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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
조회수 | 2,297
작성일 | 11.02.12
초기 교회 수도자와 하느님의 중재자
최초로 수도회 공동생활의 규정·기틀 확립
‘수도회의 시조’라 불려… 기도·묵상에 전념

그리스도의 얼굴을 직접 바라본 사도들과 바오로 사도를 제외하면, 베네딕토 성인(st. Benedictus, 축일 7.11)은 성인 중의 성인이다. 대 성인(大 聖人)이다.

베네딕토는 수도회 공동생활의 규정을 처음으로 틀을 지은 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인을 수도회의 시조(始祖)라고 부른다.

물론 안토니오가 베네딕토보다 먼저 이집트에서 흩어져 있던 독수자와 은수자들을 모아 공동 수도생활을 했지만, 그때는 아직 공동생활 규칙이 명문화 되지 않았던 때였다. 이후 안토니오의 모범에 따라 많은 이들이 사막이나 산으로 가서 수도생활을 했는데, 정해진 규칙이 없다보니 생활이 중구난방으로 제각각 이었다. 일부 수도자들의 경우, 애초의 결심을 잊고 타락의 늪에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한 뒤(해방된 뒤) 광야에서 우왕좌왕했을 때 하느님께서 십계명을 내려주신 것처럼, 수도자들에게도 법이 필요했다. 수도생활을 통해 일상에서 탈출은 했지만 나약한 인간인 만큼 마음을 바로잡아 주는 틀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처럼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의 중재자가 모세였다면, 초기 교회 당시 수도자와 하느님의 중재자는 베네딕토였다.

성인은 480년경 이탈리아 중부의 농촌도시 누르시아(Nursia)에서 태어났다. 농촌이긴 했지만, 성인 가정은 약간 여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부모님의 허락을 얻어 수도 로마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로마로 향하는 베네딕토의 마음은 들떠 있었다. 학문과 신앙의 중심지 로마에서 많은 것을 얻고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열의는 로마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실망감으로 바뀌게 된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지도 500년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조선왕조도 그렇지만 500년이라는 시간은 자칫 나태와, 이로 인한 쇠퇴를 불러올 수 있는 긴 시간이다. 당시 로마도 그러한 경향이 팽배했다.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나태와 향락의 기풍이 만연했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었다. 베네딕토는 절망했다. 환경만큼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인 것도 없다.

4년 전쯤 한 교우와 상담을 한 일이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딸이 학교에서 집단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원하지 않는데도 강제로 노래방 등을 데리고 다녔고, 술을 마시게 하고 심지어 환각제까지 먹였다. 아이를 만나 보았더니 눈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래서 분위기를 바꿔 보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다. 서울에 가서 다른 공부 환경에서 잠시 지내보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아이는 이후 서울에서 학원과 독서실을 오가며 한달 동안 지냈다. 한달 후 돌아온 아이는 눈빛부터 달라져 있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방해 받지 않고, 공부하는 분위기 속에서 치열하게 자신의 일에 매달리다 보면 삶의 의욕도 생기기 마련이다.

베네딕토도 이러한 효과를 위한 것이었을까. 로마의 환경에 실망한 베네딕토는 엔티페라는 곳으로 공부하는 장소를 옮겼다. 이곳에는 적은 수의 사제들이 경건한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제 환경이 바뀌었다. 베네딕토는 만족했다. 매일 사제들과 함께 기도하고 묵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베네딕토 성인이 원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 기적의 내용은 여기에 적지 않는다. 어쨌든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당연히 이들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도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면 사람들이 몰려든다. 몰려들지 않으면 소문을 억지로 내서라도 사람들을 불러 오려고 난리다. 왜 기적을 몰라주느냐며 목에 핏대를 올린다. 교도권에 대한 반발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베네딕토와 동료 사제들의 반응이 의외다. 이들은 기적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것을 고통으로 여겼다. 베네딕토와 동료들은 사람들이 찾아올 수 없는 산중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그리고 꼭꼭 숨었다.

기적을 행하고 입단속을 시키신 예수님을 닮았다. 요즘 한국교회에는 “나를 통해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며 떠드는 사람이 있다.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도 많다. 예수님을 닮지 않았다.

베네딕토의 소재지를 알고 있었던 사람은 로마노(Romanus) 수사 한 명 뿐이었다고 한다. 로마노 수사는 가끔 자신이 먹기에도 부족한 빵을 떼어 베네딕토에게 주었다고 한다. 베네딕토는 그 빵 한 조각 한 조각을 감사히 먹으며, 오로지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다.

정영식 신부 (수원 영통성령본당 주임) / 최인자 (엘리사벳·선교사)
가톨릭신문 2010-06-06
450 21.6%
순명을 덕(德)으로 삼은 수도생활의 아버지
엄격한 생활 요구하며 수도원의 개혁 이끌어
오늘날 수도회 모태 된 공동체 생활 규칙 제정

청년 베네딕토는 건강했다. 몸뿐 아니다. 마음도 영혼도 건강했다. 그랬기에 자신을 통해 일어난 기적을 철저히 숨기며 더욱 산중으로 숨어들어간 것이다. 기적은 청한다고 일어나고, 청한다고 알려지는 것이 아니다. 청함이 원인이 아니다. 기적은 은총의 결과다. 저절로 일어나고 저절로 알려지는 것이다.

어쨌든 이 과정에서 베네딕토는 또다시 한 번 악마로부터 큰 유혹을 당한다. 특히 정결에 대한 유혹이 심했다. 이에 베네딕토는 옷을 벗고 가시덤불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뒹굴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됐다. 그제야 악마의 유혹이 물러섰다. 이후로는 정결에 대한 유혹을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은수 생활이 3년간 계속됐다. 완전한 고독 속에서 명상만으로 보낸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베네딕토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천진난만한 목동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쳤다. 드디어 세상 밖으로 한 발 나온 것이다. 베네딕토가 목동들을 가르친다는 소문이 퍼지자 진정한 행복을 꿈꾸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물려들었다. 그만큼 성인의 명성이 이미 세상에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몰려들자 베네딕토는 이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수도원을 세워 함께 생활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인근의 한 수도원 원장이 서거하는 일이 생겼다. 그러자 수도원의 수사들이 베네딕토를 찾아와 후임 원장이 되어 줄 것을 간곡히 청했다. 베네딕토는 그들의 간청에 못 이겨 마침내 수락한다.

그런데 베네딕토는 원장이 되자마자 엄격한 수도생활을 요구했다. 수도원 개혁에 나선 것이다. 어쩌면 지위와 명예에 대한 욕심이 없는 베네딕토가 수도원장직을 수락한 것은, 타락해 가는 수도원을 개혁해 하느님으로 이끌겠다는 원의에 의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락과 타성에 젖은 일부 수도자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지금까지 잘 생활해 왔는데, 갑자기 엄격한 수도원장이 와서 우리를 못살게 군다”고 수군거렸다. 결국 이들이 일을 낸다. 수도자들은 점심식사 때 독약을 넣은 포도주를 베네딕토에게 권했다. 그런데 베네딕토가 포도주를 마시기 전 성호를 긋자 잔이 깨졌다. 이 이야기는 베네딕토의 수도원 개혁이 얼마나 어렵게 이뤄졌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는 사이 수도자의 수가 크게 증가했다. 모두 베네딕토가 성덕으로 이끈 결과였다. 수도원 하나로는 모든 수도자를 수용할 수 없게 되자, 베네딕토는 수도원 수를 늘려 나갔다. 분가된 수도원에는 모두 신뢰할 수 있는 성덕있는 수도자를 원장으로 보냈다. 원래 진실은 승리하는 법이다. 타협과 술수는 신앙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하느님은 늘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꾸준히, 이웃과 사랑을 주고 받으며 겸손과 낮추임을 통해 정진하는 것을 원하신다. 실제로 은총도 그러한 방식으로 내리신다.

베네딕토 성인은 이후 525년경 이탈리아 남부의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에서 새롭게 수도 생활을 하려고 마음 먹는다. 몬테카시노 인근의 주민들은 우상 숭배가 강했다. 몬테카시노 산에 그리스 신 아폴로에게 바쳐진 신전이 있을 정도였다. 베네딕토는 즉시 이 신전을 파괴한다. 그리고 성덕의 모범을 통해 마을 주민들을 모두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이어 5년 후인 530년경에는 이곳에 성 요한 세례자의 성당과 성 마르티노(Martinus) 성당과 수도원을 세웠다.

이곳이 바로 서방 수도원의 발상지가 된다. 오늘날에도 이곳에는 성 베네딕토 수도회의 총 본부가 있다. 베네딕토는 이곳에서 올바른 금욕생활, 기도, 공부 그리고 노동 및 한명의 원장 아래 있는 공동체 생활을 규정하는 유명한 규칙을 썼는데, 이 규칙이 오늘날 모든 수도회 규칙의 모태가 된다. 그 결과 베네딕토는 오늘날까지도‘수도 생활의 사부’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규칙은 공동생활을 명백히 규정하고, 순명을 최대의 덕으로 삼았다. 또 재산의 사유화를 금지했으며, 일평생 한 수도원에 머무를 것을 요청했다. 또한 교회의 가르침에 따를 것을 명시하고 특히 전례를 중요시하도록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수도 생활의 중심으로 성무일과를 규정했다는 것이다. 베네딕토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수도회도 없다. 오늘날 수도회는 그래서 베네딕토에게 대부분 의지하고 있다.

정영식 신부 (수원 영통성령본당 주임) / 최인자 (엘리사벳·선교사)
가톨릭신문 2010-06-13
  | 02.12
450 21.6%
은총의 일상 속 실현 위해 끊임없이 노력
하느님의 기적 체험하고도 겸손으로 일관
몸과 정신·영혼의 통합으로 정결의 덕 성취

베네딕토 성인의 빛나는 삶은 입에서 입을 거쳐 당시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많은 신자들이 수도생활의 잣대이자 올바른 신앙 삶의 전형이었던 그의 삶을 기억하고 따르기를 원했다. 그래서 8세기말부터 7월 11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해 왔으며, 교황 바오로 6세는 1964년 10월 24일에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언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베네딕토 성인의 삶을 기억하는 그 기저에는 겸손한 성인의 삶이 있다.

수련생활을 하다 보면 흔히 ‘나는 하느님을 따르며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가 잘 했다고 생각할 때, 바로 그 순간이 잘못하는 순간이 될 수 있다.

사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부족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초등학교 시절 진정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 있었던가. 어린 시절에는 막연히 하느님의 존재하심을 믿고 의지하고, 따를 수는 있어도 높은 경지의 하느님 뜻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것이 하느님 보시기에는 어려도 한참 어린 것이다. 우리의 삶은 하느님 안에서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 되어야 한다. 그렇게 끊임없이 초월적으로 우리 자신의 삶을 바꿔 나아가야 한다.

베네딕토 성인의 삶을 보자. 성인은 청년 시절, 자신을 통해 일어나는 하느님의 기적을 체험했다. 일반인들은 이 경우,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을 영성의 완성으로 생각하고 자만에 빠질 수 있다. 하느님께서 기적을 직접 보여 주셨으니, 완벽한 영성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착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통해 기적이 일어났다며 선전하고 다니는 이들이 많다.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는가, 일어나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는 둘째로 하더라도, 겸손한 영성이 없다면 일단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하느님은 겸손함 속에서 진정으로 찾아오는 분이기시 때문이다.

베네딕토 성인은 어떻게 했을까.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을 철저히 숨겼다. 그리고 영적 정진을 위해 더욱 노력한다. 산 속에 꽁꽁 숨어, 무의식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는 욕심의 몸짓과 나쁜 습성을 끊어버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런데 영적 성장은 이렇게 수련을 지속적으로 계속한다고 해서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영적 성장을 위한 길에는 수렁도 있고, 높은 벽도 있고, 가시밭길도 있다. 모두가 영혼의 단련을 위해 하느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장치다. 실제로 성인도 어느 날 벽에 부딪힌다. 성(性) 문제였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직면할 수 있는 문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남성은 여성을, 여성은 남성을 그리워하게 되어 있다. 창조될 때부터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 문제는 무조건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많은 이들이 성에 대해, 단편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성을 성행위로만 보는 것은 곤란하다. 인간은 육신과 정신, 영으로 이뤄진 존재다. 통합적인 존재다. 이 삼중으로 이뤄진 인간 존재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을 때 진정한 완성된 인간이 될 수 있다. 몸만 건강하다고 완성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적으로 똑똑하다고 해서 완성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몸과 정신 영적인 에너지로 하나로 통합 돼, 최고의 아름다운 가치를 실현해 내야 한다. 성도 육신과 정신 영의 통합 차원에서 봐야 한다. 성은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다. 성을 터부시하고 나쁜 것으로 봐서는 안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베네딕토 성인은 성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일반적으로는 이 문제를 비켜가거나 묻어버리는데, 성인은 정면으로 맞선다.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육신적 고통을 자발적으로 수련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통해 해결해 낸다. 몸과 정신과 영혼이 완벽한 통합을 바탕으로 정결의 덕을 성취해 낸 것이다.

청년 베네딕토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을 끊임없이 일상 속에서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 했고, 결국에는 성의 문제까지도 극기 수련을 통해 극복해낸다. 성덕은 떠들고 다니지 않아도, 저절로 세상에 알려지는 법이다. 하느님과 합치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향기는 저절로 세상에 퍼지게 되어 있다. 베네딕토 성인의 영성 향기가 세상에 널리 퍼져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옆동네 수도원의 수도원장님이 돌아가셨다. 지도자를 잃은 수도자들은 베네딕토를 새 수도원장으로 추대했다.

정영식 신부 (수원 영통성령본당 주임) / 최인자 (엘리사벳·선교사)
가톨릭신문 2010-06-20
  | 02.12
450 21.6%
은총 받아들여 하느님과의 합치로 승화
기도로 모든 어려움 이기며 수도원 개혁 성공
공동체 통한 구원 위해 평생 ‘순명의 덕’ 강조

수도원장 베네딕토는 난감했다. 수도자들이 정도의 길이 아닌 잘못된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몇몇 수도자들은 일반인들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기도 했다. 수도자들을 나무랄 일이 아니다. 열두 제자도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의 무리’라는 혹독한 질타를 받은 일이 있지 않은가. 베드로조차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니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한 후대의 수도자들이 잘못된 길을 걸어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베네딕토 성인은 수도원을 쇄신하기로 마음먹는다. 쇄신과 개혁에는 저항이 따르는 법이다. 처음에는 수도자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심지어 어떤 수도자들은 성인을 암살하려고 까지 했다.

하지만 하느님의 정의와 진리는 언제나 승리한다. 성인은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기도로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냈고, 결국에는 수도원 개혁을 성공적으로 성취해 냈다.

이 과정에서 베네딕토 성인은 특히 ‘순명의 덕’에 주목했다. 실제로 개인의 신심이 성장하기 위해 또 공동체가 성장하기 위해 순명만큼 이름다운 덕도 없다. 베네딕토 성인이 순명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는 다음의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흉년이 들었던 해였다. 한 사제가 성인의 수도원을 찾아와서 기름을 청했고, 성인은 이를 쾌히 승낙했다. 그런데 정작 수도원의 재정담당 수사가 기름이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제에게 기름을 주지 않았다. 뒤에 이 사실을 들은 베네딕토는 그 수사를 불러놓고 “순명의 덕을 파괴하게 한 이 물건(기름)을 수도원에 둘 수 없다. 즉각 기름을 그릇과 함께 버려라”하고 엄중히 명했다고 한다.

베네딕토 성인이 이처럼 순명을 강조한 것은 공동체를 위해서였다. 순명이 공동체를 성장시키고, 또 그 공동체를 통해 개개인의 구원 또한 성취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베네딕토 성인이 이처럼 본격적으로 수도원 원장으로서 활동을 시작하게 되는 때는 45세부터다. 선종하는 67세까지 22년 동안 성인은 빛나는 하느님의 사업을 하게 된다. 눈부셨다. 교회 발전의 초석을 놓기 위해, 수도원 성당을 건립했고, 이단자들을 회두시켰으며, 활발한 전교활동을 통해 수많은 이방인들을 입교시켰다. 특히 중요한 점은 수도원의 규칙을 정립한 것이다. 그가 정립한 수도원 규칙은 단순한 생활규범이 아니었다. 수도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을지에 대한 바로미터였다. 그 규칙서로 인해 이후 수많은 이들이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는 가장 올바른 길을 알 수 있게 됐다. 베네딕토 성인이 없었다면, 어쩌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수도회들은 생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하느님은 베네딕토 성인을 통해 수도생활의 전형을 계시하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인물이 또 있다. 바로 베네딕토 성인의 여동생 스콜라스티카 성녀다. 하느님은 남자 수도회의 정립만을 원하신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은 베네딕토를 통해 여동생 스콜라스티카에게 섭리하심으로 여자 수도회의 전형 또한 마련하셨다. 스콜라스티카는 오빠보다 먼저 선종했지만, 생전에 여자 수도 공동체를 이끌며 진정한 완덕을 보여주었다. 베네딕토가 수사들의 아버지라면 스콜라스티카는 수녀들의 어머니였다.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이지만, 하느님은 베니딕토 성인에게도 처음부터 섭리로 이끄셨다. 공동생활로 이끄셨고, 그 공동체 안에서 당신을 체험하게 하셨다. 문제는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에 심어주시는 그 은총과 형성의 신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성장시키느냐에 있다.

베네딕토 성인은 형성의 초대에 갈망과 땀으로 응답했다. 은총을 경외의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하느님과의 합치로 승화한 것은 실로 베네딕토성인의 공덕이다. 성인은 하느님께로 향하는 그 길을 아름답게 걸었고, 열매를 성취해 냈고, 결국에는 진정한 완덕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그렇게 살다가 마지막 날에는 하느님의 편안한 품에 안겼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함께, 공동체 안에서 걸어가야 할 길이다. 베네딕토 성인의 삶은 단순한 공경의 차원으로 대상화해서는 안 된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으로 재현해 내야 한다.

베네딕토 성인은 547년 3월 21일 선종했다. 마지막 날 성인의 몸은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하지만 성인은 침대에 누워있지 않았다. 제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제대 앞에 서서 팔을 벌리고 기도하면서 그렇게 선종했다.

정영식 신부 (수원 영통성령본당 주임) / 최인자 (엘리사벳·선교사)
가톨릭신문 2010-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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