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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바쳐 정의 실현한 명재상 성 토마스 모어(Thomas More)

 

 

* 1478년 영국 런던 출생     * 1492년 옥스퍼드 입학       * 1500년 변호사 자격 취득     * 1515년 <유토피아>저술

* 1529년 대법관 임명         * 1535년 단두대에서 죽음    * 1935년 시성됨

 

 

토마스 모어는 위대한 성인이다. 그는 5백여 년 전 영국에서 태어나 학자로서, 가장으로서, 법관으로서 그리고 수상으로서 그 어느 누구보다도 인생을 사랑했고 세상을 멋지게 살면서도 성인이었던 것이다. 그가 성인인 이유는 어느날 갑자기 진리를 위하여 단두대에 목숨을 내놓을 만큼 영웅적이어서일까? 교회의 형식 절차에 따라 시성 되었기에 그렇게 인정된는 것일까? 그가 성인인 이유는 무엇보다 일상에서 은총에 협력하면서 언제나 하느님을 향해 살았고 하느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용의로 근본적 결단을 내리며 살았기 때문이다.극도의 시련인 죽음은 그러한 일상적 거룩한 삶을 세상에 밝혔을 뿐이다.

 

1. 생 애

토마스 모어는 1478년 2월 런던에서 법관이던 죤 모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2세에 종교계 및 정계에 명망을 얻고 있던 모오튼 대주교의 문하에 시동(侍童)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지내는 동안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14세에 옥스퍼드에 입학하였고 뉴 인과 린카스 인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1500년 약관 22세에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다. 그는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면서도 어려서부터 관심을 가졌던 문학 수업을 게을리하지 않아 고전 작가들을 열심히 연구하였는데 그것이 평생의 취미가 된다.3년간 훠니벌스 인에서 법학 강의를 했고 1504년 중의원에 들어갔다. 이 무렵 수도생활에 마음이 끌렸으나 숙고 끝에 자신에게 그 성소가 없다고 판단하고 1501년 제인 콜트와 결혼했다.

문학 · 철학 · 예술에 다재다능한 천재

모어는 런던에서 변호사 업무를 수행하면서 상법전문가로 명성을 얻게 되었고 런던시의 전속 법률가가 되어 공정함과 빈곤계층을 위한 헌신적 봉사로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1511년에 네 자녀의 어머니인 그의 처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하게 되었고 얼마 후 연상의 미망인 앨리스 미들튼과 재혼한다. 첼시에 있던 그의 저택은 지성인 생활의 한 중심이 되어 에라무스, 콜렛, 그로우신 등 유명한 학자들이 운집했다.

헨리 8세가 즉위하면서(1509)그의 화려한 정치 및 외교 경력이 펼쳐진다.1510년에 런던 부시장으로 임명되었고 1515년엔 플란더스에 외교 사절로 파견되었다. 이 임지에서 그는 유명한 저서 <유토피아>를 썼다. 1518년에 민원관과 추밀 참정관을 경임했고 3년 후엔 기사로 승격되었다.1523년엔 중의원 의장과 케임브리지 및 옥스퍼드 대학교의 이사직을 겸임했으며 1525년에는 랭카스터 공작령의 행정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529년 그의 나이 51세에 제국의 대법관(Lord chancellor:당시 최고법관인 동시에 수상 격인 으뜸 벼슬)에 임명되었다.

왕과 좋은 우정은 토마스 모어의 직분과 함께 명성을 높게했다. 그러나 헨리 8세의 심경과 처신의 변화와 함께 모어에게 큰 위기가 닥쳐오게 되었다. 훌륭한 왕의 품격을 갖춘 인물로 존경받던 헨리 8세의 즉위는 전 유럽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으며 런던에서는 그를 '부와 금ㅑ은ㅑ보석을 탐하지 않고 불멸의 명예와 덕을 추구하는 국왕'으로 추앙했다. 헨리는 속사(俗事)에 이르기까지 교황권을 지나치리만큼 옹호하였으며 한편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수호자'라는 명예를 얻을 정도였다. 그리고 마르틴 루터가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치던 그 무렵 그는 <칠성사 옹호론>을 쓸 만큼 교회의 신앙에 열정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러했던 그가 뒷날 교황에 대적하게 되고 잔인하며 탐욕적이고 포악한 살인을 자행하는 폭군이 될 줄 어찌 누가 예견했겠는가?

영국왕 헨리 8세의 호쾌한 대화 상대자

헨리 8세는 모어의 능력과 인품을 잘 알았기에 그를 필요로 하는 자리에 적절이 등용했다. 따라서 모어는 그에게 중요한 정치적 조언자 및 협력자, 복잡한 외교 문제의 해결사뿐 아니라 문학, 철학, 예술 분야에 이르기까지 호쾌한 대화 상대자였다. 모어의 운명은 황의 이혼 송사로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헨리 8세는 그의 형 아서가 어린 소년으로 결혼했던 스페인 왕실 출신 아라곤의 가타리나와 결혼하였다. 형수와 결혼했을 때 헨리의 나이는 겨우 열두 살이었으며 그들은 행복하지 못했다. 한편 헨리 8세는 가타리나에게서 해방되길 원하면서 새로운 왕비로 궁녀인 앤 볼라인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는 학자들에게 가타리나와의 결혼의 무효에 대하여 연구하게 하고 다른 한편 교황청에 대표단을 파송해 특별 관면을 통해 합법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그것이 거부되자 그때까지 가톨릭 신앙의 수호자라 일컬어지던 그가 교회로부터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는 영국의 고위 성직계를 강입하여 첫 결혼을 무효화하게 하고 앤을 정식 아내로 선언하게 하였으며 중의원의 의결에 따라 영국 교회와 성직자들의 유일한 보호자이며 최고 지도자로 받아들이게 했다.1532년 5월 15일의 일이다. 이로써 영국 성공회가 태어나게 된 것이다.

"여보게, 나는 오늘, 자네는 내일 죽네"

모어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분쟁을 피하기 위해 건강을 구실로 사표를 제출하였다. 왕은 지극한 유감을 표시하면서 사표를 수리하였다. 그 사이에 가타리나는 궁정에서 쫓겨나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고 1553년 5월 앤은 영국의 왕비로 책봉되었다. 왕비의 책봉식에 초청 받은 모어는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모어는 왕의 행위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비난하지 않았으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어느날 모어의 친구인 노오포크 공작이 찾아와 위협 담긴 충고를 하였다."토마스, 우리는 함께 국왕을 위해 일하지 않았던가. 군주의 분노는 곧 죽음이라는 것을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그렇다면 자네와 나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네. 내가 오늘 죽는다면 자네는 내일 죽게 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는 모반 대역죄로 기소되었다. 영국의 대법관이며 수상이던 사람이 런던 탑의 감옥에 갇혔다. 그때가 1543년 4월 17일이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모든 수입을 잃었고 부동산은 몰수당했으며 가정에 큰 위기가 닥쳤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헤어져야 했다. 그는 감옥에서 헨리 8세와 앤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의 왕위 승계를 규정하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요청받았다. 서약문을 자세히 검토하면서 그는 거기에 서명할 겨우 왕이 영국교회의 최고 지도자로 또한 승인하는 데 동의하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서명을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내 양심은 나에게 국왕의 후계자들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합니다. 그러나 국왕의 대주교권을 승인하는 것은 내 영혼이 저주받는다 할지라도 서약할 수 없습니다."

적대자들은 모어가 완전히 좌절하여 스스로 포기하도록 집요하게 박해하였다. 감옥 안에서 집필을 방해하기 위해 펜을 빼앗았고 책도 차입하지 못하도록 했다. 심문은 불시에 반복되었고 식사량이 점차 줄었다.그의 가족들도 조직적으로 가난에 쪼들리게 하였다. 그는 류마치스가도져 고통을 겪었으며 건강이 많이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타협하지 않았으며 유모어를 잃지 않았다.

"왕의 신하이기에 앞서 하느님의 신하다"

모어는 자신의 종말을 <수난에 대하여>라는 글을 준비하며 쓰던중 책,필기도구와 함께 지니고 있던 모든 물건들을 빼앗겼다. 그는 숯 한 토막으로 자녀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너희들 어느 누구도 기도 중에 잊지 못하는, 사랑이 넘치는 너희 아버지가 한 토막의 숯으로 썼다....자 이제 종이도 끝이 나니 잘들 있거라. 우리 주님께서 너희를 항상 참되고 의리 있고 정직한 사람으로 지켜주시길 빈다."

그는 단두대 위에서 평화를 잃지 않으면서 잠시 하느님의 자비를 빌고 난 후 그에게 용서를 청하는 형리를 포옹한 다음 자신의 가톨릭 신앙을 고백하고 둘러 서 있는 이들에게 왕을 위해 기도하기를 권유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여 선언했다."나는 왕의 충실한 신하로 죽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에 앞서 하느님의 신하로 죽는 것입니다."그가 타워 힐에서 참수된 날은 1535년 7월 6일이었다.

1886년 정부 문서 공개로 모어의 행적이 정확히 드러남에 따라 시복 조사가 시작되었고 같은 해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935년 5월 20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하여 시성 되었다.

권력 · 富 지니고도 완덕의 길 걸어

토마스 모어는 뛰어난 인문 학자, 출중한 법률가, 한 가정의 훌륭한 가장으로서 그리고 나라의 대법간이며 수상으로서 세상사에 적극 관여 하면서 살았던 인물이다. 완덕의 길이 세상을 떠나 실천할 수 있는 철저한 복음 권고 덕에 있다고 이해하는 우리에게 이러한 인물은 흔히 '성인'이라 일컬어지는 이들과 너무나 이질적인 존재로 여겨지지 않는가? 그에게 완덕의 길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는 그의 성소에 충실하면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자유로웠기에 세상 한가운데에서도 세상을 소유하거나 그에 소유됨이 없이 참되게 그리고 열렬히 사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참된 사랑은 그에게 곧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연결되었다.

 

2. 평신도의 영성

그리스도인 성숙이란 인간의 복음화이다.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되는것"(에페 4,13)이다. 그리스도인 성숙은 곧 인간 각자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능력과 카리스마에 따라 복음 안에서 그분의 뜻대로 자신을 충만히 실현하는 것이다.

평신도의 영성은 세상 안에서 세상을 성화하며 세상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는 삶이다. 그러나 그안에 살면서 그에 매이지 아니하고 은총 안에서 성화되는 자유로운 삶이다. 그렇게 세상 안에서 완성의 길을 걷는 평신도의 영성을 모어는 모범적으로 살았다.

은총이 인간 안에 작용하기 위해선 그 본성을 전제로 요구하듯이 그리스도인 성숙은 은총이 효율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응답적 기본 바탕으로 인간 성숙을 요구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인간적 삶과 별개의 것이기보다 차라리 충만한 인간의 삶 자체이므로 인간 성숙은 그리스도인 성숙의 전제 내지 병행 조건이다. 그러므로 성숙한 인간일 수 없을 때 성숙한 그리스도인일 수 없는 것이다.

토마스 모어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기 전에 성숙한 인간이었다. 모어는 어려서부터 모든 예의 범절을 배워 익히며 언어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라틴 어는 물론 희랍어에 능통했으며 영어 산문의 대가였다. 그는 위대한 인문주의 학자였으며 외교관, 법률가였고 웅변가였다. 그는 또한 영국뿐 아니라 서구 전역에 걸쳐 당대의 유명한 석학들과 두터운 친분을 맺으며 배움과 우정을 나누었다. 특히 스페인의 비베스, 프랑스의 뷔데, 네덜란드의 에라스무스와 친숙했다.

그가 쓴 <리처드 3세 전>은 세익스피어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현대 영국 사기(史記)의 시원이기도 하다. 또 그가 저술한 <유토피아>는 후대에 무수한 이상국론들이 그것을 모방할 만큼 권위 있는 고전이 되었으며,16세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정치론서이다.

한편 그는 확고한 결단성과 대쪽같은 정의감 그리고 놀라운 용기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매우 겸손하다고 다정다감하여 모든 이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는 언제나 남을 도와주기를 당연한 일로 알았다. 억울하고 불우한 사람들을 인정 깊고 따뜻한 말로 위로해 주곤 했다. 그래서 그는 '곤경에 빠진 이들의 옹호자'라 불렸다. 위엄과 온화와 청아의 조화가 그의 품성이라고 당대의 여론은 칭송하였다. 모어는 또한 유머로도 유명하였다. 그는 일상에서뿐 아니라 단두대 앞에서까지 유머의 여유를 잃지 않았다. 단두대 앞에 꿇어앉은 채 모탕 곁으로 그의 수염을 쓸어내리며 남긴 마지막 유머는 잘 알려져 있다."수염은 모반 대역을 하지 않았으니 잘려서는 안 되지."

모어가 서거했다는 비보를 받고 에라스무스는 이렇게 썼다."토마스 모어, 영국의 수상, 그의 영혼은 눈보다 희었고 그의 천재성은 위인을 많이 낳은 영국에서도 전무후무할 것이다."그리고 스페인의 찰스 5세 황제는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표현하였다. "나는 그렇게 훌륭한 협력자를 잃는 것보다 차라리 내 영토 중에 가장 아끼는 도시를 잃는 것이 낳다고 생각한다."

2차 바티칸 공의회의 평신도 영성을 미리 살아.

모어는 젊은 시절 한때 프란치스코회 평수사가 될 생각을 했었다. 그는 세속을 떠나 수도생활을 하는 것이 속화에서 벗어나 하느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봉헌하며 성화될 수 있는 길일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오랜 심사 숙고 끝에 자신은 수도생활을 위해 세속을 떠날 소명을 받지 않았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복음 정신에 따르는 생활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그에게 소중했던 가족이나 재산도, 지위나 법질서도 자신의 마음을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두는 데 방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소신으로 살았다. 그는 가정과 세상사 그리고 일상에서 만나는 이웃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언제나 따를 태도를 가지고 살았다. 그는 아주 뒷날 제 2차 바티칸공의회가 제시하게 될 평신도의 영성을 이미 모범적으로 살았던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각기 고유한 생활 상태와 모든 조건 속에서 완전한 성인의 길[聖性]로 나아갈 수 있음을 성서에 근거하여 천명하였다(교회헌장 5장 참조).성성(완덕)에 필요한 조건은 모든 이에게 동일한 것이 아니며 어떤 사람에게 최선의 것이 다른 이에게 최선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이해해 온 대로 철저한 복음 권고덕을 수행하는 수도생활이 완덕에 나아가는 데 최선이라는 사실은 모든 사람이 다 완덕에 나아가기 위해서 그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이가 성인이 되고 완덕에 나아가도록 원하시고 부르시는 하느님은 모두가 가정과 세상사 관리를 포기하고 수도자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평신도의 성성의 생활은 세상에 살도록 불린 성소 때문에 현세에 대한 관여와 지상생활의 참여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평신도의 영성은 세상 안에서 세상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는 삶이다. 결혼, 가정, 직업 및 사회 생활 안에서의 성성인 것이다. 따라서 기도와 전례, 성사 생활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활동이 성화의 길이며 방법인 것이다.

재물 많았으나 마음은 빼앗기지 않아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모어는 그 당시 이미 평신도로서 세상 안에서 완성의 길을 걸은 사람이다. 그는 세상 안에서 살면서도 세상에 매여 있지 않았다. 그는 재물을 관리하고 활용하면서도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소유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뿐 아니라 가족들이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했으며 절도있게 재물을 관리하여 가난한 이들을 도왔고 양로원을 세워 불쌍한 노인들을 보살폈다.

그는 가정을 소중히 여기고 가족을 극진히 사랑하였지만 그것이 하느님 사랑에 장애가 되고 그분을 망각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았으며 또한 그렇게 살았다. 그는 품위 있는 가정 분위기를 즐겼고 아내, 자녀들 그리고 많은 친지들과 함께 멋진 친교와 사교생활을 하면서도 하느님과의 영적 친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새벽 두 시에 일어나 일곱 시까지 기도하고 공부하였으며 매일 아침미사에 참례하였다. 저녁엔 온 가족이 모여 가정 기도를 하였으며 식사 때는 가족 중의 하나가 성서 한 장을 주해와 함께 낭독했다.

성령께 마음을 열고

토마스 모어는 법질서와 국가 제도를 존중하였으나 그것 역시 그에게 최상의 가치는 아니었다. 그는 법과 제국 그리고 왕을 위하여 뛰어나게 헌신한 사람이었으나 이 모든 것에 대하여 내적으로 거리를 유지하고 초연한 자유를 간직하며 그의 마음은 늘 주님이신 하느님께 향하여 있었다. 그는 높은 지위의 벼슬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소탈하고 겸허하며 검소하였다. 그는 모든 이의 인격을 존중하였다. 그는 자신의 비서에게, 자기가 무엇이든 잘못할 때에는 어제든지 지적해야 한다는 책무를 주었다.

이같이 그는 가정과 재물 그리고 국가를 귀중히 여겼으나 그 어느 것도 하느님 위에 두며 우상화하지 않았다. 그의 영성은 세상과 그 사물을 떠나거나 버리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거이게 매이거나 빠지지 않는 데 있었다. 그는 세상 속에서도 성령의 은총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3. 순교 영성

순교는 인간적 열정이나 스스로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가능한 것이다. 토마스 모어가 최고의 사랑의 증거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러한 은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순교적 결단 중에 일상의 성실한 삶을 살면서 성령께 자신을 개방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수입 끊기고 재산 몰수당해

모어는 하느님과 세상의 불의의 권력 앞에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중대한 기로에서 하느님의 뜻에 모든 것을 위탁한다. 그는 결국 국정에서 지위와 영예 그리고 부수적인 모든 혜택을 포기해야 했다. 대법관이며 수상이던 그가 런던 탑의 감옥에 갇혔고 그를 심문하고 심판하는 자들 앞에서야 했다. 그는 모든 수입을 잃고 부동산을 몰수당하며 그로 인해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가족들에 대한 우려로 더욱 고통스러웠다. 그는 왕의 우정어린 호소와 배려 그리고 친구들의 감언이설에도 굴복하지 않고 끝내 목숨 바쳐 진리와 정의 편에 섰다.

우리는 모어의 언행에서 순교자들이 지녔던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자세를 발견할 수 있다. 모어는 무엇보다 먼저 순교자의 원형이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고자 하였다. 교회의 전통적 신학에 의하면 순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죽음의 의미에 기초를 둔다. 순교의 특성 중 첫째 측면이 스승이시며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며 따르는 것이다. 모어는 이 진리를 몰랐을 리가 없다. 그는 감옥에서 자녀들에게 이렇게 썼다. "아무도 머리가 없이는 그렇게 높은 영광에 다다를 수 없다. 우리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과 한 몸으로 일치되어 있어야 하며 우리도 저 영광에 이르려면 그분의 지체로서 그분을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리로 이끄시는 영도자이시다. 너희는 그리스도께서 수난하심으로써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셨음을 모르느냐? 그분이 몸소 고통 없이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지 않으셨다면 누가 감히 아무 고생 없이 그리스도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

인간의 힘으로 순교하는 게 아니다.

순교자들은 단 하나뿐인 소중한 목숨까지 바치면서 주님을 증거할 수 있다는 것이 자신들의 힘이나 인간적 열의 또는 영웅심으로 가능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오히려 질그릇같이 깨지기 쉬운 자신들의 연약함(2고린 4,7 참조)을 자각하고 인정하면서 그들 안에 성령의 은총이 충만할 때 순교가 가능한 것임을 고백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열렬한 애덕을 실천하면서 모든 성인의 통공 안에서 일치하는 공동체의 형제 자매들에게 기도의 도움을 청하면서 또한 성령의 특별한 힘을 끊임없이 간구했던 것이다. 토마스 모어도 자신의 연약함을 알았고 그러면서도 하느님의 은총을 신뢰하였다.

그는 딸 마가렛에게 이렇게 썼다. "네가 너희 아버지보다 약하고 여린 마음을 가졌을 리 없다. 비록 내 천성이 아픔을 퍽이나 싫어하고 고삐 같은 것만 보아도 소름을 끼치지만, 사랑하는 아가, 바로 여기에 내 감정도 있나보다. 즉 내가 평생 겪어본 모든 사경(死境)의 두려움의 한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자비와 힘으로 단 한번도 양심을 어기는 일에 동의할 생각조차 안 했으니 말이다." 두려움 속에서도 그는 하느님께 고통을 인내와 기쁜 마음으로 견디어 낼 힘을 주시도록 빌었다. 그는 친구 본비지에게 보낸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 그러면 친애하는 본비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자네와 나 그리고 이 세상에 사는 모든 필멸의 인간들에게, 저 기쁨을 위해서는 이 세상의 모든 보화와 영화와 삶의 희열까지도 무(無)로 여기는 힘을 내려주시길 기도하네." 그리고 그는 자주 이렇게 말하였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죽음을 대할 수 있는 모범적 생활을 내가 해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내가 죽기를 원하신다면 나의 마지막 시간에 은총과 자비를 내게 거절하지 않으실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겠다."

자기를 죽이는 이 위해 열렬히 기도

순교가 그리스도의 모방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순교자의 수난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유사한 점을 가진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며 무엇보다 순교자의 희생자세가 그리스도의 자세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즉 사랑 때문이다. 모어는 자신이 곤경에 처하고 단두대에서 비참하게 죽게 되었지만 어느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왕을 위해서까지 기도하였다. 그는 참수형을 구경하러 몰려온 군중을 향해 마지막 말을 외쳤다. 그것은 성령과 함께 하는 권위 있는 순교자로서의 신앙고백이었다. "여러분, 나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나도 하느님 나라에서 여러분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왕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분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왕이 되도록 말입니다. 나는 왕의 충실한 신하로 죽습니다. 그러나 나는 와의 신하이기 전에 하느님의 신하로 죽습니다."

매일의 십자가 지는 게 순교의 시작이자 핵심

하느님과 그분의 진리를 위해 목숨 바치는 행위를 뜻하던 '순교'의 개념은 박해 없던 시대의 교회 안에서 '영적순교'라는 뜻으로 기도와 고행에 전념하던 은수생활에 그리고 나중엔 수도생활에까지 적용되었다. 순교에 대한 폭넓은 이해는 그리스도인의 일상적 생활에까지 확대 적용되었다. 매일 앞에 놓이는 각자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순교의 시작이며 핵심이라는 것이다. 실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복음적 삶엔 매일 매순간 순교적 결단이 요구된다. 가정에서 훌륭한 부모의 역할 수행, 좋은 자녀로서의 삶, 일터에서 모범적 근무와 기쁜 봉사, 정의로의 선택, 성실한 신자로서의 본분 이행, 이웃관계에서 절제, 양보, 이해, 용서, 화해 등 여기에 언제나 순교적 결단이 요구된다. 일상에서 이렇게 길들여진 삶이 진정한 의미의 순교를 요구하는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될 때,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는 은총에 이르게 하는 확고한 기반이며 보증이라는 것을 순교자들의 생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토마스 모어는 훌륭한 성인이었다. 그것은 그가 어느 날 목숨을 내놓아 주님과 그분의 교회를 위하여 죽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구나 교회로부터 시성되었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가 성인이었던 것은 일상에서 언제나 하느님을 향해 살았으며 하느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용의로 근보적 결단을 내리며 살았기 때문이다.

하느님 위해 모든 것 바칠 근본적 결단 필요

모어는 감옥에서 헨리 8세를 영국교회의 최고 지도자로 승인 서명하기를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 양심은 나에게 국왕의 후계자들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국왕의 대주교권을 승인하는 서명은 내 영혼이 영원한 저주를 받는다 해도 할 수 없습니다."

어느 날 왕은 모어의 마음을 돌리려는 시도로 모어의 딸 마가렛으로 하여금 감옥을 방문하도록 주선했다. 모어는 얼마 전에 받은 딸의 편지 내용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딸은 그에게 하느님은 사람의 혀보다 마음을 더 소중히 여기실 터이니 그가 처신을 바꾸어도 그의 속마음을 하느님은 잘 알고 계실 것이라고 썼던 것이다. 그래서 모어는 방문한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나의 딸 마가렛, 내 생애에서 나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너의 편지였단다. 나는 나의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해선 안 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단다. 너에게 간청한다. 다시는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하지 말기 바란다."

매일의 봉헌적 삶이 순교 은총 받게 해

그는 세상의 어느 것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기에(로마 8,35-39참조)매일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루가 9,23참조)주님의 뜻을 따랐던 것이다. 극도의 시련인 단두대의 죽음은 그의 그러한 삶을 세상에 밝혔을 따름이다. 그가 순교로 끝나지 아니하고 수상으로서의 영화를 누리고 가족 및 친지들과 행복한 생활을 하며 장수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삶의 자세는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그의 매일의 봉헌적 삶이 그를 순교의 은총에까지 이르게 했던 것이다. 모어는 실로 다음과 같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그의 삶으로 증거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이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1고린 3,21-23)

 

4. 영성사 안에서의 위치

왕의 이혼 반대, 순교

1) 모어는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성실히 믿고 열렬히 옹호하던 적극적인 평신도 신학자 및 호교론자였다.

그는 유럽 전역에 큰 영향을 미치며 교회에 도전하고 있던 마르틴루터에 반대하는 글들을 쓰며 교회의 가르침을 옹호하였다. 헨리 8세가 루터에 대항하여<칠성사 옹호론>(1521)이라는 글을 발표하자 루터는 그것을 공박하였다. 이때 모어는 헨리 8세의 논문을 지지하면서 <마르틴 루터의 공박에 대한 응답>(1523)이란 글로 반격했다. 모어가 대법관을 사임한 후에는 루터파의 주장에 반대하여 교회의 가르침을 옹호하는 저술에 몰두하였다. 그는 영국 루터파 틴 데일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교회의 가르침을 변호하였다. 특히 성체 안에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두 저서는 그의 놀라운 성체 신심과 가톨릭 교회의 뛰어난 신앙 자세를 드러내 준다. 하나는 <요한 프리트에게 보내는 편지>이며 다른 하나는 <성사적, 실제적으로 우리 주님의 복된 몸을 배령하는 법>이다.

모어는 글과 말로써 호교했을 뿐 아니라 목숨을 바치면서 결혼의 불가해소성과 교황의 수위권을 옹호하였다.

성체 안의 그리스도 현존 밝혀

2) 모어는 성체 안에 그리스도의 현존을 굳게 믿고 강력히 옹호한 '성체의 성인들'중의 하나이다. 개신교로 개종한 젊은 사제 요한 프리트가 한 논문에서 성체 안에 그리스도의 현존을 부정하며 성체는 단지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억하고 기리는 음식이라고 주장하자, 토마스 모어는 공개 편지 형식을 통해 조목별로 자세히 반박하였다. 그는 성서 말씀에 입각하여 성체 안에 그리스도의 현존 사실을 설명한 후 예수께서 성체성사에 관해 말씀하실 때 그 제자들 중에도 알아듣기 어려워하던 이들이 있었으며 그 때부터 많은 이들이 떠나갔다(요한 6,48-66참조)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그러한 거부반응이 계속 되풀이되고 있음을 유감스러워 했다. 이어 프리트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당신은 주님을 떠났던 사람들처럼 되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따르는 사람들이 되도록 다른 이들을 이끌어야 할 것이오." 그리고 그를 위한 기도로 끝맺었다. "하느님, 청하오니, 길 잃은 양의 마음속에서 이단을 몰아 내시고 그를 다시 당신의 충실한 종으로 만드소서."

그 후 죠오지 조이라는 사람이 다시 성체성사를 공격하는 글인<주의 만찬>을 발표하자, 모어는 <'주의 만찬'이라는 이름의 독이 들어 있는 책에 대한 답변>이란 논문을 썼다. 모어는 그가 죽기 얼마 전 런던 탑에서 <성사적, 실제적으로 우리 주님의 복된 몸을 배령하는 법>이란 논문을 썼다. 그는 이 마지막 논문에서 성체 배령을 세 가지 방법으로 구별하여 설명하였다.그것은 성사적 배령, 영덕 배령, 그리고 실제적 배령이다. 성사적 배령은 그리스도의 실체적인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것이다. 이 겨우 때론 정신적, 영적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지 않을 경우도 있다. 은총지위에 있지 않은 채 합당하지 못하게 성체를 모시는 것이다. 영적 배령은 성체를 받아 모시지 못하더라도 신령한 방법으로 성체 안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실제적 배령은 주님의 몸을 성사적 · 영적으로 모시는 것이다.

자유 만끽한 평신도

성체성사의 생활인이며 증인인 모어가 감옥에서 바치면서 쓴 영적 배령기도는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주님, 당신의 거룩한 성체를 갈망하는 은총을 허락하소서. 특히 성체 안에서 당신의 거룩한 몸이 함께하심에 기쁨이 넘치나이다...오, 주님, 우리 모두가 오늘도 역시 이 성사의 완전하고 축소되지 않은 현존을 누리고 매일 당신의 보편 교회인 신비체의 살아 있는 지체가 되게 하여 주소서."

3) 모어는 사회의 정의와 불의 앞에서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자세를 삶으로 보여준 신앙인이다. 그는 나라와 법질서를 위하여 성실히 몸바친 사람이었다. 그는 법관으로서 소송보다는 화해를 종용했으며 오늘까지도 명 법관으로 추모되고 있다. 영국 사상 그가 대법관으로 있었을 때만큼 모든 송사가 공정하고 신속하게 판결되 유례가 없었다고 평가된다. 그는 정당들이 주는 선물을 거부했으며 몰염치한 부자들을 부끄럽게 했고 가난하고 억울한 이들에게 법의 공정성을 신뢰할 수 있도록 판결하였다. 그가 사위에게 보낸 편지에서 표현한 그의 공정성에 대한 소신 피력은 유명하다. "이 점 하나만은 자네에게 사나이의 일언으로 밝혀두고 싶네. 가령 어느 소송에서 옳은 판결을 바라고 법정에 온 사람 중 한편은 나의 부친이고 다른 한편은 악마라고 할 때 악마 측이 옳다면 악마에게 승소 판결을 내리겠네."

모어는 그의 유머와 함께 법관으로서의 훌륭한 업적으로 국민들에게 큰 신뢰와 명성을 얻었다.

4) 모어는 세상 안에서 완덕의 길을 걸을 수 있는 평신도의 영성을 모범적으로 살았다.

저서<유토피아>바탕은 그리스도교 윤리

교회역사 안에서 오랫 동안 완덕의 길이 세상을 떠나 실천할 수 있는 철저한 복음 권고덕에 있다는 전통적 사고 중에, 세상에서 열정적으로 속사(속(俗)사(事))에 관여하면서 적극적으로 사는 평신도의 삶에 완덕의 길이 있다는 것은 회의적이었다. 즉 평신도의 영성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소에 따른 영성의 다양성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하느님의 거룩하심[聖性]에 참여하는 표현의 다양성, 즉 완성에의 길의 다양성을 천명하였다(교회 헌장 5장 참조).평신도도 그의 성소 안에서 당연히 완덕에 불렸으며, 그에 나아가는 삶은 세상에 대한 부정적 관념이나 모호한 자세를 버리고 그것에 대한 개방적 자세를 취하며 도전적인 전망 중에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다. 평신도는 가정과 직업 그리고 사회 생활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현세 사물을 관리하고 발전시키면서 성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세상사에 적극적이었으나 항상 하느님 향해

이 공의회가 개최되기 다섯 세기 전, 평신도의 신원과 영성이 아직 모호하고 과소 평가되고 있을 때 모어는 이미 세상에서 완덕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세상 한가운데에서 속사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면서도 언제나 하느님을 향해 있었으며 그분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용의로 살았던 것이다.

5) 모어는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특출한 그리스도교 인문주의 학자이며 작가였다.

그의 유명한 저서 <유토피아>(1516)는 후대에까지 많은 영향을 끼친 고전이다. '어디에도 없는 곳'이란 뜻의 '유토피아'(UTOPIA)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理想)이다. 이러한 새로운 말을 유행시킨 이 저작은 초기 자본주위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며 인류의 염원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모어는 이 책에서 당시의 유럽 특히 영국사회 상태를 날카롭게 분석하고 비판했으며 신세계의 한 섬에서 행해지고 있는 이상적 사회생활을 기술하였다.이 사회에서 모든 시민은 식량, 의복, 주택, 교육, 행정, 종교등에서 완전한 평등권을 가지고 참여하며 모든 재산은 전 시민이 공유한다. 이 풍자적인 책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지만 그것은 당시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였음이 틀림없다.<유토피아>의 본질적 바탕은 그리스도교 윤리에 입각한 도덕 철학이다. 재산의 공유제도 또한 종교적, 도덕적, 신앙 에 근원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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