게 행동하게 되는 것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 고유의 풍습을 잘 지키고 따를 때, 자연스럽게 몸에 익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경거 망동으로 화를 자초하게 되는 것은 자신이 누구이며, 그리고 자신이 앉을 자리와 설자리가 어디인지를 구별하지 못하고 함부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인륜 도덕의 타락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인륜도덕이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고, 또 자신의 신분에 걸맞지 않는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우리의 고유 명절인 설날은 이 땅의 인륜 도덕을 다시 세울 수 있는 참으로 좋은 풍습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우리의 신분이 무엇인지를 듣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분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종이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인이 언제 돌아오든지 주인을 반갑게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종은 참으로 축복받을 종입니다. 그러나 종이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 채, 마치 주인이나 되는 양 행동한다면 주인으로부터 호된 꾸중과 질책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종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란 무엇입니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자신의 신분과 위치를 제대로 깨닫고, 그 위치에서 신분에 걸맞은 생활을 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종다운 생활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합니다. 어머니는 어머니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독불장군처럼 혼자서는 결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서도 안됩니다.

人間이라는 글자가 잘 말해 주듯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사람다운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었을 때 여기에 참된 평화와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 고유의 명절인 설날은, 이런 관계를 바르게 해주는 축복된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명절을 우리에게 물려주신 우리 조상들은 오늘 우리와 같은 신앙 생활을 하지는 않았겠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보다 더 철저한 신앙인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선조들은 하늘을 두려워할 줄 알았고, 돌아가신 부모님들은 물론이지만 살아 계신 부모님들을 잘 모실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우의를 나누는 데도,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할 만큼 철저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고유의 명절을 잘 지냄으로써 우리 조상들의 삶을 본받아야 할 것이며, 동시에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이 아름다운 전통을 물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산업화, 도시화되면서 옛날 우리 조상들이 물려주었던 아름다운 전통들이 하나둘 사라져 간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서양의 온갖 사조와 풍물들이 밀려와도 우리가 우리의 것을 제대로 지키기만 한다면, 우리 민족 우리나라는 영원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우리 조상들의 슬기를 본받아서, 우리의 전통과 관습을 지키는 것은 하느님의 종다운 삶을 지키는 것이고,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일입니다.

오늘 설날이 여러분 모두에게 하느님의 축복 가득한 하루가 되기를 빕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하느님의 은총이 풍성히 내려서 올 한 해는 모두 건강하시고 또 소망하시는 일들이 성취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강영구 신부
  |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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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새해, 세수(歲首), 원단(元旦), 원일(元日), 신원(新元). 설날은 음력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본격적인 의미의 새해 첫날입니다.

첫 시작. 시작이란 항상 새로움을 안겨다 줍니다. 새로움은 미지의 것에 대한 긴장과 희망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다가올 사건과 사람, 사물에 대한 희망은 우리를 들뜨게도 하지만 미지의 것에 대한 긴장은 두려움과 초조함, 조심스러움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설날을 의미하는 한문 신일(愼日-근신, 조심하는 날)이라는 단어는 이것을 잘 말해줍니다.

새로움이 가져다주는 적당한 긴장과 적절한 희망은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주지만 지나친 긴장과 희망은 오히려 우리 삶을 힘들게도 합니다. 지나친 긴장은 자신감을 떨어뜨리고 사람을 소심하게 만들며, 지나친 희망은 지나친 자신감과 과잉의욕을 불러와 낭패를 보게 만듭니다. 하지만 새로움이 내포하고 있는 이 긴장과 희망은 새로움을 제대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새로움을 제대로 살아가는 것은 우리 삶에 새로움을 덧입히는 것으로써 주어진 삶에 충실할 때 가능해집니다. 순간순간 주어진 일들(그것이 설령 아픔과 고통일지라도)에 감사하며 충실할 때 우리 삶을 새롭게 덧입힐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충실한 삶이 오늘부터 시작되는 한 해를 축복과 은총의 시간들로 채울 것입니다. 설날 조상들과 부모님, 친지들과 이웃들에게 새해 인사를 건네는 것이 바로 서로에게 새로움을 덧입혀 지나간 시간들보다 다가올 시간들에 대한 충실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한해의 시작인 오늘 우리는 우리 삶에 새로움을 덧입히기 위해 복음에 나오는 충실한 종처럼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깨어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알지 못하기에 항상 허리를 동여매고 등불을 켜놓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인이 언제 돌아오더라도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충실함은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끊임없이 하느님 뜻을 찾으며, 부단히 하느님 뜻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내 뜻이 아닌 하느님 뜻을 찾고, 내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을 이야기하고, 나 자신이 아닌 하느님을 드러내려 노력할 때 깨어 있는 충실함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 우리는 오늘 또다시 하나의 점을 찍습니다. 시작이라는 새로움을, 새해 첫날 이라는 희망을. 이 점이 결코 무의미하게 끝나지 않도록, 희망과 축복이라는 하느님 은총으로 변화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삶의 충실함이, 하느님 자녀로서의 성실함이 결국 우리를 복되게 할 것입니다. 새로움을 덧입히는 끊임없는 노력 속에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이 함께 머물길 기원합니다.

전병이(요아킴)신부
  |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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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입니다. 나의 한 해를 새롭게 세우는 날입니다. 나는 그저 생겨난 것이 아니기에, 나를 있게 한 부모 조상들을 생각하고 기리며, 또한 이 모든 일을 가능케 하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날입니다.

참으로 나는 감사해야 할 많은 도움과 은혜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들의 도움과 배려가 없었다면, 누구도 지금 여기 이렇게 서 있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전례의 말씀들은 이에 어울리는 축복과 삶의 길을 제시합니다.

제1독서 민수기는 광야의 기록입니다. 하느님과 약속을 맺은백성이 이제 긴 여정의 출발에 서 있습니다. 비록 광야의 험난함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러나 하느님께서 주님으로 함께 계십니다. 그 분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길을 걷는다면, 참 행복, 하느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기쁨과 평화가 넘칠 것입니다. 그 보증으로, 하느님께서는 아아론의 후예인 사제들에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 백성에게 복을 빌어주어라…그러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고 명령합니다. 이 세상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새 백성이 출발합니다. 세속의 부귀영화나 나만의 행복이 아니라, 백성 모두, 특히 가장 약한 이도 예외 없이 행복한, 참 평화를 향한 우리들의 공동체입니다.

결과는? 천 년이 넘는 여정, 수 많은다짐과 새 출발,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인간의 욕망과 영리함 앞에 하느님마저 문자와 제례 속에 갇혀버렸습니다. 그래도 하느님은 변함이 없습니다. 바로 백성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이신 예수께서 ‘깨어 기다리라’고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주님이라 고백하고 새 출발한 백성, 바로 그리스도인의 여정의 근본자세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깨어있음은 느슨하지 않음이고, 나에 머물지않아 너에게 열려있을 때에만 가능한 팽팽함입니다. 굳센 마음과 신뢰가 없다면, 말씀처럼 그렇게 깨어충실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지켜주시고 살펴주시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겸손과 겸허함, 곧 낮춤과 비움이 새로운 백성 그리스도 신앙인의 근본자세 입니다. 오늘 제2독서는 이를 깨우쳐줍니다. 이슬람의 ‘인살라’ 가 떠오릅니다.

우리 조상들은 참으로 지혜로웠습니다. 말씀 없이도 밑바닥에서부터 ‘두레 공동체’를 이루었고, 설날, 다시 새롭게 한 해를 시작하며 자신과 이웃을 새롭게 세웠습니다.

나를 서게 하시는 주님께 감사하면서, 우리 조상들을 기리고, 먼저 세상을 떠난 부모 형제 친척 친지들의 영원한 안식도 기원하며, 오늘 이 명절 설날을 축하합니다.

이승홍 이시도로 신부
  |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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