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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안 콜베

 

 

사랑의 순교자 막시밀리아노 콜베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성인이다.그것은 그가 단순히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감방 동료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영웅적 행위 때문만이 아니다. 그가 한평생 하느님과 성모님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았고 늘 하느님을 위해 그리고 인류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용의 중에 살았기 때문이다.

 

매일의 사랑의 순교자적 삶이 그를 순교의 은총에 응답하도록 했던 것이다. 극도의 시련인 아사 감방에서의 죽음은 그의 거룩한 삶의 자세를 세상에 밝혔을 따름이다.

 

1. 생 애

 

막시밀리아노 콜베는 1894년 1월 7일 폴란드의 준스카불라에서 아버지 줄리오 콜베와 어머니 마리아 다브로프스카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라이몬도」라는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았다(「막시밀리아노」)는 수도원에서 착의식 때 받은 이름임).라이몬도는 열심한 부모로부터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았고 훌륭한 성모신심을 몸에 익혔다. 그러한 종교적 분위기에서 자란 그는 1907년 14세의 나이에 라부프 소신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으며 3년 후에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했다.

 

그는 수련을 마치고 1911년 9월 5일 유기서원을 했다. 그리고 이듬해 가을 로마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장상들은 그의 특수한 재능을 인정하여 그레고리안 대학교에 입학시키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학업 중이던 로마에서 그는 1914년 11월 1일 모든 성인의 대축일에 종신 서원을 했다.

 

다음해 10월 22일엔 그레고리안에서 최우수 성적을 인정받으며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허약한 중에도 학업으로 과로했던 그는 1917년 여름에 폐결핵에 걸렸고 그런 상태에서 그는 여전히 학업에 열중했다. 그 해 10월엔 동료 수사 6명과 함께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를 창설하였다. 10월 17일 첫 회합을 가진 이래 새로운 회원들은 끊임없이 늘어갔다. 성모의 기사가 실행해야 할 것은 기도, 좋은 표양, 고생 그리고 노동이었다. 1918년 4월 28일 콜베는 사제 성품을 받았다.

그리고 이튿날 프라테의 성 안드레아 성당의 「기적의 제단」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다. 학업을 계속한 콜베는 다음 해 7월 22일 같은 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몹시 쇠약해진 그는 9월에 폴란드로 귀국했고 크라코프에서 교수생활을 했다. 10월엔 「성모의 기사회」를 조직하여 활동을 개시했다. 병세가 매우 악화되어 요양치료가 필요했고 결국 그는 자코파네의 요양원서 근 일년 동안 치료받으며 머물러야 했다. 그는 그곳에서도 사도직을 수행했는데 기회 되는대로 환자들을 방문하며 대화했고 가르쳤으며 많은 이들에게 고해성사를 받도록 했다.

 

병세가 호전되어 그는 크라코프에 돌아가 다시 일을 하였다. 1922년 1월, 잡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를 창간했다. 장상의 명령으로 그로노드로 이동해서도 여전히 잡지를 발행했다. 처음엔 잡지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보냈으나 많은 이들이 후원금을 보내어 계속 출간할 수 있었다. 5천 여부 발행되던 잡지가 1925년엔 배로 증가되었다.병이 재발하여 콜베는 다시 자코파네 요양원에 가 1년 반 동안 치료받았다. 그 기간 동안 그의 동생 알퐁소 신부가 대리로 임명되어 업무를 수행했다. 그런 중에 1926년에 잡지가 4만 5천부로 늘어나 발행되었다. 중병에서 기적적으로 일어난 그는 그로노드로 다시 돌아 왔다.

 

1927년 10월 드루츠키 공작으로부터 땅을 기증 받게 되어 콜베는 출판부 수사들과 함께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 (니에포칼라누프)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난했으므로 판자집을 짓게 되었는데 주민들이 음식 준비와 노동으로 봉사하며 도와주었다. 그 해 11월 22일엔 드디어 성모의 마을에 입주했다. 잡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의 발행 부수는 매년 거의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1927년 5만 부 발행되던 잡지가 8년 후인 1935년 70만 부로, 그후 5년 되던 1940년에 1백만 부에 달했다.

 

한편 콜베는 어린이들을 위한 잡지의 필요성을 느껴 「원죄 없으신 성모의 소년 기사」를 발간했고, 외국인들을 위한 잡지로 라틴어로 쓴 「Miles Immaculatae」(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를 내었다. 그는 이어서 가톨릭 정신이 선명하게 부각되며 어느 당파나 개인적 이익을 초월하는 신문을 1935년 5월에 발행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작은 신문」(Maly Dziennik)이었다. 훌륭한 편집에 저렴한 구독료, 무보수 독지가들의 판매 봉사 등으로 신문은 신속히 그리고 널리 유포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콜베는 그 성공의 비결을 알고 있었다. 성모님의 전구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임을 잘 알았던 것이다. 「작은 신문」의 출발점은 9일 기도였다. 콜베는 창간호가 나오기 9일 전부터 327명의 동료 수사들과 함께 단식과 많은 희생을 봉헌하며 성체 앞에서 밤낮으로 기도했던 것이다.

 

콜베는 성모의 마을이 창립 된지 3년이 되어갈 때 동양 선교 사명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 동기는 어느 날 그가 기차에서 몇 명의 일본인 학생들을 만나 대화하던 중 하느님과 성모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관구장을 찾아가 일본에 성모의 마을을 세우고 선교하고 싶은 뜻을 표명했다. 장상들이 허락하여 그는 4명의 수사와 함께 1929년 12월 30일 폴란드를 떠나 다음해 4월 24일에 일본 나가사끼에 도착했다. 도착 후 만 한달 되던 5월 24일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보를 고국의 성모의 마을에 보냈다. 『오늘 창간호를 보냅니다. 인쇄소를 설치했습니다. 원죄 없으신 성모님 만세! 막시밀리안. 』

 

콜베는 1931년 5월에 히꼬야마 기슭에 땅을 얻어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을 설립하였다. 일본에 도착한지 2년 후 1932년 6월에 그는 새로운 성모의 마을을 설립하기 위해 인도로 떠나 에르나쿨람에 도착했다. 그곳 대주교로부터 인도 선교활동의 허락을 얻었다. 그는 일차 사명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 와 잡지를 더욱 발전시키며 선교활동에 전념했다.

 

1936년 6월에 갑자기 콜베는 폴란드의 성모의 마을 원장에 선출되어 귀국해야 했다. 그는 일본에서 돌아 온 후 심한 박해와 시련이 닥칠 것을 예감하며 자주 언급했다. 그는 날이 갈수록 전쟁이 절박해옴을 예감했으며 수사들이 영적으로 그것에 대비하도록 촉구했고 자신의 고난에 관해 예고했다. 드디어 1939년 9월 독일 군대가 폴란드를 침범했고 같은 달 19일 나치스 헌병들이 콜베와 동료 수사들을 체포해 암티스 수용소와 오스체슬로 수용소에 억류했다가 석방했다. 그들은 성모의 마을로 돌아 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를 복간했다.

 

1941년 2월 17일 나치스 비밀 경찰에 의해 콜베가 체포되어 파비악 형무소에 갇혔다. 그곳에서 혹독한 고문으로 고통받고 있던 많은 이들에게 고해 성사를 주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며 위로해 주었다. 그 해 5월 28일 그는 좥죽음의 수용소좦로 불리던 오셴침(아우슈비츠)으로 이송되었다. 여기서도 그는 절망하는 수감자들을 위로하고 고해성사를 주었으며 처벌의 위험을 무릅쓰고 틈틈이 영적 강화를 들려주었다. 어느날 수감자 탈출 사건이 일어나 같은 감방에 있는 10명이 소장에 차출되어 아사형에 처해졌다. 처자를 위해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울부짖던 감방 동료를 살리기 위해 콜베는 그 대신 아사실을 자원했다. 절규와 비탄이 흐르던 생지옥 같은 아사실은 콜베 신부로 인해 기도와 노래를 부르는 천국의 모습으로 변했다. 형리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9명의 수감자들이 생을 마칠 때까지 기도해 주고 위로하던 마지막 생존자 콜베 신부에게는 경찰이 독약 주사를 놓았다. 그 때는 그의 나이 47세 되던 1941년 성모승천 대축일 전날인 8월 14일이었다.

 

막시밀리아노 콜베의 전기의 저자 마리아 비노프스카는 하나의 일화를 소개하며 그것이 전기를 쓰게 된 동기라고 머리말에서 밝힌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살아 나온 친구 피에르가 절망에 빠져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에서 그에게 도전해왔다. 『살육이 자행되는 강제 수용소 안에서도 성인이 있단 말인가? 진정 성인, 자신보다 이웃을 더 사랑한 성인이 있다면 내게 보여달라!』 전혀 알지 못 하는 사람 대신 아사 감방에 들어가 죽은 콜베 신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그 친구는 그 위인에 완전히 매료되어 인간을 재발견함으로써 하느님을 다시 찾았고 끊어졌던 신앙의 유대를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을 매료시키고 변화시킬 수 있는 콜베의 영성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 그에게 성모께 대한 신심, 사도적 영성 그리고 순교 영성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통합적 영성을 이룬다.

 

2. 성모 신심

 

어려서 성모님의 발현을 체험한 콜베는 로마에서 공부할 때 성모님의 특별한 도우심을 받게 되었다. 그의 오른 쪽 엄지손가락의 염증으로 뼈가 썩기 시작해 의사로부터 절단수술을 선언받았으나 루르드의 물을 구해 환부에 몇 차례 바른 후 완쾌의 기적을 체험했다. 그로 인해 그는 성모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고 그분의 용감한 기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성모께 대한 콜베의 존경과 사랑의 표현의 일부를 어떤 이는 복음적 교리를 흐리게 하는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러나 성모의 기사로서 대장 성모께 대한 열렬한 충성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문제없이 포용될 수 있다.

 

그는 구원사 안에서 주님의 종으로서 구원 사업의 협력자로서 성모님의 위치와 역할을 분명히 이해하며 그에 맞는 존경과 예우를 드린다. 그분은 인간이 예수께 나아가기 위하여 통해야 할 전구자이시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시도록 해주시는 협력자이시다. 콜베의 성모께 대한 신심의 정통성과 탁월함은 교도권에 의해 확인되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시복식 강론에서 콜베를 『마리아의 신비를 이해하고 공경하며 찬미했던 위대한 성인들과 긴 안목을 지닌 성인들의 반열에 계신 분』으로 선언한 것이다.

 

3. 사도적 영성

 

콜베의 선교사명과 활동 수행은 성모신심 안에서 더욱 성장해 나갔다. 그것은 『성모를 통하여 성모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도달하는 것』이라는 「성모의 기사회」의 목적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성모님의 전구와 도우심을 통하여 사람들을 복음화하고 성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콜베는 일생을 통해 「성모의 기사회」 운동을 추진하고 확산시키면서 선교하였다. 이 운동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라는 잡지를 통해 추진해 나갔다.

 

이 잡지는 1939년에 폴란드에서만 1백만 부를 돌파했다. 점차적으로 「성모회 기사회」의 계획은 폴란드의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니에포칼라누프) 안에서 발전했는데 2차 세계 대전 즈음엔 650 여명의 수도자와 180명이 넘는 지원자가 거기서 살며 일했다. 콜베는 폴란드에서 성모의 마을이 세워진 지 3년 되던 해 동양 선교의 사명을 느끼며 일차 대상으로 일본을 선정했다. 장상의 허락을 얻은 그는 하느님의 섭리만을 믿고 일본으로 떠났고, 도착 한 달만에 기적적으로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 잡지를 출간했으며 두 해 후엔 성모의 마을을 세웠다.

 

선교에 대한 콜베의 열정은 한계를 모른 채 전진하며 세계 도처에 성모의 마을건립을 추진하며 복음화 활동을 하고자 했다. 일본을 향해 가던 중 사이공에서 콜베는 안남의 신부들과 접촉하여 그곳에서 성모의 기사 잡지를 내도 좋다는 승낙을 받았으며 상해에서는 부호 로팡호로부터 중국어로 잡지를 발행하는데 필요한 자금 제공 약속도 받았다. 그는 한 편지에서 선교의 포부를 이렇게 전개했다.

 

『우리들의 사업이 일본에 단단히 뿌리 내리면 인도로 건너가 사업을 벌이고 다음에 아라비아인들을 위해 베이루트로 건너갈 예정입니다. 터키어, 페루샤어, 아라비아어, 히브리어로 잡지를 발행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성모의 기사회의 활동은 10억 독자, 즉 지구의 반에 미치는 것입니다』 일본에 도착한 지 2년 후 그는 인도에 가 에르나쿨람 대교구장으로 부터 그곳에서 선교활동을 할 수 있는 허락을 얻었다.

그는 폐결핵과 과로로 몹시 쇠약했으나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성모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선교 활동에 온통 투신했다. 그의 선교 활동은 수용소 안에서도 지속되었다.

 

그는 어느 곳보다도 하느님의 사랑과 위로의 은총이 절실히 필요한 곳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엄격한 금지에도 불구하고 콜베는 고해성사, 영적 훈화, 상담 등을 통해 증오와 절망으로 가득 찬 수감자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평화를 심어 주는데 전력했다. 때론 발각되어 심한 구타로 실신까지 했지만 그의 사도직 활동은 좌절할 줄 몰랐다. 수용소 안에서 그러한 사도직 활동 뿐 아니라 그의 모범적 사랑의 삶과 특히 헌신적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희망의 빛이었으며 큰 위안이었고 복음 선포 자체였다.

 

4. 순교의 영성

 

감방 동료를 살리기 위해 대신 아사실을 자청했던 콜베의 순교자적 죽음은 갑작스런 영웅심에서 유발된 것이 아니었다. 주님의 일군으로서, 성모님의 기사로서 그의 일생의 삶은 나날이 순교의 준비였으며 훈련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헌신적 죽음은 그가 일생 살아온 방식의 마지막 귀결이었다. 그는 소년 시절에 예사롭지 않은 신비체험을 했다.

어느 날 성모님이 두 개의 상자를 들고 그에게 나타나셨다. 하나는 희고 다른 하나는 붉은 색의 상자였다. 그분은 다정스럽게 콜베를 바라보며 어느 것을 원하시는지 물으셨다. 흰색의 상자는 순결을 뜻하고 붉은 색의 관은 순교를 뜻한다는 그분의 설명을 듣고 콜베는 둘 다 원한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성모님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사라지셨다.

 

이 발현 사건은 콜베가 죽은 후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동료 수사들에게 보낸 편지(1941. 10. 12)에서 밝혀졌다. 어머니는 아들이 그 사건을 말한 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으므로 그의 체험이 사실이었다고 확신했고 그가 순교자로 죽게 될 것이라는 예감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주님께서 가르치셨고 실천하신 이 사랑을 콜베는 그대로 본받고자 했다. 그는 자신이 겪어야 할 고난을 예감했고 그것을 동료들에게 여러 차례 예고했다.

 

그는 또한 십자가, 고난 그리고 순교적 죽음으로 던져지는 것이 주님의 구원 사업 완성에 유익한 협력이라고 강조하곤 했다. 수용소에서 함께 지냈던 이들이나 간수들은 콜베가 감방 동료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 주었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가 수용소와 아사 감방에서 실천한 놀라운 사랑을 한결 같이 입을 모아 증언한다. 그는 수용소에서 전반적으로 자신에게 보다 쉬운 일이 돌아오도록 결코 애쓰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이 할 수만 있다면 다른 동료들이 덜 힘들도록 가장 힘든 일을 선택했다. 그는 폐결핵으로 쇠약했지만 자신의 몫의 음식을 자주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애덕을 실천했다.

 

감시원들의 엄격한 경계와 금지 조처에도 불구하고 그는 동료들에게 사제로서의 임무를 기회 되는대로 부지런히 수행했다. 콜베의 기도와 격려 고해 성사와 영적 훈화 등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마음의 위로, 희망, 용기를 얻었으며 절망과 자살의 유혹을 극복했는지 생존자들은 증언한다. 콜베의 아사행 자원은 한 사람을 구한다는 것 이상의 동기가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목격자들은 증언한다. 즉 9명의 다른 사람들을 절망으로부터 구제해야 한다는 중대한 사명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인간이 만든 가장 잔악한 그 곳을 사랑으로 정복해 나갔다. 미움을 사랑으로, 모욕을 용서로, 저주는 기도로 바꾸어 나갔다. 콜베의 영웅적 사랑은 간수들에게조차 충격적인 것이었다.

 

1) 콜베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리는 악과 투쟁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를 설립하였다.

 

그가 성모의 기사회를 창립한 때는 파티마에서 성모님이 세 어린이에게 나타나시던 해이며 러시아가 공산화되었고 반 교회적인 비밀 결사단 프리메이슨(Freemason)이 로마에서 대담하고 난폭하게 활동하던 1917년 10월 17일이었다.

성모의 기사회의 목적은 '성모를 통하여 성모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도달하는 것'이고, 그 목표는 죄인들, 이교도들, 이단자들 및 반 교회 비밀 결사단원들의 회개를 위해 그리고 모든 이들의 성화를 위해 성모님의 보호와 전구를 빌며 활동하는 것이다.

 

이 기사회의 운동은 잡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를 통해 추진해 나간다. 회원들은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의 나라의 발전을 위해 원죄 없으신 성모님께 자신을 완전히 봉헌하고 날마다 봉헌을 새로이 하면서 봉헌 기도를 바친다. 기적의 메달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닌다. 그리고 기사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랑과 희생의 정신을 가지고 생활에 임한다.

성모의 기사회는 1918년 4월 4일 교황 베네딕도 15세로부터 인준되었으며, 1926년 12월 18일 비오 11세는 이 기사회에 특정한 권한과 대사를 허락했고 1927년 4월 24일엔 전 세계에 이 신심 단체의 지부 설립을 허락했다. 한국 교회엔 1976년 5월 20일 대구 대교구장으로부터 교구 내에 지부 설립 승인을 받은 것으로 시작하여 인천 교구(1982. 2. 16), 마산 교구(1986. 9. 3), 서울대교구(1986. 12. 12), 부산교구(1986. 12. 20), 대전교구(1986. 12. 30), 전주교구(1987. 1. 14) 등 여러 곳에서 지부 설립을 승인 받아 수 만 명의 회원들이 기사회 모임을 가지며 활동하고 있다.

 

2) 콜베는 매스 미디어(대중 매체)를 통한 선교의 선구자였다.

 

'매스 메디어에 관한 교령'을 통해 복음 선포와 교육에 대중 매체를 활용할 것을 권장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기 30 여 년 전 콜베는 이미 그 위력과 효율성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콜베는 우선 출판물을 통해 복음을 선포하는 데 열중했으며 놀라운 결실을 얻었다. 그가 동료 수사들과 1922년 1월 창간하여 제작한 잡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의 부수는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1924년에 1만 2천부, 1927년 5만부, 1929년 11만 7천 5백부, 1931년 43만 2천부, 1935년 70만부, 1939년엔 1백만 부에 달했다. 그는 이어서 어린이들의 신앙 교육을 위한 잡지 '원죄 없으신 성모의 소년 기사'와 외국인들을 위해 라틴어로 쓴 잡지를 발간했다. 그뿐 아니라 가톨릭 정신을 선명히 드러내는 신문을 발행하여 신속히 광범위하게 유포시켜 대중을 포섭했다. 그러한 성과의 뒤엔 무엇보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기 위한 자세로 콜베와 327명의 노동 수사들의 끊임없는 기도와 희생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콜베는 방송국을 설치하여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영상을 통한 교육 및 복음화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초기 단계였던 영화는 교회 안에서 윤리적 가치가 없다고 평가되며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전쟁으로 인해 무산되었지만) 선교용 가톨릭 영화를 제작하기 위하여 일류 배우들을 기용하려 구상했고 성모의 마을 안에 소형 비행장을 지을 계획도 세웠었다. 콜베는 복음 선포를 위하여 출판물 뿐 아니라 현대의 과학 기술을 홍보 수단으로 최대한 활용하고자 했던 선구자였다.

 

3) 콜베는 노동의 품위를 향상시켰다.

 

많은 지역에서 그러했지만 폴란드에서는 콜베가 활동하던 시대까지 봉건주의 사상이 남아있어 수사 신부와 노동 수사 사이에 높은 담이 있었다. 노동 수사들은 개인적 생활을 영위할 수 없을 만큼 하층 계급을 대표하듯 중노동을 했던 것이다.

콜베는 수도회의 설립자인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으로 복귀하는 쇄신을 시도하였다. 민주적 사고 방식을 가지고 당시에 일대 혁신을 이룩한 성 프란치스코는 일생 사제 아닌 평 수사(부제품은 받았음)로 살았다. 콜베는 수도원의 관행적 차별을 파기하면서 노동 수사들을 수사 신부들에게만 유보되어 있던 제 일선의 지위로 높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기득권 층에 있던 일부 사제들로부터 저항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창립자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철저한 청빈과 모범적 순종의 자세, 순교자적 헌신과 봉사 그리고 열렬한 애덕은 함께 살며 공동 작업을 하던 동료 수사들로부터 존경과 사랑 그리고 적극적인 협력을 얻도록 했다.

 

한편 콜베는 잡지를 발행하기 위해 수도자들이 수도복을 입은 채 기계를 다루며 일하는 모습의 사진을 잡지의 일부 면에 삽입하곤 했다. 그것은 수도자들은 종일 기도만 한다든지 혹은 노동이란 농사일을 하는 것만으로 생각하던 일반인들에게 발전하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면서 역동적으로 사도직 활동을 수행하는 수도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4) 콜베는 신앙 때문에 직접 박해받진 않으나 이기심과 편이주의에 안주하도록 유혹

 

받는 오늘의 상황에서 우리에게 현실적 귀감이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요한 15, 13)고 가르치셨고 인류 구원을 위해 실천하신 주님의 모범을 따라 콜베는 최고의 사랑을 드러내며 목숨을 바쳤다. 그가 실천한 그 최고의 사랑은 나약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도저히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주님께서 특별히 허락하시는 은총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어떻게 그런 은총이 가능했을까? 성령의 부르심과 이끄심에 민감히 깨어 응답하는 믿음의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언제나 주님께 모든 것을 내 놓고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칠 용의로 매 순간 결단을 내리며 증거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여기서 신앙에 대한 박해가 없는 오늘의 상황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순교는 여전히 적용될 수 있는 것이며 추구되어야 할 실재임을 깨닫게 된다. 오늘 우리는 목숨을 내놓는 상황에 살고있진 않으나 물질 만능주의와 무신론적 분위기가 확산되어 편이와 이기심에 안주하도록 끊임없이 유혹 받으며 신앙의 위기를 겪게 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복음적 삶을 살기 위해선 매일 매 순간 순교자적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일상에서 그렇게 길들여진 복음적 삶이 본 의미의 순교가 요구되는 극한 상황에 처할 때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며 은총에 응답할 수 있게 하는 기반이며 보증임을 순교자들 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진리를 우리는 콜베의 생애에서 재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5) 콜베는 103위 한국 순교 성인들 외에 우리 땅을 밟았던 또 한 분의 성인으로서 우리 나라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해 준 분이다.

 

그는 1903년 일본으로 가기 위해 한국을 통과한 적이 있다. 그 때 동생 신부에게 이러한 편지를 썼다. "…한국을 가로지르며 한 여행은 너무나 굉장해서 모두 이것을 곰곰히 생각하는데 지칠 줄 몰랐다.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멈춘 부산에서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리는 기차에서 내린 후 배를 타려면 4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는 것을 이용해 미사를 드리고 싶었다. 한 경찰관으로부터 그 도시엔 여섯 개의 개신교 교회가 있다는 것과 성당은 한국을 통틀어 세 개쯤 될까 말까 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뿐이다! 언제쯤 성모께서 이처럼 아름다운 나라에 당신 아드님의 나라를 세우실까?"

당시 한국의 성당 숫자에 대한 정보는 맞지 않는 것이지만 콜베가 그 때 한국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며 성모님의 전구를 간절히 청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시성이란       성인이란      시복이란       복자란       성인공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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