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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초월하는 신학자 · 영성가   성 아우구스티노

 

 

* 354년 누미디아(리비아)타가스테에서 출생

* 370년 카르타고 대학에서 수사학 공부

* 384년 암브로시오 주교 만남

* 387년 부활 성야에 세례성사 받음

* 391년 사제수품

* 395년 주교로 축성

* 430년 세상을 떠남

 

"님 위해 우리를 내셨기에 님 안에 쉬기까지는 제 영혼이 평안하지 않나이다."

아우구스티노는 이러한 표현으로 그의 유명한 <고백록>을 시작한다. 젊은 시절 의 방황과 깊은 늪에서 벗어나 참 사랑이며 영원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기까지 기나긴 회심의 과정을 진솔하게 기록한 그의 <고백록>에서 우리는 아우구스티노의 생애와 그 영성 여정을 살펴보며 많은 감회를 갖게 된다.

 

1. 생 애

아우구스티노는 로마 관리였던 아버지 파트리시오와 훗날 성인 품에 오른 어머니 모니카 사이에서 354년 11월 13일 로마의 북아프리카의 식민지 누미디아(지금의 리비아)의 타가스테에서 태어났다. 그는 세례성사를 받지 않았으나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각별한 보살핌으로 신앙의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16세 때부터는 카르타고 대학에 들어가 수사학을 공부하면서 그리스도교를 떠나 방황하게 되었다.

동거녀도 회심

그때 두 가지 새로운 사실이 그의 생애에 일어났다. 마니교에 몰입하게 된 것과 한 여인을 만난 것이었다. "바로 그럴 무렵 나는 한 여성을 두고있었습니다. 떳떳하게 결혼을 한 여자가 아니오라 지각없이 들뜬 내 정욕이 찾아낸 사람이었습니다"(고백록4,2).이 여인은 아데오다투스라는 이름의 아기를 낳았으며 아우구스티노 곁에서 15년간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아우구스티노의 회심의 군간에 많은 눈물을 흘리며 그의 곁을 떠나갔다. 그녀 역시 연인의 모범에 따라 회심했을 뿐만 아니라 수도원에 들어가 남은 인생을 하느님께 바치며 보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인간학 전문가

아우구스티노는 카르타고에서 공부 과정을 끝내면서 수사학 교수자격증을 획득하여 타가스테로 돌아와 학교를 열었다. 그러나 그 곳에서 그는 만족할 수 없어 다시 카르타고로 나가 아홉 해 가량 문학을 가르치며 명성을 떨쳤다. 당시 수사학 교수는 법률 전문가로서 지금의 변호사에 해당하는 직업이었다. 아우구스티노는 법률 공부뿐 아니라 철학과 문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탐구하였다. 그 당시 훌륭한 수사학자는 인문학자, 즉 인간학에 관한 전문가로 통했는데 아우구스티노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이러한 공부가 뒷날 주님의 큰 일꾼으로 봉사하게 될 때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방황중에도 진리열망

그는 수년간 여러 종교와 사상의 요소들이 통합, 절충된 교의를 지닌 마니교에 심취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의 양심 안에 그 종교의 교의에 대한 의문점과 비판이 점점 더 거세게 움직이게 되었고 그는 철학자 플로티노의 학설에 매력을 느끼며 전향하여 이번엔 그의 저서들을 탐구하였다. 그것도 진리를 추구하는 그에게 갈증을 풀어줄 수 있는 수준이 못 되었다. 그는 15년이란 긴 세월 동안 정신적, 육체적으로 황폐한 여정 중에 헤매었지만 한 가지 집념 즉 진리를 찾고자 하는 열망은 늘 그의 가슴속에 간직되어 있었다.

회심의 스승 암브로시오 주교

그는 카르타고를 떠나기로 결심한 후,383년 로마로 떠나갔고 거기서 수사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로마에서도 실망하게 되어 이듬해 밀라노로 가게 되는데 여기서 암브로시오 주교를 만나 인생의 대전환의 계기를 맞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노는 그 주교와의 첫 대면부터 인간적 매력 때문에 호감을 갖게 되었다. 그는 암브로시오 주교가 성녀 테글라대성당에서 대중을 상대로 하는 설교에 자주 참석하여 경청했다. 그는 교회에서 진리를 발견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암브로시오를 진리의 스승으로 삼고자 한 것은 아니었고 그의 관심은 문학적인 것에 있었다.그 주교의 웅변이 그가 누리는 명성에 걸맞는 것인가 확인해 보려는 심사였다. 차차 수사학적 형식을 통해서 그 내용이 아우구스티노의 마음속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의 자세가 서서히 달라져갔다. 암브로시오 주교는 아우구스티노의 입장에서 볼 때 하느님께서 그를 다시 교회의 품으로 데려와 큰 일꾼이 되도록 준비시키기 위해 예비해 두신 사람이었다. 그는 <고백록>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밀라노에 와서 나는 주교 암브로시오를 찾았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훌륭하게 알려진 당신의 경건한 종, 그의 웅변은 당신 백성에게 '당신 알곡의 알참'과 '기름의 윤택함'과 '포도주의 거나함'을 이바지하더이다. 내가 모르고 당신의 손길로 그에게 끌려간 것은 그를 통해 알고 당신께 이끌어 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5,13).

"집어라, 읽어라" 신비체험

아우구스티노는 어느날 밀라노의 그의 숙소의 정원에서 기도하고있을 때 어디선가"집어라, 읽어라!"(Tolle, lege! Tolle, lege!)라는 신비로운 음성을 반복해서 듣게 되고 뭔가 예사롭지 않은 직감에 주변에 있던 바오로 서간집을 집어 펴서 읽는다. 첫눈에 들어온 것은 다음구절이었다."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로마13,13-14).

이 말씀에 그는 철퇴를 맞은 듯 깊은 충격을 받는다. 그 대목은 바로 그에게 직접 하느님께서 해 주시는 말씀으로 영감을 받으며 놀라운 은총을 체험한다. 그의 마음 자세는 완전히 변화되었다."이 말씀을 읽고 난 찰나 한 가닥 확실성의 빛이 내 마음에 쏟아져 들어오면서 무명의 온갖 어두움이 스러져버렸나이다"(고백록8,12).그로 인해 개종을 결심하고 암브로시오 주교로부터 직접 강의를 들으면서 예비신자 교리 공부를 하였고 새로운 태어남을 준비하여 그의 나이 32세가 되던 387년 4월 24일 부활 성야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진탕먹고 마시고 취하거나...."말라

아우구스티노는 세례성사를 받던 순간을 <고백록>에서 이렇게 회상한다."당신 교회에서 아름다이 울려 나오는 송가와 찬미가에 몹시도 감격하여 저는 얼마나 울었더니이까! 그 소리는 제 귀에 스며들고 진리는 제 마음 안 속속들이 배어 경건의 정이 타오르며 눈물이 쏟아져 흐르며 이와 더불어 저는 행복해졌던 것입니다"(고백록9,6).

아우구스티노는 그가 하느님을 벗어나 살아왔다는 비참한 현실을 진정으로 깨달은 그 순간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전향할 수 있는 회심의 은총을 받았다. 하느님을 떠나 그토록 방황하던 그를 한 순간도 결코 포기하시지 않은 그분의 사랑과 섭리의 고마움을 가슴이 저리도록 깨닫게 된 것이다."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님은 저와 같이 계시건만 저는 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고백록10,27).

불멸의 고전 <신국론>집필

그리스도 신자가 된 그는 로마에 가387년 말부터 388년 여름까지 체류하였다. 그 무렵 로마 제국은 침략을 당하고 내란이 일어나는 등 혼란 중에 기울어 가고 있었다. 훗날 정치적 위기가 절정에 달하여 로마가 약탈을 당하고 사람들의 의식이 그 원인을 찾고자 할 때 히포의 주교로서 그는 조상 전래의 신들을 버리고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데에 원인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교도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면서 그의 걸작 <신국론>을 쓰게 되었다.

387년 가을 로마 근교 오스티아에서 그의 어머니 모니카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회심하고 가톨릭으로 귀의한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없이 행복해 하며 그를 축복하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하늘 나라로 떠난 것이다. 아우구스티노의 방황, 진리의 추구, 하느님과의 만남과 회심등 영성 여정 가까이엔 어머니 모니카의 인고와 사랑이 담긴 기도, 희생의 모정이 늘 동행하고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눈물어린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는다" 일깨워

모니카의 거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하느님께 바치는 정성스런 기도와 희생이 언젠가는 반드시 응답 받는다는 신비를 깨닫게 해주며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준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바라는 때와 방식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때와 그분의 방식대로 이루어지며, 실로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수도원세워, 진리탐구 전당 역할도

아우구스티노는 다음 해 여름 오스티아 항을 더나 아프리카 카르타고에 도착했다. 그리고 고향 타가스테에 가서 친구들, 동향인들과 함께 첫 수도 공동체를 이루었다. 그는 그들과 금식, 기도와 묵상 중에 함께 살면서 가르쳤다. 수도회 식구들이 차차 늘어났고 그곳은 기도 및 수덕생활뿐 아니라 성서 연구와 그리스도교 진리를 탐구하는 지적 탐구의 전당이 되었다.

36세에 사제, 40세에 주교

391년 신자들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히포의 주교 발레리오는 아우구스티노에게 성품을 주어 사제직에 올렸다. 그때 그의 나이가 36세였다. 그리고395년 6월 말 발레리오 주교의 계승권 있는 보좌 주교가 되었다. 다음해 발레리오주교의 계승권 있는 보좌 주교가 되었다. 다음해 발레리오 주교가 세상을 떠나자 아우구스티노는 히포의 교구장이 되었다.

아우구스티노는 백성들을 가르치고 성화시키며 헌신한 좋은 목자로서, 호교론자로서, 교회의 학문을 발전시킨 학자로서 그리고 뛰어난 영성가로서 40여 년 간 봉사하던 중,430년 8월 28일 반달족이 그가 교구장으로 있던 히포를 포위한 상태에서 즉 로마 제국의 붕괴와 몰락의 현장을 목격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2. 영 성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시고 비추시고 밝히사 눈 멀음을 쫓으시니, 향내음 풍기실제 나는 맡고 님 그리며 님 한 번 맛본 뒤로 기갈 더욱 느끼옵고, 님이 한번 만지시매 위없는 기쁨에 마음이 살라지나이다"(고백록10,27).

아우구스티노는 애덕을 바탕으로 하여 지혜로 완성되며 교회와 밀접히 연결된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에 관한 신학과 가르침을 발전시켰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은총론, 관상생활, 관상의단계, '사도적 생활'의 수도원 제도 그리고 수덕관을 살펴본다.

"인간 노력으로 성화된다"는 이단에 맞서

아우구스티노는 이설을 펴던 펠라지오 학파와 호교론적 입장에서 논쟁을 하며 은총론을 정립한다. 펠라지오의 사상의 기본원리는 인간 자유의 자율성이며, 구원에 있어 인간의 주도권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며 하느님이 개입하시면 자유가

소멸된다. 인간은 자유로 인해 하느님으로부터 해방된다. 인간은 원죄와 그 결과의 영향을 결코 받지 않으므로 근본적으로 선하며 자신의 자유의지로 자신을 충분히 부죄한 상태로 보존할수 있다. 은총은 영혼 안의 거룩한 삶의 원리도 아니고 인간의 능력에 내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힘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외적인 무엇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이 인간의 능력을 도와 선을 행하게 할 수 있지만 실제적 의지와 행동은 인간에게 달려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거룩하게 될 수 있으므로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따라서 권고도 청원기도도 실제로 필요 없다.

"은총 없이 신앙 없다"지적

펠라지오의 주장에 대한 아우구스티노의 응답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하느님은 원래 인간을 그분과의 인격적 친교를 통해 친밀한 결합을 이루기 위해 창조하셨으며 초자연적 은총을 부여하셨다. 그러나 첫 인간인 아담은 자유 의지로 하느님을 거슬러 죄를 지었으며 전 인류의 조상 및 머리로서 죄를 지었기에 모든 인간은 그의 죄뿐 아니라 그 결과도 상속받게 되었다. 원죄 때문에 인류는 타락의 집단이 되었다. 인간은 여전히 하느님과 선을 끊임없이 동경하지만 선을 성취할 자유를 상실하였다. 따라서 하느님의 도움이 없으면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의화와 구원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시는 일이다. 의화의 첫 조건은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이지만, 그 신앙은 하느님의 '선재(先在)하는 은총' 없이 불가능하다. 이설을 거스려 이같이 은총의 절대적 주도권을 강조한 아우구스티노는 인간의 자유를 적절히 고려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애덕은 완덕의 정수

그에 의하면 의화는 인간의 죄 사함뿐 아니라 실제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그분의 거룩함에 참여하면서 성화 되어 하느님의 모상을 닮도록한다. 그는 은총의 무상성(無償性)과 은총에 협력하는 인간의 책임을 옹호하면서 영성생활에 요청되는 두 가지 중요 요소를 강조한다. 하나는 겸손, 믿음 및 기도의 실천을 통해 성령께 순종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애덕을 통해 은총에 응답하는 것이다. 애덕을 윤리생활 전체의 요약이고 그리스도교 완덕의 정수이다.

"관상 · 활동 둘 다 필요하다"

아우구스티노는 <신국론>에세 지혜의 활동적인 면과 관상적인 면을 논한다. 활동적 부분은 덕 닦는 일에 속하며 관상적 부분은 진리의 고찰과 관련된다. 활동생활은 인간이 살아가는 현세에서 수행되다가 끝나고, 관상생활은 영원히 하느님을 관상하게 될 끝없는 후세의 삶에 연장되어 완성되는 것이다. 그는 성서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생활 형태의 상징적 예로 든다. 이를테면 야곱의 여인들, 레아를 통해 활동적 생활을, 라헬을 통해 관상생활을 상징한다. 그는 같은 개념을 사도들에게도 적용하여 베드로 사도는 활동생활의 대표로, 요한 사도는 관상생활의 상징적 인물로 묘사한다(요한복음 논고124,5참조).

그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관상, 활동 두 가지측면의 능력이 있으며 그것들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다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전적으로 활동적이거나 혹은 전적으로 관상적이기만 할 수 없다. 그 두 행위의 형태가 개인 생활에 번갈아 나타날 수 있다.

완덕에 있어 '관상'은 '활동'보다 우선

활동생활과 관상생활 양쪽을 다 체험한 아우구스티노는 삶에 다양한 길이 있음을 깨닫고 그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데 세 가지 형태의 생활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관상적 생활 또는 진리탐구의 생활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사에 이바지하는 생활이며, 세 번째는 위의 두 생활을 조화시킨 형태라는 것이다. 이 세 형태중 어느것이 최종 목적 달성에 용이한 것인지 각자가 선택해야 한다. 한편 다른어느 측면을 소홀히 하거나 경시해서는 안 된다(신국론19,19참조).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초대하여 대접하던 자매 마르타와 마리아의 자세를 활동생활과 관상 생활에 비교하여 설명하면서 서슴지 않고 완덕 진보에 있어 관상생활을 우위에 둔다(설교집169.179참조).

관상에 7단계 둬

아우구스티노는 그의 저서<영혼의 크기>에서, 영혼이 정화되며 관상으로 나아가는 데 정상적으로 통과하는 7단계를 열거한다. 첫 세 단계는 인간생활의 생장적, 감각적 및 이성적 차원과 관련된다. 그리스도인은 제 4단계에 이르러 완덕을 향해 참으로 진보하기 시작한다.이것은 덕을 실천하는 단계이며 여기에 정화가 따른다. 제 5단계엔 욕정을 제어함으로써 오는 평화를 누리며 내적 평정에 이른다. 제 6단계에서는 영혼이 하느님의 빛 속으로 들어가는데 거기에서 영혼은 신성(神性)에러 침투하고자 한다. 영혼이 여기에서 더 전진하게 되면 하느님과의 항구적 일치 혹 하느님의 내주(內住)의 단계인 마지막 제 7단계에 이르게 된다.

아우구스티노가 구상하고 실천을 시도하던 공동체적 수도생활은그의 생애의 네 단계 여건 변화 과정에 따라 변형되면서 발전하였다. 첫단계는 밀라노 근교 카시치아쿰에서 지낼 때이고 둘째 단계는 그의 고향 타가스테로 돌아 왔을 때이며 셋째 단계는 주교로 성성되기 전 히포에서 살 때이고 마지막으로는 주교 성성 후의 단계이다.

주교관을 수도원으로 개조

그는 386년 10월부터 약 8개월 간 카시치아쿰에 있는 한 친구의 별장에서 소수의 친구들 및 제자들과 함께 은거하면서 성찰 및 묵상생활을 하였다. 그가 동료들과 함께 한 그 반(半)의 은둔생활은 수두생활로 묘사될 수 없으나 그 준비과정이라 할 수 있다.2년 후 그의 고향 타가스테로 돌아와 그는 어느 정도 윤곽 잡힌 수도원 성격의 공동체를 구성하였다. 그리고391년 사제 수품 후 그는 본연의 모습으로서 첫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하느님의 종들'이라 불렸고 재산을 공유하였다.

교구사제 서품 조건에 공동생활 요구

그는 주교가 되면서 자신의 거처를 수도원으로 개조하여 구성원들이 공동생활을 하고 개인 재산 소유를 포기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그의 교구사제 서품의 조건으로 제시하였다. 그가 교구사제들이 공동생활, 청빈 및 독신생활을 실천하기를 주장한 이유는 사제들이상호 협력할 수 있다는 좋은 점뿐 아니라 더 나은 기도와 연구 및 반성하는 데 적합한 여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없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생활에서 관상적 측면이 사목적 봉사 때문에 활동적 측면과 조정되면서 점차 변형될 수밖에 없었다.

수도생활은 성 베네딕도에게도 영향 줘

그 공동체에서 실천되던 사항들은 공동체적 및 개인적 기도,침묵,절제,겸손,순명,순결,청빈의 실천 등 전통적인 동방의 수도생활의 것과 많이 유사한 것이었으며 여기에 덧붙여 형제적 사랑이 강조되었다. 아우구스티노의 수도원 제도의 구성원은 동방의 원래적 의미의 '수도승'(修道僧:monk)이 아니라 뒷날 중세 서방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의미의 '수도자'(religious)라 할 수 있다. 동방의 수도생활이 영성지도자의 도움을 받으며 성숙시켜야 할 하느님과의 개인적 관계 즉 수직관계를 철저히 강조했던 데 비해, 아우구스티노의 수도생활은 공동체성의 가치에도 높은 관심을 기울이며 형제적 상호간의 관계 즉 수평관계를 보완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우구스티노는 여러 지역의 수도 생활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는데 훗날<성베네딕도 규칙>에서까지도 그의 가르침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엄격한 금욕주의 취해

아우구스티노는 근본적 엄격주의를 견지했다는 점에서 예나 지금이나 비판을 받는다. 그가 당시의 사회가 도덕적으로 퇴폐해 있었고 또 한 자신이 젊은 시절에 향락적 생활에 너무 깊이 빠져들어 있었음을 자각했기에, 개종을 하면서 그러한 악습에서 해방되고 유혹에 대항하기 위하여 성스러운 열정을 가지고 엄격한 금욕자세를 취하려 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의 개종이 마니교를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졌을지라도 그의 영성에 마니교적 색조가 나타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실체 대립의 이원론이 그것이다. 바로 거기에 전부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영성이 나온다. 예를 들면 육신의 이끌림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그것을 몰아내든지 하는 것이다. 한편 수도생활에 대한 관념은 그러한 영성에 더욱 자극을 주었다. 단호한 희생만이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자유를 다시 찾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또한 개종의 과정에서 만났고 도움을 받은 신 플라톤 사상이 그 안에 스며들어 영성적인 발견과 이해를 통한 감각적인 것의 포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에게 확신시켜주었다. 그의 금욕주의는 애덕의 발전과 사목적 관심에 의해 어느 정도 조절되기도 했으나 신비적 영감에 의하여 여전히 자극을 받았다.

단호한 희생을 실천

아우구스티노는 개종하면서 금욕적인 생활 외에 다른 어떤 형태의 삶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때까지 금욕을 실천한 어떠한 형태의 생활도(따라서 기종의 수도생활의 형태도)따르려 하지 않았다. 결국엔, 그가 새로운 형태로 변형시킨 것이기는 하지만, 수도생활이란 형태를 통해서 그것을 수행하게 된다.

 

3. 영성사 안에서의 위치

철학자 · 신학자 · 영성가였던 천재

1)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한 사유를 철학적 체계 안에 정립한 철학자인 동시에 신학자였으며 굵은 선의 영성가였다. 그는 <신국론>,<삼위일체론>,<자유 의지론>등 백여 권의 책과 논문, 2백여 통의 서간과 설교문을 쓴 초기 교회의 위대한 교부이며 저술가로서 그때나 지금이나 늘 당대의 인물 같은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아우구스티노르 "참으로 모든 교부들에게 공통되는 자질들을 갖춘 빛나는 모범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과거의 모든 사상적 조류들이 그의 작품에서 서로 만나게 되며 또한 다음 세대의 모든 교의적 전통을 이루는 원천이 되어 왔다"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요한 바오로2세는 그를 "신앙과의 조화 때문에 참으로 그리스도교적이라 불릴 수 있는 철학을 정립한 천재"라고 찬탄하였다.

그리스도교 문화를 과거 문화와 융화시킨 공로자

실로 그의 신학 및 영성적 권위는 오늘까지도 우뚝 솟아 있으며 그는 그리스도교 문화를 옛 세계의 문화와 융화시킨 큰 공헌자이기도 하다.

최고의 라틴사상가

2) 아우구스티노는 손꼽히는 위대한 사상가이며 라틴 사상가로서는 가장 뛰어난 분으로 지목된다. 그가 기도의 자세에서 진지하게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여 방황의 세월 그리고 회심에 이르기까지 그의 전 생애를 서술하는 <고백론>은 세계의 문화사 안에서 큰 펂을 이루며 오늘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파스칼, 키엘케고르 그리고 도스토에프스키의 저서들 못지 않게 많은 이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철학자 카알 야스퍼스는 인류의 위대한 사상가들중 '근원에서 사유한 3대철학자'로 플라톤, 칸트와 함께 아우구스티노를 꼽는다.

문화사적으로도 그는 고대 그리스, 로마 세계의 철학과 문학에 있어 마지막 대가이다.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가 플라톤이라면, 아우구스니토는 가장 위대한 라틴 사상가라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특히 그가 쓴 <신국론>은 플라톤의 저서들을 제외하고서는 서방 세계의 사고에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없을 정도라고 평가된다.

지칠줄 모르는 진리의 연인

3) 아우구스티노는 종착점인 하느님을 찾아 만나기까지 지칠 줄 모르던 진리 탐구자였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진리를 찾아내려는 사랑에 사로잡혀 있다"(삼위일체론15,8)고 규정한 아우구스티노는 사상적 방황을 하면서도 숨겨진 진리를 탐구하고 추구하는 데 지칠 줄 모르던 '진리의 연인'이었다.

"아, 진리 진리! 당신은 그들이 하고 많은 책들에 한 소리를 자주 또 가지가지로 제게 속삭여줄 때 제 영혼의 골수가 얼마나 당신을 그려 애타하더이까?"(고백록3,6).그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그 진리를 발견하였을 때 이렇게 고백한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십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하나이다"(고백록10,27)."이제 당신만을 사랑하니... 저는 당신만을 섬길 각오가 되어있나이다"(독백1,1.5).

교회 끔찍이 사랑

4) 아우구스티노는 이단을 대면하여 사랑하는 교회의 정통성을 합리적으로 지키고 가꾸어나간 훌륭한 호교론자였다. 그는 교회를 끔찍이나 사랑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교회의 가르침을 주장하는 광신적 자세를 지닌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교회를 대적하는 이들에게 인내와 사랑을 보여야 한다는 본분을 교회에 일깨웠다. 그것은 상대방들을 정복하려는 정략적 의도에서가 아니라, 그들도 구원의 대상임을 잊지 말고 보살펴야 하는,'구원의 보편적 성사'로서 교회의 본성에 맞갖게 이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5)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사도 바오로 다음 가는 큰 준봉을 이루는 신앙의 회심자였다. 그는 성서 말씀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면서 놀라운 발견을 한다. 그가 존경하던 철학자들이 발견한 진리가 뛰어난 것일지라도 성서 저자들이 전해준 거룩한 계시에 관한 가르침과 비교할 때 무한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특히 바오로 사도의 서간들 안에서 깊은 감명을 받으며 그에 대해 열정을 지닌다."나는 당신의 성령의 숭고한 글, 그 중에서도 사도 바오로를 붙들고 늘어졌습니다...이렇게 시작한 나는 저기서 읽었던 진리가 모두 여기선 당신 은총으로 한결 더 승화되어 있음을 발견하였으니 이는 보는 사람이면 보는 것 그것 뿐 아니라 볼 수 있는 기능까지도 무엇 하나 받지 않은 것이 없는 만큼, 마치 아니 받는 것처럼 뽐내지 말라 하심이었습니다"(고백록7,21).

성 바오로 글 읽고 법열 느껴

아우구스티노는 철학자들의 책에선 볼 수 없었던 것들을 사도가 쓴 계시 진리 안에서 읽으면서 자기 자신의 내면적 갈등을 느꼈고 비애와 동시에 희열을 체험한다. 그러면서 그의 마음에는 불확실성과 의심의 안개가 걷혀갔다. 어느날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예사롭지 않게 대면한 바오로의 로마서(13,13-14)한 구절의 일독은 다마스커스로 향하던 바오로에게 일어났던 사건만큼이나 극적인 회심의 전환점이 되었다. 물론 진정한 회심인,'세례성사'라는 대 사건이 완성되려면 아직 몇 단계를 거쳐 준비해 나가야 했지만 그는 그때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고있었다."이 말씀을 읽고 난 찰나, 내 마음에 법열이 넘치고 무명의 온갖 어두움이 스러져 버렸나이다"(고백록8,12).

어머니가 간절한 기도와 희생 바쳐

6)아우구스티노가 회심하여 신앙에 귀의하고 성화의 은총을 받도록 한 데엔 어머니 모니카의 숨은 기도와 희생이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가 세상을 떠나기 전 아들에게 남긴 말 중 가장 감격스러운 것은 아들이 회심하도록 이끌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한다는 것이었다."아들아, 내게 있어선 세상 낙이라곤 이제 아무 것도 없다. 현세의 희망이 다 채워졌는데 다시 다 할 것이 무엇인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 세상에서 좀 더 살고 싶어했던 것은 한 가지 일 때문이었다. 내가 죽기 전에 네가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을 보겠다는것...그랬더니 하느님께서는 내게 과분하게 베풀어 주셨다. 네가 세속의 행복을 끊고 하느님의 종이 된 것을 보게 되었는데 내 할 일이 또 무엇이겠느냐?"(고백록9,10).

"네가 세속 끊고 하느님 종이 된 것을 보게 되었는데 내 할 일 더 있겠느냐?"

그리고 그녀는 아들을 쓰다듬어 주면서 효자라고 칭찬하였다. "임종의 병석에서 내가 시중을 들고 있을 적에 어머니는 나를 귀여워 쓰다듬어 주시면서 나를 효자라고 불러 주었습니다. 그리고 지극한 애정을 표시하시면서 평생 내 입에서 자기를 쏘는 언사나 욕되는 소리를 들은일이 없다는 것이 없습니다"(고백록9,12).실로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하고 덮어주며 좋은 점만을 간직하고 회상하는 것인가 보다. 아우구스티노에게 모니카는 육적으로뿐 아니라 영적으로 낳아준 어머니였다."그가 몸으로 낳아 준 것보다 정신으로 그 얼마나 한 정성을 기울여 나를 분만해주었던가 모릅니다"(고백록5,9).

서방교회서 가장 오래된 규칙서 저술

7) 아우구스티노는 수도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서방 교회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 규칙서를 썼다. 그것은 사도행전 4장(32-35)에 나타난 '사도적 생활'의 서술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는 새로운 양식의 수도생활을 구상하고 수도원을 설립하였는데, 그것은 이미 시작되어 서방에 소개되었던 동방의 수도 생활을 단순히 이식한 것이 아니었고 성서적 바탕 위에 문화와 환경에 맞게 적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당시뿐 아니라 근래에 이르기까지도 많은 수도회들이 아우구스티노의 수도 규칙서를 그대로 따르거나 새로운 규칙서를 만드는 데 그것을 참작하였다.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서 많은 성인 · 신학자 · 인문학자 · 과학자 배출

수도회는 십수 세기 동안 끊임없이 발전하여 왔고 남자 수도회와 여자 수도회로 이루어진 '성 아우구스티노회'는 많은 성인과 신학자들, 인문주의 대가들 그리고 과학자들을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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