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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
조회수 | 1,655
작성일 | 11.02.12
정통 신앙 수호에 몸 바친 위대한 교부
어릴적부터 성직자 꿈꾸며 철학·신학 두루 섭렵
‘성모님의 신학박사’로 불리며 이단 척결에 매진

313년. 그리스도교 신앙인이라면 꼭 기억해둘 필요가 있는 해다. 그해 2월 로마 제국의 공동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 280?~337)와 리키니우스(Licinius, 270?~325)가 오늘날의 밀라노에서 공동으로 칙령(勅令)을 발표한다. 소위 밀라노 칙령이 그것이다.

이 칙령을 통해 그리스도교는 비로소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다. 칙령은 그리스도교인을 포함해 누구든지 자신이 원하는 종교를 믿을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그동안 그리스도교에 가해지던 박해를 금지했다. 더 나아가 국가와 개인이 불법적으로 빼앗았던 교회 재산을 모두 반환토록 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개인적으로 공의회 설립을 주도해 교리를 체계화 하는 등 그리스도교를 장려했으며, 교회 설립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후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국교로 점차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하지만 세상 일이 늘 그렇듯,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따라오기 마련이다. 그리스도교 성장과 함께 이단도 우후죽순으로 늘어났다. 종교의 자유가 생기자 너도나도 자기 주장을 내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세속 정치 지도자들은 종교인들이 갈라져서 싸우자, 어느 편이 옳은 말을 하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혼란이 거듭됐다.

성 치릴로(St. Cyrillus ab Alexandria, 축일 6.27)는 이러한 혼돈의 시기인 370년 북부 아프리카의 대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청소년기부터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한 치릴로는 철학과 신학 등 이론적 학문을 두루 섭렵했다. 영신 수련에 대한 열의도 강해, 직접 이집트에 가서 수도자들과 함께 생활하기도 했으며, 예루살렘에서는 요한 주교 아래에서 교육을 받기도 했다. 이후 치릴로는 412년,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테오필로가 서거하자 그 후임으로 주교직에 올랐다.

이후 그는 정통 가톨릭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일생을 헌신한다. 과도한 엄격주의를 표방한 도나투스 이단에 맞섰다. 또 나중에 화해하긴 했지만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연설을 오해, 맞섰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만큼 치릴로의 교회에 대한 사랑, 정통 신앙 수호를 위한 결의는 대단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치릴로 총대주교는 이교와 이단에 맞서 수많은 글을 썼다. 설교에도 열성이었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도 단연 돋보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최대 공적은 네스토리우스 이단을 극복해 낸 것이다.

치릴로가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로 있었을 당시, 네스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일치해 있다는 교리와 다른 이론을 폈다. 그리고 마리아는 하느님의 모친이 아니라고 했다. 그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이 이단에 빠졌다. 신자뿐 아니라 성직자와 수도자들도 혼란을 겪었다.

이에 치릴로는 강론을 통해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리고 이집트 수도자들에게 서한을 보내 이단에 빠지지 말 것을 경고했다. 네스토리우스에게도 직접 편지를 두 차례나 보내, 주장의 철회를 요구했다. 하지만 문제는 진화되지 않고 점점 악화됐다. 시간이 흐를수록 네스토리우스 이단을 믿는 추종자들이 늘어났다.

이에 치릴로는 교황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고, 교황은 이 문제와 관련한 모든 판단과 전권을 치릴로에게 위임했다. 이에 네스토리우스는 분개했고, 교황이 아닌 로마 황제에게 치릴로를 고소했다. 네스토리우스가 총대주교로 있던 콘스탄티노플은 로마 황제가 거주하던 곳이었다. 당연히 네스토리우스는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이 문제를 독단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교들의 회의를 소집하는데 이것이 유명한 441년의 에페소 공의회다.

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이 잘못됐다고 결정했으며, 그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은 파문될 것임을 결의했다. 그리고 마리아를 ‘하느님의 모친’(테오토코스)으로 선언했다. 치릴로가 ‘성모 마리아 신학박사’로 일컬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점에서 치릴로는 성모 신학의 정립 소명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후에도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따르는 이들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이에 치릴로는 모든 생애를 바쳐 이단 척결을 위해 노력하게 된다.

그는 그렇게 32년간 총대주교직에 있다가 444년 선종했다. 교황 레오 13세는 치릴로에게 교회박사라는 칭호를 내렸으며, 이후 지금까지 로마 가톨릭 위대한 5인의 교부 중 한 사람으로 공경을 받아 오고 있다.

정영식 신부 (수원 영통성령본당 주임) / 최인자 (엘리사벳·선교사)
가톨릭신문 2010-05-16
450 21.6%
확고한 신념으로 이단으로부터 교회 지켜
신앙 자유 후 ‘도나투스 이단’ 등 이단자들 난립
42세에 주교 돼… 사명감으로 정통교리 수호

1600여년 전, 하느님께서는 치릴로를 이 땅에 탄생시키시면서, 그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셨을까. 치릴로는 74년의 일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을 세상에 보내주신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실현해 나갔을까.

내면형성을 위한 토대는 이미 잘 마련되어 있었다. 치릴로가 살았던 북부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수도생활과 신심생활의 전통이 강했던 곳이었다. 치릴로는 이러한 수련생활을 하는 수도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와 이 땅에서 실현시켜야 할 자신의 사명, 하느님께로의 순명을 터득했을 것이다. 특히 그는 예루살렘 요한 주교와의 만남을 통해 신학적 교육 및 영적인 도움을 많이 받았다. 결국 치릴로는 청년 시절부터 육신적이고 지성적인 건강뿐만 아니라 영적인 건강까지도 잘 닦으면서 생활을 하셨던 분이다.

이 내면 형성의 과정을 거친 이후 42세 때 비로소 주교가 된다. 25세부터 42세까지, 17년의 준비기간을 통해 이제 본격적으로 하느님의 일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세례를 받는 것도 지극히 행복할 일이고, 사제로 서품되는 것도 행복할 일인데, 주교가 되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이었을까. 실제로 영적인 차원에서 볼 때 주교직에 오른다는 것은 지고의 행복에 이를 수 있는, 참으로 축하하고 함께 행복해할 일이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 인간적 면에서만 볼 때 주교가 되는 것은 그리 행복한 일이 아니었다. 주교가 된 이후 30여년의 삶은 사실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 이유는 이렇다. 당시는 종교의 자유가 주어진 때였다. 그래서 박해의 고통은 없었다. 마음껏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전교를 하고 싶으면 전교를 해도 됐고, 영성생활을 진하게 하고 있으면 그렇게 하면 됐다. 하지만 세상에는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따라오는 법이다.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다 보니 이단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치릴로 주교는 주교가 되기 전까지 쌓았던 내면형성을 상호형성의 단계로 발전시킨다. ‘나’뿐만 아니라 ‘너’의 형성을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을 향한 안타까움, 죄와 오류로 가득찬 세상을 바라보는 고통스러움 속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이단자들의 상호형성을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확고한 정신으로 한 번도 좌절에 굴하지 않고, 30여년 동안 주교직을 수행, 교회를 지켜내고 교우들을 지켜냈다.

가장 먼저 언급할 수 있는 것이 3세기 중엽에 생겨난 도나투스 이단이다. 이들은 로마의 박해시기 때 잠시 배교했던 신앙인들이 교회로 다시 돌아오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했다. 작은 흠만 있어도 신앙인의 자격을 상실한다고 주장했다. 박해의 고통 속에서도 경건하게 신앙을 지켜온 거룩한 ‘우리들끼리만’ 신앙생활을 하자는 것이다.

로마의 박해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배교를 했다. 인간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나약함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을 죽이겠다는 데 누가 배교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쩌면 배교는 나약한 인간 본성으로 볼 때,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박해시기에 교회를 잠시 등졌던 이들이 박해시기가 지나자, 눈물로 회개하고 교회로 돌아오려고 했다. 당연히 교회는 이들을 받아들이려 했다. 예수님께서도 탕자의 비유를 통해, 회개하고 돌아오는 아들을 감싸 안으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셨는가.

그런데 도나투스 이단은 교회로 돌아오려는 이들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했다. 오히려 엄한 형벌을 내려야 한다고 했다. 박해 때 마음을 돌린 이들은 교회로 돌아올 자격이 없다고 했다.

도나투스 이단의 말대로라면 오늘날 우리들도 자유롭지 않다. 드러내 놓고 배교를 하지는 않지만, 마치 배교한 사람처럼 살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로는 하지 않지만, 마치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이렇게 나약한 인간에게 엄격한 신앙의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하면 교회에 남을 사람이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나약한 인간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무한히 잘못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힘을 주셨다. 바로 용서의 힘이다.

치릴로 주교는 도나투스 이단에 강하게 반박했다. 그리고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그렇게 교회의 정통 교리를 수호하고,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전해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정영식 신부 (수원 영통성령본당 주임) / 최인자 (엘리사벳·선교사)
가톨릭신문 2010-05-23
  | 02.12
450 21.6%
교회 발전과 올바른 신앙 구축에 헌신
옥살이 견디며‘네스토리우스 이단’과 투쟁
정통 계시·하느님의 모친 교리 정립에 영향

그리스도의 교회를 사랑했던 치릴로 성인은 ‘이단’이라는 말만 들어도, 머리카락이 곤두섰던 분이다. 팔 걷고 나서 “싸우자”고 대적했던 분이다. 이런 이유로 생긴 해프닝도 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우리가 ‘금구(金口)’라고 부르는 성인이다. 별명이 금구일 정도로 말씀과 강론에 능통하셨던 분이다. 특히 수많은 신학적 논증들을 정립하신 훌륭한 분이다. 치릴로 성인보다는 20여 년 선배다.

그랬던 금구 성인이 한때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의심받은 일이 있었다. 오직 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던 치릴로는 당연히 이단으로 의심받는 금구 성인의 반대 입장에 섰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치릴로는 금구 성인의 주장이 이단이 아님을 알게 된다. 치릴로는 즉시 금구 성인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화해를 했다. 그리고 금구 성인의 명예를 회복시켜 드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한다.

어떤 잘못을 했을 때, 그 잘못을 솔직히 고백하는 사람은 얼마나 멋진 사람인가. 신앙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래야 회개가 뒤따르고, 그래야 구원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고백할 줄 아는 것이 바로 구원의 첫걸음이다. 자신을 합리화하고, 자신만의 정의를 추구하고, 자신만이 진리를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이 바로 우리 모두를 멸망의 나락으로 이끈다. 치릴로의 이러한 성덕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치릴로 성인의 진면목은 네스토리우스 이단과 투쟁하는 그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어쩌면 성인은 네스토리우스 이단을 극복하라고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분이실지도 모른다.

우선 네스토리우스 이단에 대해 살펴보자. 가톨릭교회는 예수님 안에 신성과 인성이 동일하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네스토리우스는 그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어 있다고 했다. 이는 다분히 인간적인 해석이었다. 계시는 본질적으로 인간적 이성으로 파악하기 힘들다. 그래서 계시인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섭리를 이성으로만 이해를 하려다 보면, 자칫 합리적으로만 생각하려할 수 있고, 그래서 이런 이단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한번 생각이 방향을 잘못 잡으면, 갈수록 그 영향은 심각해진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분리하다보니 성모님의 지위에 대해서도 중대한 오류를 범하게 된다. 네스토리우스 이단은 성모님은 하느님의 모친이 아니라 단순히 인간 예수의 모친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성모님은 인간 예수의 어머니다. 동시에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하신 하느님의 모친이시다. 또한 신비적 차원의 계시를 통해 교회는 성모님이 승천하셨다고 신앙고백한다. 네스토리우스는 이 모든 주장을 반박했다. 인간적 머리로 이 모든 계시를 이해하려다 보니 그렇다.

치릴로 성인이 당연히 반박에 나섰다. 61세 때 에페소 공의회에 참여해 네스토리우스 이단에 강하게 반박했다. 그래서 하느님의 모친 교리를 정립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치릴로는 네스토리우스의 모함으로 2년간 감옥살이를 하는 등 고난을 받는다. 하지만 이런 고난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오히려 진정한 진리를 알지 못하는 이단들의 완고한 마음에 가슴이 아플 뿐이었다. 사람들은 아직도 자신의 머리로, 자기 뜻대로 하느님 존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교만이었고 모순이었다. 치릴로 성인은 감옥 생활을 마친 후에도, 마지막 일생을 교회를 보호하고 교회를 발전시키고, 교우들의 올바른 신앙을 돕는데 바쳤다.

내면형성의 완성을 통해 상호형성을 완성하신 치릴로 성인은 더 나아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세계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치릴로 성인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아직도 정통 계시를 알지 못한채 암흑 속에서 헤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교황님들과 주교님들은 지금까지도 줄곧 치릴로 성인의 모범을 이어오고 있다.

주교님과 교황님뿐만 아니다. 치릴로 성인의 삶과 가르침은 오늘날 평신도들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잘못된 신앙생활로 이끄는 유혹들이 넘쳐난다. 성모님이 발현했다며 사람들을 그어 모으고, 적 계시가 어쩌구 저쩌구 한다. 모두 교만에 의한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이요 공번된 정통 교회의 가르침을 따를 의지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치릴로 성인이 목숨을 걸고, 평생동안 수호한 참 진리를 따를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정영식 신부 (수원 영통성령본당 주임) / 최인자 (엘리사벳·선교사)
가톨릭신문 2010-05-30
  |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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